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2부 22권 - 15화
문을 연 최치곤의 부친 최재섭은 파자마 바지에 늘어진 티셔츠 차림이었다. 반가워할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놀라고 두려운 얼굴이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우리 치곤이…? 치곤이 그놈이 잘못됐냐?”
외국에 드나든다고 만날 수 없다던 최치곤, 느닷없이 TV에 보도된 테러, 마지막으로 밤늦게 혼자 찾아온 강성태를 보며 최재섭은 불행한 소식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모 장숙경이 그렇더니 못 본 사이 최재섭 또한 훌쩍 나이 든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이모부만큼이나 듬직하던 최재섭이 어느새 쪼그라진 몸으로 강성태를 두렵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 솔직하게 말해줘. 너는 그럴 수 있잖아?”
“아, 진짜. 우리 아버지 왜 이렇게 늙으셨어?”
강성태는 놀라고 당황한 최재섭을 안았다.
장숙경만큼이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의 작아진 몸이 유독 마음을 아리게 다가왔다.
“진짜 아무 일 없어요, 아버지. 저 믿으시잖아요.”
“정말 괜찮은 거야?”
“치곤이 놀라게 해주려고 몰래 왔어요. 치곤이가 여자 친구 생겨서 얄밉기도 했고요.”
“치곤이가 여자가 생겼어?”
“예. 카페에서 일하는 이은주 씨라고 기억하세요?”
진실을 알고 싶어 상체를 뒤로 빼내는 최재섭을 보며 강성태는 부드럽게, 그리고 듬직하게 웃어주었다.
최재섭의 시선이 강성태의 상처들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이번에 치곤이는 마카오에 안 갔어요. 대신 다음번에 멕시코 갈 때는 꼭 함께 갈 생각이에요. 약 올라서 그냥 못 두겠어요.”
“여자가 생겼다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
“어? 우리 아버지 이제 웃으시네?”
“에이, 나쁜 놈.”
세월은 강성태와 최치곤에게 연륜과 경험을 가져다준 대신 장숙경과 최재섭에게서 젊음과 강단을 빼 내간 모양이었다.
사고가 터졌을 때 최재섭은 항상 의연했었다.
땅을 팔고, 집을 팔고, 변호사를 구할 때도, 심지어 구치소에 면회 가서도 최재섭은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낡은 주택에서 홀로 늙어가며 아들을 염려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녁은?”
“먹었죠. 안 드셨어요?”
“나야 제시간을 건너뛰면 손이 떨려서 못 견디지. 그래, 진짜 무슨 일이야?”
“이거요. 치곤이가 아버지께 면세점에서 파는 양주 한 병 꼭 선물하겠다며 벼르길래 제가 선수 쳤지요.”
강성태는 면세 쇼핑백에 담긴 양주를 들어 보였다.
“치곤이가 선물하기 전에 제가 먼저 하려고요. 이거 알고 약 올라 할 거 생각하니까 재미있잖아요. 아버지도 뵙고 싶었고요.”
강성태의 얼굴을 들여다본 최재섭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치곤이는 요즘 뭐 해?”
“사실은요. 전에 일하다가 조금 다쳤어요.”
집안을 향해 들어가던 최재섭이 움찔하며 멈추고는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아버지는 이런 건가, 그의 눈빛에서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핑계로 은주 씨랑 잘돼서 여전히 병원에 버티고 있어요. 조만간 은주 씨랑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올 거예요.”
“여기를?”
“미래를 약속한 거 같던데요? 저는요, 아버지. 치곤이가 여자한테 잡힐 줄은 몰랐어요.”
“치곤이가 잡혀? 그 아가씨가 그렇게 강단 있어?”
“말도 마세요. 꼼짝도 못 해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건네며 거실에 들어온 강성태는 최재섭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말릴 틈도 없이 넙죽 절을 올렸다.
“왜 이래?”
“카페에서 못 드리니까요. 아, 이제 치곤이 데이트 시간이니까 전화해서 약 올려야겠다.”
“데이트 시간은 또 뭐야?”
“카페 끝나면 은주 씨가 찾아가서 둘이 병실에서 알콩달콩 하나 봐요. 1인실이라 의사랑 간호사들도 닭살 돋아 한다던데 전화해서 김 빼놓으려고요.”
“거! 그러지 마!”
“어? 아버지? 서운하게 치곤이 편드시는 거예요?”
“못난 놈이 처음으로 여자 만난다는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스마트폰을 꺼내 든 상태에서 강성태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자 최재섭이 멋쩍게 따라 웃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야 할 시간이었다.
왜 병원에 있는지, 멕시코는 왜 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곤잘레스 이두안과 은선곤을 팔아먹는 대신 카르텔에 대해서 굳이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홀로 남아 걱정할 늙은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주는 일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믿었다.
**
서면 식구파는 이십여 명 정도 되는 소규모 조직이었다.
규모가 작은 것도 있지만, 백 명이 넘는 조직이라고 해도 당장 경상도와 부산 바닥에서 신강남파 이교창에게 맞서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실 서면 식구파의 인원수는 오늘 일에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우르르, 달려간 신강남파 부산 덩치들은 이교창의 지시에 따라 일단 두들기고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술 마시다 피떡이 돼서 끌려온 놈, 늘어져서 TV 보다 깨진 놈,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기다가 불려 나간 놈들은 느닷없이 비처럼 쏟아지는 몽둥이를 맨몸으로 받았다.
부산은 역시 항구의 도시였다.
“커흑. 컥.”
은은한 조명을 품은 바다가 멀리 펼쳐진 항구의 창고에 꿇어앉은 덩치 중 한 명이 코와 입에서 쏟아지는 피 탓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교창은 그 뒤에 들어섰다.
덩치들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은 이교창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꿇어앉은 놈들을 돌아보았다.
잠시 삐딱하게 피범벅으로 꿇어앉은 서면 식구파 덩치들을 바라보던 이교창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찰칵.
“후우-.”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을 때였다.
“형님!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 말씀이나 해 주십시오!”
중간에 앉은 덩치가 억울함이 가득한 음성으로 이교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장기봉이가 우리 보스 노렸다. 그러면 설명이 되냐?”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본 야쿠자 밑구녕 빨았다고, 이 씨발 새끼야! 놈인지, 년인지 모를 야쿠자를 위해서 삼각별 승용차 렌트했고, 운전까지 해서 우리 보스 노렸다고! 이제 상황이 이해돼?”
“그 씨발 새끼가 진짜!”
이교창의 앞에 꿇어앉았던 덩치가 상황에 맞지 않을 독한 욕을 뱉었다.
“이러지 마시고요, 형님. 차라리 연장 하나만 쥐여 주십시오, 형님. 제가 그 개새끼 모가지 잘라서 형님 앞에 내놓겠습니다!”
“너는 몰랐다?”
“알든, 몰랐든, 기봉이, 그 개새끼가 형님 말씀 어기고 야쿠자 밑구녕 핥아버린 건 사실 아닙니까? 죄는 제가 받겠습니다, 형님. 대신요. 식구들 전부 물 먹이며 몰래 개아리 튼 그 개새끼 멱은 제 손을 따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 형님!”
툭, 피우던 담배를 던진 이교창이 허벅지에 팔을 걸치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지금껏 독하게 의지를 밝힌 덩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금껏 서면 식구랍시고 설치는 너를 그냥 둔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 보스가 세 가지만 아니면 그냥 두라고 해서다. 하나는 마약, 다른 하나는 고리대금업, 그리고 야쿠자나 삼합회와 손잡지 말 것.”
이어질 이교창의 말이 곧 판결이어서 지금껏 다부지게 뜻을 밝혔던 덩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뒤에 이교창이 “치워.” 한마디만 하면 서면 식구파는 드럼통에 들어가 바닷속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너를 보니까 한 번은 믿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가 보스께 전화 드려서 내 이름을 걸고 이 정도 선에서 서면 식구파는 용서하자고 말씀드려야 해. 알았냐?”
어떻게 하지?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던 이교창이 숨을 길게 내쉰 뒤에 다시 가져왔다.
“네가 뒤빡 쳐서 나만 욕 처먹는 거면 이대로 끝내겠는데 노익이 형님까지 걸려.”
“형님. 그라믄요, 제가 기봉이 작업해서 형님께 드리고, 형님 그늘 아래로 들어가겠심니더.”
“아효, 이 개새끼야! 그러게 동생 관리 좀 잘하지, 이게 무슨 꼴이고?”
갑갑해서 그런지 이교창의 마지막 말에는 사투리가 묻어 나왔다. 그러면서 이교창은 알았다. TV에서 보도한 마카오 테러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발휘하는지 말이다.
지금껏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서면 식구파가 저렇게 쉽게 신강남파 그늘로 들어오겠다고 한 게 그 증거였다.
**
야간 근무를 위해 지구대에 도착한 김민정은 정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았다.
지구대의 밤은 술 취한 사람들로 시작해서 그들이 술에서 깰 때쯤 끝난다고 봐야 했다. 최근에는 여성들과 관련된 사건에 반드시 여경이 달려가야 해서 특히 김민정은 반드시 현장을 지켜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민정이 근무하는 지구대는 다른 곳에 비해서 사건이 월등히 적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소위 조폭들의 시비가 이상하리만치 없었다.
아직은 무료한 시간이라, 김민정이 오늘 찾아가지 않은 운전 면허증 목록을 살필 때였다.
“이 양반이 대한민국 최고 조직 두목이라던데?”
뉴스를 보던 선배 경찰이 말을 건넸고, 옆에 앉았던 그의 동료가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경찰이 하는 말을 모른 척하기 어렵고, 궁금하기도 해서 김민정도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이 사람 보이지? 이게 신강남파 행동대장 이병렬이고, 이게 유섭우라고 하더만. 폭발 때 뛰어가서 테러범 끌어안은 게 신강남파 보스 강성태고.”
이름을 듣는 순간, 김민정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으로 멍했다.
“어떻게 알았어?”
“본청 수사과에 동기가 있잖아. 최근에 지구대별로 주취 사건이나 사소한 폭행 사건이 없어진 게 모두 여기 신강남파 보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이 사람이 뭘 어떻게 했기에 그래?”
“일반인 건드는 건 가만 안 둔다고 얼마나 족쳤는지 진짜 깡패들은 시비가 붙으면 먼저 고개 숙이고 도망 다닌다고 하더라고. 윗선에서도 이 정도면 눈감아 주자는 식으로 지켜보는 중이고.”
“이야! 저런 깡패 두목이 우리 동네 살면 진짜 편하겠는데?”
“신월동 산다더만 뭐.”
“그래요?”
털썩, 소리가 나도록 김민정은 의자에 늘어졌다.
그 직후였다.
전에 호프집에서 매니저와 직원을 때렸던 덩치들이 김민정을 알아보고는 세상 얌전하게 죄를 자백하던 일부터, 중고차 매장에서 있었던 일까지, 지금껏 있었던 이해하지 못할 상황들이 환하게 불을 켠 것처럼 김민정의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이런 깡패 두목이 어떻게 저런 사업가의 경호를 맡았지?”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고 하던데?”
답을 하던 선배 경찰이 주변을 둘러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국회랑 방송국, 고검까지, 백도 대단해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고. 저 공사 따오는 바람에 우리나라 어지간한 그룹들이 저 양반 싸고돌아서 당장 우리는 손도 못 대는 수준이라던데 뭐.”
“이런 놈들은 돈도 많겠지?”
“말도 마. 클럽에, 카지노에, 이번 공사로 번 돈만 해도 천억 단위란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질 돈이지.”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가슴이 뻑뻑해서 민정은 억지로 숨을 내쉬었다.
아파트를 사라며 내준 돈이 그렇게 번 거였을까?
은선곤 정도로 대단한 남자가 강성태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신월동 집까지 찾아왔던 게 협박당해서였고?
‘어떻게 해, 엄마?’
이사가 문제가 아니라 장숙경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우선 확실히 알아본다.
다른 사람의 ‘그렇다더라.’ 보다는 김민정이 직접 알아보고 확인한 뒤에 판단한다.
숨을 길게 내쉬었던 김민정이 독한 눈으로 선배 경찰이 보는 보도에 눈을 돌렸다.
**
그랜드 서울 호텔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병렬은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나다. 뭐 하는데 연락이 없어? 뭐? 잠깐만 기다려.”
고속도로에 진입한 승용차가 속도를 올리는 틈에 이병렬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보스랑 함께 듣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봐.”
- 장기봉이가 형님. 그랜드 호텔에 함께 있어서 지금 동생들하고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개새끼?”
- 올라가서 문을 열면 호텔 경비랑 경찰이 오게 생겨서 일단 지키고 있는데 밀고 올라가서 그냥 달아올까요, 형님?
김진용의 평소 성품이나 행동으로 봐서 이병렬이 허락만 하면 특급 호텔의 문을 부숴서라도 장기봉을 잡아오고 남는다.
강성태는 이병렬을 향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금 가니까 일단 지켜보고 있어. 혹시 그 안에 그 새끼 나오면 그때 달고.”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이병렬이 입술을 뒤틀 때였다.
순서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교창입니다, 형님. 통화되십니까, 형님?
“지금 괜찮아. 말해.”
- 서면 식구파 전부 달아다가 두들겼는데, 장기봉이가 혼자 먹겠다고 조용하게 처리해서 이쪽에서는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형님.
이게 말이 돼?
강성태가 시선을 돌리자 이병렬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의미로 보였다.
- 허락하시면 장기봉이를 직접 작업하겠다고 하고, 그 뒤에 신강남파에 몸담고 싶다고 합니다, 형님.
다시 시선을 돌린 앞에서 이병렬은 같은 반응이었다.
“서면 식구파는 잘 판단해서 결정하고, 나중에 결과만 알려줘. 그리고 지금 있었던 일을 노익이 형님께 말씀드리고.”
-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장기봉이 작업하는 건 이쪽 동생들한테 맡깁니까?
“그건 일단 모른 척하라고 해.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어떤 이유에서든 그쪽에서 말이 나가서 장기봉이란 놈이 도망가거나 수작질을 하면 결과가 안 좋을 거란 것만은 분명하게 말해 둬.”
-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형님. 철저하게 관리하고, 노익이 형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이렇게 됐어.’ 하는 얼굴로 이병렬을 본 뒤에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참 징그럽다.
그렇게 회칼을 들이대고 알려줬는데도 돈 몇 푼에 야쿠자의 잔심부름을 하는 깡패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야쿠자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삼합회도 그렇고?
아니면 그 몇 푼 안 되는 돈에 팔려 가는 놈들이 원래 사람 새끼들이 아니라 개새끼들이었을까?
어둠에 갇힌 고속도로는 답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