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2부 25권 - 1화
제1장. 명분이 보스한테 있는 거지.
액정에 올라온 건 이교창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 이교창입니다, 형님. 방금 기무라라는 관동 연합 대가리가 이곳에 있는 사카구치에게 전화했었습니다.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이교창은 기무라 쿠니오키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솔직히 예상했던 반응보다 더 엎드린 자세였다.
“내일 기무라 쿠니오키가 입국한 뒤부터 나채상을 데리고 나를 만나러 오는 것까지 책임질 수 있겠어?”
- 예? 형님?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이교창이 당황한 것처럼 반문을 내놓았다.
“부산을 맡은 이교창이 기무라 쿠니오키의 전화 심부름이나 할 정도로 시시한 사람이었어?”
- 그런 건 아닙니다, 형님.
“다시 물어보자. 내일 입국한다는 기무라를 상대해서 내게 데려올지 아닐지를 결정할 자신 있어?”
- 맡겨주시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형님.
“신강남파를 대표하는 만큼 진중하게 움직여. 나채상에게도 흠 잡히지 말고. 하지만, 절대 굽히지 마. 여차하면 관동 연합 밀어버린다. 그 결정을 하는데 한 치도 망설이지 말고.”
- 알겠습니다, 형님. 혹시 노익이 형님께 의논드려도 되겠습니까, 형님?
“편한 대로 해.”
-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먼저 노익이 형님께 말씀드리고 조금 뒤에 서울로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이교창의 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아직 고속도로가 한가해서 승용차는 여유롭게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기무라가 부산에 있는 사카구치에게 전화했단다.”
“씨발 새끼가 뭐라고 했다는데? 붙자는 거야?”
“내일 오전에 인천공항으로 들어오겠다는데? 나채상을 불러서 해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데 자세한 건 들어봐야지.”
“그 새끼들 믿을 수 있겠냐?”
최치곤의 질문을 들은 강성태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치곤아. 지금 그 질문 절대 잊어버리지 마.”
“뭐?”
“야쿠자 중에서 이놈만큼은 믿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으면 조금 전 그 질문을 생각하라고.”
“뭐? 그 새끼들 믿을 수 있냐는 거?”
강성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조심하라는 거지?”
“나는 너한테 등을 맡긴다.”
강성태의 답을 들은 최치곤이 각오를 세운 것처럼 볼을 씰룩였다.
“개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뭔 가지지도 않은 돈 내놓으라고 지랄을 떨어서는.”
그런 뒤에 최치곤은 이병렬을 흉내 내듯 툴툴댔다.
다른 일이 없다면 그리 늦지 않게 서울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
조태완의 사무실에 들어선 박노익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얼른 앉아.”
자리를 권한 조태완이 시선을 돌리자 김석문이 빠르게 냉장고로 움직였다. 집은 물론이고, 사무실에서까지 함께 지낸 덕분인지 이제는 제법 눈치가 늘었다.
“여직원이라도 한 명 두시지요?”
“저놈이 있는데 뭐 한답시고 돈을 써?”
홍삼 달인 물을 두 사람 앞에 놓아준 김석문이 상체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부산 교창이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말입니다, 형님.”
그 뒤에 박노익은 기무라 쿠니오키의 방문을 들은 대로 조태완에게 전했다.
“그것참. 정말 쉽게 안 끝나네.”
“오늘 밤에 교창이가 사카구치인가 하는 놈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답니다. 밤에라도 형님께 인사드려야 하는데 일이 그래서 자리 비우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올라와서 일단 전화 드릴 겁니다, 형님.”
“바쁜데 무슨 전화를 일일이 챙겨?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라고 해.”
“혹시 보스가 직접 말씀드리지 않아서 서운하십니까, 형님?”
“내가?”
힐끔 박노익을 보았던 조태완이 바람 빠지는 사람처럼 웃었다.
“동팔이 알지? 전에 내가 믿거라 하고 데리고 다니던 놈.”
“예, 형님.”
“칼 맞기 전에 말이야. 무슨 일을 하든 그 새끼가 안 보이면 화부터 나더라고. 나중에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니까. 반대로 동팔이 새끼는 자기 빼놓고 내가 일 봤다고 서운했었던 모양이더라고.”
“그랬습니까?”
박노익의 반문에 조태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다니면서도 서로 믿지는 않았던 거지. 그게 결국 마지막 칼부림으로 나온 거고.”
“예에, 형님.”
아픈 이야기라 박노익은 추임새처럼 늘어지는 답만 내놓았다.
“이럴 때는 병렬이라도 함께 설쳐줘야 하는데 보스 주변에 사람이 너무 없어. 당장 병렬이야 죽다 살아난 것만 해도 고마운 상황이니, 원.”
“어지간해서 보스 따라다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능청맞은 표정으로 조태완이 맞장구를 치고 나서 두 사람이 비슷하게 웃었다.
“전에 빌라에서 동팔이 놈에게 당할 뻔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에 곱창집에서 또 한 번. 나는 두 번이나 보스 덕에 살았다. 거기에 아이도 얻었고. 나는 진짜 보스에게 더 바라는 거 없다.”
그렇기는 하다는 투로 박노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한번 봐. 우리가 언제 야쿠자 오야붕이 잘못했다며 절할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어? 요코하마 시내를 야쿠자 달고서 걸을 생각이나 했었냐고?”
“그건 또 그렇습니다.”
“우리 보스가 화났다는 이유로 관동 연합 오야붕이 달려온다는 거 아냐? 전화조차 어려워서 교창이 통해서 당부한 거고. 더 뭘 바라?”
말을 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조태완이 픽 웃었다.
“보스가 마약, 고리대금업, 인신매매 막겠다니까 하늘이 돕는 건가 싶다. 요즘 세상에 깡패가 전국 통일한답시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견디겠어? 아마 벌써 골인돼서 죽을 때쯤에나 나올걸?”
“그게 저도 참 신기합니다. 강치 형님이야 우리 바닥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차웅진 회장에 나채상 이사장도 그렇고. 저라면 무조건 고개 숙일 사람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명분이 보스한테 있는 거지. 그래서 아까 말한 대로 하늘이 돕는 거고.”
동의한다는 투로 박노익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보스가 멕시코로 방향을 잡은 것도 그래. 회계 정확하게 처리하고, 약이나 사채 안 돌리는데, 식구 건사하기가 얼마나 뻑뻑해? 그뿐이야? 숙소 동생들에게 따박따박 월급 내려줘야지. 그러니 멕시코로 갈 수밖에 없지.”
“훈련은 어떻습니까, 형님?”
“세상이 좋아져서 군대 다녀온 놈들이 제법 있어. 마카오랑 이번 요코하마 일 보고 나서는 다들 멕시코로 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고. 훈련은 걱정할 거 없다.”
“듣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합니다, 형님. 가시죠? 제가 저녁 모시겠습니다.”
“곱창 안 먹는다.”
“흐하하하.”
넉살 담은 조태완의 농담에 박노익이 커다랗게 웃음을 토해냈다.
**
강성태가 이병렬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7시 40분이었다.
뭐야?
상체를 반쯤 세워놓은 침대에 이병렬이 억지로 기대 있었고, 가운데 세워놓은 테이블에는 육개장이 있었으며, 조봉진이 수라간 나인처럼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김진용과 조봉진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 숙였고, 최치곤이 안쪽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육개장을 먹어도 돼?”
“입맛이 없잖아. 칼칼한 게 생각나기도 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이병렬의 얼굴이 이전보다는 확실히 좋아 보였다.
“치워라.”
“예, 형님.”
이병렬의 지시에 조봉진이 그릇을 구석으로 옮겼다.
“저녁 아니야? 그러지 말고 더 먹어.”
“맵더라고.”
이병렬이 저녁으로 주문한 육개장을 밀쳐냈다. 그것도 맵다는 핑계로. 강성태가 찾아준 게 얼마나 반가운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어디 다녀오냐?”
강성태와 최치곤의 복장을 살핀 이병렬이 시선을 들면서 건넨 질문이었다.
침대 옆에 앉은 강성태는 조봉진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부산에 다녀왔던 일을 쭉 들려주었다. 마지막은 이교창이 서울로 향한다는 내용이었다.
“씨발 새끼들. 급하긴 한 모양이네. 대가리가 다 달려온다고 하고. 계획은 있냐?”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이병렬이 입술 한쪽을 늘이며 웃었다.
“누군지 또 뺨따귀 불나겠구만. 에이, 불쌍한 인간. 알아서 잘하겠지만, 두들길 거면 아예 혼이 빠지게 만들어. 보스 대신 내가 찾아가도 벌벌 떨게. 그래도 시간 지나면 뒤통수 노릴 놈들이라는 거 명심하고.”
강성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곤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라면, 이병렬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든든한 내 편이라는 느낌일까?
“공사 금액이 크고, 먹을 게 많아서 그런지 끈적거리는 일이 더럽게 많네. 카르텔이나 가페란 놈들도 그렇고. 멕시코라서 그런가?”
“그런 면도 있지. 대신 카르텔이 설치는 곳이라 우리한테 일이 돌아온 건지도 몰라.”
“흠.”
입술을 내밀며 숨을 뱉었던 이병렬이 눈가를 좁혔다.
한편으로는 이병렬의 저런 표정이나 툴툴대는 말투가 강성태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위로가 되었다.
“저녁은? 육개장이라도 하나 시켜줄까?”
“가는 길에 치곤이랑 먹을게.”
강성태는 웃는 낯으로 이병렬의 질문을 받았다.
무엇보다 종일 고생한 최치곤이 마음 편히 식사하게 하고 싶었고, 다음으로 육개장은 방금 맡은 냄새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얼른 들어가. 가서 조금이라도 쉬어. 아, 참! 여유 되면 가는 길에 태완이 형님께 전화나 한 통 드려. 이해는 하시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서운할 수 있어.”
강성태는 이병렬의 손등을 다독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곤이 네가 내일 보스 모시냐?”
“예, 형님.”
“너라면 안심해도 되겠다. 괜히 술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가 자.”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몸조리하십시오, 형님.”
당부를 받은 최치곤이 인사를 마치고서야 강성태는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는 길이었다.
“참! 내일 김삼문도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르윈 형님이 비행편하고 시간 알려준다고 했었잖아?”
“알고 있어. 연락 오는 대로 연순동에게 전화해서 경찰 쪽 확인할 생각이었고. 고소인들이 있어서 입국하는 대로 경찰서로 갈 거라서 급할 건 없어.”
말이 끝날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로비로 내려간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승용차에 올랐고, 집을 향해 움직였다.
밝은 불빛을 배경 삼아 신월동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조태완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통화되십니까?”
- 노익이가 와서 함께 저녁 먹고 지금 차 마셔. 부산에 다녀왔다면서?
“안 그래도 그 내용을 말씀드릴까 해서 전화했습니다.”
- 노익이한테 대강 들었어. 교창이가 서울 도착하면 노익이가 챙기기로 했으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보스가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나? 나중에라도 궁금한 일이 있으면 내가 전화할 테니까 앞으로는 밥 같이 먹을 사람 필요할 때만 전화해.
전화해 준 게 고마웠는지 조태완은 내내 기분 좋은 음성으로 강성태를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에 통화를 마쳤다.
무슨 일이 있나?
강성태는 오후에 연락한다던 아르윈을 떠올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삼문의 도착 시각이 궁금하기보다는 혹시 강성태에게 말하지 못하는 문제로 아르윈이 힘든 건 아닌가 염려돼서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걱정을 알았다는 것처럼 그 순간에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통화되십니까?
“괜찮아.”
- 필리핀에서 이제야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에 김삼문이 잔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연락이 늦었답니다.
“잔머리?”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최치곤이 힐끔 강성태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 돈을 송금하면서 합의서를 반드시 다음 날 넣어달라고 문자를 보냈었나 봅니다.
“경찰서에서 바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나 본데?”
- 안 그래도 돈을 갚았으면 된 거 아니냐고 억울해했다고 합니다, 형님. 그 바람에 필리핀에서 조직원 두 명을 함께 보내려고 예약을 바꾸느라 이제야 도착 시각이 정확하게 나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아, 참. 한결같은 인간.
김삼문의 행동을 떠올린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들어오는 대로 경찰서로 가는 건 확실하니까 굳이 조직원 함께 보낼 거 없다고 전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대신 비행편이 바뀌면 꼭 알려달라고 하고.”
- 알겠습니다, 형님. 문자로 비행편이랑 시간 넣겠습니다.
“고생했어.”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
“저녁에 고기 먹을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에 밥 말아 먹자. 이모네 김치 있지?”
하루를 편안하게 마감하자는 최치곤의 제안에 강성태는 기분 좋게 웃었다.
“너는 내일이 부담스럽지도 않냐?”
“걱정할 게 뭐 있어?”
힐끔 강성태를 보았던 최치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렇게 뛰는 대신 멕시코에서 흘릴 피가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자. 실제로도 그럴 거고.”
“멕시코를 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는 진짜 모르겠다. 솔직히 동영상만 봐서는 실감도 안 나고.”
최치곤의 답이 어쩌면 지금 멕시코로 가겠다며 지원한 인원들의 공통적인 심정인지 모른다. 관광지만 돌아본 사람들에게 멕시코는 아름다운 여행지였을 테고.
“무지하게 그리울 거다. 이 불빛, 밤에도 안심하고 돌아다니는 환경, 전화만 하면 배달되는 음식,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 깨끗한 환경, 전부 다.”
그러냐는 투로 최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눈치였다.
더 말해 뭐하겠나.
시에라마드레 산맥에 도착해 하루만 지나면 바로 실감할 텐데.
벌써 이렇게 됐나?
어느새 멕시코로 향할 시기가 부쩍 다가왔지만, 당장은 내일 나채상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