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2부 25권 - 3화
강성태는 탁자를 두들기는 최치곤의 손가락에 시선을 주었다.
“아! 미안하다.”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앞 골목에서 이동재가 보냈던 덩치들과 혼자 맞붙었던 최치곤, HK 맨션에서 유충일을 구하겠다며 복도를 막아섰던 악바리가 나채상의 반응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국회의원이고, 딸과 사위가 모두 부장판사인 나채상의 권력이 최치곤을 찍어누르는 눈치였다.
멋쩍은 표정의 최치곤이 머그잔을 잡았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탁자에 올려두었던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교창이 형님이다!”
액정을 확인한 최치곤이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소음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빌라여서 함께 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강성태는 최치곤을 배려하는 심정으로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교창입니다, 형님.
“기무라 쿠니오키는?”
- 조금 전에 입국했습니다, 형님. 공항이 소란스러워서 주차장에 와서 전화 드립니다.
분을 삼키는 게 역력한 이교창의 음성이 조용한 거실에 울려 나왔다. 그 뒤로 그는 공항에 도착해서 주차장으로 나와 전화 걸 때까지의 모든 장면을 세세하게 강성태에게 전해주었다.
“조성 호텔이라고 그랬지?”
- 예, 형님. 객실인지, 식당인지도 알려주지도 않고서 조성 호텔로 오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여기 사카구치가 있으니까 연락해서 알아보면 되겠는데…. 죄송합니다, 형님.
말을 하다가 보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기무라 쿠니오키의 앞에서 나채상에게 씹힌 듯한 모습을 보인 게 강성태에게 미안했고.
“잘 참았다. 충일이 통해서 연락할 테니까 우선 강남 호텔에 가 있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곧바로 유충일의 번호를 눌렀다.
- 유충일입니다, 형님.
“이교창이 인천 공항에서 지금 출발하니까 통화해서 인원수 확인해 보고 편하게 쉴 수 있게 객실 좀 잡아줘.”
- 알겠습니다, 형님. 다른 건 필요 없으십니까, 형님?
오늘 기무라 쿠니오키의 입국을 아는 게 분명한 유충일의 질문이 뒤에 붙었다.
“숙소 식구들 움직일 수 있으니까 준비했으면 싶은데. 아, 참.”
- 예, 형님.
“짐작하는 모양인데 워낙 거물을 상대하는 일이라서 뒤가 안 좋을 수 있어.”
- 용동이 형님 영정을 제가 안고 있었습니다, 형님. 야쿠자 새끼들 상대하는 일이라면 꼭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고맙다. 우선 교창이 챙겨주고 기다려.”
답을 들은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하여간 얍삽한 새끼들.
이교창에게 조성 호텔이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알려줬다는 건 이제부터 강성태에게 직접 전화하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나채상이 한국에서의 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며 기무라에게 큰소리친 결과일 테고.
어쩌면 예상을 이렇게 빗나가지 않는지.
김삼문이 그러더니 나채상과 기무라 쿠니오키 역시 뒤통수를 노리는 모습 하나는 참 한결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로 움직이는 강성태를 최치곤의 고개가 일정하게 따라붙었다.
“커피 더 할래?”
“아니.”
가스레인지의 불을 켠 강성태를 최치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갑갑해 하는 최치곤의 심정을 빤히 알면서도 빌라에서 기다렸다. 나채상이 혹여 경찰이나 검찰을 움직일지 모른다는 염려에서였다.
당할 때 당하더라고, 곤잘레스 이두안과 바르지오 만시니가 머무는 호텔에서 체포되는 꼴을 보이기 싫어서 말이다.
반대로 이 시간까지 경찰이나 검찰이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건 나채상 역시 그렇게까지 밀어붙이는 게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모자란 인간들.
나채상을 떠올리며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이런 싸움은 뺏기는 게 많은 놈이 지게 돼.
감정이 폭발해 순간적으로 맞붙더라도 결국 뺏기는 게 많은 놈이 발을 빼게 돼 있다고.
강성태를 체포하지 않는 것으로 나채상은 이미 뺏기지 않으려는 방어심리를 충분히 드러낸 꼴이었는데, 해적들과 카르텔에 비하면 순진해 보일 만큼 솔직한 반응이었다.
길지 않은 침묵의 끝에서 물이 끓는 주전자를 기울인 강성태는 커피를 새로 내려 식탁으로 돌아왔다.
강성태가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처음 보는 이동전화 번호를 액정에 올린 스마트폰이 식탁 위에서 몸을 떨었다.
시작해볼래, 나채상?
누가 미친놈처럼 끝까지 갈 수 있는지?
약세를 보인 만큼 철저하게 밟아주마.
내가 그쪽에서는 세계적인 전문가거든.
곤잘레스 이두안과 보리스 파리오가 직접 찾을 정도로.
마음을 독하게 먹은 강성태는 긴장한 표정의 최치곤 앞에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네가 강성태라는 두목이냐?
거친 욕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비함이 가득 담긴 거만한 음성이 강성태를 찾았다.
“나채상 이사장?”
-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오래전 교과서나 고전 문학에서 봤던 욕이 스마트폰을 타고 강성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 남은 인생을 모두 교도소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면 냉큼 조성 호텔로 와 용서를 구해. 로비에 도착해서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된다.
강성태는 먼저 나채상이 들으란 듯 픽 웃었다.
“당신은 일단 빠져 있고, 기무라에게 말을 좀 전해줘. 앞으로 한 시간 안에 강남 호텔에 도착하지 않으면 관동 연합이 없어질 거라고.”
- 너, 이놈?
“나채상 이사장님. 나에 대해 조사가 전혀 없었나 본데, 그런 식으로 욕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그다지 안 좋아. 그러니 조심하고 시간이나 분명하게 전해. 앞으로 한 시간이다.”
- 그 전에 네놈과 신강남파라는 깡패조직이 무탈할 성싶으냐?
뭐 이런 유치한 협박이 다 있지?
“후-.”
짜증을 뱉어낸다는 투로 강성태는 숨을 길게 뱉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휘젓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나올수록 기무라 쿠니오키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커져. 경고하는데 내가 사는 세상에 발을 디딘 다음에는 조심하는 게 좋아.”
- 그림자니, 네놈 세상이니, 듣던 대로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구나. 오냐. 네놈이 그토록 원한다니 평생 교도소에서 지내게 해주마.
칼을 쓰는 사람이라면 강성태를 수십 번 찌르고 남았을 정도로 독한 느낌의 경고였다.
그저 배 불리기 위해 살았던 깡패라면 당장 몸을 낮추고 용서를 구했을 텐데, 불행하게 강성태는 독한 나채상의 협박이 먹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기대하지.”
짧게 답을 전한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시선을 들었던 강성태는 최치곤의 눈매와 표정을 보고는 픽 웃었다.
통화 직전까지 긴장했던 그가 아예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였다.
“씨발, 후련하기는 하다. 이제 진짜로 붙는 거지?”
“물러설 곳이나 있어?”
“씨발 새끼가! 들어보니까 뒤가 타고 있구만, 괜히 센 척은?”
통쾌한 최치곤의 평가 앞에서 강성태는 머그잔을 들었고,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
올림픽 도로에서 빠져나와 여의도를 건넌 승용차가 소공동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국말에 능통한 야쿠자 조직원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바람에 나채상은 강성태의 반응을 있는 대로 기무라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통화 내용을 전해 들은 기무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볼 뿐,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지기 싫은 마음에서 떠드는 거지, 아무리 설쳐 봐야 한국에서는 일개 깡패일 뿐입니다.”
“나 상.”
듣기 좋은 나채상의 말끝에서 기무라가 그를 불렀다.
“나는 원래 한국인을 믿지 않소. 무엇보다 말만 번지르르한 데 반해 행동이 없고, 쓸데없이 체면을 중시해서 일을 망치기 때문이오.”
“부끄럽습니다.”
“우리 나 상은 내가 유일하게 믿던 한국인이오. 그런데 왜 이번처럼 중요한 일에 신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른 한국인들과 똑같이 행동하시는 건지 실망이 큽니다.”
“제가 너무 좋게만 해결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당장 손을 써서 놈을 잡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나직하게 답을 내놓은 나채상을 향해 기무라가 분노와 실망했다는 표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내가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소? 맡겨달라고 해서 조사를 한 줄 알았더니 한국인의 특성 그대로 주먹구구이셨군.”
나채상이 뭐라 대꾸를 내놓지 못할 정도로 기무라의 눈빛과 음성이 차가웠다.
“40명이오. 고작 40명. 그 인원만으로 요코하마에 날아왔을 만큼 무모하고 강한 사람이오. 나 상이 그를 체포한다고 칩시다. 그 뒤에 아카시 마오와 카르텔이 관동을 노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소?”
“강성태의 구속과 함께 신강남파 폭력배들을 줄줄이 체포하면 자연히 수그러들지 않겠습니까?”
나채상의 답을 들은 기무라가 울컥 올라오는 욕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빠가야로’라는 욕을 분명하게 보여서 나채상은 고개를 움츠렸다.
“멕시코 사업의 주체가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한국의 은선곤이오. 그들이 버티는 한, 카르텔과 가페는 강성태의 지시를 따르게 되오. 그 결과는 나와 관동 연합의 몰락일 테고.”
“은선곤까지는 체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은 어떻게 할 거요? 그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카르텔을 무너트려야 하는 인물이오. 강성태의 의지가 아니라도 카르텔을 관동에 보내야 한단 말이오.”
이렇게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고?
당황한 나채상의 표정을 확인한 기무라가 이를 악물었는지 연속해서 볼을 씰룩였다.
“나 상의 체면을 위해 나와 관동 연합의 안위를 걸다니? 이제는 우리의 도움이 없어도 홀로 설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오만, 진심으로 관동 연합의 도움 없이 한국의 연백국이 무사할 성싶소?”
굳이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최악의 순간이면 서약서를 공개할 수도 있다는 독한 의지를 기무라는 눈빛과 표정으로 충분히 보여주었다.
“우리 연백국의 마지막 목표는 한국과 대일본의 동화요. 특히, 정치면에서 우리와 같이 내각제를 시행해서 나 상의 자녀분들이 대대손손 의원직을 유지하며 총리를 노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 그런데 관동 연합이 무너지고, 아카시 마오가 강성태의 뜻을 받든다면 나 상인들 무탈하겠소?”
설마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다는 나채상의 반응을 보며 기무라는 아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채상이 버텨봐야 기무라의 한 마디면 승용차는 강남 호텔로 방향을 돌린다.
“제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기무라 상의 깊은 심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강성태를 구속한 뒤에 아카시 마오를 불법 입국으로 연달아 체포하면 끝나리라 여겼습니다. 바로 전화하겠습니다, 기무라 상.”
“멕시코의 신도시 공사,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의지, 은선곤의 능력과 그가 보인 충성심을 나중에라도 반드시 조사해보기를 바라오.”
“명심하겠습니다.”
기무라를 향해 고개를 깍듯하게 숙인 나채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
마음을 비운 모양인지 최치곤은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들여다보며 피식거렸다.
강성태의 의지와 능력을 믿는다.
구속이든, 칼질이든, 마지막 순간까지 강성태의 등을 지켜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뭐든 해 봐, 이 씨발 놈아.
웹툰을 들여다보는 행동으로 최치곤은 본인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강성태는 소설을, 최치곤은 웹툰을 넘겨 가며 커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영락없이 하릴없는 백수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페이지를 넘긴 최치곤이 피식 웃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아까의 이동전화 번호를 올려놓은 채 몸을 떨었다.
웃음기를 싹 지운 최치곤이 독해진 눈매로 강성태를 보았다.
여태 함께했는데 이제 와서 가릴 게 있겠나.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은 강성태는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 나채상 이사장이다.
“말투를 바꾸든가, 나중에 전화하든가 해.”
- 내가 지금 강남 호텔로 가주마.
됐다! 그렇지?
최치곤이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드는 순간이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고, 말투를 바꿀 마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 전화해.”
단 한 점의 미련도 없다는 양, 강성태는 깔끔하게 종료버튼을 눌렀다.
“걱정할 거 없어.”
“센 척해봐야 속으로는 쫄았으니까 전화한 거잖아? 하나도 걱정 안 해.”
최치곤이 별것 아니란 투로 대꾸를 내놓은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또다시 같은 번호를 액정에 올린 스마트폰이 식탁에서 몸을 떨었다.
“에이, 씨발 새끼!”
고개 숙여 번호를 확인했던 최치곤이 욕을 뱉고는 히죽 웃었다.
“여보세요?”
- 강남 호텔로 가겠소.
“안내할 사람이 있으니까 로비로 들어가서 기다려.”
- 40분이면 도착할 거…요.
픽 웃은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집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출발해?”
“가서 밀어뒀던 따귀를 때려줘야지.”
“아후, 씨발. 전화 지켜보다가 수명이 사흘은 줄어든 거 같네!”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최치곤이 현관으로 가서는 문에 달린 유리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왜?”
“혹시 바깥에 곰 새끼들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있으면 아래에 숨거나 했겠지, 눈에 빤히 보이게 서 있겠냐?”
“그렇지?”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최치곤이 이를 악물며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 뒤에 빠르게 바깥과 계단 쪽을 살핀 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강성태를 믿는 것과 별개로 나채상이란 인물과 기무라의 얍삽한 행동을 의심해서 나온 반응으로 보였다.
“강남 호텔에 연락해야 하지 않겠냐?”
“가는 길에 하자.”
유충일이 독한 심정으로 대기 중이고, 자존심 팍 상한 이교창이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최치곤은 조수석 뒤로 움직여 문을 열었다.
“호텔로 바로 갈 거니까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뒤에 타.”
고맙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군소리하지 않은 채 최치곤이 열어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참 길었다.
깡패를 동원하지 않는 싸움이라 그 누구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웠고.
‘스무 대 출발이었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강성태는 나채상이 맞아야 할 따귀 대수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