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2부 23권 - 9화
부산에 도착한 아르윈은 미리 받아두었던 번호로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아르윈입니다, 형님.”
- 그래, 동생. 부산에 도착은 했고?
쇳소리 가득하게 받았던 이교창의 음성이 반가운 기색을 품고 달려왔다.
“지금 막 톨게이트 지났습니다, 형님.”
- 욕봤다.
“야쿠자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형님?”
- 안 그래도 노익이 형님이 다시 전화하셨더라. 거, 광안리 해수욕장에 보면 센트럴 베이라고 나오거든? 그 옆에 할머니 횟집이라고 있어. 바닷가 도로에. 거기 있다. 그 새끼들 30명 넘게 모였는데 괜찮겠냐?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승용차가 구서 나들목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준비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형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님.”
- 알았다. 먼 길 왔는데 밥 한 끼 못 먹여서 마음이 편치 않다. 기다릴 테니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바로 연락해. 아니어도 일 마치거든 꼭 연락하자?
“예,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조수석에 앉은 조직원에게 ‘센트럴 베이’를 알려주었다.
함께 내려온 차량이야 지금처럼 뒤따르면 되겠다. 하지만, 목적지를 알고 달리는 게 훨씬 편하고 안전한 일이어서 조수석의 조직원이 전화로 목적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잠깐만. 성태 형님께 전화부터 드리고.”
운전석 뒤에 앉은 키란을 돌아보았던 아르윈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강성태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아르윈입니다, 형님. 통화되십니까?”
화려한 부산의 불빛과 진한 바다 냄새가 아르윈이 탄 승용차를 들여다보고는 내키지 않는 듯 달아나고 있었다.
- 괜찮으니까 말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형님. 좀 전에 교창이 형님과 통화해서 광안리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 저녁은?
“휴게소에서 먹었습니다, 형님.”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염려하는 강성태의 심정이 그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아르윈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했다.
강성태를 협박했다는 야쿠자?
씨발 새끼들. 그거 하나로 다 죽은 거지, 뭐.
- 삼합회 칼잡이를 잡아서 뒷정리 중이다. 서울은 안심해도 되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그럼 일 끝나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부산으로 달려오는 동안 서울에서는 삼합회의 칼잡이를 잡아낸 모양이었다.
엄청나게 기쁜 소식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린 아르윈은 운전석 뒤에 앉은 키란을 돌아보았다.
“서울에서 칼잡이를 잡았단다.”
“형님은 괜찮으시답니까?”
“그런 놈들에게 당할 분이냐? 편하게 말씀하시는 거로 봐서 크게 다친 식구들도 없는 거 같다.”
오래 차를 타서인지 키란은 갑갑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순박한 표정의 키란이 쿠크리를 뽑아서 적에게 달려들 때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곧 도착한다. 성태 형님께서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더라.”
“예, 형님.”
아르윈의 말을 받은 키란이 순박한 미소를 그려냈다. 잠시 뒤에 얼마나 독해질지 짐작조차 안 되는 눈빛으로 말이다.
**
이병렬은 삼합회 여자들이 차지한 테이블에 의자를 붙이고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나가는 순간부터 우리 동생들이 따라붙을 거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도망쳐. 동생들 손에 잡히면 발목 끊고 온몸에 문신 떠서 섬에 팔아버릴 거니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알아서 뒈지든가.”
여자들은 깔끔한 차림새였다.
머리 모양도 세련돼서 얼핏 보기에는 절대 삼합회가 보낸 칼잡이로 보이지 않았다.
“아! 하나 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이병렬은 생각난 게 있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뒈지기 전에 너희를 보낸 삼합회 간부에게 전화나 한 통 해주라. 어떤 새끼가 우리를 노리라고 시켰는지 모르지만, 조만간 모가지를 따줄 거라고. 그럼 남은 거 맛있게 먹어.”
지기 싫은 모양인지 여자들은 이병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손님들이 이병렬과 말 한마디 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번갈아 힐끔대는 앞이었다.
차갑게 웃은 이병렬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사장님? 여기 계산은요?”
“아까 5인분 주문하셨던 분이 다 하셨습니다.”
얼른 나가만 주라.
주인의 답변이 마치 그렇게 던지는 애원처럼 들렸다.
이병렬은 몸을 돌려 곱창집을 나섰다.
텅 빈 편의점 테라스, 깔끔하게 정리된 쓰레기통, 직전의 사건을 모른 채 오가는 사람들, 곱창집 바깥은 평화로워 보였다.
이병렬이 나서자 기다렸던 모양으로 정소국이 다가왔다.
“보스는?”
“공원에서 기다리십니다, 형님.”
이병렬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 그의 눈에 강성태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 안쪽 벤치에 계십니다, 형님.”
“저년들 따라붙을 동생들은 어떻게 했어?”
“광주 동생들이 오토바이로 기다리고 있고, 제가 관리하는 숙소에서 승용차 세 대 준비했습니다, 형님.”
“충일이가 너무 심하게 처리하는 거 아냐?”
“저는 충일이 보다 고룡동이 더 염려됩니다, 형님.”
“그놈도 왔어?”
“예, 형님.”
에이, 불쌍한 년들.
강성태의 지시라면 물불 안 가리는 고룡동을 떠올리며 이병렬은 입맛을 다셨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이병렬은 뒤에서 기다리는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고생들 많았다. 보는 눈이 있으니까 너희는 먼저 차에 가 있어.”
“들어가십시오, 형님.”
함께 곱창집에 있었던 강남 숙소 덩치들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뒤에 곱창집 옆의 골목으로 움직였다.
이병렬은 정소국과 함께 공원을 향해 걸었다.
작은 공원이었다.
조명이 없어 어둑한 공원에 들어서자 맞은편 벤치에 강성태가 앉아 있었다.
근처 빌라의 창을 통해 달려온 보잘것없는 조명에도 강성태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선명했다.
정장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를 이병렬은 처음 봤다.
인물은 또 어떻고?
저런 남자가 수십, 수백 명의 폭력조직원을 상대로 가장 앞에서 달려가 길을 뚫고, 자기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몸이 만신창이가 돼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오늘 밤만 해도 그렇다.
그 많은 숫자를 불러놓고 결국 칼잡이를 상대하는 가장 앞을 강성태가 맡았다.
보스 복이 터진 건지, 아니면 뭐에 홀린 건지, 원.
벤치에 앉아 있던 강성태가 이병렬을 보고는 픽 웃었다.
저 미소에 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세상에 없던 조직을 만들자는 말과 사심과 거짓이 없는 저 눈빛에 끌려서 말이다. 게다가 보스라는 사람이 넘버 투를 맞이하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서기까지 한다.
“고생했다.”
“나야 입만 털다 온 건데 뭐. 이제 소국이도 보내지?”
강성태는 정소국을 돌아보았다.
“애써 준 덕분에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 지켰다. 고맙다.”
“아닙니다, 형님.”
저거 봐, 저거.
보스가 저렇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는데 누가 불렀다고 불만을 품겠어?
“이만 들어가.”
“심부름할 동생은 있으십니까, 형님?”
“봉진이가 차에 있어. 신경 쓰지 말고 가.”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강성태와 이병렬에게 인사한 정소국이 몸을 돌린 뒤에 곱창집 옆에 있는 작은 골목으로 움직였다.
“잠깐 앉자.”
강성태의 권유에 이병렬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는 벤치였다.
강성태는 꼬고 앉은 다리의 무릎에 깍지 낀 손을 걸었고, 이병렬은 팔을 뒤로 뻗어 벤치의 뒷부분을 짚은 자세로 상체를 반쯤 뒤로 넘겼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치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직장인처럼 이병렬이 편안하게 입을 열었다.
“나부터 우리 식구들이 삼합회나 야쿠자를 아주 만만하게 여기고 있더라고.”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래?
힐끔 바라보는 강성태의 옆에서 이병렬은 하늘에 시선을 준 채 말을 이었다.
“약쟁이들이 우리 졸라 무서워하고, 그만큼 싫어하는 거 알지?”
그러냐?
강성태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오래 해 먹자, 우리. 보스가 없어지면 이런 신강남파는 하룻밤 꿈으로 사라진다. 또 형님이란 새끼들이 말밥이나 카드 밑밥 깔기 위해 동생들 주머니 터는 개새끼들 소굴이 된다고.”
강성태는 입술을 늘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야,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 배고프지?”
“아까 차돌박이를 그렇게 먹었는데 무슨 배가 고파?”
“그럼 당 떨어졌나 보다. 얼른 가자. 내가 달달한 거 한 잔 사줄게.”
사람을 뭐로 보고?
인상을 쓰려고 했으나 이병렬은 실없는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이런 보스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나?
“가! 뭐 하나 마시고, 나는 아까 잡았던 새끼들 면상이나 보러 가야겠다. 애새끼들이 어디에서 말을 배웠는지 욕 하나는 진짜 잘하더라고.”
그나마 삼합회 칼잡이를 정리했다는 생각에 이병렬은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가 없었다면 조태완이나 박노익이 무사했을까?
커피전문점을 향해 걸으며 이병렬은 새삼 강성태 한 사람이 지니는 비중과 힘을 되새겼다.
**
로페즈 니에토는 상관의 전화를 받았다.
- 두 시간 뒤에 출발한다. 문자로 비행 편이랑 계좌 보낼 테니까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일 처리를 끝내다오.
입금을 일 처리라는 표현으로 바꾸다니, 상관이 얼마나 이번 일에 진지하게 매달리는지를 확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카르텔에서 야쿠자에게 언질을 주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아카시 마오라는 여자의 구출을 카르텔에게 맡겼다. 그 여자를 구출하지 못하면 카르텔은 땡전 한 푼 못 받아.
하여간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저렇게 철저할 수가 없었다. 저 마음가짐이 나라를 위해 발휘됐다면 가페도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기가 막힌 심정에서 나오는 웃음을 로페즈는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 그것만이 아니라 정보가 새 나간 게 확인되면 가페는 앞으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편에 서서 시에라마드레 지역의 소탕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거라고 말해뒀다.
“죄송하지만, 카르텔에 얼마나 준다고 하셨습니까?”
- 흐음. 내가 상관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게 좋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미스터 강에게 확실하게 보고하기 위해서입니다.”
- 한 사람당 한국 돈으로 5천만 원이다.
카르텔 조직원이 열다섯 명이라고 했으니 한국 돈으로 7억 5천만 원을 지불하는 셈이었다.
멕시코 카르텔에게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이기는 한데, 7백 5십억 원을 처먹으려는 상관이 하기에는 확실히 구역질 나는 행동이었다.
“공사를 맡은 한국 컨소시엄의 대표가 미스터 강의 사람입니다. 비밀이 새 나가면 이후로 한국의 컨소시엄은 물론이고, 미스터 강에게도 신뢰를 잃게 됩니다.”
- 그 점은 염려하지 마. 우리가 2선에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가페 대원은 고작 열 명이 전부입니다.”
- 흥! 카르텔이 몸에 폭탄까지 두르고 달려드는 일이다. 그놈들이 모조리 휘젓고 나면 우리가 마무리하면 돼.
이거였구나!
로페즈 니에토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상관은 카르텔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놓고 아카시 마오를 손에 꽉 움켜쥐고 멕시코로 향할 계획인 게 분명했다.
로페즈에게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솔한 대원 둘에게만 저격을 지시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 계약금에는 문제없겠지?
“이번 일로 미스터 강의 신뢰를 제법 얻었습니다. 확실하게 처리될 겁니다.”
-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미스터 강이 어떤 유혹을 던져도 배신은 생각도 하지 마라.
“안심하십시오. 그럼 문자 오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더 통화하다가는 욕을 뱉을 것 같아서 로페즈는 통화를 마쳤다.
툭,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던진 로페즈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천천히 끌어내렸다.
부끄럽다. 이런 모습은.
지금껏 로페즈의 삶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관과 별다른 게 없었다는 점도.
강성태는 상관의 반응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예상했었는데 이번 일을 중재하다 보니 돈을 본 가페는 마치 옷을 홀랑 벗어 나체로 움직이는 듯 생각과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잘 닦인 도로, 높은 건물, 안심하고 밤늦게 돌아다닐 수 있는 치안, 높은 교육열, 문맹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서울이라는 세상에서 로페즈 니에토는 지독한 열등감에 다시금 얼굴을 감쌌다.
**
오세아는 주황색 임신복을 입어서 펑퍼짐한 스타일 안에 적당하게 배를 가렸다.
“뭐예요?”
조태완을 맞이한 그녀는 검은 봉지에 담긴 곱창을 받고는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곱창인데 먹다가 생각나서 구워 왔다.”
그냥 툭 던진 말이었다.
생각나서 구웠다는 표현이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있었던 일대로 말한 거고.
“왜? 못 먹겠으면 버려.”
돌아선 오세아의 반응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조태완은 상체를 기울였다.
임신부이다 보니 곱창 기름 냄새가 역겨울 수도 있겠다.
“구역질 나는 걸 왜 들고 있어? 이리 줘.”
손을 뻗었던 조태완은 멍하니 오세아를 들여다보았다.
구역질을 참는 줄 알았던 오세아가 진주만 한 눈물을 닦고 있어서였다.
“왜 그래? 곱창과 관련한 슬픈 일이 있었냐?”
한 손은 아직 곱창 봉지를 들었다. 그래서 오세아는 나머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오빠가 이렇게 사주는 게 처음이잖아요.”
“뭐?”
“나, 임신했다고. 손에 드는 거 진짜 싫어하는 오빠가 까만 봉지를 직접 들고 오셨잖아요. 그게 고마워서요….”
말하다가 울음이 툭 터진 모양이었다.
에효, 태완아, 태완아, 이 모자란 조태완아.
그토록 바라던 아이 가져주고도, 고작 곱창 봉지를 들고 우는 여자 한 명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새로운 조직을 이끌겠다고.
이왕 내친 길이니까.
조태완은 오세아의 등에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당겼다.
이것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내가 딸기든, 바나나든, 족발이든, 직접 사다 줄 테니까. 알았지?”
그런데 이게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 일이었나?
조태완의 품에서 오세아는 마치 지난 시절 참고 지냈던 모든 설움과 아픔을 풀어내는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