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3권 - 17화 (470/513)

《470》2부 23권 - 17화

야쿠자들과 삼합회 칼잡이들의 등장 배경이 설명되면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씻긴 뒤에 옷을 갈아입혀 데리고 나온 연순동은 프로 복싱 대회에서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건 선수처럼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리 앉아.”

검사도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연순동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외모는 복싱 챔피언인데 동작은 폭력 조직의 두목에게 딸과 결혼하겠다며 찾아온 백수처럼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왜 나채상이라는 인간한테 전화할 때 삼합회 칼잡이가 놔둔 핸드폰을 쓴 거지?”

“그 핸드폰을 사용하는 거로 제가 호텔에 직접 도착해 영상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유충일에게 얼굴을 짓밟힌 탓에 발음이 어눌하고, 말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연순동은 바로바로 답을 내놓았다.

“네가 연락 안 했으니까 그쪽에서 기다릴 거 아냐? 그런데 여태 전화가 없었어. 그건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연순동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됐지만, 이대로 보내면 연순동은 교통사고, 엉뚱한 장소에서 추락, 혹은 자살 추정이라는 사유로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

“영상 봤지?”

“봤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여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냐?”

대답 대신 연순동이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었다.

“입을 찢어줄까?”

유충일의 나직한 쇳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연순동의 고개가 홱 올라왔다.

“전문적으로 배운 여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성태는 서둘러 답을 내놓는 연순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웅진이 당한 뒤부터 연백국은 강성태를 타깃으로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은 곤잘레스 이두안, 강명그룹과 지경그룹, JBC 방송국의 힘을 어쩌지 못해 벼르던 참이었을 텐데, 마침 그 순간에 야쿠자와 삼합회가 도움을 청했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연순동. 너는 이제 죽어.”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아니라 연백국에서 널 죽일 거라고. 자살로 처리하든, 추락해서 죽든, 교통사고든, 연백국에서 널 살려둘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나한테 불었다고 확신할 테니까.”

“이런 모습을 나채상 이사장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살겠다는 집념이 강해진 만큼 머리 회전은 멈춘 모양으로 연순동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항변을 내놓았다.

“네가 칼리안에서 강남으로 온 거 정도는 얼마든지 확인하겠지. 그런 뒤에 나를 만난 것도 알게 될 테고. 그런데 또 영상을 내놓지도 않아. 그쪽에도 검찰청에 아는 인간들이 있을 테니 네가 뭘 수사하는지도 확인될 테고. 그런데도 너를 살려둘까?”

거대한 권력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연순동이었다. 폭력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들 역시 잔인한 면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강성태의 설명을 들은 그의 눈이 삽시간에 공포에 물들었다.

“가서 나한테 맞았고, 그 바람에 영상을 빼앗겼다고 해도 죽어. 연백국의 나채상이 정체가 드러났다고 여길 테니까. 어쩌면 차라리 너를 죽여서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할지 모르지.”

“그럼 나를 지켜줘야 하지 않습니까?”

강성태는 대놓고 고개를 저었다.

“나나 연백국 쪽이나 네가 죽는 게 서로 가장 편한 결과인데 내가 그럴 이유가 있어? 너를 지킨다고? 어떻게? 부장검사가 깡패들을 주르륵 달고 다닐래?”

두껍게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에서 연순동의 눈알이 서럽게 흔들렸다.

“실제로 지키기도 쉽지 않아. 영상을 봤으니 알겠지만, 삼합회가 보낸 칼잡이들과 마주치면 너는 손짓 한 번에 그냥 죽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너는 그 여자들의 손짓 한 번도 못 막아.”

용병 생활, 경호원, 심지어 신강남파를 이루는 동안, 숱하게 독한 인간들을 만나봤지만, 삶을 이토록 갈구하는 눈빛을 강성태는 처음 보았다.

“정말 그렇게까지 살고 싶어?”

“예.”

숨도 쉬지 않고 나온 연순동의 답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간절한 눈빛으로 그가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아, 이 불쌍한 인간아.

강성태는 심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이런 인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 위험이 강성태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모두 퍼지기 때문이었다.

“정말 살고 싶어?”

입으로 하는 대신 간절한 표정과 눈빛으로 연순동이 고개를 들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 너는 연백국을 깨부숴야 하는데 그게 진짜 되겠어?”

“아까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 생각해. 고강준, 소신영, 이우섭, 강명그룹하고 지경그룹, 그리고 여기 멕시코 대원까지 모두 나서야 하는 싸움이다. 네가 중간에 흔들리거나 마음 바꾸면 당장 고강준이 너를 죽이겠다고 달려들게 돼.”

“수사만 제 마음껏 하게 해주십시오.”

고강준의 이름을 들은 연순동이 느닷없이 투지를 불살랐다. 아무리 권력을 쥔 연백국이라 하더라도 고강준이 지켜준다면 붙어볼 만하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이런 각오와 실력을 갖춘 인간이 장인인 이학의의 성폭행을 덮고, 고강준이 지시하는 온갖 더러운 행동에 앞장서 왔으니, 당하고도 말할 곳 없어서 피눈물을 삼켜야 했을 피해자들의 울분이 얼마나 컸을까.

당장 따귀를 열 대쯤 더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강성태는 지그시 눌렀다.

빛의 세상에서 웅크린 괴물 나채상은 차웅진과 달리 야쿠자를 데리고 있지도 않았고, 겉모습은 자선활동과 교수, 정치가를 후원하는 선량한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런 인간에게 어설프게 칼을 들고 달려드는 건, 올가미에 스스로 목을 걸어주는 꼴, 그 자체였다.

나채상에게 가장 훌륭한 적수는 역시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괴물 연순동이 제격이었다. 물론, 연순동에게 목줄을 제대로 채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강성태는 몇 가지 해야 할 일과 주의할 점을 연순동에게 알려주었다.

“할 수 있겠어?”

“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다른 객실을 잡아줄 테니 그곳으로 옮겨.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어설프게 룸서비스나 다른 사람 불러들이지 마. 네가 이곳에 묵는 게 알려지는 순간, 저쪽은 너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유충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능하면 12층으로 해서 객실을 하나 잡아. 그리고 이 인간 그곳에 넣어주고,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지켜줘.”

“예, 형님.”

상체를 숙인 유충일이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내일 오전 10시에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할 거니까 그때까지 좀 쉬어.”

이어서 강성태는 로페즈에게 오전에 있을 회의를 알려주었다.

“계약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비행기 탑승이 확인되면 입금돼. 그건 염려하지 마.”

“감사합니다.”

이전이라면 ‘알겠습니다.’라는 답이 있었을 순간에 ‘감사합니다.’란 인사가 나왔다.

“로페즈. 지금도 늦지 않았다. 가페의 긍지를 지키며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돌아가면 부패한 상관과 카르텔의 협박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 위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내 가족들은 여전히 카르텔이 법인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바엔 신도시에서 빛을 향해 걷는 그림자로 살겠습니다.”

다부진 대꾸였다.

강성태의 어깨에 로페즈와 대원 둘, 그들의 가족이라는 무게가 얹혀지는 것을 제외하면 박수를 보낼 정도로 현명한 결심이기도 했다.

이병렬이 이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멕시코인으로 구성된 신강남파 지부가 생긴 꼴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적당한 순간에 유충일이 돌아와 연순동을 데리고 맞은편 객실로 움직였다.

5분쯤 지난 뒤였다.

“샌드위치라도 먹을래?”

“괜찮으시면 차라리 아침을 먹겠습니다.”

로페즈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셉션에서 찾아갈 수 있게 샌드위치를 주문해. 우리 인원수에 병원에 있는 치곤이랑 신월동 식구들 숫자 생각해서 좀 넉넉하게 시켜.”

강성태는 돌아온 유충일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

새벽 5시 10분이었다.

수술을 끝낸 안다미는 지친 몸으로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향해 걸었다.

탄천에서 넘어온 서늘한 기운이 수술실과 병원 건물 안에서 보내느라 답답해진 가슴을 그나마 후련하게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하얀색 삼각별 승용차로 다가가던 안다미는 걸음을 멈추고 눈가를 좁혔다.

조명이 어둑한 가운데 기둥에 기대 있던 강성태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뭐해요?”

“책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들어 보였다.

“혹시 몰라서 샌드위치를 사 왔거든요. 이거 호텔에서 산 거라 제법 비싼 겁니다. 이게 싫으면 얼큰한 라면을 끓여줄 수도 있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안다미가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걸어와 강성태의 품에 안겼다.

신기하게도 오늘 하루의 힘겨움이 그녀를 안는 순간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생했어요.”

“이렇게 잠깐만 있을게요.”

오래도록 매달렸던 수술의 결과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치료하던 사람을 보낸 날이면 안다미는 유독 이렇게 강성태의 품에 안겨 시간을 보내며 위로받곤 했었다.

비닐봉지를 든 손으로 등을 안아준 강성태는 다른 손으로 안다미의 머리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최선을 다했던 거잖아요. 고생했어요.”

“너무 어린아이였어요. 마지막까지 엄마한테 손을 잡아달라던 아이요. 그랬는데….”

늘 냉정하던 안다미가 울음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지하차도를 지나고 고통받던 때에 안다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길을 강성태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백 마디 말보다 그 손길에서 위로받았던 것도.

상황을 모른 채로 떠드는 몇 마디 말보다 지금은 그저 온기를 전해주는 게 강성태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긴 숨을 내쉰 안다미가 고개를 들었다.

강한 사람답게 그사이 오늘의 아픔을 안쪽 어딘가에 갈무리한 눈빛이었다.

“가요.”

몸을 돌린 그녀가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서 강성태는 앞쪽을 돌아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강남 호텔은 왜 갔었어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들고 있는 비닐백에 이름과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거든요.”

강성태가 들고 있는 비닐백을 돌아보았던 안다미가 앞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샌드위치를 오래 들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성태 씨도 오늘 늦게까지 일이 있었던 거네요?”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강성태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지쳤던 모양이었다. 빌라에 함께 들어간 안다미는 강성태가 손을 씻고 나온 그 짧은 순간에 소파에 옆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뭐라고 먹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사치로 느껴질 만큼 안다미 역시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 뒤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바라고 바랐던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참혹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였다.

괜히 침대로 옮기겠다며 들었다가 혹시 깰까 싶어서 강성태는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안다미를 덮어주었다.

매국노, 부패한 검사, 돈에 눈이 멀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 같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온전하게 발전하는 건, 모두 제 자리에서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는 안다미와 같은 사람들 덕분이지 않을까.

테이블에 앉은 강성태는 바르지오가 보내준 사진과 이름, 그 외의 자료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전 10시에 신월동 나이트에서 모이기로 했고, 일본행 출발은 오후 2시 30분이어서 여유는 충분했다.

부족한 잠은 비행기 안에서 적당히 해결할 수 있는 데다, 일본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건 밤늦게나 새벽이어서 급할 것도 없었다.

마카오 회의에 참석하느라 여권을 만들었던 신강남파 식구들 위주로 꾸렸다. 이미 마카오에서 손발을 맞췄었기 때문에 특별한 역할이 없는 한, 굳이 다른 사람을 끼워 넣을 이유도 없었다.

로페즈와 대원 둘은 당연히 함께 가고, 남은 변수는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었다.

강성태는 노트북을 이용해 지도를 펼쳐놓고 바르지오가 보내준 동선을 또다시 확인했다.

마카오의 경우처럼 저격용 소총을 구할 수 있다면 일이 좀 더 쉽겠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무기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야쿠자들이 멕시코까지 달려오게 하려면 아무래도 제대로 자존심을 밟아줄 필요가 있었다.

귀국 방법도 두 가지 루트를 준비해야 했는데 무엇보다 이교창에게서 아직 답이 오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다음은 연백국 나채상이었다.

세상 부조리를 강성태 홀로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칼을 들이댄 적을 그대로 두는 건 동정표를 받지 못할 만큼 멍청한 짓이었다.

강성태가 계획과 동선에 집중하며 시간이 흘렀다.

“성태 씨?”

소파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안다미가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아직 시간 있어요. 좀 더 자요.”

“오늘은 조금 일찍 가봐야 해요.”

강성태는 식탁에서 일어나 안다미가 덮고 있던 이불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밤새웠어요?”

“오늘 오후에 일본에 가야 하거든요. 이틀 정도 뒤에 돌아올 거 같습니다.”

피곤함과 잠이 빠져나가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안다미가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얼른 끝내고 올게요.”

왜 가는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모습조차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안다미는 꿋꿋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치지 말고 와요.”

“물론입니다.”

몸을 세운 안다미가 강성태의 품을 다시 찾았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안다미에게 당장 필요한 건, 커피도, 샌드위치도 아닌 강성태의 위로인 모양이었다.

안다미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일본으로 향하는 강성태 또한 안다미의 품에서 길었던 지난밤의 힘겨움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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