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2부 23권 - 3화
제2장. 강성태가 진심이라고 보나?
일의 진행 순서를 생각하면 누구보다 바르지오 만시니를 찾아가 얻어낸 정보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도 강성태는 로페즈를 먼저 만나 그의 뜻을 확인했고, 이어서 곤잘레스 이두안의 객실을 향해 움직였다.
아카시 마오가 죽었든, 살아있든, 그건 상관없다.
전화했던 놈의 위치가 한국인지 일본인지도 강성태의 계획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객실로 향하며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위는 삼합회, 아래는 야쿠자.
하여간 주변 복은 더럽게 없어서 지랄 같이 끼었는데 이 기회에 관동 연합이란 놈들을 갈가리 찢어서 지금의 삼합회처럼 다시는 한국을 함부로 기웃대지 못하게 확실한 교훈을 줄 생각이었다.
물론 한 번 때려서는 말을 안 들을 수도 있겠다.
어려울 게 있겠나?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네 번, 멈추지 않고 계속 두들겨서 깡그리 죽거나, 알아듣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객실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강성태를 확인한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강.”
커다란 덩치에 여유를 머금은 존 보스만이 거실 정면에서 강성태를 맞았다.
“회장님은?”
“회의 중입니다. 안에 연락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커피 어떠십니까?”
“로페즈를 만나 마셨어. 물을 부탁해.”
답을 들은 존 보스만이 안쪽의 직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문 오른쪽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이곳에 있는 직원들과 경호원들은 마카오에서 있었던 강성태의 활약을 보았다. 또한, 강성태가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에게 직접 통화해서 약속을 잡을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았다.
그래서일까, 직원들과 경호원들 모두 강성태를 부회장쯤 되는 인물로 대하고 있었다.
“요즘도 그 카페에서 계십니까?”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거 같아.”
고개를 비튼 존 보스만이 ‘멕시코를 벌써?’ 하는 느낌으로 시선을 던졌다.
“멕시코에 먼저 가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있어서 회장님과 의논한 뒤에 결정하려고.”
“놈들이라면?”
“야쿠자가 성가시게 굴어서.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거라, 이 기회에 가페의 썩어빠진 대원들과 카르텔을 엮어서 한꺼번에 처리해 보려고.”
존 보스만이 질렸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는, 카르텔 하나만으로도 버거울 판국에 셋을 묶겠다는 계획을 들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이번에도 쉽지 않겠군요.”
“신도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페와 카르텔의 방해는 피할 방법이 없지. 그들과 손잡고 달려들 마피아나 삼합회도 빼놓을 수 없고. 그렇다면 시작 전에 어느 정도 힘을 빼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렇군요.”
존 보스만의 답이 떨어진 뒤였다.
비서실에 속한 직원이 다가와 회의실 유리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성태와 존 보스만의 시선을 받은 그가 엄지를 옆으로 뉘여 거실 안쪽을 가리켰다.
“회장님이 찾으시는 모양입니다.”
존 보스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강성태는 비서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곤잘레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게. 커피?”
“조금 전에 마셨습니다.”
커피 테이블로 움직인 그가 도자기로 된 주전자를 들었다.
“내가 자네를 서운하게 한 적이 있었나? 왜 직접 연락하지 않고 바깥에서 기다렸나?”
“로페즈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의 답에 따라 나를 만날지 아니면 그냥 돌아갈지가 결정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더욱 서운하군.”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라고 넘기기에는 곤잘레스의 진심이 워낙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자네를 파트너라고 하지 않았나? 오랜만에 이 호텔에 들렀는데도 연락하지 않는다면 내 기분이 어떨 거 같은가?”
“커피를 마셔도 되겠습니까?”
“따라달라는 건 아니겠지?”
강성태의 질문을 곤잘레스 이두안이 능청맞게 받았다. 툴툴거리고 나자 그나마 기분이 조금은 풀린 눈치였다.
정세원도 그렇지만, 세계적인 부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의 독점욕, 변덕은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날 때가 많았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특히 별것 아닌 사안이라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은 경우, 지금 곤잘레스 이두안과 같은 반응이 나오곤 했다. 마치 한순간 과거로 돌아가 카르텔의 조직을 먼저 치겠다고 말할 때의 상황, 꼭 그 모습이었다.
네가 하는 일을 내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숙이기만 하면 종이 되고, 맞서는 모습으로 일관하면 갈라서는 일만 남는다.
강성태는 태연하게 커피를 따른 뒤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만든 다음이었다.
“제 목표는 성공적인 신도시 설립과 운영입니다. 그 성공이라는 표현 안에 회장님의 안전이 포함됩니다.”
다음 말을 계속해보라는 투였다.
시선을 강성태에게 준 곤잘레스 이두안이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회장님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일을 할 때만큼은 개인적인 친분을 위해 시간을 뺏길 수 없습니다.”
“말이 늘었군.”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혔다고 받아주십시오.”
곤잘레스 이두안이 눈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강성태의 답에 마음이 풀렸다는 의미였다.
커피 테이블 앞에 선 상태였다.
강성태는 그렇게 서서 아카시 마오에서 시작돼 로페즈 니에토를 만난 과정을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회장님께 보고드리는 겁니다. 이 싸움을 멕시코 시에라마드레로 가져가도 된다면 시작하겠습니다.”
강성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 상태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미 결정한 일 아닌가?”
“저는 파트너일 뿐입니다. 멕시코 신도시 개발 사업의 보스는 회장님이시고, 결정 또한 회장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눈가와 입 끝에 감추지 못하는 미소가 걸렸다.
“너무 위험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차피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이 서울에 계실 때 최대한 마무리 짓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필요한 비용은?”
“아까 말씀드린 아카시 조직의 재산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네 손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더구나 계약금도 주기로 했다면서?”
“계약금은 직원 파견을 위해 조성한 자금으로 집행할 생각입니다.”
이거 봐, 이거.
또 사람을 무시하지?
장난처럼 강성태를 삐뚜름하게 보았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자네의 파트너를 무시하지 말게. 한국 돈으로 3백억 원을 준비하지. 멕시코에서 자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경비로 사용하게.”
이런 비용은 도대체 어떤 명목으로 건네줄까?
은선곤을 통해 회계의 어려움을 알게 된 탓에 엉뚱한 의문을 떠올렸다.
“보리스 파리오 회장님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아? 그 친구 말인가?”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더할 수 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국 정부가 내세운 회사에 지분을 모두 뺏기고 소송을 제기했지. 그것도 중국 법원에. 그 뒤로는 모르겠네. 앞으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게 된 사람의 일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안 됐다는 투로 고개를 저은 이두안이 시선을 가져왔다.
“멕시코에 내가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반드시 내 곁에 있어 주게.”
“로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국의 소중함을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고,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환경에 워낙 만족하고 있다네.”
차라리 잘 됐다.
힘겨운 싸움에 로라의 등교까지 챙겨야 한다면 어려움이 몇 배로 커지고, 그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니 말이다.
“바르지오에게 가나?”
“세부 계획을 세우려면 그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모처럼 자네의 특기가 발휘되겠군.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게. 우리 사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네. 돈은 미스터 은과 의논해서 처리할 테니 그에게 받게.”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강성태는 만족해 하는 곤잘레스 이두안의 집무실을 나섰다.
존 보스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강성태가 객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통화돼?
거친 이병렬의 질문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
- 미친년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일 다시 전화하기로 했다며?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만나고 나오는 길이야. 정확한 계획은 정보를 확인한 뒤에 세우려고. 아까 병원까지 가서 고생했다며? 고맙다.”
- 무슨 인사를 이렇게 빨리하시나?
뼈 있는 이병렬의 대꾸에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투의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거 같아서 엘리베이터 앞쪽의 좁은 창가에 기대선 참이었다.
- 병원은 염려하지 말고 움직여. 하늘이 쪼개져도 문제없을 테니까. 그런데 퇴근한 다음이 문제거든. 동생들 붙여도 되겠어?
“아무리 늦어도 퇴근 한두 시간 전에 내가 병원으로 갈게.”
- 그게 제일 좋기는 하지. 대신 신월동 식구들이 따라붙을 거니까 그것만 이해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빌라에서 함께 지내.
“신경 써 줘서 고맙다.”
- 일 생기면 나 빼놓지 마.
이 말을 하려고 전화했구나 싶은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좋은 놈, 이병렬.
강성태는 정보를 주는 놈, 바르지오 만시니의 객실로 향했다.
“어서 와, 미스터 강.”
문을 열어준 그는 이번에도 여러 개의 모니터를 달아놓은 컴퓨터 책상 앞으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운동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말도 마. 존 보스만이 일주일에 세 번은 피트니스 센터에 끌고 가.”
강성태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던 바르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된 건 순전히 한국의 음식 탓이야. 특히 생선을 이용한 찌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 싱싱한 굴은 또 어떻고?”
“두 가지 모두 그렇게 살이 찌는 음식은 아닌데?”
“물론 사이드 메뉴와 야식을 빼놓을 수는 없지.”
음식을 떠올렸는지 입맛을 다신 바르지오가 회전의자를 돌려 뒤편의 서랍을 열었다.
그는 이십 장 정도 되는 A4 용지를 강성태에게 건넸다.
“건네받은 번호를 확인하면서 추가로 연결된 정보들을 추리다 보니 양이 그렇게 많아졌어. 어나니머스 회원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건 알 테고, 그들의 도움이 컸지.”
말을 마친 바르지오가 눈짓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시선을 떨군 강성태는 오른손으로 페이지를 하나씩 넘겼다.
“먼저 전화번호의 주인은 사카구치 소우타라는 남성이다. 36세. 도쿄를 둘러싼 요코하마, 이바라기, 야마나시, 군마를 지배하는 다섯 조직, 관동 연합의 중간 간부.”
기름 바른 머리를 로큰롤 가수처럼 넘긴 사카구치 소우타는 말랐고, 허름한 양복 위로 카라가 큰 셔츠를 입었는데 일부러 험상궂게 보이려고 애쓴 느낌이었다.
애는 썼는데 솔직한 인상은 그냥 ‘더럽게 생겼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했다.
“그래서 이 인간의 현재 위치는?”
“부산의 고제 호텔. 그와 연락한 번호들을 확인해서 같은 호텔과 주변 호텔 3개에 모두 32명이 투숙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박노익이 말한 야쿠자 놈들이었겠구나.
사진을 확인하는 틈을 기다렸던 바르지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카시 마오는 잘 알 테니까 설명을 줄이고, 그 여자의 증조부 때부터 내려온 한국 내 재산이 상당하더라고. 대개 부동산인데 관동 연합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지 싶다.”
“목록을 알 수 있나?”
서류를 확인하라는 투로 바르지오가 다시 시선을 던졌다.
페이지를 넘긴 강성태는 잠시 내용을 확인했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부산을 포함해 전국에 깔린 부동산이 상당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소유자가 한국인이었다.
임야는 그렇다고 친다.
오피스 건물, 쇼핑센터, 심지어 유원지도 있었다.
“부동산 자료에 소유자가 모두 한국인 이름으로 돼 있어. 그리고 거기 적힌 한국인들은 모두 아카시 조직에 충성하는 부류고. 차웅진처럼.”
“이렇게 하면 여기 한국 사람들이 부동산을 처분해도 방법이 없을 텐데?”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의 자본과 기술, 심지어 유통까지 아카시 조직의 도움을 얻었어. 차웅진만 봐도 그 위치에서 아카시 조직에게 충성했으니 대강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이전에 한번, 치욕적인 역사에 관해 강성태가 분노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모양으로 바르지오가 조심스럽게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유추해 보자면, 목록에 있는 부동산을 처리하려면 아카시 조직만이 보여줄 수 있는 뭔가의 증명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관동 연합이 미스터 강에게 요구하는 게 바로 그 서류일 테고.”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가 걷히듯 지금까지 달려들었던 엉뚱한 일들의 내막이 그나마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카시 마오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나?”
“요코하마.”
묻기 무섭게 바르지오 만시니가 답을 내놓았다.
“신나카하라초 근방에 공중전화로 연결하는 사창가에 있다.”
“확실한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까?”
강성태의 요구를 받은 바르지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카시 마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스터 강.”
“그렇다면 4개월 전 아침에 호텔에 함께 있던 놈들 명단과 위치는?”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 다섯이 이미 살해됐고, 둘은 아카시 마오와 함께 있었던 거로 추정된다. 위치가 신나카하라초 근처에서 사라졌거든.”
강성태의 표정을 살핀 바르지오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라면 이쯤에서 한 번 더 고민하겠다, 미스터 강. 물론 말을 듣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마침 적당한 순간이어서,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에게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설명을 바르지오 만시니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멕시코로 끌고 갈 생각을 하다니.”
가페와 카르텔을 아는 바르지오 역시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카시 마오든, 남은 두 놈이든, 상관없어. 한 명만 멕시코로 데려갈 수 있으면 돼. 혹시 세 사람 모두 죽었다면 내가 부동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체에서 가져갔다는 것만 보여주면 돼. 하나 더.”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를 단단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관동 연합이 개망신을 당해야지. 그래야 악 받쳐서 멕시코로 따라오겠지. 아카시 미키야토가 마카오에 왔던 것처럼.”
“신나카하라초 근방에 있는 야쿠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할 시간과 탈출 방법, 루트,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도 여유가 필요해. 내게 하루만 줘.”
“그 정도라면 문제 될 게 없지.”
강성태의 답을 들은 바르지오 만시니가 쓴웃음을 그려냈다.
“마치 전쟁을 계획하는 느낌이군, 미스터 강.”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감상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