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2부 23권 - 19화
광주 덩치들이 데려온 로페즈가 대원 두 명과 함께 적응되지 않는 얼굴로 나이트에 들어섰고, 10분 뒤에는 아르윈이 키란, 필리핀 조직원들과 신월동 나이트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오전 9시 50분에 조태완과 박노익이 김석문, 문기주를 이끌고 홀에 들어서면서 약속했던 인원이 모두 모였다.
소파와 테이블을 한쪽으로 치워놓은 홀은 광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접이식 의자를 줄에 맞춰 놓아서 조태완과 박노익, 이병렬의 순서로 줄줄이 앉았는데 인상들이 워낙 강해서 적당히 밝혀놓은 조명이 오히려 강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굳이 무대에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강성태는 무대 바로 앞에 서서 앉아 있는 사십여 명을 돌아보았다.
“일본에 가기 전에 먼저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어서 강성태는 로페즈의 현재 상황과 그의 의지를 앉아 있는 이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런 뒤에 로페즈를 앞으로 불러냈다.
마카오에 함께 갔었던 신강남파 식구들은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앞으로 나선 그는 먼저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그리고 어젯밤에 보았던 덩치들의 동작을 따라 한 모양인데 젓가락을 처음 잡는 외국인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군인입니다.”
그의 영어를 강성태가 우리말로 바꾸어 들려주었다.
“멕시코는 카르텔의 세상입니다. 군대가 나서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 숫자, 무기를 갖췄습니다. 심지어 나의 가족조차 카르텔의 위협에 떨고 있습니다.”
긴장하지 않은 표정으로 강성태의 통역을 기다렸던 로페즈가 말을 이었다.
“보스가 만들려는 새로운 도시에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동료들과 함께 희망과 미래가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세한 규칙은 모르지만, 보스의 지시만 따르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강성태가 그의 말을 전달해 준 다음이었다.
홀을 밝힌 조명 아래에서 로페즈가 다시금 상체를 숙였다.
그는 분명 울컥한 느낌이었다.
일반인들에게 기분 풀이 삼아 총질하고, 불구덩이에 던지는 세상, 카르텔에 반대하는 정치인의 시체가 목이 잘린 채 발견되는 멕시코에서 벗어나 규율과 질서가 잡힌 한국의 모습을 접하면서 올라온 부러움, 아쉬움, 안타까움 등이 그의 감정을 자극한 것으로 보였다.
“보스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로페즈의 표정과 눈빛을 확인한 조태완이 묵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멕시코 현지 조직이 있으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카르텔의 유혹에 흔들리는 군인들만 받아들여도 숫자는 충분할 테고, 어느 정도 규율도 있어서 관리하기도 편할 겁니다. 다만.”
강성태는 숨을 고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카르텔과 가페는 이미 한몸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가족들이 신도시에서 지낸다고 해도 분명 카르텔과 내통하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보스가 버튼을 누르면 조직원들이야 따르는 거지. 무슨 의견이 필요해? 보스가 결정해. 받아들일 거야, 아니야?”
로페즈를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조태완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또 그런다. 보스가 결정하는 거라니까. 받을 거야? 아니야?”
“받아들이겠습니다.”
강성태의 답을 들은 조태완이 가장 앞줄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박노익과 이병렬이 일어났고, 이어서 줄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태완은 앞으로 나와 로페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태완이다. 반갑다.”
강성태가 눈짓을 던지자 로페즈가 조태완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짝. 짝. 짝. 짝. 짝.
이병렬을 시작으로 박수를 치는 가운데 로페즈를 받아들이는 결정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멕시코에 신강남파 지부를 만드는 일이 결정됐다.
“아르윈. 조직원 한 명을 정해서 통역을 담당할 수 있게 로페즈에게 붙여줘.”
“예, 형님.”
로페즈를 들여보낸 뒤에 강성태는 삼합회와 야쿠자, 연백국, 나채상, 그리고 연순동까지의 일을 줄줄이 설명했고,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들려주었다.
“최치곤.”
설명의 끝에서 강성태는 이병렬의 바로 뒤에 앉아 있는 최치곤을 불렀다.
“예, 형님.”
이런 장소에서도 인상 하나는 절대 밀리지 않는 최치곤이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순동을 잃거나 그가 죽으면 그 덤터기를 우리가 모두 뒤집어써야 해. 지금 지키고 있는 충일이와 교대해서 그를 지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다. 연백국이 또다시 칼잡이를 보낼지도 몰라.”
“감사합니다.”
일본에 가지 못하는 최치곤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나자 그나마 서운함이 가신 얼굴로 다부지게 답을 내놓았다.
“우리는 먼저 아르윈이 멕시코에서 오는 가페와 카르텔 조직원들과 합류해야 하고.”
아르윈과 로페즈를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시선을 돌렸다.
“고룡동. 네가 광주 식구들과 요코하마를 뒤집어서 시선을 끌어줘야 해.”
고룡동이 볼을 씰룩했는데 그런 그를 이병렬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 뒤에 오다 스미야기를 잡으러 들어간다.”
“오다 스미야기? 관동 연합의 오야붕 오다 스미야기 맞아?”
강성태의 설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명처럼 들리는 조태완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가 연백국의 일본 측 파트너입니다.”
매번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지친다는 듯 조태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에 양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오다 스미야기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아는 눈치였다.
묵직한 침묵이 홀을 짓누를 때 조태완이 고개를 들었다.
“초창기에 광룡부터 삼합회, 조강치 형님, 차웅진 회장, 마카오 회의, 보스는 어떤 상대를 만나도 주저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아직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꼬마 생활할 때 우러러봤었던 사람들이라 더 그런 거 같다.”
숨을 길게 내쉰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역에서 물러난 상태여서 단단함은 많이 사라졌으나 조직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조태완이 지닌 무게감은 여전했다.
“10년만 젊었다면 목숨 걸고 오다 스미야기를 잡겠다며 뒤따랐을 텐데 출발을 앞둔 보스와 동생들 앞에서 놀란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럽다.”
놀란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오히려 일본으로 향하는 신강남파 식구들의 사기를 꺾어버린 듯한 반응으로 보일까 염려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적당한 선에서 정리하려고 했었습니다.”
강성태는 내려앉은 표정의 조태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곱창집에서 형님 옆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이 진짜 칼잡이들이었습니다. 신강남파를 지탱해주는 태완 형님을 노렸습니다. 깡패 뭐 있습니까? 우리가 당했던 만큼 돌려줘야지요. 그래서 목표로 결정한 인물이 관동 연합의 대장 오다 스미야기입니다.”
곱창집에서의 일이 떠올랐는지 조태완의 눈매와 표정이 슬며시 바뀌었다. 노린 건 아니지만, 함께 듣고 있던 신강남파 식구들의 눈에도 독기가 진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럼 세부 계획을 알려줄 테니까 이병렬, 고룡동, 아르윈은 특히 주의해서 들어.”
강성태는 일본에 도착해서 해내야 할 일들을 풀어냈다.
15분쯤 지나 설명이 끝났을 때였다.
조태완은 물론이고, 박노익마저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뒤에 박노익이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설명을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병렬부터 고룡동까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일본에서의 싸움을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가지 못하는 최치곤과 김진용, 김석문, 문기주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강성태는 잠시 틈을 준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무식한 방법인 건 안다. 하지만, 야쿠자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다. 그래놓고 삼합회 칼잡이를 앞세워서 한 발 빠졌고, 부산에 들어와서 교창이와 부산 식구들을 자극했다. 칼잡이로 협박한 뒤쪽에 숨어서 공권력에 우리를 넘기겠다는 야비한 방법이었다.”
강성태는 앉아 있는 신강남파 식구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신강남파는 받은 만큼 돌려준다. 부산 조강치, 차웅진, 삼합회, 상대가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다. 우리는 어차피 어둠에서 살아가는 깡패다. 같은 어둠에서 살아가는 야쿠자의 도발은 깡패답게 맞받는다. 깡패 뭐 있어? 일직선으로 간다. 목표는 오다 스미야기다.”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이병렬이 입가를 늘이며 웃었다.
고룡동은 주먹을 쥐고 있었고, 자리에 앉은 다른 식구들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피가 끓어오른 모양이었다.
볼을 씰룩인 박노익이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
치과에 다녀온 연순동은 유충일이 준비해 준 죽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연순동을 지켜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넓은 스위트룸 객실에 그는 혼자였다. 심지어 죽을 가져다준 유충일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는 바로 객실을 나섰다.
검찰청에 전화 한 통이면 수사관들과 경찰 수십 명쯤 부를 수 있는 부장검사 연순동인데 말이다.
‘지켜는 준다. 하지만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해.’
강성태의 의도는 분명했다.
고강준이 막아설 테니 강성태를 폭력으로 엮기는 어렵겠지만, 호텔을 나서거나 연백국 나채상과 연락하는 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연순동은 스위트룸 벽에 붙은 책상에서 고개를 돌려 옆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검붉은 피멍이 이마는 물론이고, 턱을 지나 목덜미까지 내려왔고, 왼쪽 뺨은 평소 두 배쯤 부풀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사를 이렇게 두들겨 패는 깡패라니.
더 환장할 일은 강성태의 말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둥그런 플라스틱 죽 그릇에 처량하게 꽂힌 일회용 숟가락을 보며 연순동은 느닷없이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먹다 남은 죽이 마치 자신의 현재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죽을 바라보며 연순동이 슬픈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지이잉.
그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자네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지 모르겠군. 연락 주게.]
아침까지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긴 게 분명한 나채상의 문자였다.
“실망스러운 모습?”
문자를 읽은 연순동은 기가 막힌 심정에 헛바람이 쏟아내는 것처럼 웃었다.
검사되고, 부장 달면서 제법 성공했다고 여겼다.
최정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류사회에 속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달랐던 모양이었다.
사학재단 이사장인 장인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마누라는 그를 처가 덕에 살아가는 개 정도로 여겼다.
지금도 그렇다.
역시나 사학재단 손에 쥐고, 사업체에 연백국이라는 재단 만들어서 권력자들과 알고 지낸다는 이유로 나채상은 부장검사에게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쉽게 던지고 있었다.
‘이 개새끼.’
죽을 자리에 밀어 넣은 것도 분한데 사람을 종 취급해?
숨을 길게 내쉰 연순동은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린 뒤였다.
- 강선영입니다. 부장님.
기다리던 답이 있었다.
“내가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오늘부터 병가로 처리해 놔.”
- 예?
“내가 못 나갈 거 같으니까 이번 주 병가 처리해 놓으라고.”
- 알겠습니다.
“너 요즘 무슨 사건 맡고 있어?”
- 특별한 건 없습니다.
눈알을 굴려 창을 보았던 연순동은 마음을 굳힌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강성태 알지? 그 인간하고 함께 움직이는 일이니까 다른 곳에 말하지 말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자료 좀 모아.”
- 예?
“자꾸 두 번 말하게 할래? 강성태하고 함께 움직이는 거라고. 그러니까 계장들도 모르게 조용히 움직여. 밖으로 알려지면 너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왜 병가 처리하는지 모르겠어? 조용한 곳으로 가서 메모 준비해.”
- 잠시만요, 부장님.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 부장님. 제가 부장님 병가를 처리하면 어차피 다들 알게 됩니다.
“그건 알아서 해! 알아서! 내가 그거까지 일일이 떠먹여 줘야 하냐? 왜 기저귀도 갈아줘?”
- 아닙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어진 통화에서 연순동은 원하는 자료를 차례대로 불러주었다.
연백국과 나채상의 이름이 건너간 뒤로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챈 모양인지 내용을 확인하는 강선영의 음성이 확실하게 달라졌다.
“내용 보면 알겠지? 밖으로 알려지면 너는 자살이나 추락,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알지? 압수수색 할 자료가 모일 때까지는 절대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해.”
- 예, 부장님.
“끝나면 문자 하지 말고 전화로 연락해. 이왕이면 검찰청이나 지금 전화 말고 다른 번호로 하는 게 좋아. 나랑 통화한 건 그냥 병가 처리하라는 지시만 받은 거로 하고.”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연순동은 통화 종료버튼을 확실하게 누른 다음에 스마트폰을 툭 책상 위로 던졌다.
“사람이 집에 안 들어갔는데 전화 한 통 없어?”
불쑥 이학의와 안사람을 떠올린 연순동이 갑갑한 얼굴로 창을 바라보았다.
이제 믿을 건 진짜 강성태 한 명밖에 없었다.
**
회의를 끝낸 강성태는 조태완과 박노익, 그 외에 김진용, 최치곤과 인사를 나누고 공항으로 향했다.
조봉진이 운전하는 승용차 뒷자리에 이병렬과 함께 앉았다.
올림픽 도로에 들어섰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나야, 강선영.
강선영이 확인하고자 하는 내용은 간단했다.
“연순동 말이 맞아. 그 사건 조사한다는 내용이 알려지면 너도 위험해. 자신 없으면 하는 척만 하고 있어. 이틀 정도면 돼.”
- 됐어. 진짜 너하고 관련돼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전화했던 거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강선영은 당찬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이병렬은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우리야 보스 말대로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라고 치면 되는데, 빛의 세상에서도 우러러볼 자리에 있는 인간들이 왜 어둠에 있는 우리보다 더 더러운 모습인 거지?”
알고 지내면 든든한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고강준, 소신영, 그 뒤로는 차웅진과 나채상의 속을 들여다보며 느낀 점이 많은 모양이었다.
“더럽든, 추악하든, 더 쥐겠다는 탐욕이 그렇게 만드는 거지. 강직한 검사, 정치인, 경찰, 판사만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굳이 마약과 고리대금업을 막겠다고 피 흘릴 이유가 없어. 삼합회나 야쿠자가 우리 땅을 넘볼 수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쥐고도 뭐가 그렇게 욕심날까?”
뭔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혼잣말을 뱉어낸 이병렬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다 스미야기, 이 씨발 새끼.”
느닷없이 이병렬이 욕을 뱉었다.
이유는 모르는데, 욕을 뱉은 이병렬의 감정은 이해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