《500》2부 25권 - 7화
강성태는 이병렬의 침대 옆에 있었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고, 이후로 함께 뒷일을 의논했다.
“고검장이 모른 척할 수 있잖아?”
“총장을 하겠다는 야망 때문에라도 이번 일을 조용하게 덮지 않을까?”
“못 한다고 지랄했다며?”
“지검장을 막으라고 했으니 불만이 터질 만도 하지.”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십니다?”
기가 찬 표정으로 이병렬이 반문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고강준이네. 전화부터 받고.”
이병렬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는 덤덤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지검장은 원하는 대로 해결했다. 이사장 딸과 사위가 이번 일로 고소할 수는 있겠지만, 검찰에서 기소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도 돼.
“고생했어.”
- 이거 말이야. 내가 아무리 약점을 잡혔다고 해도 명색이 고검장이다. 언제까지 졸개 부리듯 하려는 거야?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족쇄를 풀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
강장문과의 면담 탓인지 고강준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반말하고 있잖아?”
- 야, 이 사람아?
“검찰 총장이 되겠다며?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해.”
- 깡패 수괴의 눈치를 보느라 꼼짝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총장을 해? 못 할 말로 청렴, 결백해서는 총장을 할 수가 없어요. 깡패 수괴니까 그 정도는 알 거 아냐?
강장문의 일로 공을 세웠다고 여긴 데다, 모처럼 편하게 대화하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둑 무너진 물처럼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 그러고 보니까 깡패 수괴와 이런 통화를 하는 거 자체가 허물인 거네. 이것 참, 더럽게 물렸어.
“정 서운하면 은선곤 대표를 만나서 식사라도 해.”
- 뭐라는 거야? 함정에 또 빠지라고?
“당장 운용하는 자금이 1조 원대고, 다섯 개 그룹의 실세들과 통하는 인물 아냐?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 푸후-.
소신영이 족제비나 너구리라면, 고강준은 확실히 독사의 기질을 지녔다. 차갑고 날카로운 그는 강성태가 던진 미끼에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거친 한숨으로 단숨에 밀쳐냈다.
- 지금도 목줄 묶인 개처럼 끌려다니는데 나더러 은선곤 대표 덕을 보라고? 총장 만들어서 아예 검찰을 주무르고 싶은가 본데 적당히 해.
“휴가 때에 한 번씩 올 수는 있어도 멕시코에 간다면 10년은 그곳 공사에 매달려야 해. 마약과 고리대금업, 그 두 가지 사건만 독할 정도로 처벌해. 그럼 나 역시 최선을 다해서 총장이 되도록 지원할 테니까.”
- 그 빌어먹을 영상은?
“나를 아직 몰라? 내 뒤에 칼을 넣지만 않으면 영상은 잊어도 돼.”
- 흐음.
믿기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의 심정이 한숨 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이 총장이 되면 나 역시 불편해. 그러니 은선곤의 도움을 받아.”
- 요구 조건은 그 두 가지다?
“방금 말한 두 가지만 성역 없이 처벌해 준다면, 나는 멕시코에서 열심히 일하며 지내고, 고검장은 한국에서 총장 돼서 행복한 거 아냐? 총장 임기가 10년씩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가 겹칠 일은 없잖아?”
무슨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
이병렬이 갑갑하고 궁금한 눈으로 강성태를 보고 있었다.
- 그건 나중에 의논하기로 하고. 강장문 지검장이 찾아가면 얼굴 좀 망가트리지 마. 연순동 검사도 그거 벌써 두 번째야. 벽에 부딪혔다는 변명도 못 한다고. 아무리 깡패라고 해도 그렇지, 위아래 없이….
“적당히 하지?”
강성태의 음성이 나직하게 가라앉자 아차 싶었는지 고강준이 뒷말을 삼켰다.
- 연순동이 경찰서에 연락했던 건은 확인했나?
그런 뒤에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바꿨다.
- 문제 생기면 연순동과 통화하기로 하고, 바빠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혹시나 강성태가 다른 말을 할까 무섭다는 투로 고강준은 바로 통화를 마쳤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틈만 주면 어떡해서든 비비고 들어오는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틈을 파고드는 법을 가르치나 싶을 정도로 공통된 모습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고강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고검장이라고 했었잖아?”
“맞아. 고강준.”
“씨발. 살다가 고검장하고 친구 먹는 보스를 볼 줄은 몰랐네. 가만있어 봐. 나랑도 친구 먹었으니까 그럼 고검장과 나도 친구가 되는 거 아냐?”
“자리 마련할 테니까 함께 보든가.”
“아서라. 그런 인간들하고 밥 먹으면 3년은 재수 털린다.”
강성태가 농담조로 던진 제안을 이병렬이 단칼에 잘라냈다.
“잘 된 거지?”
그런 뒤에 나직하게 진짜 건네고 싶었던 질문을 내놓았다.
강성태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주었다.
“나채상 이사장이란 인간, 지금쯤 피눈물을 흘리겠는데?”
눈 끝을 늘이며 웃는 이병렬을 따라 강성태는 비슷한 미소를 그려냈다.
**
인천공항경찰단이 체포해 경찰서로 넘겼던 김삼문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조사를 마쳤다.
“김삼문 씨. 고소된 건의 피해변제가 모두 이뤄졌으니까 구속영장을 치지는 않는데 나오라고 하면 바로 오세요. 안 그러면 도주했던 경력이 있어서 바로 영장 청구합니다. 알았어요?”
“예.”
“가 봐요. 그럼.”
“저기, 수사관님.”
문을 돌아보았던 김삼문은 상체를 기울인 뒤에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밖에서 깡패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서를 검정 끈으로 묶던 형사가 무슨 소리냐는 투로 시선을 주었다.
“돈을 갚았는데도 폭력조직의 두목이 나를 꼭 봐야 한다며 부하들을 경찰서에 보냈습니다.”
서류를 한쪽에 내려놓은 형사는 김삼문이 귀찮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더러 집까지 모셔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깡패들을 피해서 갈 수 있게 도와주십사 하고.”
“이봐요, 김삼문 씨. 여기 경찰서예요. 깡패가 납치하려 들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다른 거 하지 말고 고함만 질러요. 알았어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무슨 이 씨…! 독립운동하다가 잡혀 왔어?”
“예?”
“아무리 갚았다고 해도 돈 떼인 사람들의 심정이 어디 받았으니까 감사하다, 그렇게 끝나냐고? 막말로 따귀도 때릴 수 있고, 침도 뱉을 수 있는 거 아냐? 그거 다 당신 죗값이야. 그 정도는 알아요?”
말을 마친 형사가 손을 들어서 바깥으로 휘저었다.
“가요, 얼른. 나갔다가 깡패가 납치하려고 들면 입구에 서 있는 의경한테 살려달라고 고함지르면 돼요.”
경찰은 원래 권력자, 다음으로 먼저 돈 주는 사람, 둘 다 빈털터리일 때는 피해자의 편에 선다.
내쫓듯 고개를 외면하는 형사를 보며 김삼문은 누군가 입김을 불어 넣었다고 확신했다.
“이 양반이 그런데 왜 이렇게 미적거려? 얼른 나가시라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봉투고 뭐고 먹히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깽판을 치고 유치장에 들어가는 일인데 자칫했다가는 팔다리를 붙들려서 바깥으로 내쫓기는 꼴만 보일 수 있다.
더는 어쩌지 못한 김삼문은 쭈뼛거리며 일어나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의 심정으로 수사과를 나섰다.
“미스터, 김?”
문을 나선 그는 화들짝 놀랐다.
필리핀에서 함께 왔던 가디언스파 조직원들이 그를 기다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대한민국 경찰서의 수사과 문 앞에서 말이다.
김삼문은 대뜸 수사과 안으로 들어갔다.
“형사님! 여기 필리핀에서 나를 납치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거, 씨발! 그래서 납치당했어? 아니면 칼에 찔렸어? 어떻게 하라고? 필리핀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잡아들여?”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도 김삼문은 수사과 안을 빠르게 훑었다.
역시!
소란이 있었는데도 반장은 물론이고, 자리에 앉은 형사들 누구 한 사람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이제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해적 문신을 팔에 그린 가디언스파의 잔인함, 이리저리 알아본 신강남파의 힘을 실감한 김삼문은 고개를 떨군 채 수사과 문을 닫았다.
“렛츠 고오, 미스터 김.”
고개로 정문을 가리킨 가디언스파 조직원 둘이 김삼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가자! 가!”
돈 갚았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마음을 비운 김삼문은 가디언스파 조직원 둘을 따라 정문을 향해 걸었다.
건물을 나선 직후였다.
주차장에서 현관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김삼문은 숨이 턱 막혔다.
“김삼문 사장님?”
찢어진 눈, 번들거리는 눈빛, 잔인함을 로션만큼이나 치덕치덕 바른 인상, 볼 아래와 목덜미에 선명한 칼자국, 나 조폭이에요, 하는 자세, 그런 남자가 김삼문의 위아래를 쭉 훑었다.
“갑시다?”
남자는 고갯짓으로 주차장에 세워 둔 흰색 승용차를 가리켰다.
혼자 온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가리킨 승용차 앞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세상에!
그의 목덜미를 본 김삼문은 느닷없이 울음이 터졌다.
손등에 그려진 해적도 오금이 저리는 판국인데 승용차 앞에 있던 남자는 목덜미에 굵직한 해적 문신을 새겨서 그가 목을 꺾는 동작에 따라 살아 있는 해적인 양 이리저리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
강장문은 먼저 곽정윤을 병원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불러냈다.
“고검장이 뭐라십니까?”
“말씀도 마십시오. 우리 사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모양입니다. 강성태를 잡기는커녕, 사건을 덮느라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습니다.”
강장문은 적당한 거짓을 섞어가며 고강준을 만났던 상황을 전했다.
“나 이사장이 살인 교사를 했다니?”
“의원님!”
곽정윤의 탄식을 들은 강장문이 주변을 살폈다.
누가 들을지 모르니 말을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연순동 부장검사라고 했소?”
“나 이사장이 직접 보낸 문자를 보관하고 있고, 심지어 살인 전문가의 휴대폰까지 증거로 확보했답니다. 그 외에도 120억 원에 달하는 나 이사장의 횡령 금액까지 조사가 끝나 있었습니다.”
“크흠. 어떡하면 좋겠소?”
“제가 보니까 말입니다. 연순동 부장의 왼쪽 볼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습니다.”
상체를 기울이고 있던 곽정윤이 뭐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뒤로 뺐다.
“아마도 강성태를 살해하려던 일과 관련해서 나 이사장님과 비슷한 수모를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허! 부장검사가 어떻게 조폭 수괴에게?”
“제가 이렇게 의원님만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고검장님의 뜻을 전하고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하시오.”
탄식하는 곽정윤을 상대로 강장문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살인 교사가 포함된 사건입니다.”
“우리야 몰랐던 일이잖소?”
“법정에서 어디 그게 통합니까? 또 보도가 나간 뒤의 후폭풍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검찰이 지검장을 기소하지는 않을 거 아니오?”
부러움 묻은 곽정윤의 질문에 강장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사건이 터지면 고검장 역시 어떤 식으로든 궁지에 몰립니다. 검찰 식구인 나를 지켜줘야 하는 부담에 우리 의원님까지 덮어야 한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고검장이 그렇게 말씀하셨소?”
“제가 우리 의원님을 감싸달라며 청했습니다.”
“오!”
당장 달려들어 손이라도 붙잡을 듯 곽정윤은 감동 먹은 반응을 내놓았다.
“만약 고검장이 모질게 나오면 당장 검찰 내부에서 승진을 위해 식구를 잡아먹는 사람으로 찍히게 됩니다. 게다가 연백국 회원 숫자를 생각하면 끝까지 가기도 어렵지요. 그럴 경우, 고검장은 위로 가기 어렵습니다.”
말끝에서 강장문은 검지를 거꾸로 세워 찌르듯이 위를 가리켰다.
“위라면, 혹시?”
“다음 총장에 가장 근접한 분이 고검장 아니겠습니까?”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곽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검장은 우리가 강성태를 찾아가서 사건을 덮도록 달랬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심지어 의원님이나 오상현 회장이 거부하더라도 저만큼은 가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는 거요?”
“강성태가 사건을 물고 늘어질 때를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로 들었습니다.”
“흐음.”
한숨을 푹 내쉰 곽정윤이 입술을 비틀었다.
“우리가 그런다고 해서 부장판사 부부가 그냥 지켜보겠소?”
“의원님. 대한민국에서 고검장과 제가 기소하지 않는데 재판을 할 수 있습니까?”
고강준에게서 들었던 말을 강장문이 그대로 내놓았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일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것도 일본 연백국의 동의를 얻어내신 거로 보도자료를 뿌리고 홍보하시면 의원님께서 총리를 하시는 것도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곽정윤의 눈알이 흉하게 흔들렸다.
“총리를 하시면 다음은 대선입니다. 고검장이 총장이 되고, 제가 고검장이 되면 알아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곽정윤의 속을 짐작한 강장문이 그의 탐욕에 불을 세게 댕겼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 미래를 보고 잠시 굴욕을 삼켜야지요. 오 회장 불러서 강성태를 만나시지요.”
“아호.”
총리에 대선 후보를 떠올리던 곽정윤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색으로 바뀌었다. 따귀를 맞고서 부러진 이를 뿌려대는 나채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 이사장에게는 폭력을 행사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무탈하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다독이러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깡패라고 해도 웃는 얼굴에 침 뱉겠습니까만, 정 불편하시면 계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강장문이 홀로 간다면 이후 문제가 생겼을 때, 곽정윤은 빠져나올 핑계조차 없어진다.
“그럴 수야 있나요?”
계산을 마친 곽정윤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시다. 가야죠.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는 고검장의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가는 게 사람 된 도리지요.”
후련하게 내놓은 답과 달리 곽정윤의 눈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