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2부 22권 - 19화
김민정이 감정을 수습하자 기다렸다는 듯 안다미의 하얀색 승용차가 지구대 앞에 도착했다.
지구대 유리문 안쪽에서 정복 경찰들이 이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민정 씨?”
“안녕하세요, 언니?”
“많이 놀랐죠?”
차에서 내린 안다미는 마치 커다란 사고를 당했던 사람을 다독이듯 김민정을 안아주었다.
“잠깐 나가도 돼요?”
“허락받았어요.”
“그럼 우리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해요. 성태 씨가 뒤로 타요.”
“언니? 오빠가 여기 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김민정을 조수석으로 데려간 안다미가 문을 열었고, 그 사이 강성태는 뒤로 가서 앉았다. 셋이서 차에 타고 출발할 때 지구대의 유리문에는 더 많은 경찰이 매달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다미의 선택은 홍대입구역 근처의 카페였다.
옛날 양옥을 개조한 듯한 구조였는데 테라스를 넓혀 놓아서 도로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안다미는 승용차 뒷좌석에 있던 카디건을 꺼내 김민정에게 주었다. 그런다고 경찰복을 모두 가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앉을 때 눈에 띄는 건 확실히 덜했다.
“여기는 피자 괜찮아요. 피자 하나 하고, 커피? 아니면 주스?”
“저는 주스 마실게요.”
“성태 씨는 커피죠?”
시원시원하게 주문을 마친 안다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김민정을 보았다.
“어쩜 경찰복이 이렇게 잘 어울려요?”
“죄송해요, 언니.”
사유를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강성태에 관한 좋지 않은 일로 안다미까지 달려온 상황이 김민정은 영 미안한 눈치였다.
“괜찮아요. 우리 아빠는 더 하셨었는데요. 뭐. 식당에 가서 밥하고 불고기 그대로 두고 나왔을 정도로 반대하셨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안다미의 말에 홀린 것처럼 시선을 든 김민정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성태 씨의 진심을 보신 거죠. 잠시만요.”
말하던 도중에 안다미는 스마트폰을 꺼내 김민정에게 보여주었다.
“여기가 멕시코예요.”
그 사진을 가지고 있었어?
말릴 틈도 없이 안다미는 멕시코에서 구출됐던 일을 브리핑이라고 여길 정도로 짧고 간결하게, 사진을 넘겨 가며 설명했다.
피자와 커피, 주스가 나왔다.
셋이서 피자와 각자 음료를 마셨는데 이번에 안다미는 밀동에서의 일과 교사가 되겠다던 친구의 일을 덤덤하게 들려주었다.
“성태 씨가 아니었다면 남순이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 몰라요. 내 친구는 더 말할 것 없고요. 부모님하고 함께 봉사활동 한다는데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피자의 작은 조각을 입에 넣은 안다미가 냅킨에 손을 닦고는 강성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태 씨는 민정 씨가 생각하는 그저 그런 깡패가 아니에요. 법이 지켜주지 못하는 곳에 놓인 힘겨운 사람들과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짓눌린 피해자들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세요.”
김민정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 안다미가 시선을 들었다.
“성태 씨. 미안한데 은선곤 씨를 불러줄 수 있어요?”
“지금, 이리로요?”
은선곤과 안다미가 딱히 친분이 깊지 않은 상황이어서 강성태는 확인처럼 되물었다.
“언니. 그분은 이미 뵀어요.”
“성태 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 듣는 게 좋지 않겠어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잖아요?”
김민정이 지금 그런 상태인가?
그걸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강성태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점을 안다미가 짚었다.
“아니에요, 언니. 언니 말 들으니까 알겠어요. 다만, 오빠한테 꼭 듣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떻게, 왜, 폭력조직에 들어가게 된 건지 그것만큼은 꼭 알고 싶어요.”
안다미가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처음 시작은 김민정이었다.
도주한 좀도둑을 잡으러 인천에 갔다가 일이 꼬이면서 시작된 거라 차라리 오해를 받고 말지, 그 사연을 김민정이나 이모네 가족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일수록 솔직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민정이 평생 커다란 돌을 가슴에 안고 살지 모르는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김민정은 침묵하는 강성태와 안다미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변명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적당한 핑계만 주면 그냥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아직 흔들리는 김민정의 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솔직한 걸 원하는 거죠?”
“네, 언니.”
강성태의 침묵을 안다미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안다미는 막힘없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안다미를 말리면 모양새가 더 이상해진다.
“대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안다미의 요구를 들은 김민정이 강성태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갔다.
“약속할게요.”
“민재 씨가 만나는 요선 씨 알죠?”
“네? 요선 언니요?”
“동생이 요즘 한창 TV에 나오잖아요.”
아, 불쌍한 김민재.
열쇠고리 받은 것도 서운한 마당에 맹요선의 막냇동생 맹인선을 구하다가 깡패들과 연결됐다는 핑계에 제대로 이용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깡패들의 복수에 맞서는 이야기, 이어서 클럽에 가서 마약에 중독된 여자를 구출한 일로 조직에 몸담게 된 과정, 마지막으로 마카오 회의까지 연결되었다.
이래도 되겠어요?
강성태의 시선을 본 안다미가 눈을 찡긋했다.
“오빠는 왜 우리 식구밖에 몰라? 그냥 민재 오빠가 깡패들에게 맞게 놔두지, 왜 그렇게 바보 같아?”
미안하다, 김민재.
다음에 멕시코에 다녀올 때는 아예 승용차를 하나 사 줄게.
“민재 씨한테는 비밀로 해준다는 거 잊지 말아요. 알고 나면 죄책감에 잠이나 오겠어요?”
“그 멍청이는 성태 오빠가 이런 줄도 모르고, 열쇠고리 선물했다고 툴툴댔어요!”
“뭐예요? 열쇠고리를 선물했어요? 심했다.”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정으로 강성태는 입맛을 다셨다.
적당하게 분위기가 수습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혹시 장기봉이 일을 저질렀거나 아니면 부산에서 사고가 터졌을까?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는 갸웃한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괜찮아, 지금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 있어. 무슨 일이야?”
- 바로 일어서시는 게 아니면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20분이면 도착합니다.
“잠시만.”
강성태는 무슨 일인가 하는 안다미와 김민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은선곤이 이리 오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죠? 20분 정도 걸린다네요.”
“잘됐네요. 오라고 하세요.”
안다미의 시원한 대꾸에 강성태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통화를 마쳤다.
“오빠. 그럼 내 차 사러 갔을 때 거기 사장이 쩔쩔맨 것도 오빠를 알아봐서 그런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 자꾸 가격을 싸게 넘기려고 해서 인상 쓴 건 있지. 너도 알아봤겠지만, 제값 다 주고 샀어.”
김민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어떻게 해, 오빠?”
“그냥 모르는 척해주라. 혹시 다른 곳에서 이야기 들으신 거 같으면 네가 아니라고 해주고.”
“아이, 사고뭉치 김민재!”
강성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안다미를 보았다.
‘때론 적당한 거짓이 진실보다 좋은 결과를 만들 때가 있어요. 이건 이렇게 넘어가요.’
안다미가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 씨. 나는 다 알고 오빠를 선택했어요. 어떤 말이 들리든 나와 오빠의 선택을 믿어줘요.”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김민정이 “네, 언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궁금한 건 그보다 더 많은 눈빛이었고.
‘내 남자다. 내가 인정했으니 나를 믿고 더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문 앞에 수문장처럼 안다미가 서 있었다.
적당하게 대화가 흘러서 조금 전 지구대에서 있었던 일을 김민정이 들려준 뒤였다. 테라스 안쪽에서 은선곤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일에 열중하는 남자는 매력적이라더니 마치 야근 중에 잠시 나온 것처럼 은선곤은 일에 집중한 사람이 보이는 묘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잠깐 인사를 나눴고, 4인용 탁자여서 김민정의 옆에 은선곤이 앉았다.
“무슨 일이야?”
“그냥 뵙고 싶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안다미를 돌아본 강성태는 옅게 웃은 뒤에 은선곤을 돌아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불편하면 잠깐 자리를 옮기든가.”
“아닙니다.”
강성태가 내놓은 권유를 은선곤이 거절했다.
“정말 다른 거 없습니다. 그저 밤 10시에 그룹 회장님을 뵙고 나와서 서류를 정리하는데 문득 회장님이 뵙고 싶어져서 전화 드렸던 겁니다.”
“정세원 회장?”
“예.”
안다미는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인데 아무래도 김민정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비서실 출신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서나 들어보았던 강명그룹 회장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직접 들으면 당장 실감 나지 않을 수는 있겠다.
다가온 직원에게 시원한 음료를 주문하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김민정 씨가 정복을 입은 거 보면 근무 중에 나온 모양인데 혹시 중요한 일을 의논하시는데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민정이의 이름을 기억해?”
“이모부님과 이모님, 김민재 씨, 그리고 여기 김민정 씨의 이름을 모두 기억합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진짜 가족 모습이어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유독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은색 안경 안쪽에서 보이는 은선곤의 눈이 외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성태 씨?’
강성태는 안다미의 눈짓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얼래?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김민정이 멍한 표정으로 은선곤의 아픈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이 절로 나오기는 했는데, 샤프하고 깔끔한 느낌의 은선곤이 외로움 가득 묻은 미소를 보였으니 모태 솔로 김민정의 심장이 두근거릴 만한 모습이었다.
“정말 정세원 회장과 별다른 일 없었어?”
“다리를 건넌 뒤에 불 지르고 왔다고 여겨주시면 됩니다, 회장님.”
은선곤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이제야 왜 은선곤이 강성태를 꼭 보자고 했는지, 어째서 아픈 미소를 지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후회하지 않겠어?”
“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더 이야기해 봐야 어설픈 이야기로 겉돌 게 분명했다.
“시간 봐서 지난번처럼 한번 마시자. 내가 또 호텔에 얌전히 넣어줄게.”
“은 대표님이 호텔에 실려 갈 정도로 술을 드셔?”
“나도 있었어요. 다음에 마실 때 연락할 테니까 민정 씨도 나와요. 그 기회에 우리도 편하게 시간 갖게요.”
대뜸 대답하지 않았지만, 전화하면 김민정이 나온다는 데 김민재에게 준 열쇠고리를 걸 수는 있었다.
“도착한 날이라 피곤하실 텐데 괜히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뭐야, 괜찮겠다니까.”
“아닙니다. 밀린 일도 있고, 그룹 회장님 뵙고 나서 이상하게 잠깐이라도 뵙고 싶어서 왔던 거니까 다음에 시간 되시면 불러주십시오.”
은선곤이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고,
“그럼 오빠. 나도 이만 돌아갈게. 근무 시간인데 너무 오래 있었어.”
김민정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내가 태워다줄게요.”
“근무지가 어디 신지 모르지만, 가는 길에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얼핏 보기에 은선곤은 그저 흔히 보이는 선의였고, 제안을 들은 김민정은 가슴이 설레는 느낌이었다.
“그래 줄래요? 그럼 내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살게요.”
눈치가 빠른 안다미가 말 한마디로 두 사람을 엮었다.
“민정아?”
“걱정하지 마, 오빠. 나 다미 언니 말 믿어.”
강성태에게 고개를 끄덕인 김민정이 안다미와 인사를 나눈 뒤 은선곤을 따라 카페를 나섰다.
테라스여서 승용차에 타는 두 사람이 내려다보였다.
안다미와 같은 종류의 삼각별 승용차였는데 운전석에 타기 전에 은선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김민정은 손을 흔들었다.
“나름 해피 엔딩이네요.”
“민정이가 마음고생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선곤 씨 반응도 나쁘지 않던데요?”
그랬나?
고개를 돌린 앞에서 안다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제 우리도 가요.”
그런 뒤에 몸을 일으켰다.
계산을 마친 강성태는 안다미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조수석에 올랐다.
“성태 씨도 참 걸리는 사람 많네요. 이제 TV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말이 돌 텐데 더 힘든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강성태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안다미가 혼잣말처럼 내놓은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