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2부 24권 - 1화
제1장. 와따시 신강남파 고룡동이다.
천으로 만든 보스턴백 형태였다.
코렌은 한쪽 어깨가 축 처질 정도로 무겁게 들고 온 가방을 아르윈 앞에 올려놓았다. 가방의 지퍼를 열자 총기를 닦을 때 사용하는 기름 냄새와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화약 냄새가 아르윈에게 달려들었다.
권총과 탄창, 다이너마이트들을 확인한 아르윈은 로페즈 앞으로 가방을 밀었다.
“이곳에서 타깃 사이트까지 이동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영어로 나온 질문이었다.
편하게 대답하라는 투로 아르윈은 코렌을 향해 눈짓을 던졌다.
“해안선을 따라서 수도고속도로가 있습니다. 그 도로를 이용하면 신나카하라초까지 대략 30분 정도 걸립니다.”
“빠져나가는 루트는 확보했습니까?”
“항구에서 보트가 대기 중입니다. 이후에 어선으로 갈아타고 공해상까지 나갈 겁니다. 부산에서도 이미 어선이 출발했다니까 한국에 들어가는 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확인했던 점들을 막힘없이 답하면서도 코렌은 수시로 아르윈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에서 준비에 부실한 점이 있다거나 아르윈이 좋지 않은 평가를 필리핀 보스에게 전하면 코렌의 시체가 요코하마 바다에 떠오를 거란 사실을 그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로페즈는 후안 리카르도가 볼 수 있도록 복사한 지도를 내놓았다.
“총소리가 울리면 일본의 육상 경찰과 수상 경찰이 동시에 달려올 거라고 하더군. 일본 자위대나 수상 경찰의 훈련이나 작전 수행 능력이 뒤처진다니까 10분 안에만 해결할 수 있으면 성공 확률이 높다.”
로페즈의 설명을 들은 후안 리카르도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아카시 마오가 잡혀 있는 장소, 사진, 그리고 탈출 루트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대화의 끝에서였다.
“로페즈. 이번 일로 얼마를 받기로 했나?”
내내 작전에 집중하던 리카르도가 아카시 마오의 사진을 들고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대령이 미쳐 날뛰더군. 심지어 얼마의 희생이 있든 상관없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알고 있었나? 나와 우리 동료에게는 한 사람당 미화 1만 불을 보장했다.”
오래돼서 시커멓게 보이는 탁자였다.
팔을 걸치고 상체를 가까이 한 리카르도가 얼음이 거의 녹은 유리잔을 들어서 물을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열 명이니까 10만 달러나 되는 큰돈이지. 대령이 10만 달러를 내놓는다는 게 이해가 돼?”
눈 끝과 코끝, 볼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대령을 떠올리며 로페즈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옆에 앉은 후안 리카르도 역시 군인이 보여야 할 사명감보다는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과 혹시 더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성태가 처음 로페즈를 볼 때의 심정이 이랬을까?
지난 몇 달간 한국에서 지내며 잠시 밀쳐두었던 멕시코의 현실이 후안 리카르도의 눈에 담긴 탐욕과 뜨거운 숨결을 타고 불쑥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여자를 데려오라고 불을 토하던데 대령의 수입이 얼마나 되기에 저토록 열성적인 거지?”
로페즈는 입맛만 다셨다. 그리고는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래도 사명감을 품은 필리핀 조직원들이 좀 더 의젓해 보였다.
앞으로 강성태를 따르다 보면 로페즈와 동료들도 저런 여유를 지닐 때가 오리라는 믿음, 지금 그가 지닐 희망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 역시 미스터 강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라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로페즈는 사실과 다른 답을 내놓았다.
대화는 일단 거기까지였다.
두 사람은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며 루트를 확인했다.
로페즈와 후안 리카르도,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아르윈은 새삼 강성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카오에서의 경험 덕분에 필리핀에서의 무기 공급은 완벽했다. 게다가 새벽에 도착했다는 공문의 위력인지 일본에 있는 가디언스파 조직원들 모두 입안의 혀처럼 굴고 있었다.
강성태는 이런 점까지 고려해서 공문을 새벽에 보낸 걸까?
궁금증을 풀지는 못했으나 지금은 남은 일을 챙겨야 할 때였다.
아르윈은 코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보스와 고룡동에게 전할 무기는?”
“대기하고 있습니다.”
답을 한 코렌이 스마트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윈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로페즈가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
커피숍으로 들어온 필리핀 남자는 고룡동을 알아본 듯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특별한 말이 없었다. 고개 숙여 인사한 뒤에 맡았던 가방을 돌려준다는 식으로 고룡동 옆에 내려놓고는 다시 비슷한 인사를 남기고 카페를 나섰다.
일을 마치면 저 필리핀 조직원이 고룡동 일행을 빼내 주는 역할을 맡는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천으로 된 가방을 집어 허벅지에 올린 고룡동은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지퍼를 열었다.
신문지로 날을 감싼 회칼이었다.
날의 두께나 길이, 손잡이까지 마음에 들었다.
가방에서 시선을 든 고룡동은 차가운 눈으로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심하게 지랄을 떨수록 성태 큰형님께서 쉬워지신다. 시원하게 하자. 그리고 이거 기억해. 신강남파는 받은 만큼 돌려준다. 상대가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다.”
마지막에 강성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는 고룡동은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눈가에 광기마저 어른거렸다.
“야쿠자의 도발은 깡패답게 맞받는다. 깡패 뭐 있어? 일직선으로 간다. 목표는 오다 스미야기다. 나는 진짜 성태 큰형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말을 마친 고룡동이 가방의 지퍼를 쭉 잠갔다.
“혹시 화장실 가고 싶은 놈 있으면 지금 다녀와.”
“형님, 혹시 쪼셨습니까?”
“뭐?”
“평소보다 말씀이 많으셔서 그렇습니다, 형님.”
고룡동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덩치가 날 선 눈빛을 받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대꾸를 내놓았다.
“뭐하십니까? 얼른 가시죠?”
“흐흐흐. 이 개새끼.”
한 살 아래 동생이 내놓은 대꾸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룡동이 습관처럼 욕을 뱉었다.
**
청바지에 셔츠, 검은 재킷 차림의 필리핀 조직원이 들어와 강성태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주문을 받았던 어린 직원이 ‘요코하마의 야경을 안내할 가이드인가?’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무기를 가져왔습니다, 보스.”
강성태는 들어선 필리핀 남자에게서 가죽을 여러 겹으로 말아놓은 자루를 받았다.
“쿠크리를 구했어?”
“날을 세우지 않은 제품은 이곳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회칼을 다듬던 기술자가 날을 세워서 원래 사용하시던 물건과는 다를 겁니다. 혹시 몰라서 쿠크리 두 자루와 회칼 세 자루를 넣었습니다.”
“고생했다. 앉아.”
“감사합니다. 보스.”
회칼만 세 자루를 받을 거라고 예상했던 강성태에게는 뜻밖의 준비였다.
솔직히 어느 정도 품질인지는 모른다.
강도가 약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날이 휘청일 테고, 각도와 길이가 다르면 휘두른 만큼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회칼만 지닌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리한 무기였다.
“바깥에 승용차와 모터사이클, 승합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상황을 봐서 차량을 선택하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추적을 따돌리는 데 이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은 가디언스파 조직원들이 야쿠자들의 추적을 받지 않나?”
“위조 번호판인 데다 사용하고 난 차량은 모두 바다에 버릴 겁니다.”
이병렬이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대화였다. 고맙게도 키란이 상체를 기울여 지금 오간 대화를 우리말로 들려주고 있었다.
“다른 쪽은?”
“멕시코 용병이 신나카하라초를 향해 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강성태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미안한데 다른 곳의 상황을 계속 체크해 줄 수 있을까? 내가 나오면 바로 들을 수 있게.”
“필리핀 보스에게서 오늘만 다섯 번이나 연락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보스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모두 따르라는 지시였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필리핀 남자의 태도는 엄청난 VIP 고객을 맞이한 여행사 직원으로 오해하기 충분했다.
‘굉장한 부자였어?’
강성태를 바라보는 어린 여직원의 눈에 두 개의 하트가 둥둥 떠 있었다.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린 여자고, 강성태를 보며 부끄러움을 드러낼 정도로 아직 때 묻지 않은 심성을 지닌 소녀였다.
지금 서 있는 세상에서 지내.
유혹이나 탐욕에 물들지 말고.
나직하게 숨을 내쉰 강성태는 필리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 끝나고 보자.”
강성태의 말을 들은 필리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향하는 커피숍 바깥이 어둑하게 변해서 창을 통해 보이는 가게들이 머리에 이고 있는 간판에 울긋불긋한 불빛을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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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 두 대와 승합차 세 대로 달렸다.
한국과 다르게 왼편으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아르윈은 매섭게 바다를 노려보았다.
신나카하라초의 창고에 갇혀 있는 아카시 마오를 꺼내는 임무였다.
특수부대 출신인 로페즈와 가페 대원들, 세상 무식한 집단인 카르텔 조직원을 보내놓고도 강성태는 비슷한 숫자의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을 함께 보냈다.
“아르윈. 정 어렵다면 아카시의 시체라도 확인해. 그도 아니면 그의 부하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든지.”
동양인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멕시코 군인들과 카르텔 조직원, 거기에 사명감 대신 현금에만 관심이 쏠린 후안 리카르도, 그들을 앞세웠지만, 정작 강성태가 믿는 건 아르윈이라는 의미였다.
“미안하다.”
달랑 두 명만 데리고 관동 연합의 오야붕인 오다 스미야기의 목을 가르러 가는 강성태가 이렇게 많은 숫자를 보내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내놓았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하면서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강성태의 마지막 눈빛과 음성, 표정을 떠올린 아르윈이 볼을 씰룩였다.
근로자 송출에 눈이 뒤집힌 필리핀 보스, 대령의 수입이 궁금한 후안 리카르도, 그리고 자신의 대원에게 무슨 짓을 하든 여자를 구해내라며 불을 뿜었다는 가페의 대령, 온통 욕심에 물든 사람들 속에서 강성태만은 유일하게 조직원들의 안위를 염려했었다.
아르윈과 함께 움직이는 필리핀 조직원들 역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힘겨운 임무를 맡기며 안쓰러워하는 강성태의 심정을 말이다.
“저기 보이는 창고입니다.”
조수석에 앉은 코렌이 손을 뻗어 가리키는 창고를 향해 아르윈은 시선을 돌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왼편에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선 창고였다.
어둠을 품어 짙어진 바다에 요코하마의 마천루가 뿜어내는 빛살이 오색찬란하게 박혀 빛나고 있었다.
‘죽었다면 그 여자의 목을 잘라서라도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창고를 보며 아르윈은 옅은 미소를 그렸다.
독한 각오가 한계까지 오르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더니 창고를 지키고 있을 야쿠자들이 같잖게 느껴졌다.
‘키란. 미안한데 보스 꼭 지켜드려. 정 안 되면 우리는 지옥에서 보자.’
아르윈이 키란을 떠올렸을 때였다.
깜빡이를 켠 승용차가 왼편으로 빠지는 도로를 타고 방향을 틀었다.
**
고룡동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광주 식구들이 뒤따라 줄줄이 몸을 세웠다.
“야쿠자 놈들이 보면 위아래 없다고 욕합니다, 형님. 제가 들겠습니다.”
고개를 돌렸던 고룡동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방을 한 살 아래 덩치에게 넘겼다.
정면 코너에 있는 건물이었다.
기역 자로 꺾인 건물 중앙에 요염한 여자들이 눈웃음치는 간판이 조명을 받아 빛나고 그 바로 아래에 ‘BLANCA’라는 네온사인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좌우를 살피며 도로를 건넌 고룡동은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없어 보였다.
대신 요코하마 조직의 근거지라는 말을 증명하듯 중앙과 벽을 따라 놓인 소파에 인상 더러운 야쿠자들이 그득하게 앉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오마에 난다요?”
각오는 했다. 진짜 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본 것과 달리 신월동 나이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은 홀에 70명은 확실히 넘는 숫자의 야쿠자들이 ‘저것들은 뭐야?’ 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성태가 함께였다면 이백 명이라고 해도 웃었을 텐데, 고룡동과 광주 덩치, 모두 열 명이 감당하기에는 솔직히 좀 많은 숫자였다.
“씨발. 깡패 뭐 있어?”
욕을 뱉은 고룡동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동생이 지퍼를 연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이! 난닷테?”
거만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던 야쿠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룡동을 바라보았다.
“와따시 신강남파 고룡동이다. 지금부터 여기 있는 새끼들은 모두 뒈져 데쓰.”
회칼을 오른손에 든 고룡동이 왼손으로 신문지를 벗겨내는데 눈빛이 정말이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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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가 이병렬, 키란과 함께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다 같이 커피숍을 나섰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커피숍, 커피 향, 부끄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린 여직원, 지금껏 있었던 밝은 세상에서 나와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다.
하얀색, 분홍색, 주황색의 간판들이 뜨문뜨문 길을 밝혔고, 남은 불빛들이 거리 옆에 흐르는 개천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계단 세 개 위로 있는 나무 대문이 앞에 있을 때 강성태는 가게와 가게 사이로 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죽 자루를 풀어낸 강성태는 키란에게 쿠크리와 회칼을, 이병렬에게는 회칼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마지막 남은 회칼 한 자루를 허리 뒤에 꽂은 강성태는 쿠크리의 칼집을 뽑아 왼쪽 팔뚝에 대고 가죽 자루로 감았다.
강성태가 조용하게 지켜보는 앞이었다.
특유의 기도를 올리느라 잠시 눈을 감았던 키란이 완전히 달라진 눈빛으로 강성태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