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2부 24권 - 20화
최치곤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액정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영악한 인간.
그림자가 빛의 세상으로 끌려가면 권력의 움직임대로 따라 할 뿐, 스스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나채상은 잘 알고 있었다.
강성태를 빛의 세상으로 끌어낸다.
그렇게 그의 세상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강성태와 주변 사람들을 권력이란 무기로 무너트린다.
일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 번호를 보며 강성태는 나채상을 떠올렸다.
당신도 그렇겠지만, 이런 싸움에서 나 역시 져본 적 없어.
그래도 승패는 갈리겠지?
누가 이길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려는 당신과 붙어서 질 거 같아?
한 번의 패배에도 죽음을 맞아야 하는 세상을 당신은 몰라.
이번엔 당신이 우리 쪽 세상으로 들어와, 나채상.
싫겠지만, 어둠 속에서 그림자와 마주 서 봐.
요란하게 몸을 떨던 스마트폰이 진동을 멈춘 뒤에 부재중 통화 기록을 액정에 남겼다.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 아니었냐? 왜 안 받았어?”
“한 번이잖아. 목숨이 걸린 일인데 다시 전화하지 않는다면 저놈들도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 되지. 일본 정권과 나채상을 이용해서라도 붙겠다고 각오했든가.”
“정말 그런 거면?”
“말한 대로 카르텔과 가페를 일본으로 불러야지. 그 둘이 멕시코에서 붙으나, 관동에서 붙으나 우리는 손해 볼 거 없어.”
“연백국 나채상이 너 잡으려고 한다며?”
강성태는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연순동에게 조사를 부탁한 건 법으로 잡아넣으려는 계산도 있지만, 이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어.”
“그래서?”
대답 대신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독한 결정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같은 번호를 액정에 올린 스마트폰이 다시 울었다.
“왔다! 아까 그 번호!”
몸을 떠는 스마트폰만큼이나 최치곤이 흥분한 눈치였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고속도로 휴게소라서 속도를 높여 달리는 차량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보스? 관동 연합의 야마다 코신입니다.
야마다 코신의 음성이 먼저 들렸고, 반 박자 느리게 우리말로 전해주는 통역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 정도라면 강성태의 말을 기무라 쿠니오키 역시 함께 듣고 있다고 봐야 했다. 누군가 옆에서 일본말로 바꿔주면서 말이다.
“야마다 코신.”
- 예, 보스.
“충고 하나 해줄까?”
- 그렇지 않아도 보스의 말씀을 듣기 위해 전화 드렸습니다.
“그럼 전화 끊는 대로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가. 주변 정리도 하고.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한이 덜 남아.”
- 보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
-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야붕께 여쭤보았으나 말씀하셨던 연백국의 회원들을 사주한 일은 결단코 없다는 답이었습니다.
급하게 건너온 해명이었다.
관동을 비우고 도주하자니 정관계 인맥을 동원해 달려들 아카시 마오가 부담스럽고, 맞받아치자니 강성태와 신강남파의 독기가 두려운 관동 연합의 현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해명이기도 했다.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이 작성한 서명서가 있다. 그건 알고 있나?”
- 저는 말만 들었을 뿐,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다 스미야기가 지니고 있었다니까 이제는 기무라 쿠니오키가 보관하고 있겠지. 그 서약서가 밝혀지면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은 삶 자체가 망가져.”
- 그렇게까지 위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보스.
지금 대꾸는 강성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나온 추임새 느낌이었다.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인생 자체를 붙들린 나채상과 연백국 회원 놈들이 대놓고 나를 노린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 보스. 그건….
“조용히 들어.”
- 예, 보스.
뭔가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야마다 코신을 강성태는 짧은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서 엎드렸던 놈들은 어디 가고 네가 전화하는 거지? 신강남파가 만만한 거냐, 아니면 신강남파 강성태 정도는 네가 상대할 급이라는 거냐?”
말문이 막혔는지 야마다 코신의 답은 없었다.
“이번 일로 관동은 신강남파가 접수한다. 나를 대신해서 아카시 마오가 관동을 움켜쥐든가, 아니면 관동 연합에 속한 놈들이 모조리 죽든가, 둘 중 하나일 때 끝나는 싸움이다.”
이번에도 대꾸는 없었다.
말문이 막혔던 앞과는 달리 지금은 질려서 답을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하나 더. 건방지게 너에게 전화를 시킨 기무라 쿠니오키, 그리고, 함부로 전화한 너,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목을 갈라주마.”
야마다 코신이 분명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픽 웃은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우와, 씨!”
통화를 마친 직후에 최치곤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왜?
시선을 돌린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입을 열었다.
“너는 평범한 목소리로 어떻게 그렇게 몰아붙이냐? 내가 상대방이었으면 지금 속옷 갈아입으러 갔을 거다. 그나저나 우리말을 하는 놈이어서 대신 너한테 전화한 거면 좀 억울한 거 아냐?”
“일본말 뒤에 우리말로 바꿔서 들려주는 통역이 있었어.”
“씨발 새끼들이 그런 건 또 어떻게 생각했대?”
거칠게 야마다 코신의 통화 방법을 평가한 최치곤이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전화도 못 하게 막아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최소한 연락할 방법은 남겨둬야 놈들이 매달리기라도 할 거 아냐?”
“두 가지 방법이 남았잖아.”
“두 가지?”
강성태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최치곤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무라 쿠니오키가 악을 바락바락 쓰며 다그칠 인간 한 명, 아니면 무릎을 꿇고라도 한 번쯤 통화하게 해달라고 전할 인간, 이렇게 둘.”
수수께끼를 받은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고개를 비틀었던 최치곤이 혹시 하는 얼굴로 시선을 가져왔다.
“기무라라는 새끼가 악을 바락바락 쓰며 다그칠 인간이 나채상이냐?”
빙고!
강성태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럼 무릎을 꿇고라도 통화하게 해달라고 전할 인간은 부산에서 교창이 형님이 잡도리하는 그 새끼?”
강성태의 표정을 확인한 최치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걸 진짜 통화하면서 생각하고 결정한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막바지까지 몰아붙인 거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잖냐.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적이 튀어나온다고 멍하니 죽을 수는 없는 거고. 멕시코 카르텔 놈들이 워낙 예상 밖으로 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생각해 주라.”
몸을 일으키는 강성태를 따라 최치곤이 감동한 표정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만약 아카시 마오가 우리 손에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 거 같냐?”
“깡패 뭐 있어? 나는 몰라도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밤에라도 일본에 가야지.”
“그건 또 그러네.”
우체통처럼 생긴 쓰레기통을 향해 걷는 강성태를 따라 최치곤이 무릎을 펴고 걷는 특유의 걸음으로 움직였다.
“씨발 새끼들. 지금쯤 머리 졸라리 아프겠네.”
쓰레기통에 일회용 컵을 넣은 최치곤이 기무라 쿠니오키의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
야마다 코신과 통화한 사카구치 소우타는 스마트폰을 앞에 내려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20분이 지났다.
이 정도면 일본에서 강성태에게 연락하고 남을 시간이었다.
시간이 꾸역꾸역 흐르는 만큼 살벌한 정적과 드럼통, 시멘트, 죽음이라는 단어들이 선명해져서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뻑뻑했다.
이교창은 ‘회칼을 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동상처럼 시선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할까?
사카구치 소우타를 공구리 쳐서 드럼통에 넣으라는 지시, 아니면 이 자리에서 울대를 끊어버리겠다는 독한 생각?
침묵이 길어질수록 결과가 참혹할 거란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사카구치 소우타가 앞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일본에서 온 전화입니다.”
“받아. 스피커폰으로.”
착 가라앉은 이교창의 음성, 번들거리는 눈빛에 눌린 것처럼 사카구치 소우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모시모시. 사카구치 소우타 데쓰.”
그가 답을 한 뒤였다.
일본어에 능통한 덩치 한 명이 이교창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 한국의 보스와 통화했다.
“예, 오야붕.”
이어진 통화에서 기무라 쿠니오키는 강성태와의 통화에 대해 나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강성태가 왜 부산까지 내려와 아카시 마오를 만났는지, 그래놓고 고작 차 한 잔 마신 뒤에 곧바로 서울로 향했는지를 말이다.
- 한국의 보스는 우리 의도와 다르게 야마다 코신이 전화했다는 사실에도 분노했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대가리가 직접 전화한 게 아니라 중간에 있는 새끼한테 시켰다고?’
통화를 전해 들은 이교창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잔인하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 내일 오전 비행기로 내가 직접 들어가겠다.
예상 밖의 내용이 넘어왔다.
이교창은 고개를 돌려 통역해주는 덩치를 돌아보았다.
‘확실합니다, 형님.’
긴장한 상태에서도 통역하던 덩치는 확신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 오해를 풀기 위해 내가 직접 전화했다. 네가 의지하는 부산의 보스에게 내 뜻을 전하고, 강성태 보스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부탁해. 그렇게만 된다면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나채상을 불러서 한국의 보스에게 해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명하게 조치하겠다.
“부산의 보스께서 함께 듣고 있습니다, 오야붕.”
저런 개새끼가?
이교창이 눈을 희번덕거렸으나 이미 사카구치 소우타가 주절거린 뒤였다.
- 내일 오전 9시 20분 인천공항 도착이다. 답이 없어도 출발할 테니 강성태 보스를 못 만나게 된다면, 이병렬 보스나 부산의 보스라도 뵙게 해달라고 부탁드려.
“알겠습니다.”
이 새끼들이 병렬이까지 알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대충이라도 신강남파를 알아봤다는 건데?
이교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뒤트는 순간이었다.
짧지 않았던 통화가 끝났다.
처분을 바라는 눈으로 사카구치 소우타가 시선을 들었고, 여태 상체를 기울여 통역했던 덩치가 몸을 세우고 물러났다.
“야!”
“예, 형님.”
“너도 그렇고, 일본의 오야붕이란 인간도 그렇고, 왜 이렇게 꼬리를 말지?”
“예? 형님?”
“상황이 그렇잖아, 이 새끼야? 야쿠자가 원래 이렇게 고분고분한 집단이었어? 기합이니 근성이니 지랄 떨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대가리를 처박냐고?”
앞뒤를 정확하게 모르는 이교창이 설명을 요구했다.
대략 10분에 걸쳐 사카구치 소우타는 현재 관동 연합의 상태, 아카시 마오가 카르텔과 넘어올 것에 대비해 자리를 피하지 못하는 현실, 그렇다고 맞받자니 일본에서 사건이 크게 벌어지면 관동 연합까지 함께 몰락한다는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지금 우리 큰형님께 전화 드릴 건데 장난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괜히 헛소리하게 해서 나 바보 만들지 말고.”
“없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본에서 오야붕이 오시는데 무슨 장난친 게 있겠습니까?”
“흠.”
심오한 얼굴로 사카구치 소우타를 노려보던 이교창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강성태는 연순동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여보세요?
“그동안 고생했어. 이 정도면 됐으니까 서류 정리하고 돌아가.”
대뜸 날아간 강성태의 지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눈치였다.
“여기까지만 하자고. 집에 가라는 게 싫은 건 아니지?”
- 뒤를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풀어야지.”
- 그게 아니라, 호텔에서 연락이 끊겼던 내가 느닷없이 집으로 돌아가면 나채상 이사장이 의심할 거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하라고 갑자기 돌아가라고 합니까?
그럼 그렇지.
어쩐지 뒷일을 걱정하더라니.
“적당히 둘러대. 나한테 붙들려서 삼합회 칼잡이 일로 곤란했었다거나 뭐 그렇게. 이번 일을 문제 삼으면 나채상까지 드러날 수 있으니까 기회를 봐서 신강남파를 제대로 엮어 넣겠다고 말하면 이해할 거다. 의심하면 얼굴을 보여줘.”
- 알겠습니다. 그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주십시오.
“알았어.”
강성태의 제안을 받아들인 연순동이 마음 급한 사람처럼 통화를 마쳤다.
강성태는 유충일에게 전화해서 연순동을 보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카시 마오의 헛소리로 시작된 일이 삼합회의 칼잡이를 고용하면서 느닷없이 커졌고, 나채상은 그 와중에 불쑥 등장했다.
이미 죽은 오다 스미야기의 지시를 받아서 강성태를 노렸다고 보는 게 지금으로써는 가장 확실한 이유였다. 거기에 일본에 고개 숙이며 살아가던 차웅진을 잡았다는 사실에 앙심을 품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준비는 여기까지였다.
강성태가 바라는 대로 기무라 쿠니오키가 움직인다면 그럭저럭 수월하게 마무리하는 거고, 엉뚱한 짓거리를 한다면 또다시 피를 흘리더라도 그에 맞춰 밀고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어떤 선택을 할래, 기무라 쿠니오키?
강성태의 생각을 알았을까?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든 스마트폰이 얼른 받아보라는 듯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