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2부 25권 - 2화
아침은 평화로웠다.
어지간하면 자고 갔을 최치곤이 이은주와의 통화 때문인지, 관동 연합의 수장이 온다는 소식에 준비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밥을 먹고 돌아가는 바람에 한적하게 아침을 맞았다.
느긋하게 샤워와 아침을 해결한 강성태는 커피를 준비했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들고서 연순동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별다른 일 없지?”
- 혹시 그쪽으로 연락이 있었소?
누군가 옆에 있는지 연순동의 말투가 또 바뀌어 있었다.
“오늘 점심쯤에 보게 될 거 같은데?”
- 누구를 말이오?
“나채상 말고 더 있어? 그건 그렇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강성태는 김삼문의 일을 짧게 설명하고 경찰서에서의 조치를 부탁했다.
- 그 정도야 어려울 게 없소. 원하는 대로 조치해 두겠소. 누군지 몰라도 강 회장의 이모부를 털어먹다니, 인생 참 고급스럽게 말아먹는구려.
“말투 좀 바꾸지?”
- 크흠.
민망한 느낌의 헛기침이 넘어왔고,
- 오늘 점심때 나채상 이사장을 만나면 원만하게 끝나는 거지요?
“그래야지.”
연순동은 바로 말투를 바꾸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떨궈 몸의 상처들을 살폈다.
상처 아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엷게 베인 상처에는 벌써 흉터가 두툼하게 올라와 있었다.
나쁠 건 없으니까.
유헌우가 부작용을 모를 리 없을 테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이전에 읽던 책을 찾았다.
한 시간만이라도 글이 펼쳐주는 세상에서 보내고 싶었다.
**
아침을 맞은 이교창은 객실에 들어서는 박노익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나야 먹고 나섰지. 너는 어떻게 했냐?”
“조금 전에 해결했습니다, 형님. 이리 앉으십시오.”
넓지 않은 거실 한쪽의 소파로 박노익을 안내한 이교창이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좀 가져와.”
“예, 형님.”
수발드는 동생이 상체를 숙인 뒤에 구석으로 움직였다.
체격이 다부진 두 사람이 마주 앉자 4인용 소파가 꽉 찬 느낌이었다.
“사카구치란 놈은?”
“옆방에서 동생들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형님. 정말 이렇게 단출하게 움직여도 되는 겁니까?”
무슨 소리냐는 투로 박노익은 시선만 주었다.
“뭐라 해도 관동 연합 오야붕이 오는 거 아닙니까, 형님? 병풍을 세우지는 않더라도 신강남파 위상을 보여줄 정도는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교창의 의견을 들은 박노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보스가 너한테 뭐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만, 이번 일만큼은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맞지 싶다.”
“그렇습니까, 형님?”
“친목을 위해 방문한 거라면 병풍 세우고, 각 잡고 하겠지. 하지만, 이번은 나채상 이사장까지 나온다는 거 아니냐? 흉한 모습이 나올 수도 있는데 동생들 잔뜩 깔아서 좋을 게 있겠냐?”
그렇구나.
턱을 매만진 이교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그림 그리려고 하지 말고, 어제 들었던 대로 단단하게 각 잡고, 이 정도 일은 이교창 하나로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보스가 원하는 정답 같다.”
덧붙인 박노익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이교창은 확실히 알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참 어렵습니다, 형님.”
“뭐가?”
“우리 보스 말입니다. 예전에야 수발 잘 들고, 상납 제대로 하면 끝이었는데 우리 보스에게는 그런 게 전혀 안 통하잖습니까. 요즘은 밑에서 사고 칠까 봐 숙소 단도리하기 바쁩니다.”
이교창의 말에 박노익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커피 드십시오, 형님.”
마침 수발드는 동생이 커피를 가져다주어서 잠시 틈이 있었다.
“차웅진 회장하고 이번 일은 달라. 그 양반이 야쿠자들을 앞세워 달려들었다면, 나채상 이사장은 권력을 이용해 보스와 우리를 노리는 거지. 야쿠자를 두들긴다고 해도 나 이사장이 미친 척하고 권력으로 우리를 누르면 맞설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더 갑갑합니다, 형님.”
“이것도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너나 나나 지금껏 없던 조직을 경험하는 건데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개겠냐?”
벌써 겁이 난다는 표정을 짓는 이교창을 향해 박노익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공항은 몇 시에 나가?”
“아직 여유 있습니다, 형님.”
“비굴할 이유도 없지만, 목에 힘주느라 양아치처럼 보여서도 안 돼. 그렇게 따지면 연장 들고 마주 서는 것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예, 형님.”
별것 아닌 당부라도 얼굴 마주하고 직접 전하고 싶었던 박노익, 그가 와서 다독이는 게 힘이 된 이교창, 두 사람은 비슷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
내내 편안했었다. 그런데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알지 못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찻잔 사이에서 피어나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
오전 9시쯤 빌라에 들어선 최치곤은 강성태와 식탁 위 머그잔, 스마트폰을 차례로 본 뒤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법 신경 써서 입고 온 정장 차림이었다.
제 딴에는 세련되게 보이겠다며 머리에 젤을 발라 세웠는데 어제가 그냥 깡패라면 오늘은 머리에 힘을 빡 준 깡패, 꼭 그 정도의 변신이었다.
“책을 읽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보았다.
“이럴 때 나는 좀 무섭다.”
“뭐가 또?”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 그런데 책이 눈에 들어오냐?”
픽 웃는 강성태의 반응에 고개를 저은 최치곤이 커피를 따라서 탁자에 앉았다.
“몇 시에 움직일 거냐?”
“9시 20분 도착이라고 해도 강남에 넘어오면 대략 11시 근처나 될 거다. 이교창이 연락하면 그때 움직여도 충분해.”
“내 말이! 그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이라도 태완이 형님 사무실이든, 병렬이 형님 병실이든, 그쪽으로 출발하자는 거지. 그래야 보자고 할 때 바로 가지.”
강성태는 대답 대신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잠시 틈을 만들었다.
“기무라 쿠니오키가 나채상에게 연락했을까, 아니면 그냥 넘어올까?”
“연락했겠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네가 양보해야 한다, 그 정도는 말했지 않겠냐? 어제 그런다고 했다며?”
“연락받은 나채상은 어떻게 할 거 같냐?”
“뭐?”
“기무라 쿠니오키의 말대로 얌전하게 와서 고개 숙일까, 아니면 힘 있는 사람을 동원해서 적당하게 끝내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다고 나올까?”
질문을 받은 최치곤이 입으로 가져가던 머그잔을 허공에 든 채 강성태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라면 후자일 거 같다. 나채상의 눈에 기무라 쿠니오키는 일본의 대단한 야쿠자 오야붕이고, 우리는 그냥 한국의 깡패놈들이니까. 기무라 쿠니오키 앞에서 힘을 보여주고 싶기도 할 테고, 깡패한테 고개 숙이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고. 안 그래?”
“기무라가 사과하러 온다고 했잖아?”
“진짜 나채상과 함께 깔끔하게 사과하면 믿을 만한 일본 사람도 있는 거지.”
“만약 네 말대로 나채상이 버티면?”
“깡패 뭐 있냐? 버릇을 고쳐줘야지.”
강성태의 대꾸를 들은 최치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정과 눈빛으로 봐서 나채상이 어떤 힘을 지닌 인간인지 확인해 본 눈치였다.
**
이교창이 인천 공항에 도착한 시간 역시 오전 9시였다.
사카구치 소우타와 동생들 넷을 데리고 입국장에 들어선 이교창은 게이트 옆의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에 사카구치 소우타를 앉힌 이교창의 뒤를 동생 두 명이 받쳤고, 다른 두 명은 혹시 일찍 나올 것에 대비해 게이트 앞에 세워두었다.
화려한 영상을 담은 커다란 TV 화면을 외면한 채 사카구치 소우타는 연락받을 스마트폰을 커다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쥐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카구치 소우타를 힐끔 보았던 이교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뒤틀었다.
몇 명이나 데리고 올까?
박노익이 대형 승용차를 수배해 주었고, 승합차도 여러 대 밀어줘서 대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기무라 쿠니오키 일행이 몇 명인지 정확한 숫자를 이교창은 알지 못했다.
‘씨발 거, 이상하게 배알이 틀리네.’
친선을 위한 방문도 아니고, 신강남파 보스에게 사죄하러 오는 인간이 일행의 숫자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이교창이 욕을 삼켰다.
“어제라면 몰라도 이제 와서 몇 명이나 오냐고 물어보는 건 괜히 모양만 빠진다. 차라리 차를 충분히 준비하자.”
박노익과 의논할 때는 그러려니 했던 일이었으나 돌이켜 보니 강성태의 얼굴에 망신을 뿌린 꼴이었다.
‘씨발.’
이교창이 이를 씹어가며 또다시 욕을 삼켰을 때였다.
기다리던 비행기의 도착 소식이 안내 방송을 통해 나왔다.
시선을 들어 입국장 게이트 위에 걸린 도착안내판을 확인한 이교창은 별다른 생각 없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뒤에 거만하게 게이트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꽤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이었다.
나이에 비해 탱탱한 피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생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듯 윤기 나는 인상과 태도, 고개 돌리는 사소한 동작에도 배어 있는 거만함까지, 한 마디로 꽤 힘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지닌 권력을 증명하듯 정장 차림에 직원 신분증을 가슴 앞으로 건 공항 관계자 세 명과 비서와 운전기사로 보이는 두 명을 거느리기까지 했다.
입국장 게이트 앞으로 움직인 그는 확실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저 인간이 혹시?
이교창이 게이트와 거만한 남자를 번갈아 살피며 5분쯤 지났을 때였다.
게이트 안쪽에서 더블 재킷에 세로줄이 박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오야붕입니다!”
애타게 입국장 게이트를 지켜보던 사카구치 소우타가 급한 소리와 함께 몸을 세웠다.
어라?
전화를 하기로 해놓고 먼저 나왔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교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직후였다.
야쿠자인 게 분명한 열 명을 데리고 나온 기무라 쿠니오키가 좀 전에 보았던 거만한 태도의 남자 앞에 멈춘 뒤 반가운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뭔가 틀어졌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어제의 통화와 오늘의 모습이 전혀 달랐다.
이교창의 시선을 알았을까?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던 기무라 쿠니오키가 이교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가 날카롭다면, 기무라 쿠니오키는 나이에 따른 무게감이 대단한 느낌이었다.
“형님. 오야붕이십니다.”
“가 보자.”
일단 참는다.
당당하게 행동한다.
각오를 세우는 이교창을 지나 냉큼 앞으로 달려간 사카구치 소우타가 기무라 쿠니오키를 향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이교창은 그 뒤에 도착해 기무라 쿠니오키를 당당하게 바라보았다.
열 명의 야쿠자를 거느린 기무라 쿠니오키, 네 명의 동생이 뒤를 받친 이교창이 처음 얼굴을 마주한 다음이었다.
사카구치 소우타가 일본어를 지껄이며 이교창을 가리키자 기무라 쿠니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관동 연합을 이끄시는 오야붕이십니다.”
기무라 쿠니오키를 똑바로 본 상태에서 이교창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교창입니다.”
“반갑다고 하십니다, 형님.”
사카구치 소우타가 통역하는 앞에서 이교창은 기무라 쿠니오키와 지극히 형식적인 악수를 나눴다.
그렇다면 거만한 남자는 확실히 나채상일 확률이 높았다.
이교창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네가 부산에서 온 강성태라는 두목의 졸개 맞지?”
‘이런 씨발 인간이?’
대뜸 날아든 모욕적인 질문을 이교창은 볼을 씰룩이며 삼켰다.
“말씀을 좀 가려가며 하십시오.”
“내가 망신을 당하려니 너와 이러고 있다만, 검찰 고위 관계자와 한일 의원 교류회 소속의 국회의원들까지 오늘 자리에 참석한다. 중요한 손님을 모신 자리이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태도를 공손히 해.”
이교창은 순간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감 앞에 선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못 배운 티를 내는구나. 그건 나중에 가르치기로 하고, 강성태인가 하는 두목은 어디에 있냐?”
“도대체 사장님은 누구십니까?”
“나채상이라 한다.”
확실히 짐작이 맞았다.
오늘 쉽지 않겠는데?
이교창이 나직하게 숨을 내쉰 뒤였다.
“강성태 두목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강남 호텔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럴 거 없이 이분은 내가 조성 호텔로 모실 테니까 너는 가서 강성태 두목과 함께 그리로 와.”
몸을 돌리려던 나채상이 깜빡 잊었다는 얼굴로 다시 이교창을 찾았다.
“오기 전에 강성태 두목에게 꼭 전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고, 공손한 태도로 오라고. 그렇게 한다면 이곳까지 와주신 기무라 상의 체면을 생각해 나도 좋게 넘어가겠다만,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오늘부로 두목은 물론이고, 너처럼 따르는 놈들 모두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말이다.”
단호하게 경고를 전한 나채상이 고개를 돌렸다.
“고찌라이 도조, 기무라 상.”
그가 앞을 향해 팔을 뻗자 이교창을 힐끔 본 기무라 쿠니오키가 짧은 눈인사를 던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요코하마의 시내를 관통했던 이교창이었다.
그날 얌전히 뒤따랐던 야쿠자들의 태도를 기억하는 이교창은 어제 통화에서 다급했던 기무라 쿠니오키의 음성과 오늘 모습이 전혀 다른 것을 보며 이를 씹었다.
“앞으로 내가 일본 놈들 말을 또 믿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독한 각오를 내뱉는 이교창을 사카구치 소우타가 곁눈질로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