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6화 (499/513)

《499》2부 25권 - 6화

제3장. 왜? 언짢아?

나채상은 세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은 뒤에 병실로 옮겨졌다.

머리에서 오른쪽 눈을 조금 내놓은 걸 제외하면 거의 축구공 수준으로 붕대를 칭칭 감는 바람에 침대에 적힌 환자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가 나채상인지 확인조차 어려울 몰골이었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나채상의 병실에는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특히 여자의 표정이 무척이나 독했다.

“대한민국에서 존경받아 마땅할 교육자가 이렇게 폭행당했는데 그 폭력범을 그냥 둔다는 게 말이 되나요? 더구나 폭력조직 수괴고, 흉기, 감금, 특수 폭행, 협박, 지금 열거한 형법만 적용해도 무기 징역이 가능한 중범죄예요.”

“그렇지 않아도 지검장이 알아보고 있으니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요.”

“그러니까요! 그걸 왜 알아보냐고요? 우선 체포해서 구속하는 게 정당한 법 절차가 아니냐고요? 제가 우리 법을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여보. 일단 좀 진정해.”

독기를 파르르 떨치는 나서희를 그녀의 남편 김병일이 달래며 나섰다.

“의원님. 우리가 모르는 내막이 있습니까?”

그런 뒤에 김병일은 곽정윤을 향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 부부가 부장판사가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형사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그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법의 처벌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많았습니다.”

“흐음.”

김병일의 의도를 짐작한 곽정윤은 곤란한 얼굴로 헛기침을 뱉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사건은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초동대응이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는 처음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우리 부부가 나서서 힘을 써보겠습니다.”

막말로 힘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겠다는 뜻이어서 곽정윤은 민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의원님?”

“그게 말이오.”

재차 나온 김병일의 독촉에 곽정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매년 일본과 교류가 있잖소? 그곳에서 우리 나 이사장이 서약서를 작성했는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튀어?

나서희와 김병일이 눈가를 좁히며 곽정윤이 내놓을 말에 집중했다.

“오늘 일본 측 연백국의 이사장이 함께 있었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연백국 이사장이 폭행 당사자란 말씀이세요?”

“그게 아니라.”

“그러지 말고, 후련하게 말씀해 주세요.”

독기가 파르르 피어나는 나서희의 독촉에 곽정윤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대강이나마 전해주었다.

수시로 표정이 바뀌던 나서희가 서릿발이 피어나는 눈매로 입술을 뒤틀었고, 김병일은 옆구리가 꼬집힌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깟 보도야 허위 사실로 고소하겠다는 경고면 하루 이틀 사이에 수그러들잖아요. 그 정도에 의원님은 물론이고, 지검장님까지 이렇게 나오신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게 아니오. 일본에서 오늘 저녁에 연백국의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한다면 사건의 후폭풍이 클 수 있어요.”

“야쿠자라고 해도 일본의 폭력조직이 아니겠어요?”

“연백국의 일본 측 이사장이 야쿠자 두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지요.”

곽정윤의 말에 나서희가 멈칫하더니 하려던 말을 삼켰다.

“방금 말했던 대로 오늘 자리에 그 야쿠자 두목이 함께 있었소. 또한,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모르지만, 강성태라는 폭력조직의 수괴가 우리가 주고받은 자금과 후원 내용까지 모조리 꿰고 있어서 함부로 대응하기도 어려웠고.”

“강성태라고 하셨죠?”

“그렇소.”

창을 향해 독한 눈매를 피워내는 나서희를 곽정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려야 하지 않겠소?’

그런 뒤에 그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선을 김병일에게 던졌다.

“지검장님은 그럼 지금 뭘 알아보신다는 겁니까?”

“나 이사장과 재단의 일을 연순동이라는 부장검사가 알아보았던 모양이오.”

“부장검사가요? 왜요?”

김병일과 곽정윤의 대화 중간에 툭 끼어든 나서희가 내놓은 질문이었다.

“나 이사장과 관련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 부분에 관한 건 나도 제대로 듣지 못했소. 아무튼, 그 연순동 부장검사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지검장이 고강준 고검장을 만나러 갔으니 조만간 해결책이 나올 거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봅시다.”

뒤에 숨겨진 뭐가 있는데?

나서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부친 나채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붓기가 얼마나 심한지 붕대를 감지 않은 오른쪽 눈 부위가 주먹 하나 크기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꼭 물리적으로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에요.”

나채상을 바라보며 나서희는 각오처럼 들리는 혼잣말을 뱉어냈다.

“이가 모두 열두 대나 부러졌어요. 광대뼈 함몰, 코뼈 골절, 고막 파열, 저 연세에는 살인만큼이나 잔인한 폭행이에요.”

말을 하다가 감정이 올라왔는지 나서희는 왈칵 눈시울을 붉혔다.

“한평생 후학 양성과 대한민국의 국위선양, 민간 외교를 위해 애쓰신 분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우리나라는 늘 이래요.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게 습관으로 자리 잡았어요. 심지어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조차 없었던 일로 돌리는 파렴치한 짓을 너무 쉽게 행하고 있어요.”

뭐라 대꾸할 말이 없는 곽정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김병일은 나서희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면 누가 우리나라를 신뢰하겠어요?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조약을 맺었다면 존중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 아니겠어요? 아버지는 신뢰를 잃은 우리 국민을 대신해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시려던 애국자세요.”

“내가 그 충정을 모르겠소? 나 역시 연백국의 회원이고, 한일의원 협의회의 회장을 맡은 사람이오. 하지만, 우선 기다려 봅시다. 지검장이 가져올 결과를 보고 후속 조치를 준비합시다.”

달래는 곽정윤의 말을 끝으로 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채상의 침대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세 사람의 표정은 확실히 달랐다.

**

강장문을 맞이한 고강준은 먼저 차를 대접했고, 이어서 연순동을 불렀다.

“아….”

왼쪽 관자놀이부터 귓가와 볼, 턱까지 시커멓게 죽은 연순동을 본 직후에 강장문은 반사적으로 탄식을 토해냈다.

“인사드려. 18기 강장문 지검장.”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21기 연순동입니다.”

“반가워.”

고개 숙인 연순동과 힘겹게 인사를 건네는 강장문을 고강준이 비릿하게 바라보았다.

“앉아.”

고강준이 자리를 권하자 조심스럽게 움직인 연순동이 강장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들고 왔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하자.

강장문은 고강준이 어렵다.

한 기수 선배인 것도 그렇고, 검찰 내부에서의 영향력, 대외적인 인맥, 하다못해 성깔까지 강장문은 고강준의 적수가 아니었다.

“자료 좀 드려.”

고강준의 지시에 연순동이 들고 왔던 자료를 돌려서 강장문이 보기 좋게 밀어주었다.

“우리 검사들이잖소. 솔직하게 갑시다.”

“예, 고검장님.”

아직 자료도 확인하지 못한 강장문을 압박하듯 고강준이 입을 열었다.

“하늘이 쪼개져도 우리 식구들을 기소하지 않는 건 아실 테고, 나 역시 그렇게 할 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긴장한 표정의 강장문은 귀를 쫑긋 세웠다.

“나채상 이사장의 횡령 금액이 120억이 넘어요. 최소 7년에서 무기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네가 이걸 조사했어?

강장문이 힐끔 시선을 던졌으나 연순동은 막 자대 배치받은 신병처럼 자세를 똑바로 한 채 표정조차 감추고 있었다.

“이 자금이 돌아다닌 게 문제인데 어떻게 할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강장문의 반문에 고강준은 대놓고 픽하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일본의 폭력조직이 후원한 금액도 사이좋게 나누셨더구만.”

“고검장님?”

“잠자코 들어!”

쨍하고 나온 고강준의 반말에도 강장문은 마른침만 삼킬 뿐 대들지 못했다.

“곳간에서 인심 나지. 나도 알아.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검사는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켜줄 스폰서, 아니면 빵빵한 처가. 당신은 뭐야? 뭔데 이런 지저분한 돈을 먹어서 여기 연 검사가 조사하게 만들어?”

아예 대놓고 반말을 날린 고강준이 확인해 보란 투로 서류에 시선을 던졌다.

이게 도대체 뭔데?

오른손으로 서류를 잡은 강장문이 왼손 엄지로 서류를 넘겼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서류를 넘길수록 강장문의 표정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그건 알 거 없고, 어떤 걸 원하는지 답만 해. 폭력조직 수괴 강성태와 신강남파 조직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까, 아니면 연백국이 독립유공자 후손을 지원하는 사업을 지켜봐 드릴까?”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왜 강성태를 감싸십니까?”

용기가 필요한 질문이었다.

다르게 보면 반항이라고 표현해도 될 질문이기도 했다.

“멕시코에 공장과 신도시 건설 사업을 진행하는 건 알고 있소?”

“듣기는 했습니다.”

“그 공사가 120조 원 규모요. 1차 공사가 그렇고, 성공하면 2백조 원 규모의 2차 공사를 가져옵니다. 그걸 빼앗기 위해 삼합회, 야쿠자, 심지어 세계적인 기업가까지 달려들었고 아직도 기회를 노리는 상황이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공사가 나채상, 연백국과 무슨 상관이고?

힐끔 연순동을 보았던 강장문이 빠르게 시선을 가져간 다음이었다.

“나채상 이사장은 일본의 야쿠자와 손잡고서 살인을 지시했어. 그것도 멕시코 신도시 담당자 강성태를 대상으로.”

“증거가 있습니까?”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강준은 연순동을 보았다.

“나채상 이사장이 제게 보낸 문자가 있습니다. 살인 장면의 영상을 확보해서 가져다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외에 소위 킬러의 전화기, 그리고 살해 시도 영상도 확보했습니다.”

“그럴 리가…?”

“어떻게? 이제 윤곽이 좀 보이시나? 야쿠자라는 일본 조직과 손을 잡고, 강성태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방법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야쿠자를 직접 동원했지.”

얼이 반쯤 빠진 강장문을 향해 고강준은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 대단한 지검장님은 그런 자리에 곽정윤 의원, 오상현 회장과 함께 가셨고. 어디 이번에는 내가 한번 물어봅시다.”

잔인한 눈매로 강장문을 몰아붙인 고강준이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일본의 폭력단체가 건넨 돈을 나눠 먹은 지검장, 한일 친선 어쩌고 하는 국회의원, 기업 회장이 나채상 이사장과 함께 움직였네? 그것도 살인 지시 당사자인 일본의 폭력조직 야쿠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걸 어떻게 설명하실 거지?”

“그런 자리인 줄 몰랐습니다.”

“문제는.”

강장문의 변명을 고강준이 한마디로 잘랐다.

“살해를 지시했던 이사장, 일본의 폭력조직원들이 살해하려던 대상, 강성태를 불러냈다는 점이지. 이게 몰랐다고 하면 죄가 성립 안 된다고 보시나? 그렇다면 지검장의 법률적 해석과 적용 능력을 내가 의심하게 되는데?”

아예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강장문은.

“일본 폭력조직의 두목만 왔다면 또 정상참작이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들의 숫자가 열 명이나 되더구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던 강장문이 참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먼저 질문했던 거 같은데? 강성태와 신강남파 조직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까, 아니면 연백국이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지켜봐 드릴까?”

“그 말씀은?”

“조용하게. 탈 없이. 그게 좋지 않겠소?”

강장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안을 던진 고강준이 먹이를 앞에 둔 뱀처럼 야비한 눈빛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야 따른다고 해도 나채상 이사장의 영애와 서랑이 모두 부장판사 출신입니다.”

“강장문 지검장님?”

“예, 고검장님.”

“기소를 안 하는 사건도 재판할 수 있습니까?”

고검에 진정하면 고강준이 덮을 테니, 저들이 어떻게 나오든 강장문 역시 사건을 덮으라는 의미였다.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고검과 지검의 싸움이 벌어질 테고, 이는 곧 고강준과 강장문의 맞대결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강장문은 고강준의 적수가 아니었다.

우선 따르는 부하 검사들의 숫자와 수준, 충성심이 달랐다. 그만큼 고강준은 이전부터 부하 검사들에게 정말 많이 뿌렸다.

공사비 120조 원?

그렇다면 강성태가 바로 고강준의 스폰서일 확률이 높았다.

대한민국 그룹 컨소시엄을 등에 업은 고강준은 심지어 다음 대 검찰 총장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이 상태에서 고강준을 들이받으면 충성심을 보이려는 전국의 검사들이 강장문을 노리고 달려든다.

“고검장님. 저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먹이를 바라보던 뱀눈이 빙그레 웃었다.

“조용하게. 탈 없이.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검장은 내가 지켜드리지.”

“감사합니다, 고검장님. 앞으로 어떤 일을 지시하시든,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따르겠습니다.”

“하기는. 우리 지검장도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셔야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고검장보다는 듣기 좋네.”

승패는 확실히 갈렸다.

판을 확실히 읽은 강장문이 납작 엎드렸고, 그의 머리를 고강준이 지그시 밟은 듯한 한판이었다.

“거, 시간 되면 강성태 회장 만나서 사과라도 하지?”

“예?”

“왜? 언짢아?”

“아닙니다. 선배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한 번 엎드렸는데 두 번은 못 할까?

선배 앞에서 후배는 어떤 경우에도 고개를 숙이는 게 검사의 도리라고 배웠다. 직급에서 밀린 선배 검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는 것도 후배에게 고개 숙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고.

연순동이 보는 앞에서 강장문은 고개까지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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