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2부 23권 - 4화
바르지오 만시니를 만나 정보를 들었고, 자료를 받은 강성태는 로비의 커피숍으로 움직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자료를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자 진한 커피가 그리워졌기 때문이었다.
야쿠자를 멕시코로 끌고 가는 계획의 전체적인 윤곽은 분명하게 그렸다. 이제는 자료를 바탕으로 세부적인 계획을 세울 단계였다.
가장 걸리는 점은 신강남파 식구들이 흘려야 할 피였다. 그렇다고 이번 계획에서 그들을 제외한다면 멕시코에 가서도 늘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대비한 훈련으로 삼는다. 대신 신강남파 식구들의 희생과 피를 줄이려면 그만큼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생각을 정리하던 강성태에게 사십 대 직원이 다가왔고,
“커피를 부탁합니다.”
커피를 주문한 강성태는 커피숍 옆으로 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자연스럽게 최치곤, 이병렬, 김진용, 조태완, 박노익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대림동, 강서구, 강남, 광주, 충청도, 떠오르는 얼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고맙다.
그들이 빛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되새겼다. 비록 그 순간에 강성태 홀로 어둠에 서 있어야 할지라도.
‘빛을 향해 달려. 비록 그 자리에 내가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절대 후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까.’
창밖을 보며 강성태가 각오를 다졌을 때였다.
직원이 다가와 옆에서 밀어주는 듯, 세련된 동작으로 커피가 담긴 찻잔을 강성태 앞에 놓아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와 함께 강성태는 커피잔을 잡았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며 바르지오에게서 받은 자료를 한 장씩 넘겼다.
‘사카구치 소우타. 너는 아무래도 용서가 안 돼.’
사진을 넘긴 강성태는 부동산 목록과 소유자를 천천히 확인했다. 두 페이지에 걸쳐 빽빽하게 적힌 탓에 바르지오 앞에서는 세세하게 살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과거부터 내려온 부동산이라 소유자로 돼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았다.
잘 처먹고 큰소리칠 수만 있다면 치욕적인 강점기의 재산이라도 충직하게 지키며 꼬리 치는 개만도 못한 인간들.
자료를 좀 더 확인하며 시간을 보낸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조태완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와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이어서 박노익, 이병렬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걸었다.
**
은선곤은 예정에 없던 곤잘레스 이두안의 전화를 받았고, 강성태가 사용할 경비 3백억 원에 대해 들었다.
- 멕시코 현지의 용역 비용으로 지급하면 될 거라던데 더 자세한 건 우리 쪽 회계팀과 의논해서 처리하게.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은선곤은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조태완의 회사에서 인원을 선발하고, 위탁 교육을 통한 훈련을 하고 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의아할 정도로 강성태는 평범하게 지냈다.
이렇게 지내도 될까 싶은 순간에 느닷없이 나온 한화 3백억 원은 그래서 은선곤에게 더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아직 멕시코로 향하기에는 여유가 있는 시점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이 직접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있겠지.’
홍콩에서, 마카오에서, 강성태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던 은선곤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지금쯤 강성태는 특유의 강렬한 눈빛으로 듣는 사람들이 질릴 만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게 확실했다.
상황을 예상하던 은선곤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사해봤던 가페, 카르텔은 맞설 상대가 아니라 협상을 통해 적정한 선을 지켜야 할 상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강성태가 누구를 상대하려는 건지, 지금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로페즈 니에토는 일주일에 두 번 연락하던 상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이지?
훈련에 지친 건지, 열악한 환경 탓에 늘어져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상관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이곳에 있는 미스터 강과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미스터 강? 강성태 말인가?
“그렇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들으셨으면 싶습니다.”
- 흠. 잠시만 기다려.
주변을 돌아본 뒤에 어디론가 장소를 옮기는 것처럼 문 여닫는 소리와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지?
직전의 나른함을 훌쩍 던져버린 상관이 뭔가를 기대하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선 이번 일을 비밀로 해주십시오.”
- 가페의 명예를 걸겠다.
울컥 튀어나오는 욕을 로페즈는 가까스로 삼켰다.
대원 둘에게 곤잘레스 이두안의 암살을 지시했던 인간이 너무도 쉽게 가페의 명예를 입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 여보세요?
“미스터 강이 일본 야쿠자 조직의 재산을 손에 쥔 모양입니다.”
- 일본 야쿠자의 재산을? 어떻게?
“제대로 설명하자면 꽤 긴 내용이라, 아카시 조직의 후계자가 한국에 와서 미스터 강에게 재산과 관련한 서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고 아시면 됩니다.”
- 야쿠자가 왜? 아! 나중에 듣자고 했었지? 그래서?
재산이란 말을 들은 상관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미스터 강은 그 서류를 가지고 멕시코에 가져가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현금화하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 야쿠자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 호오?
상관이 뱉어낸 감탄사에는 강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일본에서 인질을 구할 때 가페가 협조해 줄 것, 다음으로 멕시코에서 야쿠자들을 상대로 안전을 보장해 줄 것,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 흥! 우리더러 피를 흘려라? 그래서 우리가 얻는 건 뭔데? 얼마나 주겠다는 거지?
“그가 얻은 재산의 50퍼센트입니다. 한화로 칠백오십억 원가량 됩니다.”
로페즈의 답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대꾸 대신 먹먹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 칠백오십억 원의 절반이면….
“가페에게 전하기로 한 보상이 한화 칠백오십억 원입니다.”
답을 한 로페즈는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달았다.
말이 좋아 한국 돈 칠백오십억 원이지, 실제로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만 든다면, 시에라마드레 산맥 주변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라고 해도 먹힐 금액이었다.
- 이봐, 로페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떠드는 모양인데….
“계약금 5퍼센트를 선지급하겠답니다.”
로페즈 니에토가 두 번째로 말을 잘랐고, 반복되는 훈련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 이번 일의 가능성을 얼마로 보나? 그쪽에서는 그나마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나?
“뭐가 문제입니까? 계약금만 받아도 한화로 37억이 넘습니다. 일본에서 그가 원하는 걸 도와주고, 잔금을 받을 때까지 구해낸 인질을 가페가 데리고 있으면 되는 일입니다.”
- 인질과 잔금을 교환하자? 그가 인질을 포기하면?
“미스터 강이 굳이 인질을 데려가려는 이유를 짐작해 보십시오. 인질이 있어야 미스터 강도 야쿠자의 재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겁니다. 인질을 구하지 못하면 계약금으로 끝내고, 인질을 구출하면 잔금과 교환하면 됩니다.”
- 오오!
감동이 끓어올라 자연스럽게 터진 탄성이었다.
- 다시 묻지. 강성태가 진심이라고 보나? 일본에 갔다가 엉뚱한 싸움만 한다면 아무리 계약금을 받아도 크게 얻는 건 없는 꼴이다.
“제 이름을 걸겠습니다.”
마치 앞에 상관이 있다는 듯 눈을 하얗게 위로 치켜뜬 로페즈의 답이었다.
- 흐하하하하하하!
워낙 커다랗게 터진 웃음에 로페즈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다.
- 계약금을 받을 방법을 의논해. 그리고 내게 알려줘.
“그가 요청한 도움에 대해서 뭐라고 답하면 되겠습니까?”
- 그렇지!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아봐서 함께 알려주면 되겠군. 서둘러!
행여나 시간이 끌리면 계약금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여기는지 상관은 급하게 로페즈를 몰아쳤다.
로페즈는 마카오에서 강성태를 경험했었다. 게다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관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결국, 미스터 강이 이기는 싸움이구나.’
앞으로 펼쳐질 멕시코 시에라마드레 산맥에서의 싸움을 앞두고, 로페즈 니에토는 반드시 강성태에게 목숨을 배팅하겠다고 다짐했다.
**
조태완이 대표를 맡은 회사 ‘KN 용역’은 논현동의 7층 건물의 가장 위층에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강성태가 들어서자 기다리던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늦었습니다.”
“노익이와 병렬이가 먼저 온 거지. 어서 앉아.”
박노익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강성태는 이병렬에게 눈짓을 건넨 후 소파로 움직였다.
“상석은 형님이 앉으셔야 합니다.”
“왜 이래?”
“이건 아닙니다, 형님.”
“아, 거!”
자리를 비켜주려다가 다시 상석에 앉은 조태완이 세상 흐뭇한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병원 지키는 일 때문에 의논 중이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우선 지금 하는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박노익과 이병렬을 돌아본 조태완이 안심하라는 투로 시선을 가져왔다.
급할 게 없어서 강성태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제법 자세하게 세 사람에게 전했다.
“그러니까 관동 연합 놈들이 부산에 들어온 거구만. 그중 한 새끼가 동생을 협박한 거고?”
부산의 사정을 알게 된 박노익이 눈매를 독하게 뜨고 질문을 건넸고,
“보스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표정을 가라앉힌 조태완이 다음 행보를 물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가릴 게 있을까.
강성태는 품고 있던 계획을 세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후-.”
질렸다는 느낌의 숨을 뱉어낸 조태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껏 나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을 보스가 해 온 건 분명하게 알아. 하지만 일본에 가는 것만은 다시 생각해봐.”
“야쿠자들을 멕시코로 끌고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아, 거참. 아, 그러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
답답해하던 조태완이 왼편에 앉아 있는 박노익을 닦달했다.
“지금껏 엄청난 일들을 해왔지만, 동생이 막무가내로 움직였던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뭔가 짐작하지 못하는 목표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
박노익의 시선을 받은 강성태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멕시코에서 맞서야 할 가장 큰 적은 카르텔입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그들은 총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가페가 나서서 카르텔과 야쿠자를 상대하는 싸움이 우리에게는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가 됩니다.”
“흠.”
신음처럼 숨을 뱉어낸 조태완이 입맛을 다셨다.
한국에서 삼합회와 야쿠자를 몰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이고, 멕시코로 가지 않는다면 신강남파라는 이름 아래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회계팀을 동원하고, 월급을 지급해서 숙소 식구들의 만족도와 충성도도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
“보스 말은 알겠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멕시코로 가자고. 몇 명 데리고 일본에 갈 생각하지 말고.”
“일본에 가지 않으면 야쿠자가 따라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강성태를 말리고 싶은 심정을 조태완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그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야쿠자를 모른 척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제 와서 멕시코를 포기하자면 안 되는 거겠지?”
“위태롭게 공권력을 피해 왔지만, 당장 야쿠자가 죽을 각오로 달려들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결국 교도소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게 폭력조직의 숙명이니까요.”
조태완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박노익과 이병렬 역시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지 못했다.
“보스라는 자리를 맡았으니 법의 처벌이 있다면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 있는 두 분 형님과 병렬이까지는 아마 저와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저를 믿고 따라준 식구들만큼은 밝은 곳에서 당당하게 살게 하고 싶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말해서 그런지 함께 있는 세 사람 모두 칼에 찔린 듯 아픈 표정이었다.
“이대로 국내에 안주하다가 삼합회와 야쿠자들이 몰려들면 결국 불행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직과 믿고 따라주는 식구에게 이번 일은 분명 새로운 계기가 될 겁니다.”
“보스가 그렇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버티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편하게 살았었나 보네.”
새삼 현실을 깨달은 모양으로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멕시코.”
그런 뒤에 그가 내놓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같은 느낌이었는지, 박노익과 이병렬 역시 강성태와 함께 조태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그래? 나더러 늙었으니까 물러서 있으라는 소리를 할 거면 아예 입도 뻥긋하지 마. 보스가 물러나라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때는 아예 이 자리도 내놓고 집으로 가겠다.”
“형님?”
급하게 부르는 박노익을 향해 조태완이 말을 이었다.
“보스가 저러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밥 먹고 지내? 게다가 전부 내 손으로 뽑은 놈들이다. 가서 어떻게 사는지, 어떤 싸움을 하는지, 사는 환경은 어떤지를 알아야 훈련이라도 제대로 부탁하지.”
당장 말리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조태완은 독한 눈매였다.
엉뚱한 곳에서 혹을 붙인 꼴이었는데 정작 강성태는 나쁘지 않은 결심이라고 여겼다.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일수록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 산맥의 환경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조태완의 말대로 떠나는 숙소 식구들을 더 챙겨줄 수 있을 테니까.
특히나 조태완처럼 현장에서 뛰기 힘든 경우에는 차라리 가페를 앞세울 수 있는 이번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말이지?”
“예.”
당연하게 말릴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기대와 다른 강성태의 반응에 박노익과 이병렬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