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3권 - 16화 (469/513)

《469》2부 23권 - 16화

불모지에서 특출난 천재가 태어나기도 하지만, 대개 어느 종목이나 수많은 아마추어가 풀뿌리를 구성하고 그중에 재능을 지닌 데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가 프로라는 나무가 된다.

프로의 세계는 더욱 냉정해서 오로지 실력으로 위아래를 가르는데 그런 면에서 이병렬은 메달리스트라고 할 만했다.

“야! 저것들 곱게 갈아서 바다에 뿌릴 거니까 전부 트렁크에 실어.”

분명 강성태가 이거저거 알아보라고 했는데 이병렬의 지시는 단호했다.

고룡동과 신월동 덩치들이 다가가서 뒤로 묶인 여자 한 명에게 둘씩 달려들었다.

“야, 이 넋 빠진 새끼들아! 나라시 영업에 손님 모시냐? 뭐 그렇게 두 새끼씩 붙어서 지랄들이야?”

셔츠 차림으로 여자들에게 걸어간 이병렬은 뒤로 팔다리를 묶어놓아서 활처럼 꺾인 여자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런 뒤에 묶어놓은 타이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끌었다.

지이이이익.

가뜩이나 바싹 조여놓은 타이가 손목과 발목을 파고든 상태였다. 타이를 붙든 이병렬이 힘껏 당기자 붙들린 여자의 옆구리와 얼굴, 허벅지가 공장 바닥에 끌렸고, 체중을 이기지 못한 팔뚝과 발목을 타이가 파고들면서 시뻘건 피가 배어 나왔다.

“뭐해?”

이병렬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고룡동과 신월동 덩치 세 명이 비슷한 모양새로 남은 여자 넷을 끌었다.

“에이, 쌍년. 더럽게 무겁네.”

문 앞까지 여자를 끌어다 놓은 이병렬은 조금 전에 강성태가 치료했던 의자에 앉았다.

“담배 있냐?”

“여기 있습니다, 형님”

덩치 한 명이 담배를 건네주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동안 고룡동과 덩치 셋이 남은 여자 넷을 공장 입구에 끌어다 놓았다.

“후-.”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 이병렬이 식당에서 당차게 마주 보던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선수들끼리는 안다.

그것도 프로 선수들끼리는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선수가 진심인지, 겁을 주려고 바람 잡는 건지를 말이다.

“병아리가 생기면 감별사가 있거든. 암놈인지, 수놈인지를 감별하는 건데 수놈으로 판정 나면 기계에 넣고 갈아. 그래서 사료로 쓰지. 그걸 가는 기계가 성능이 워낙 좋아서. 뼈다귀까지 정말 깔끔하게 갈려.”

수놈을 오래 갈아대서 지친 노동자처럼 이병렬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한테 김진용이라고 제일 아끼는 동생이 있는데 곱창집 맞은편 편의점에서 잡힌 다섯 놈 있잖냐? 그 새끼들을 안산 공장에 보내는데 어설픈 동생에게 맡길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조금 전에 그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더라고.”

눈에서 독기가 안 빠진 여자를 향해 이병렬이 잔인하게 웃었다.

“세 놈을 갈고 났더니 남은 두 새끼가 뭐든 말하겠다며 매달린다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보는 순간에 너희 다섯 년이 잡힌 거지. 그래서 내가 깔끔하게 마저 갈아서 버리라고 했다.”

마지막 담배를 깊게 빨아댄 이병렬이 담배를 툭 떨어트린 뒤에 발로 지그시 밟았다.

“눈깔에 독기 좀 담았는데 그걸 높게 사서 네년부터 천천히 갈아주마. 아주 천천히. 지금까지 경험으로 봐서 허리가 갈릴 때까지는 살아있더라. 강단 없는 것들은 기절도 하는데 너처럼 독기 있는 년은 분명 살아있어. 그래서 비명도 더 생생하고.”

고개를 든 이병렬이 덩치를 돌아보았다.

“물 좀 주라.”

덩치가 가져다준 물병을 받은 이병렬은 뚜껑을 연 뒤에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네가 비명을 요란하게 지를수록 뒤에 남은 두 년 정도는 뭐든 말하겠다고 매달려. 그러니까 그걸 막고 싶으면 악착같이 비명을 참아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픽 웃은 이병렬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고룡동. 네가 이것들 진용이에게 데려가. 여기 이 년부터 갈아. 그래서 확실하게 바다에 뿌리고 와.”

“감사합니다, 형님.”

고룡동과 덩치들이 달려들어서 여자들을 트렁크에 담을 때였다.

“내 이름이 이병렬이다. 죽어서 귀신이 되든, 다시 태어나든, 그건 꼴리는 대로 하고, 내가 있는 한, 우리 보스 건들 생각하지 마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번처럼 갈아버릴 거니까.”

돼지처럼 들린 여자를 내려다보며 이병렬이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지금 이병렬의 눈빛이 얼마나 독한지 끌려가는 여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연순동의 발악은 삽시간에 체념으로 바뀌었다가 곧바로 애원으로 변했다.

“와, 이 개새끼!”

퍼윽! 퍽! 퍼으윽!

독이 오른 유충일이 발로 얼굴과 배를 아무리 걷어차도 연순동은 그의 발을 붙들고 처절하게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아, 이 씨발 놈이 진짜!”

콰악! 콱! 콰아악!

로페즈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로 유충일은 연순동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허리나 가슴도 그렇지만, 허벅지 중간을 제대로 찍히면 그 통증이 말도 못 한다. 그런데도 살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연순동은 피범벅인 얼굴을 하고도 유충일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잠깐 비켜봐.”

강성태가 나직하게 내린 지시에 발길질을 멈춘 유충일이 옆으로 비켜섰다.

재킷을 만지는 유충일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걷어차고 짓밟았다는 이야기였는데 놀랍게도 연순동은 아직 유충일의 왼발을 놓지 않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았을 때 이런 심정일까?

의식이 반쯤 나간 상태가 분명한데도 연순동은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연순동.”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강성태의 음성을 알아챈 모양인지 핏물 가득한 연순동의 눈이 꿈틀했다.

“일단 앉아.”

“끄응.”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연순동이 악착같이 팔을 뻗어가며 상체를 일으켰다.

“커흑. 컥.”

“인생이 불쌍해서 한 번 기회 준다. 묻는 말에 조금이라도 헛짓거리를 하면 아예 죽여서 데려갈 거니까 알아서 해.”

“으예.”

걷어 채이고 짓밟힌 얼굴 탓에 이상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연순동은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연백국이라는 모임하고 나채상 알지?”

“압…니다. 장인어른 소개로 알게 됐습니다.”

연순동에게서 다리가 풀려난 유충일이 눈치껏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저 인간도 의자 줘.”

“예, 형님.”

강성태가 앉아서 지켜보는 동안 유충일이 의자를 가져가 연순동의 상체를 들어서 앉혔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할 거 같냐?”

“나채상 이사장을 잡으십니다.”

“그래. 그럼 넌 뭘 해야겠냐?”

퉁퉁 부어서 눈을 거의 덮어 버린 눈꺼풀 아래로 겨우 드러난 연순동의 눈알이 강성태를 억지로 향했다.

이 와중에 또 잔머리를 굴려?

너는 진짜….

“제가 나채상의 죄를 모조리 밝혀내겠습니다.”

강성태의 결정이 떨어지기 직전에 연순동이 답을 내놓았다.

마치 죽을힘을 다해 달린 주자가 간발의 차이로 베이스를 먼저 밟는 바람에 ‘세이프!’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고강준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보고할 거 없어. 조사가 끝나면 JBC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거고. 국회의원이 걸려 있다면 이우섭이 정리하게 한다. 너는 수사만 해. 알았지?”

“예. 저는 수사만 하겠습니다.”

강성태는 왼팔을 뻗어 연순동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움찔, 놀란 그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온몸을 떨었다.

여기에서 동정은 사치였다.

강성태는 여태껏 지켜보고 있던 로페즈와 대원 둘을 향해 천천히 연순동의 고개를 돌렸다.

“멍청아. 멕시코 공사는 단순하게 건설 회사들이 공수를 수주하는 수준이 아니라 중국 삼합회, 일본 야쿠자, 그리고 저렇게 멕시코의 카르텔과 가페라는 특수부대까지 모두 달려든 싸움이다. 그 틈에 잘못 끼어들면 검사 아니라 검사 할아비라도 죽는 싸움이고. 알아들어?”

“예. 예.”

이건 알아들었다기보다 반사적으로 나온 답이었다.

강성태는 다시 연순동의 고개를 돌려서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네가 나를 못 잡았으니까 말이 새나갈 걸 걱정하는 나채상이 삼합회를 사주해 너를 죽이려고 할 거다. 반대로 오늘 일을 지켜봤으니까 네가 또 나를 노리면 공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저기 멕시코 카르텔과 가페 대원들이 너를 죽일 거고.”

아직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는 상황이라 지금 한 강성태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어떡해서든 살겠다는 의지를 품은 연순동의 눈알이 바쁘게 꿈틀대고 있었다.

“오늘 삼합회 칼잡이를 잡았고, 야쿠자들을 두들겼으니까 며칠 시간은 벌었다. 그 안에 네가 나채상을 잡지 못하면 너는 그들 손에 반드시 죽어. 헛생각을 해서 나를 체포하면 그 즉시 저기 멕시코 직원들 손에 바로 죽을 거고. 판단 잘해.”

두 번째 설명을 듣고서야 연순동은 강성태가 전하는 뜻을 제대로 이해한 눈치였다.

검사라는 지위가 이미 연순동이라는 인간을 잡아먹어서 괴물을 만들어 버린 뒤였다.

한 번 괴물이 된 인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밝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괴물들과 싸우는 데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마치 고강준이나 소신영처럼 말이다.

“마카오에서 있었던 테러 보도도 못 봤어? 폭탄 터트리고 총 쏴가면서 가져가려는 공사라고. 밝은 세상에서는 너 같은 괴물이 차지한 위치가 무서워서 다들 고개 조아릴지 모르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어둠 속에서 너는 검사라는 패찰 단 쓰레기밖에 안 되는 거라고.”

강성태의 눈을 본 연순동이 반사적으로 “예.”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 인간 화장실에 데려가서 적당히 씻겨. 옷 구해서 갈아입히고. 벗긴 옷에 혹시 USB가 더 있는지도 알아봐.”

“예, 형님.”

눈짓을 던져 덩치 둘을 부른 유충일이 연순동을 끌다시피 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앉아.”

그때까지 서 있던 로페즈를 향해 강성태가 소파를 가리켰다.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있으면 부탁해.”

이번에는 로페즈가 고갯짓을 해서 대원을 부렸다.

계속해서 친근함을 표시하는 남자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게 도리였다.

가페 대원이 커피를 놓아주는 사이, 강성태는 연순동의 위치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커피를 앞에 둔 로페즈의 표정이 복잡했다.

“한국에도 부패한 공무원이 있었군요.”

“아픈 역사도 있었지. 위나 아래로 개만도 못한 이웃도 있고. 그래서 더 악착스러워진 면도 있을 테고.”

“그래도 한국은 멕시코처럼 되지 않았잖습니까?”

“멕시코에도 깨어 있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겠지.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굳이 시에라마드레 공사에 신도시를 포함한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 이 기회에 자신의 배를 불리겠다고 아까 그 검사처럼 될 건지, 피를 흘리더라도 바른 세상을 위해 싸울 건지를 결정하는 건 오로지 너의 몫이다.”

강성태의 답을 들은 로페즈가 입을 다물고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고민도, 결정도 그의 몫이었다.

커피를 마신 강성태가 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그때까지 생각에 잠겼던 로페즈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죄송한 질문이 있습니다.”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로페즈의 질문을 기다렸다.

“만약 미스터 강이 카르텔처럼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도 검사를 저렇게 벌할 정도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산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어. 마약, 고리대금업, 인신매매, 그리고 빛에 사는 사람들의 헛된 탐욕을 유혹하는 짓. 그 선을 넘어선 안 되지.”

“조직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본능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해하는 게 있는데 로페즈. 유흥이란 단어가 퇴폐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손님과 손님이 눈이 맞는 걸 막으라는 게 아냐. 그사이에 끼어서 마약이나 매춘으로 더러운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말라는 거지.”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웃었던 로페즈가 조금은 개운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본은 언제 출발합니까, 보스?”

강성태는 의아한 얼굴로 로페즈를 보았다.

지금껏 ‘미스터 강’이라고 부르던 그가 방금 분명하게 ‘보스’라는 호칭을 말끝에 붙였기 때문이었다.

강성태뿐만 아니라 대원 둘 역시 무슨 뜻인가 하는 눈으로 로페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도시에 보스를 따르는 멕시코 현지 조직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가페와 완벽하게 통하는 조직입니다. 어떻습니까?”

“분위기에 휘말린 모양인데 카르텔의 복수는 생각 안 해?”

“신도시 안에서라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한 뒤에 로페즈가 고개로 욕실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배신하면 제가 처단해야 할 테니 가페 신분보다는 새로운 카르텔 조직원이 더 좋겠지요.”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고 전개였다.

“가페 대원이 카르텔에 협조하는 절반은 돈, 그리고 안전 때문입니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일하게 해 주십시오.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으로 카르텔에 들어가는 가페 대원들을 모으겠습니다. 신도시에서만큼은 어둠이 낮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의지를 밝힌 로페즈가 볼을 씰룩였다.

가페 대원이었다. 누구보다 멕시코의 현실을 잘 아는.

그런 로페즈가 죽음을 각오하고 내놓은 각오여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의지는 알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 또 네가 기존의 카르텔처럼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교육이 필요한 거군요.”

강성태의 뜻이 로페즈에게 왜곡돼서 전달된 게 분명했다.

“보스의 조직 이름이 신강남파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첫 번째 외국인 조직원이 되겠습니다.”

강성태는 심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로페즈의 결심도 문제였지만, 당장 그가 내놓은 소망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신강남파 첫 번째 외국인 조직원은 이미 네팔 출신 키란이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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