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2부 24권 - 13화
제6장. 믿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최치곤이 갈비를 구하러 나가면서 강성태는 병실에 홀로 남았다.
조태완은 일본에 다녀온 일로 후유증이 없도록 조직을 단속하느라 바빴고, 박노익은 이교창과 함께 로페즈 일행을 조용하게 들여오는 일로 정신이 없는 데다, 부산과 광주 식구들은 근거지로 출발해서 당장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붕대를 감은 몸에 환자복을 걸친 강성태는 모처럼 여유로운 심정으로 방지병원의 창을 내다보았다.
오다 스미야기를 잡았고, 기무라 쿠니오키를 비롯한 관동 연합 대가리들의 사죄를 받아냈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지쳤을까?
아니면 희생자들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자꾸 눌리는 건가?
일본에서 키란이 샌드위치로 강성태를 다독여주더니 한국에 와서는 최치곤이 고기를 핑계로 힘을 내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당당하게 중심에 서서 멕시코로 향할 준비에 힘을 쏟아야 할 강성태의 모습 어딘가에서 맥이 빠져 보이는 모양이었다.
참혹한 전장 한가운데서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던 강성태가 두 번이나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서 끼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흔히 보는 조직의 못된 보스나 형님들처럼 동생들이 챙겨줘야 밥을 먹는 건방을 떨게 되는 건 아닐까?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요란하게 쓸고 다니다가 훌쩍, 훌쩍 잘도 떠나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들.”
의식이 흐릿한 순간에 서달수를 안아주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굵은 눈물을 흘렸던 이병렬이 정신을 차린 뒤에 툴툴거리며 내놓았던 말이었다.
그의 심장에 서달수가 얼마나 무겁게 담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성태였다.
비통해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강성태, 툴툴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 사람에게 아픔을 보이지 않는 이병렬, 두 가지 모습을 차례로 떠올렸던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또 배웠다. 이병렬에게서.
지금의 모습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질 때,
우우우웅. 우우우웅.
침대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강성태를 찾았다.
“여보세요?”
- 로페즈입니다, 보스.
“어디야?”
- 부산입니다. 무사히 들어왔고, 이쪽 조직원의 도움을 받아 아카시 마오를 병원에 넣었습니다.
강성태는 나직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지금 병원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오를 부산 식구들에게 맡기고, 내가 연락해서 차를 준비해줄 테니까 서울로 올라와.”
-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기 직전이었다.
“고생했어, 로페즈. 고맙고.”
- 모처럼 피가 뜨거웠었습니다.
강성태가 감사의 뜻을 전하자 로페즈가 그럴듯한 인사를 내놓았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이교창의 번호를 눌렀다.
강성태는 먼저 로페즈와의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고, 이어서 그가 서울에 올라올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 지시를 전했다.
- 알겠습니다, 형님. 실수 없이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부진 답을 끝으로 이교창과의 통화를 끝냈다.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하얀색 봉투를 양손에 든 최치곤이 들어섰다.
강성태는 침대를 짚으며 일어나 테이블로 걸었다.
“어디에서 구했냐?”
“내가 아침 식사를 잘하는 집을 알아요.”
능청맞게 대답한 최치곤이 바쁘게 포장을 뜯어내면서 고기와 반찬, 밥이 테이블을 뒤덮었고, 이어서 숯불에 구운 고기 냄새가 병실을 가득 메웠다.
곁에서 최치곤을 돕던 강성태는 봉지 안에서 익숙한 포장을 꺼내고는 눈가를 좁혔다.
“뭐냐, 이거?”
“보고도 몰라?”
뻔뻔한 답을 한 최치곤이 구석에서 물을 가져와 맞은편에 앉았다.
“샌드위치 사이에 갈빗살을 넣어서 먹어주면 끝장나. 그냥 나만 믿어.”
자신 있다는 얼굴로 고기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를 내미는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일단 잡숴봐! 이걸 먹잖아? 그럼 다음번에 고기 먹으러 가기 전에 샌드위치 가게를 찾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놈은 멕시코에서 샌드위치 전문점을 여는 게 아닐까?
일본에서 두 끼를 샌드위치로 해결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사정을 알 길 없는 최치곤에게 다른 말을 하기 싫어서 강성태는 크게 베어 물었다. 얼른 먹어 치우고 밥과 고기를 입에 넣고 싶어서였다.
“어?”
“거봐! 죽이지?”
일본에서 먹은 건 샌드위치가 아니었구나 싶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둘이서 킬킬대며 식사를 하는 동안, 강성태는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신강남파 보스 강성태가 아니라 잠시 밀쳐두었던 커피알리고의 매니저 강성태, 그리고 최치곤의 친구 강성태로 말이다.
먹성이 폭발한 최치곤의 권유에 또다시 샌드위치를 받아들자 이번에는 이모 장숙경의 조카, 김민재와 김민정의 가족 강성태의 모습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마약과 고리대금업, 인신매매를 없애기 위해 어둠에 섰었다. 그 상황에서도 항상 빛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둠에 갇힌 그림자처럼 빛의 세상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샌드위치를 받아든 강성태는 최치곤을 보며 픽 웃었다.
“고맙다.”
“우리 사이에 뭐 샌드위치 하나로 그래? 얼른 먹어.”
강성태의 심정을 알 길 없는 최치곤이 반으로 접은 샌드위치를 커다랗게 베어 물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병실에 있을 테니 안심하고 자라는 최치곤의 다독임에 기댄 덕분인지, 강성태는 정말이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았을 정도로 깊게 잠들었던 강성태가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어? 일어났냐?”
“몇 시냐, 지금?”
“밤 11시.”
들여다보던 스마트폰을 내린 최치곤이 구석으로 움직여 물을 가져다주었다.
실제로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강성태는 물병을 받아 시원하게 들이켰다.
“태완이 형님 오셨다가 가셨어.”
그걸 모르고 계속 잤다고?
강성태는 멍한 얼굴로 최치곤을 바라보았다.
“진짜 죽은 듯이 자더라.”
“장례식은?”
“안 그래도 태완이 형님이 용동이 형님 장례식장 지키실 거니까 너는 절대 오늘 오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시더라.”
이미 비행기 안에서 받았던 당부였다.
일본에서의 사건이 조용하게 넘어가지야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상처 가득한 신강남파 보스가 첫날부터 대놓고 자리를 지키면, 민감한 상황에 말이 크게 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르윈은?”
“종환이 형님이 대림동하고 강서구, 신월동 숙소를 반으로 나눴어. 반은 용동이 형님 쪽으로 가고, 나머지 반은 아르윈 형님이 지키는 장례식장으로 가기로.”
“후우-.”
“광주 숙소에서 다 올라왔으니까 첫날은 그냥 여기 있자.”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렬이한테나 다녀오자.”
“잠깐만.”
침대에서 발을 내린 강성태의 상체에 최치곤이 외투를 덮어주었다.
링거대를 붙든 최치곤이 앞서서 문을 열기 무섭게 복도에 있던 대림동 덩치 세 명이 상체를 깊게 숙였다.
바로 옆방이어서 멀리 걸을 것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옆에 앉아 있던 김진용과 조봉진이 얼른 몸을 세우고는 상체를 깊게 숙였다.
이병렬은 깨어 있었다.
강성태를 본 그는 픽 웃은 뒤에 침대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옆자리에 앉으라는 의미로 보였다.
“장례식장에 가려는 거 아니지?”
“내일이나 가려고.”
“이번은 그게 맞아. 광주 숙소에서도 대진이만 장례식장에 있기로 하고, 나머지 다친 동생들은 발인 때 가기로 했다더라고.”
어쩐지 고룡동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은 좀 먹었어?”
“저 새끼들이 대가리가 컸다고 말을 안 들어 먹어서 쫄쫄 굶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돌린 강성태 앞에서 김진용과 조봉진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형님. 병렬이 형님께서 육개장을 사 오라고 하셔서, 형님.”
한 명은 샌드위치에 꽂혀 사람을 질리게 하더니, 이쪽은 죽도 겨우 먹을 상황에서 육개장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며칠만 참아.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육개장집에서 제대로 사다 줄게.”
“그건 됐고.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사과를 받았다는데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아르윈하고, 대진이, 키란이가 보스 옆에 있었나 본데 죄 장례식장에 가 있어서 전화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어차피 해줘야 할 이야기였다.
강성태는 어제 있었던 기무라 쿠니오키와의 일을 자세하게 이병렬에게 들려주었다.
“아, 그 얍삽한 새끼들!”
시원시원하게 욕을 뱉어내는 이병렬의 주변에서 김진용, 최치곤, 조봉진이 귀를 바싹 세운 채 강성태의 말에 집중했다.
**
사흘이 훌쩍 흘렀다.
병실을 찾은 조태완의 간곡한 당부에 강성태는 결국 발인 날 새벽에 먼저 아르윈을 찾아가 필리핀 조직원들을 조문했고, 이어 고룡동의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한 뒤에 화장터와 추모공원까지 함께 움직였다.
고룡동을 추모공원에 안장한 김대진이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일본 야쿠자들과의 싸움이 완벽하게 일단락되었다.
추모공원에서 나선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빌라로 향했다.
빌라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아르윈의 이름을 액정에 올린 스마트폰이 소파에서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동생들 모두 잘 보냈습니다.
“고생했어.”
무거운 주제여서 강성태는 그저 애썼다는 말로 아르윈을 위로했다.
- 저기 형님. 필리핀에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김삼문이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가져간 돈을 거의 다 뱉어낸 거 같은데 어떻게 할지 여쭤보라는 지시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돈을 거의 다 내놨다고?”
- 형님께 기쁜 소식을 드리겠다며 필리핀에서 꽤 애쓴 모양입니다.
말이 좋아서 애썼다는 표현을 사용한 거지, 필리핀의 가디언스파가 달려들어 돈을 거의 찾아냈을 정도면 김삼문의 현재 상태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 한국에서 돈을 빌린 사람의 이름하고 금액까지 모두 적었는데 열 번 넘게 확인했다니까 믿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에는 빌린 사람들 연락처도 알 거 같은데, 순서대로 전화해서 사과하고 필리핀에서 송금하는 거로 처리할 수 있을까?”
- 확인하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형님.
“어깨 조심해.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 감사합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는 최치곤에게 김삼문의 일을 들려주었다.
“하여간 남의 피 같은 돈 생으로 처먹으려고 하는 새끼들은 어디 탄광 같은데 처넣어서 죽을 때까지 석탄 캐게 하고 번 돈은 전부 피해자들한테 골고루 나눠줘야 하는데.”
최치곤의 독한 평가가 떨어진 직후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스마트폰이 울었다.
강선영의 이름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야. 통화되니?
“말해.”
- 부장님하고 나채상 이사장 조사하는 거 알지? 기본 조사는 끝났고, 압수수색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압수수색을 신청하면 저쪽에서 눈치챌 확률이 무지 높아.
평소라면 엉뚱한 소리부터 했을 강선영이 통화하기 무섭게 내용을 꺼내 들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란 의미였고, 이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선 필요한 자료 목록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나한테 줘.”
- 네 능력을 모르는 건 아닌데 불법적으로 취득한 증거는 법정에서 인정 못 받아.
“자료를 구해서 정확하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파악한 뒤에 거기에 맞춰서 압수수색을 청구하면 되잖아. 그때는 나채상이 알아도 다른 방법이 없을 거 아냐?”
- 그렇게 하자고?
혼잣말처럼 질문한 강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신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거로 봐서 압수수색이 필요한 목록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 그럼 내가 부장님하고 통화한 뒤에 다시 연락할게. 그런데 진짜 이거 무슨 일이야?
“우선 자료부터 해결하고 이야기하자.”
- 한 번을 쉽게 안 가네. 알았어. 조금 뒤에 다시 통화해.
연백국과 나채상에 관한 내용은 최치곤도 이미 아는 일이었다.
강성태는 통화 내용만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진짜 가끔 돈이 무섭다. 어느 인간은 친한 사람들 줄줄이 엮어서 그 집안이 망하든 말든 깡그리 빌려서 필리핀으로 튀고, 어떤 인간은 할아버지가 매국노 짓 한 걸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렇게 모은 돈으로 떵떵거리며 오히려 나라 팔아먹는 데 앞장서고.”
말을 쏟아내던 최치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싫은 게 그런 새끼들이 학교 만들어서 나랏돈 졸라리 빼먹는 거야. 빼먹기만 해? 세금 연체하고도 오히려 큰소리치잖냐. 에이, 씨발 새끼들. 그런 새끼들은 진짜 이가 다 빠지도록 두들겨버려야 하는 건데.”
불만을 있는 대로 쏟아낸 최치곤이 ‘가만?’ 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왜?”
“몰라서 물어보시나요, 서방님? 이번에도 시원하게 때려주실 거지요? 생각만 해도 소녀의 가슴이 후끈후끈합니다요.”
“내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에이, 더러워.”
눈살을 찌푸리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