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2부 24권 - 12화
완연하게 기운 태양이 강성태와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주황색 노을을 뒤덮은 시간이었다.
왼손에 쿠크리를 든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기무라 쿠니오키는 시선을 떨군 채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끝에서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던 기무라 쿠니오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놓고도 마지막 확인을 위해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도로에 서 있는 저 많은 숫자가 정말 두렵지 않소?
지금이라도 적당한 선에서 합의할 생각이 정말 없는 거요?
야마다 코신이 그렇더니 기무라 쿠니오키 역시 끈덕지게 강성태가 주눅 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조태완의 조언대로 뭔가를 베풀었다는 모양새를 갖추고 싶은 걸까?
지겹도록 끈적이는 기무라 쿠니오키를 보며 강성태는 마음을 굳혔다.
승용차로 돌아간 이후 5분이라는 시간을 주기로 했던 약속은 지킨다. 대신, 엉뚱한 짓거리로 시간을 허비하게 한 야마다 코신을 본보기로 처리해주마.
독하게 마음먹은 강성태는 고개를 돌려 야마다 코신을 눈에 담았다.
화들짝 놀란 야다마 코신이 강성태가 들고 있는 쿠크리로 시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강성태의 결정을 알아챈 모양으로 기무라 쿠니오키가 입을 열었다.
“각 조직의 오야붕들을 불러.”
“하이.”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야다마 코신이 왼팔을 높게 들었다.
하여간, 음흉한 인간들.
오기 전에 이미 사과할 준비를 마쳐놓은 모양이었다. 그래놓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적거렸다.
언제고 신강남파와 강성태가 만만해지는 순간이 오면, 사과했다는 말은 쏙 빼고,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혈투가 사회적 문제가 될까 봐 양보했던 거라며 떠들고 남을 인간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화로 해결할 일이었음에도 밤에 기습해서 백 명이 넘는 야쿠자 조직원들이 애꿎게 희생됐다며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다.
야마다 코신이 팔을 높게 들고 나서였다.
승용차에서 내린 세 명의 중년 남자가 각자 두 명씩의 야쿠자들을 거느리고 기무라 쿠니오키의 뒤편으로 다가왔다.
강성태에 대한 두려움, 조직원들 앞에서 절을 해야 하는 치욕, 복잡한 표정의 기무라 쿠니오키가 볼을 씰룩였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카시 조직의 후계자 아카시 마오가 멕시코로 향한 탓에 지금 관동 연합은 나와 뒤에 선 세 명이 이끌고 있소.”
떨리는 음성으로 설명을 건넨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두목을 따라 나왔던 야쿠자들이 품에서 얇은 천을 꺼내 기무라 쿠니오키를 비롯한 세 명의 우두머리 앞에 펼쳤다.
지금이라도 그만하라고 하면 더 좋은 관계가 될 거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기무라 쿠니오키의 눈을 강성태는 여전히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이백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상처가 가득한 강성태에게 절을 하는 상황이었다.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기무라 쿠니오키는.
“더럽게 꾸물거리네.”
뭔가 꼼수를 피우려던 그가 차갑게 날아간 강성태의 말을 전해 듣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세 명의 오야붕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관동 연합 기무라 쿠니오키는 세 명의 오야붕과 함께 한국의 신강남파 강성태 오야붕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사죄를 청한 기무라 쿠니오키가 세 명과 함께 바닥에 양손을 겹쳐 놓고는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강성태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오야붕들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양, 이백여 명의 야쿠자들이 고개를 떨궜고, 완연하게 기운 태양은 관동 연합이 신강남파 강성태에게 꿇었다는 사실을 붉은 노을로 확인해주었다.
피처럼 붉어진 노을 속에서 강성태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보고 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 풀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든 강성태의 심정을 짐작하는지, 뒤에 서 있던 김대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 뒤였다.
“일어나.”
시선을 내린 강성태가 짧게 건넨 지시에 엎드려 있던 네 명의 오야붕들이 몸을 일으켰다.
감추려 애쓰고 있었으나 기무라 쿠니오키를 비롯한 세 명의 얼굴에 수치심과 굴욕이 또렷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거야 뭐, 이놈들 사정인 거고.
“새벽 2시쯤 신강남파 식구들을 태운 전용기가 일본에 도착한다. 출국하기 전에 희생된 내 식구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항구에 있는 창고, 블랑카, 오다 스미야기가 있던 주택을 거쳐 공항으로 가겠다. 중환자들과 사망자가 있으니 말이 나오지 않게 출국할 수 있도록 준비해.”
“알았소. 필요한 게 있다면 야다마 코신에게 말씀하시오.”
강성태의 요구를 들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무라 쿠니오키가 몸을 돌렸고,
“필리핀 조직원들이 우리의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고, 아카시 마오와 카르텔을 상대하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조용하게 말을 건넨 야다마 코신이 네 명의 오야붕을 따라 승용차로 향했다.
보슬비처럼 흩날리는 어둠이 요코하마에 내려앉는 사이, 야쿠자들이 차에 올랐고, 가장 앞에 선 차량부터 빌라를 바로 지난 공터에서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들어선 순서대로 빌라를 지났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나가는 바람에 마치 우뚝 선 강성태에게 줄줄이 인사하고 가는 모양새였다.
마침내, 마지막 차량이 빌라 앞의 도로를 따라 달려서 큰 도로 방향으로 사라진 뒤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고룡동의 한이 어느 정도는 풀렸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김대진이 강성태를 향해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
한국에서 출발한 신강남파 일행이 빌라에 도착한 건 예상보다 늦은 새벽 3시 30분이었다.
이미 강성태가 조태완과 통화해 일본에 도착해서 할 일들을 알려주었고, 이어서 김대진과 아르윈이 한국에 연락해 필요한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늦은 시간에 고생하셨습니다.”
“보스가 이렇게 나섰는데 고작 비행기 몇 시간 탄 게 무슨 고생이라고 그래.”
조태완이 강성태를 다독인 다음이었다.
먼저 이병렬을 비롯해 움직이기 어려운 광주 식구들과 아르윈의 조직원들을 공항으로 보냈고,
“출국 시간이 있어서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이어서 강성태는 조태완과 박노익을 비롯한 신강남파 식구들 2백여 명을 이끌고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새벽 4시였다.
요코하마의 창고에 들러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의 한을 풀어준 강성태는 다시 일행과 함께 요코하마 시내로 들어섰다.
다음 목적지는 요코하마 조직의 업장 블랑카였다.
강성태가 앞섰고, 그 뒤로 조태완, 박노익, 이교창이 따랐으며, 다음으로 고룡동의 영정을 품은 유충일이 김진용, 김대진과 함께 움직여 블랑카 안쪽에 들어섰다.
“형니-임!”
처절했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김대진이 어쩌지 못하는 감정으로 고룡동을 찾았다.
내부는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투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야쿠자 백여 명을 고작 열 명의 광주 식구들이 틀어막았다.
“이제 그만 보내줘.”
지켜보던 조태완이 나직하게 권유하자 김대진은 평소 고룡동이 좋아하던 소주를 꺼내 블랑카의 구석구석으로 움직여 병을 기울였다.
“형님! 동생이 올리는 술 받으십시오, 형님!”
입구에 선 김대진은 이 자리를 지키려 애썼던 고룡동을 위해 남은 술을 모두 부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코를 훌쩍이는 식구들과 함께 블랑카를 나선 강성태는 그대로 오다 스미야기가 있었던 주택을 향해 걸었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가장 앞에 선 강성태를 따라 고룡동의 영정을 든 유충일, 필리핀 조직원들의 영정을 든 아르윈의 동생들, 이어 신강남파의 식구들이 서열에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야쿠자 2백여 명이 예의를 갖추기 위해 따라붙었다.
새벽 4시라 해도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무라 쿠니오키의 요청을 받은 경찰이 나서 도로를 통제해준 덕분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출발에 앞서 강성태가 의도적인 도발이나 시비를 걸지 말라며 분명하게 지시했고, 더불어 일본의 야쿠자들이 아예 고개를 조아리는 수준이어서 충돌 따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조태완, 박노익, 이교창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강성태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백여 명의 야쿠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관동 연합을 이끄는 네 명의 오야붕들이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고 들었다.
상상이나 되나?
그것만 해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였는데 강성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신강남파 식구들을 전부를 일본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지금처럼 요코하마 창고와 블랑카라는 업장을 방문해 희생된 조직원들을 위로했으며, 마지막으로 요코하마 시내를 걷고 있었다.
자신 있으면 지금이라도 밀고 들어와.
아니면, 얌전히 대가리 처박고 뒤를 따라와.
새벽의 요코하마 골목을 걷는 강성태의 의지는 분명했다.
또 있다.
아무리 교통을 통제한다고 해도 신강남파의 보스 강성태가 조직원들을 이끌고 요코하마 시내를 관통하는 장면을 주변 건물과 멀리서 오가는 사람들은 볼 수밖에 없었다.
요코하마 거리, 영정을 앞에 든 신강남파, 꼬리에 붙어 말없이 따르는 야쿠자, 누가 우위인지를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만한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다 스미야기를 잡았던 저택에 도착한 강성태는 세 칸으로 된 계단 위로 올라섰다.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경계 서는 야쿠자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강성태가 계단 위로 올라서자 신강남파 식구들이 좁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서열에 따라 둥그렇게 모였다.
“가장 먼저 들렀던 창고와 조금 전에 보았던 업장을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 그리고 고룡동과 광주 식구들이 틀어막아 준 덕분에 이전 관동 연합의 대가리 오다 스미야기를 잡았다.”
새벽 시간 요코하마 시내에 내려앉았던 잠과 침묵을 밀쳐낸 강성태의 음성이 신강남파 식구들의 심장에 박혔고, 이어서 자부심으로 피어났다.
“일반인에게 고개 숙이지만, 깡패끼리의 싸움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 우리 구역,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조직도 마약, 고리대금업, 인신매매 따위를 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위해 고룡동과 아르윈의 동생들 세 명이 희생됐다.”
무거운 내용이어서 강성태를 바라보는 신강남파 식구들의 표정과 눈빛이 모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려운 일에도 끝까지 믿고 따라준 두 분 형님과 우리 식구들, 희생된 고룡동과 세 명의 필리핀 조직원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미안하다.”
늘어선 신강남파 식구들을 향해 말을 마친 강성태는 분명한 태도로 상체를 숙였다.
“형님?”
놀란 신강남파 식구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이면서 요코하마 시내에 뜨거운 남자들이 감정이 불처럼 일어났다.
바깥에서 둘러싸고 지켜보던 야쿠자들의 눈에 두려움과 부러움, 질시와 질투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상체를 세운 강성태는 뜨거운 눈으로 둘러선 신강남파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목표는 시에라마드레 산맥에 건설하는 신도시의 밤을 지배하는 일이다.”
강성태의 말을 끝난 다음이었다.
혹여나 보스가 또다시 “앞으로 잘 부탁한다.” 소리와 함께 고개 숙일 것을 염려했는지 불쑥 조태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보스! 최선을 다할 테니 지금처럼 이끌어다오.”
다짐을 내놓은 그가 대놓고 상체를 깊게 숙였고, 이어서 박노익과 식구들이 다시 한번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인사는 요코하마에서의 처절한 싸움을 끝낸 강성태에게 신강남파 식구들이 올리는 감사의 의미처럼 보였다.
**
한국에 도착한 강성태는 아직 이른 시간에 방지병원으로 향했고, 치료 후 병실로 옮겼다.
일본에서 대강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왼쪽 어깨에 권총을 맞았던 아르윈은 수술을 받았고, 키란 역시 상처를 봉합하는 수술 후에 병실에 들어갔다.
“단골 환자가 한동안 안 보이면 반가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되거든요. 차라리 이렇게 내가 치료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다쳐 오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모릅니다.”
병실에 들어온 유헌우가 환자 속을 벅벅 긁어대는 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병렬이랑 먼저 도착한 환자들은요?”
“응급실에 남아 있는 환자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위험한 상황은 넘겼다고 봅니다. 그나마 응급 치료를 한 상태에서 더 시간 끌지 않고 바로 병원에 와준 게 다행입니다.”
상태를 전해준 유헌우가 빤히 강성태를 들여다보았다.
“멕시코에 신도시 건설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잘 돼갑니까?”
“예?”
“마카오에서 그 난리를 벌여놓고 뭘 모르는 척해요?”
뭔가 다른 뜻이 있나 싶어서 강성태는 먼저 유헌우를 들여다보았다.
“서라대학병원 안 선생에게 들으니까 병원도 설립할 계획이라던데, 그게 확실하면 부탁 하나 하려고요.”
“원장님이요?”
강성태의 반문에 유헌우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를 먼저 보여주었다.
“하여간 나중에 뭐 하나 부탁할지 모르니까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무슨 부탁인데 뻔뻔한 거로는 강성태와 이병렬을 동시에 쓰러트릴 수준의 유헌우가 이렇게 뜸을 들일까?
강성태가 눈가를 좁힐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최치곤이 병실에 들어섰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테니까 며칠만이라도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대화를 뚝 자르다시피 정리한 유헌우가 최치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병실을 나섰다.
“좀 어떠냐?”
“다 알면서 뭘 물어봐?”
“그건 그렇지.”
일본에 오지 못했던 서운함을 떨쳐 낸 최치곤이 강성태의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연순동은 어떻게 하고 있어?”
“나야 뭐 객실 앞을 지키기만 한 거라서 잘 모르겠는데 식사 챙길 때 보면 출력해 놓은 거 들여다보면서 심각한 척 오지게 하더라.”
연순동을 떠올린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연백국과 나채상을 두들기는 일이 고스란히 남았고, 필리핀에서 잡아놓았다는 김삼문도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해서였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응?”
“일본에서 돌아온 날 아침이잖아. 오늘 하루만이라도 좀 쉬자. 아침 안 먹었지? 내가 고기라도 좀 구워올까?”
최치곤의 눈을 들여다본 강성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고룡동의 죽음, 위험한 상태로 돌아온 이병렬, 아직 응급실에 있는 광주 식구, 수술받은 아르윈, 그 모든 상황을 모르지 않는 최치곤이 뻔뻔한 얼굴과 음성으로 아침 메뉴를 권하고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운 내야 한다는 말 대신에 말이다.
“갈비 먹을까?”
“소를 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구해올게.”
강성태의 요구를 최치곤이 후련한 미소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