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2부 23권 - 18화
제7장. 받은 만큼 돌려준다.
서울에 돌아온 아르윈은 강성태에게 보고한 뒤에 프리 스테이션에서 쪽잠을 자다시피 하고서 깨어났다.
신월동 나이트로 10시까지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집에 가서 자도 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된 아르윈은 언제 튀어 나갈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프리 스테이션을 선택했다.
오전 7시 50분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먼저 시간을 확인했고, 이어서 조용하게 주방으로 움직였다.
“어? 언제 일어났어?”
놀랍게도 주방에는 말끔하게 세수까지 마친 키란이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보면 볼수록 키란은 미운 구석이 없었다. 반대로 저런 남자가 적이라면 참 징그럽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좀 더 잘 수 있도록 아르윈은 주방의 한쪽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키란과 함께 마주 앉았다.
커피를 즐긴다고 해도 씻고 간단하게 요기한 뒤에 나이트로 향하는데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아르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났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이 시간에?
한국이 오전 7시 50분이니 마닐라는 오전 6시 50분이었다.
“아르윈입니다, 보스”
- 알고 있었나?
필리핀 가디언스파의 보스는 50억 원의 돈을 받았을 때보다도 확실히 한 톤 더 흥분한 음성이었다.
- 한국에서 협조공문이 왔다! 우리가 만든 회사뿐만 아니라 정부에도 멕시코에 파견하는 근로자의 여권 발급 등 관련 업무에 협조를 바란다는 공문이 도착했단 말이다!
아르윈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이미 마닐라의 아침 보도에 나왔어! 잘했다! 훌륭해!
“아마 서울의 보스께서 지시한 내용인가 봅니다. 어제 저는 보스의 지시를 받아서 지방에 다녀오느라 그 소식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 한국의 보스 지시를 받아서 움직였다고? 그래서 보스께서 만족하실 결과가 나왔나?
“안심하셔도 됩니다.”
- 그래야지! 그래 줘야지!
아르윈은 힐끔 키란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키란의 활약이 있기에 망정이지, 자칫 야쿠자에게 깨지고 돌아왔다면 필리핀 보스는 당장 히트맨들과 권총, 저격용 총을 보내겠다고 악을 썼을 게 분명했다.
- 아! 한국의 보스는 언제 뵙게 되지?
만족한 반응 끝에서 필리핀 보스가 던진 질문이 아르윈의 생각을 뚝 잘랐다.
“이곳 시각으로 오전 10시에 뵙기로 했습니다.”
-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보스.”
키란은 영어를 알아듣는다. 그가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아르윈의 통화를 들었는지 홀에서 자고 있던 조직원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렇게 한결같은 보스를 나는 처음 봤다. 근로자 송출 건만 해도 그래. 수수료 수익이 얼마인지 너도 잘 알 거다. 리베이트 요구조차 없었다.
강성태에 대한 좋은 이야기라 아르윈은 뿌듯한 심정으로 필리핀 보스의 감탄을 받아들였다.
- 아르윈. 이번 송출 사업을 쥐는 조건으로 내가 물러날 테니까 앞으로 가디언스파를 네가 관리해.
“보스?”
그러나 이어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통보에 아르윈은 황당한 심정으로 필리핀 보스를 불렀다.
- 우리 인력을 계속 보낼 수 있으려면 네가 가디언스파 보스가 돼서 한국의 보스를 모시는 게 좋아.
어쩌면 앞으로 추가되는 공사에 필리핀 근로자들을 더 보내겠다는 날카로운 계산에서 나온 결정일 수 있겠다. 적어도 아르윈이 가디언스파를 이끈다면 강성태가 필리핀 근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계산 말이다.
“당분간 제가 한국에 있어야 하고, 멕시코 현장에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문제는 나중에 한국의 보스와 의논하겠습니다.”
- 그래?
아르윈이 내놓은 대꾸가 흡족한 모양이었다. 필리핀 보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하기는, 소원하던 근로자 송출 공문을 받아서 흥분한 상태로 던진 제안을 아르윈이 넙죽 “그렇게 하겠습니다.” 했다면, 오히려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 아무튼, 한국의 보스가 필요하신 게 있다면 뭐든 말해. 네가 가디언스파를 이끈다는 심정과 자세로 한국의 보스를 모시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고생했다, 아르윈.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히죽 웃었다.
“무슨 일입니까?”
“필리핀에 근로자 송출을 요청하는 공문이 도착한 모양이다.”
“좋은 일입니까?”
순박한 키란의 눈을 보며 아르윈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안다미를 보낸 강성태는 새벽에 호텔에서 가져왔던 샌드위치와 커피를 앞에 두었다.
일본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이었고, 요구했던 자료들이 많아서 거의 10분이나 15분 간격으로 바르지오에게서 문자가 날아들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강성태는 바르지오가 보내준 자료를 검토했고, 이어서 그것들을 토대로 계획을 좀 더 치밀하게 세우는 데 집중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커피를 마신 강성태는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에 시선을 돌렸다.
액정에 올라온 이름을 보며 웃음 짓는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여보세요?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야?”
- 통화 괜찮아?
“무슨 일인데 목소리가 그래? 아침부터 이모한테 맞았어?”
- 내가 애냐?
툴툴대는 김민재의 음성은 변함없는데 그 안에는 확실히 감추지 못하는 걱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 저기, 아버지랑 엄마는 절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다음번에 자동차 안 사줘도 되니까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그래? 그냥 시원하게 말해.”
- 아버지 공장 있잖아. 거기 자재 납품하는 분이 할인 조건으로 1년 치 선금을 받아 갔는데 돈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도망간 모양이야.
느닷없는 김민재의 설명을 들으며 강성태는 이모부 김진규의 얼굴을 떠올렸다.
- 아버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근처 공장들하고, 지방에 있는 공장들 여러 곳도 당했나 봐. 당장 이번 달에 문 닫아야 하는 곳도 있고, 주택 담보나 친척들에게 빌려서 큰돈을 건네준 분들은 오히려 빚에 시달려서 죽게 생겼대.
사정은 들었다. 충분히 이해했고.
평생을 작은 공장을 운영하며 정직하게 살아온 양반에게는 참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분노는 나중이고 당장 이모부 김진규를 살리고 봐야 할 때였다.
“뭘 어떻게 도와줘?”
- 일단 나랑 민정이가 적금 깨기로 했고, 엄마가 모아놓은 것도 있고 하니까 모자란 것만 조금 도와줘. 나랑 민정이가 모으면 1년이면 갚을 수 있어.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돈을 깡그리 긁어간 인간 하나 때문에 김민재와 김민정의 결혼이 한참 뒤로 밀리게 생겼고,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모았을 이모 장숙경의 여유마저 한순간에 사라지게 됐다.
“아파트는 괜찮아?”
- 말도 마. 하늘이 쪼개져도 그건 손댈 수 없다고 하셔서 애초에 대출도 받지 않았고, 아침에도 공장문을 닫으면 닫았지, 아파트로 뭔가 할 생각하지 말라고 딱 자르시더라.
“그럼 너랑 민정이가 대출받겠네?”
- 뭐?
강성태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진 직후에 예상대로 당황하는 김민재의 반응이 나왔다.
“민재야. 너랑 방을 함께 쓴 게 몇 년인지 알지? 네 말투만 들어도 진짜인지, 아닌지 다 알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대출받지 않으려면 얼마가 필요해?”
평소 뻔뻔하던 김민재가, 이 아침에 어렵게 전화까지 한 그가 차마 금액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다음번에 멕시코 다녀올 때도 너는 열쇠고리야. 그러니까 일단 금액부터 말해.”
- 1억3천만 원.
“통장 번호가 네 스마트폰 전화번호 맞지?”
- 미안해. 무슨 일이 있어도 민정이랑 둘이서 2년 안에….
“나쁜 새끼.”
강성태의 욕이 뜻밖이었는지 김민재의 뒷말이 뚝 잘렸다.
“나더러 왜 매번 양보만 하냐며? 우리 다 한 식구라며? 그래놓고 이런 일에는 민정이랑 너만 한 식구냐? 너는 두고 봐. 열쇠고리도 공항 면세점이 아니라 어디 시장판에서 가장 싼 거로 사 줄 거니까.”
강성태의 넉살이 어떤 의미인지 김민재가 모를 리 없었다.
- 알았어. 그럼 우리 셋이서 똑같이 나눠서 나랑 민정이 몫을 갚을게. 대신 지난번에 나 팔아먹은 거 이번에 정식으로 용서해 줄게.
“그래! 그래야 김민재지. 그나저나 돈은 보낼 건데 이모부하고 이모, 민정이한테는 다른 곳에서 구했다고 할 방법이 있냐?”
- 퇴근 전까지 적당한 핑계 만들어볼게. 회사에서 직원 대출로 도와주겠다는 동료가 있다고 하거나.
걱정을 반쯤 덜어낸, 그러나 미안함이 그만큼 커진 음성으로 김민재가 답을 내놓았다.
김민재와 김민정에게 부담을 지울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정도에서 그의 뜻을 받아주는 게 좋았다.
“알아서 해. 그리고 돈 먹고 필리핀으로 갔다는 양반 이름하고 나이 알 수 있을까? 주민등록번호나 전화번호 알면 더 좋은데.”
- 이름이야 알지. 김삼문 사장님이라고 62년생.
이모부 김진규를 통해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 그런지 김민재는 돈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아직도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런 착한 사람들 돈을 그런 식으로 가져가서 행복할까?
“됐다. 입금할 테니까 알아서 일단 해결해. 그리고 나 이틀 정도 연락 안 될지 몰라. 일본에 다녀오거든.”
- 고마워.
“힘 빠진 목소리 할 거면 끊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OTP를 가져와 김민재의 통장으로 말했던 금액을 보내주었다.
필리핀으로 도주하셨다는 거지?
선량한 사람들 돈을 잔뜩 긁어서?
이건 도대체 따귀를 몇 대나 때려줘야 하는 거야?
입맛을 다신 강성태는 시간을 확인한 뒤에 자료에 고개를 숙였다.
아르윈에게 전화할까 했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라는 생각에 당장 번호를 누르지는 않았다.
강성태는 심오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샌드위치에 물려 있던 참이었다. 새벽까지 병원 앞을 지키던 최치곤과 신월동 숙소 덩치들, 안다미를 위해 준비했다가 남는 바람에 내놓은 참이었고.
좌절하고 있을 이모부 김진규를 떠올리자 입맛도 뚝 떨어졌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좌절했어? 이럴 땐 내가 있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몸을 떤 스마트폰이 액정에 이병렬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여보세요?”
- 아침 안 먹었지? 먹었어도 그냥 육개장 한 그릇 더하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건 현금일지 몰라도, 추악한 인간에게 실망한 감정을 달래는 것만큼은 가족이나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듯한 전화였다.
“나이트로 가면 돼?”
- 보스가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빌라 주차장이니까 준비되면 내려와. 잊지 말고 여권 챙겨서 내려와.
아래에 와 있다고?
거실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5분만 기다려.”
가뜩이나 샌드위치가 지겹던 상황에 날아든 육개장이라는 유혹이 강성태의 기분을 바꿔주는 느낌이었다.
간단하게 식탁을 정리한 강성태는 여권과 스마트폰, 등에 메는 가방에 노트북을 담아서 빌라를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김진용과 조봉진이 듬직하게 상체를 숙였고, 그 옆에서 이병렬이 고개를 숙였다.
“뭐하는 거야?”
“넘버 투가 보스에게 하는 인사.”
능글맞은 답을 내놓은 이병렬이 강성태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괜히 이곳에서 떠들어봐야 좋을 게 없어서 강성태는 서둘러 뒷자리에 올랐다.
이병렬, 김진용, 조봉진이 차에 올랐고, 곧바로 빌라 골목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에 강남 소국이 통해서 병원 섭외했거든. 충일이가 동생과 함께 부장검사 데리고 출발했어.”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지병원에 보낼까도 고민했었는데 연순동이 마음을 바꾼 뒤에 유헌우를 조사하거나 귀찮게 굴지 않을까를 염려해서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고 했었다.
“고룡동이가 새벽에 돌아왔는데 칼잡이 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더라고. 그것들은 죽게 생기면 우는 게 버릇인가 나중에 살려달라며 울고불고했다던데?”
“어떻게 했는데?”
“몰라.”
강성태의 질문을 이병렬이 뚝 잘랐다.
더는 묻지 말고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일본에 갈 동생들은 전부 나이트에 있어. 아침 일찍 몰려 있길래 홀에서 아침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나이트에 들어와 있으라고 했고. 괜히 바깥에 서성대는 거 보기 그렇잖아.”
강성태가 계획을 점검하는 사이, 이병렬 나름으로 바쁘게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10시에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도 오시겠다던데.”
이병렬의 말이 떨어졌을 때 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나이트 주차장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늘 느끼지만, 아침에 보는 강남의 클럽이 거만한 느낌이라면, 밝은 세상에서 보는 신월동 나이트는 원래 자리로 돌아온 거지 왕자처럼 어쩐지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이었다.
불 꺼진 아치형 네온사인을 머리에 올리고 버티는 기둥 두 개가 지난밤의 화려함을 잊은 채 잠들어 있었고, 그 앞으로 입구를 지키는 덩치 다섯이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건들거렸을 덩치들이 지금은 양손을 앞으로 잡은 채 마치 경호원처럼 보이는 단정한 자세로 강성태 일행이 탄 승용차를 맞았다.
조봉진이 차를 세우자 덩치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고개를 끄덕여 답해준 강성태는 반대편에서 내린 이병렬, 조수석에서 내린 김진용과 함께 나이트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긴 하루, 그만큼 길었던 밤을 보내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야쿠자 본진을 털기 위해 일본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이 싸움을 통해 야쿠자들을 멕시코로 끌어들이고, 여차하면 삼합회까지 엮을 생각이었다.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연백국 나채상이 드러났고, 신강남파 멕시코 지부가 생겼다. 이모부와 선량한 사람들의 돈을 긁어서 도망간 군것질 수준의 파렴치한 사기꾼도 있고.
빛에서 사는 괴물들, 그들을 어둠으로 붙잡아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