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2부 23권 - 14화
공장 골목은 어둑했다.
골목 안쪽 끝은 높다란 벽으로 막혔고, 벽 위쪽에 영등포 로터리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서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렸다.
신강남파 소속이 아니라면 들어올 일 없는 막힌 골목,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모두 삼켜버리는 자동차 소음,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어지간한 사람은 열린 공장문과 덩치들만 봐도 오금이 저릴 분위기였다.
광주 덩치들이 여자들을 모두 공장에 넣은 뒤였다.
공장 안으로 들어간 강성태는 문 쪽에 앉아 상처를 소독했고, 붕대를 감았다.
날이 워낙 짧아서 상처가 깊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보스는 이만 돌아가지?”
재킷을 벗어 셔츠 차림인 이병렬이 치료를 마친 강성태에게 가볍게 권한 권유였다.
책임질 일에서 빠져나가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정작 여자들을 두들겨 잡아 온 건 강성태였다. 게다가 책임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또 언젠가 이 순간이 문제가 된다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기도 필요하고.”
“보스. 이건 그냥 나한테 맡겨주라.”
고룡동과 유충일, 이병렬과 함께 있던 신월동 덩치들이 보는 앞이었다.
어지간하면 강성태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던 신강남파 넘버 투가 보스에게 대드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서열 두 번째가 이병렬이라면 이렇게까지 나온 이유가 있으리라고 믿어주는 게 좋았다.
“전화기 찾아주고, 혹시 삼합회 칼잡이가 더 있는지도 알아봐.”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상태에서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야! 저년들이 들고 있던 핸드백 확인해서 핸드폰 좀 찾아와.”
“예, 형님.”
허리 뒤로 팔과 다리를 묶어놓아서 활처럼 몸이 뒤집힌 여자들을 향해 고룡동이 덩치 두 명과 함께 다가갔다.
“적당히 하고 끝내. 그래야 내일 일본에 가지.”
“저런 년들 상대하는데 시간 길게 끌 거 있나?”
이병렬이 답을 내놓았을 때, 여자들의 핸드백을 뒤집어엎었던 고룡동이 다가왔다.
“핸드폰은 이게 전부입니다, 형님.”
덩치들이 내놓은 건 접이식 핸드폰 두 개였다.
“몸도 뒤져봤어?”
“그렇지 않아도 충일이가 허벅지랑 뒤져봤다는데, 형님. 칼 세 자루 나온 거 말고는 없었답니다.”
여자들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의 질문에 고룡동이 공손하게 답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이리저리 깨진 고룡동의 얼굴을 보자 이병렬은 울컥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하여간 너도 이 새끼야! 무슨 빗자루마냥 이리저리 쓸고 다니더니 여자한테 얻어맞아서 주둥이나 퉁퉁 붓고. 잘하는 짓이다.”
이병렬이 쏟아 낸 질책이 고개를 떨군 고룡동의 이마에 사정없이 박혔다.
“유충일, 너도 마찬가지야, 이 새끼야! 보스를 모시라니까 이렇게 팔에 칼이 박히도록 옆에서 쥐어 터지기나 하고. 이래서 무슨 일을 맡기겠냐?”
“죄송합니다, 형님.”
이병렬의 질책을 얻어맞은 유충일이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꾸중의 시간이 끝났다.
“밖에 차 있지? 너는 광주 동생들하고 보스 모셔. 알았냐?”
“예, 형님.”
유충일에게 지시한 이병렬이 속 터진다는 얼굴로 강성태를 찾았다.
“보스는 이제 가보셔. 혹시 뭐라도 알아낸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고룡동은?”
“저 성격 강한 새끼가 주둥이가 퉁퉁 붓도록 얻어맞았는데 그냥 가라면 오늘 밤에 잠이나 오겠어? 여기에서 잡일이나 시킬라니까 신경 쓰지 마.”
툴툴대지만, 고룡동의 심정을 이해해서 나온 이병렬의 배려였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이병렬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뭘 그렇게 웃어?”
“아냐. 병원에 가 있을 테니까 시간 구애받지 말고 연락해.”
강성태가 몸을 돌리자 이병렬과 덩치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유충일이 열어주는 뒷좌석에 오른 다음이었다.
“너는 얼른 운전석으로 가.”
유충일을 보낸 이병렬이 문을 닫아주고는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내 공손한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신강남파 넘버 투가 말이다.
‘뭐 하는 거야? 불편해.’
‘보스답게 가만히 좀 있어.’
강성태를 향해 눈을 찡긋하는 이병렬의 뒤에서 고룡동과 신월동 덩치들이 서열대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덩치들이 상체를 세우기 전에 유충일이 승용차를 움직였고, 그 뒤에서 승합차가 뒤따랐다.
“서라대학병원으로 가겠습니다, 형님.”
목적지를 확인하듯 말을 건넸던 유충일이 신월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정하게 박힌 가로등이 차창을 스치며 뒤로 달려 나갈 때, 강성태는 접는 방식의 핸드폰 두 개를 들여다보았다.
이 중 하나는 전화를 걸면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리도록 바르지오가 손을 써놨다고 들었다.
강성태는 먼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바르지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자들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이 두 개다. 그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테니까 번호를 확인해.]
우우웅.
[오케이, 미스터 강.]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바로 바르지오의 답이 액정에 올라왔다.
강성태는 여자들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 두 개를 순서대로 들어 문자를 보냈다.
바르지오가 두 개의 번호를 확인하면 아직 남은 칼잡이들이 있는지, 삼합회에 협조한 서울이나 지방의 조직이 있는지, 불행한 결과지만 신강남파에 배신자가 있는지를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라 택시들은 물론이고, 승용차들마저 무섭게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일본에 가야 하는데 일 참 많다.
창밖을 보며 강성태가 옅게 웃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등받이에 기댄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벌써 결과가 나왔다고?
의아하기는 했지만, 액정에 올라온 이름은 분명 바르지오였다.
“여보세요?”
- 미스터 강. 내가 첫 번째 통화는 무조건 미스터 강의 번호에 연결되도록 프로그램을 조작한 번호가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문자로 보낸 건데 왜?”
- 조금 전에 미스터 강이 보내준 두 개의 문자에 그 번호는 없어.
“뭐?”
강성태는 옆자리에 내려놓은 접는 방식의 핸드폰 두 개를 집어 들었다.
- 두 개 모두 새로운 번호다, 미스터 강. 숙박 기록에 입력했던 번호가 없다고.
“혹시 호텔 체크인 때 엉뚱한 번호를 입력한 건 아닐까?”
- 호텔 기록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기지국도 체크했었거든. 그때 분명 기지국이 칼리안 호텔로 나왔고. 혹시 몰라서 방금 다시 체크했는데 아직 칼리안 호텔로 나와.
이게 말이 되나?
강성태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바르지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호텔 직원이 가서 퇴실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핸드폰을 못 챙길 정도로 호텔 직원이 무서웠던 건 아닐 테니, 당장 떠오르는 건 칼잡이가 실수로 객실에 두고 나왔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호텔이 확실하지? 번호를 확인해서 내게 보내줘.”
- 확인할 것도 없이 지금도 기지국 위치가 칼리안 호텔로 떠 있어. 아직 그 핸드폰이 호텔에 있다는 뜻이지.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내줄게.
통화를 마쳤을 때, 승용차는 이미 오목교를 지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강성태는 익숙한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칼잡이 여자가 실수로 핸드폰을 객실에 놓아두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객실을 청소한 메이드가 발견해서 리셉션에 전해주었을 테고.
우우웅.
바르지오가 보내준 핸드폰의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번호를 확인하며 강성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맞붙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아저씨. 내려. 뭐해? 내리라니까.”
칼을 휘둘렀던 여자는 분명 호텔 직원을 서둘러 보냈었다.
“자신 있으면 타.”
그래놓고 강성태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불러들였다.
오목교를 지난 유충일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병원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달렸다.
뭔가 있는데?
지하차도가 앞에 나타났는데 이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병원 맞은편에 탄천으로 바로 내려가.”
“예, 형님.”
지하차도를 지난 유충일은 강성태의 지시대로 탄천을 향해 내려갔다.
어둠과 주변 불빛을 동시에 품은 탄천, 군데군데 불이 켜진 아파트, 탄천은 어딘가 눅눅한 분위기에서 강성태가 탄 승용차와 뒤따르는 승합차를 받아들였다.
멀찍이 걷는 사람 한둘을 제외하면 탄천 앞은 고즈넉했다.
유충일이 벤치 근처에 차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강성태는 뒷좌석에서 내려 승용차의 지붕에 팔을 짚고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운전석에서 내린 유충일이 강성태의 뒤에 섰고, 승합차에서 달려온 덩치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늘어섰다.
‘서라대학병원’이라는 하얀색 글자가 유독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저 건물 수술실에 안다미가 있고, 응급실 앞에는 최치곤과 신월동 숙소 덩치들이 수상한 여자들이 없는지를 살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위급한 순간에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은 더없이 좋은 무기가 된다. 그런데 그 독한 칼잡이 여자가 9층 복도를 신강남파 덩치들이 지키는 상황에서 핸드폰을 두고 나온다고?
손이 허전해서라도 오히려 더 찾았을 핸드폰을?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칼리안 호텔에는 정소국을 보내는 게 좋겠다.
프런트에 가서 객실 번호를 말하고, 핸드폰 번호까지 정확하게 알려주면 핸드폰을 손에 넣는 데는 특별한 문제가 없겠다.
강성태가 생각을 굳혔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누구지?
스마트폰을 꺼내 든 강성태는 액정을 확인한 뒤에 고개를 갸웃했다.
호텔 직원이 함부로 전화할 리는 없는데, 바르지오 만시니가 알려준 번호, 호텔에 있다던 바로 그 핸드폰의 번호였다.
병원 앞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요란해서 이대로 전화를 받기는 곤란했다.
“안에서 통화할 거니까 말할 때까지 문 열지 마.”
“예, 형님.”
강성태는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 소리가 뚝 잘려서 제법 조용했다.
누군지, 어떤 상황일지 짐작할 수 없으니까.
통화버튼을 누른 강성태는 손으로 스마트폰의 아래쪽을 가리고는 목소리를 작게, 그리고 씹듯이 깔았다.
“여보세요?”
- 호텔에서 핸드폰과 엘리베이터에서 싸운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강성태의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황당한 보고였다.
- 여보세요? 이사장님?
“어! 그래. 고생했다.”
-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기회를 만드셨는지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
이 인간,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한데?
강성태는 창밖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충일이 뒷좌석 안을 뻐끔뻐끔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였지?
- 이 정도 영상이라면 삼합회가 은선곤, 강성태와 협상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아! 아, 이 개새끼!
중앙지검 형사부 부장검사 연순동, 이 구제불능 새끼.
하마터면 이름을 부를 뻔했다.
강성태는 숨을 골라 황당한 심정을 감춘 뒤에 입을 열었다.
“삼합회 부산주와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걸 강남 호텔로 가지고 와.”
-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간이 급하다고 해서 바로 보기로 했다. 그래야 우리 연 부장도 제대로 인사하고 공로도 인정받지.”
워낙 나직하게 말한 데다 손으로 가리기까지 해서 혹시 연순동이 못 알아들은 건 아닌가 염려될 정도의 음성이었다.
- 이사장님? 부산주는 처음 듣습니다.
“어허. 삼합회의 가장 높은 분을 산주라 불러. 그 아래가 부산주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연순동의 장인인 이학의의 말투를 최대한 흉내 내서 던진 질책이었다.
“그만큼 저분들이 관심을 가진 일이니까 지금 바로 강남 호텔 1206호로 와. 멕시코 경호원과 중국 경호원이 문을 열어줄 거다. 삼합회에서 뭔가 큰 선물을 하려는 거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이건 나하고 자네, 둘만 아는 거로 해.”
-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이익 앞에서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연순동의 품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차창을 내렸다.
“강남 호텔로 가자! 최대한 서둘러! 얼른!”
강성태의 재촉에 유충일이 뛰었고, 이어서 기다리고 있던 덩치들이 승합차로 달렸다.
급하게 운전석에 뛰어드는 유충일을 보며 강성태는 먼저 로페즈의 번호를 눌렀다. 정말 짧은 통화였다. 그런 뒤에 이어서 조성호의 번호를 찾았다.
바쁘다. 정말.
조성호에게 지시만 전한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바르지오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여보세요?
그가 답하기 무섭게 강성태는 방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 영상을 지울 생각은 못 했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연순동 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혹시 삼합회 칼잡이들과 공통으로 나오는 번호가 있는지 알아봐 줘. 그리고 혹시 연순동이 다른 곳과 통화하는지도 확인하고. 아예 그 인간이 다른 곳과 통화 못 하게 막을 방법이 있을까?”
- 번호부터 불러줘.
연순동의 번호를 알려준 강성태는 바르지오와 통화를 마쳤다.
“후-.”
강성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그렇지.
야쿠자와 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합회 칼잡이가 이따위로 설치기 쉽지 않았겠지.
어쩐지 호텔에서 직원을 빨리 보내려고 애쓰고, 강성태를 대놓고 긁어대더니 이런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가지는 확실했다.
삼합회 칼잡이가 더는 없을 거라는 점, 그리고 연순동이 등장한 이 순간이 놈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라는 점이었다.
당장이라도 연순동에게 전화해서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멕시코 공사에 강성태가 차지하는 비중을 빤히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일에 끼어들어 설쳤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는 연순동은 강성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가 번호를 누르자 바르지오가 심어둔 프로그램이 강성태에게 연결했을 뿐이었다.
연순동이 진짜로 통화하고자 했던 인간은 누구였을까?
고강준은 이미 얻은 게 많고 워낙 처참한 약점을 잡혀서 당장 연순동과 손을 잡을 거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연순동 따위에게 모든 걸 배팅할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하나씩 풀어가면 되겠다. 하나씩.
염병, 무슨 복에 일본에 편히 가겠나.
그렇지만 찜찜한 위험을 뒤에 남기고 가느니, 몸이 바쁘더라도 이렇게 털고 가는 게 백 번 감사한 일이었다.
멍이 빠지니까 뺨이 다시 간질간질한 모양인데, 어디 보자, 연순동.
혹시 일이 틀어질지 모를까 염려하는 강성태의 심정을 이해한 듯, 유충일이 무서운 속도로 올림픽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