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2부 22권 - 12화
삶과 죽음이 사실은 한 덩어리인 것처럼 희극과 비극은 동전의 양면인 양 함께 달려들 게 마련이었다.
더 할 수 없이 만족스럽게 본회의를 마친 일행이 곤잘레스 이두안의 전용기가 대기 중인 마카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공항 청사 입구부터 삼합회 조직원이 분명한 덩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위압적인 태도와 표정으로 곤잘레스 이두안과 강성태 일행을 지켜보았다.
정복 경찰은 물론이고, 대테러 특수팀이 소총을 앞으로 두른 상태에서 경비에 나선 참이었고, 세계 유수의 방송사가 따라붙은 상황이어서 당장 삼합회 조직원들이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와 같았다.
글자 그대로 지켜보는 수준이었는데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지금은 이대로 보내주지만, 다음에 마주하게 된다면 빚을 제대로 갚아주마.’
팽팽한 긴장 속에서 강성태 일행은 곤잘레스 이두안을 둘러싸고, 공항 건물 안으로 향했다.
출국 게이트로 향하는 청사 안쪽은 좀 더 많은 삼합회의 조직원들이 바둑판에 일정하게 깔아놓은 검은 돌처럼 촘촘하게 서 있었다.
충돌이 있을까?
삼합회가 날뛰면서 또 다른 특종을 만들어주나?
기대를 가득 품은 방송 카메라들이 삼합회 조직원들을 담았고, 이어서 곤잘레스 이두안과 강성태 일행을 줄줄이 따라붙었다.
빤히 경찰들이 나섰는데도 그 앞에서 이따위 무력시위를 하는 건, 신강남파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삼합회의 체면이 밟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과 강성태 일행을 향해 경찰들과 특수팀이 달라붙었다. 그렇게 홍콩 경찰들과 경찰 특수팀이 강성태 일행을 출국 게이트로 몰 듯이 감싼 채 움직였다.
출국 게이트 앞에 도착한 강성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강성태의 시선을 따라 이병렬과 유섭우, 고룡동이 고개를 돌렸고,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마저 삼합회 덩치들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심지어 강성태 옆에 선 은선곤까지 은테 안경을 반짝이며 삼합회 덩치들의 시선에 당당하게 맞섰다.
제발 그만하고 이제 좀 한국으로 가라!
아마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크흠.”
경찰 간부인 듯한 남자가 조마조마한 이 상황을 더는 지켜보기 힘들다는 투로 헛기침을 토해냈다. 하기는 마카오 국제공항에서 삼합회가 이성을 잃고 날뛰면 경비를 담당한 간부들은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겠다.
이 정도에서 끝내주지.
픽 웃은 강성태가 몸을 돌리자 일행이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방송 기자들의 카메라도 따라붙지 못하는 안쪽이었다.
어서 가! 그냥 가!
출국 수속은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세관과 검역은 손짓으로 통과했고, 법무부 사열대 직원은 질문 하나 없이 바로 출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CIQ 안으로 들어선 강성태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옅게 웃었다.
아마 타지도 않을 국제선 항공권을 끊었거나 그에 상응하는 명분을 댔을 텐데,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수속을 마친 안쪽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삼합회 조직원들이 서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끝까지 이렇게 같잖은 실력을 보여서 체면을 세우겠다?
탑승 게이트 앞에서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면세점에 들러 선물을 사고 싶습니다.”
계획에 없던 요청이었다.
이런 순간에 쇼핑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존 보스만과 달리, CIQ 안을 둘러본 곤잘레스 이두안은 예의 흥미롭다는 느낌으로 강성태에게 시선을 주었다.
“멕시코 사업에 도움 되는 일이겠지?”
“경호만 생각한다면 조용하게 출국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멕시코 사업을 위해서라면 이런 사소한 위협에도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렇구만.
능청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전용기에서는 면세품을 팔지 않으니 최소한의 쇼핑 시간은 필요하겠지. 자네는 필요한 게 없나?”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대신 미스터 강이 제 선물을 준비해 줄 거라 기대합니다.”
강성태의 의지를 확인한 뒤라 그런지 존 보스만이 그답지 않은 뻔뻔한 대꾸를 내놓았다.
강성태와 곤잘레스 이두안이 마주 선 상황이었고, 그 주변을 존 보스만과 경호팀이 감쌌다.
2선에 은선곤과 신강남파 식구들, 그 바깥에 로페즈와 대원 둘,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 열 명, 마지막으로 경찰들이 촘촘히 둘러쌌는데 곤잘레스 이두안은 세상 태평한 표정이었다.
“30분이면 되겠지? 시간이 급한 게 아니라 내가 원래 누구를 기다리는 걸 잘 못 해서 말일세.”
곤잘레스 이두안의 진심이 묻은 요청이었다.
실제로 강성태가 아는 그는 누군가를 10분, 아니 5분 이상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30분이나 양보했다. 이따위 위협에 밀리지 않겠다는 강성태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지시와 같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30분이면 오랜만에 테킬라를 즐기기에 적당한 여유로군. 그럼 나는 존과 함께 전용기에서 기다릴 테니, 쇼핑을 즐기고 오게.”
마지막에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그가 느긋하게 몸을 돌려 탑승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탑승하겠습니다.’
강성태에게 눈짓을 던진 존 보스만이 경호팀과 함께 탑승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왜 안 움직여?’
영어로 오간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탓에 이병렬과 유섭우, 고룡동이 놀란 시선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강성태가 그들을 향해 짧게 고개를 저은 다음이었다.
영어 대화를 알아들은 은선곤이 괜찮을까 하는 얼굴로 곤잘레스 이두안이 걸어가는 열린 게이트 안쪽을 살폈다. 혹시나 강성태가 떨어진 틈을 이용해 곤잘레스 이두안을 노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국제공항이라 해도 CIQ 안쪽에서 테러가 일어나면 마카오는 앞으로 십수 년간 관광을 포기해야 한다. 거기에 완전히 무장한 특수팀이 지키는 상황이었다.
그걸 넘어서 전용기에 탑승한 곤잘레스 이두안에게 테러를 가하면, 국제 분쟁으로 치달고 남을 사건이었다.
통로 끝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곤잘레스 이두안과 존 보스만을 확인한 강성태는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기다리는 이병렬과 유섭우, 고룡동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보다시피 삼합회가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주었는데 꼬리를 내린 것처럼 가는 건 서운해서 말이지. 지금부터 30분간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즐긴다.”
‘뭐?’
이병렬의 당황한 눈과 표정을 본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투로 웃음을 그려냈다. 삼합회 놈들이 보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의도였다.
웃어? 이런 상황에서?
강성태의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지켜보던 삼합회 조직원들이 눈알을 뒤틀었다.
“삼합회가 협박하는 거잖아. 신강남파가 꼬리를 내리고 가는 건 자존심 상하니까 염장을 긁어줄 겸 해서 쇼핑하자는 거지. 일부러 붙으라는 게 아냐. 쇼핑 정도만.”
“그런 거면,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지!”
뒤늦게 강성태의 뜻을 알아차린 이병렬이 반가운 얼굴로 나섰다.
“30분이라고 했지? 안 그래도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이 걸렸는데 잘됐네! 뭐 하냐? 선물 사러 가자?”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나도 갈 거야.”
“예? 형님?”
“나도 선물 살 게 있다고.”
놀라 묻는 유섭우에게 가볍게 웃어준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동네 마트 규모의 면세점을 향해 걸었다.
방송용 카메라들이 바쁘게 따라붙고 있었다.
“아, 거, 씨발 놈들. 눈알을 하도 부라리니까 겁이 나서 선물을 못 고르겠네. 누가 돈 떼먹고 튈까 봐 그러냐, 뭘 그렇게 빤히 봐, 빤히 보기를!”
방송 카메라가 없는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이병렬은 지금껏 눌러두었던 깡패 억양과 쇳소리를 마음껏 토해냈고, 이어서 양주 네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개 ‘하우 머치?’가 영어 실력의 전부인 신강남파 식구들이었다. 그 바람에 은선곤과 아르윈, 필리핀 조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통역을 대신하고 있었다.
사실 안다미를 위해 마카오를 상징할 만한 선물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마카오를 상징할 만한 건 호텔, 카지노, 그리고 포르투갈 식민지였다는 증거처럼 빵이나 타르트가 전부였다. 그런 이유로 강성태는 가장 먼저 안다미에게 선물할 향수를 골랐다.
“아르윈!”
이어서 강성태는 또 하나의 향수를 선택한 뒤에 유섭우의 계산을 도와준 아르윈을 불렀다.
“이거 어때?”
“향수 아닙니까, 형님?”
“나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많잖아. 고맙고 미안해서 안식구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제가 사겠습니다, 형님.”
“내가 선물해주고 싶어서 이런다니까.”
당황하는 아르윈을 다독인 강성태는 김민정에게 선물할 향수를 하나 더 골라서 포장을 부탁했다.
다음으로 장숙경에게 선물할 화장품, 이모부와 김민재를 위한 선물, 마지막으로 최치곤이 원했던 양주를 담았다.
그 외에도 떠오르는 사람은 많았다.
이병렬 말마따나 조태완과 박노익, 안호상 박사가 생각났는데 희한하게 가장 선물을 고르기 어려운 사람은 유헌우였다.
“나한테 선물할 생각이 들었다면 봉투에 현찰을 넣었어야지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습니까?”
선물을 받은 그가 눈을 삐뚜름하게 뜨고서 뱉어낼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카드를 가져간 점원을 기다리며 강성태는 넉넉하게 면세점 안을 둘러보았다.
목숨 걸고 일해서 번 돈으로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신강남파 식구들의 얼굴에 뿌듯한 자부심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조직을 위해서 회칼을 들고 달려 나가는 일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버는 돈과 이번처럼 방송에 탈 정도로 떳떳하게 번 돈의 무게가 같을 리는 없었다.
이렇게 하나씩 성장하자.
자부심을 품을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협박이나 일삼는 덩치들이 양아치로 보일 테고, 그 뒤에는 진짜 빛을 향해 움직이는 그림자가 될 거다.
그때까지만 고생하자.
덩치들을 둘러본 강성태는 면세점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해도 눈빛에 담은 감정은 충분히 알아본다.
킬킬거리며 쇼핑하는 신강남파 식구들의 의도를 알아챈 삼합회 조직원들의 얼굴에 숨기지 못하는 분노가 가득 올라와 있었고, 이글이글,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씨발 새끼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하기는 이병렬과 유섭우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서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
특히나 강성태가 던지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한 감정은 오히려 말보다 눈빛이 더 효과적이었다.
‘삼합회? 언제고 목을 잘라줄 거니까 생각 잘하고 움직여.’
간부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픽 웃은 강성태는 직원이 건네주는 카드를 받았다.
쇼핑이란 게 원래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가는 모르겠지만, 몇 개 골라 계산했을 뿐인데 25분이 훌쩍 지났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강성태가 고개를 돌린 옆에서 양손 가득 비닐 쇼핑백을 든 이병렬이 만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거 한 병 넘으면 세금 나와.”
“뭐?”
“양주는 한 병만 면세일걸?”
정말 몰랐는지 이병렬이 눈을 끔벅였다.
“제가 사람들과 나눠 들고 들어가면 됩니다, 회장님.”
그때 옆으로 다가온 은선곤이 구세주 같은 느낌으로 이병렬을 거들고 나섰다.
강성태는 일행들과 함께 면세점을 나서 곤잘레스 이두안의 전용기에 연결된 게이트에 들어섰다.
정말 끝났다, 마카오 회의가.
너 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그러니 어서 네가 사는 어둠으로 가버려!
마카오의 햇살을 가득 품은 자그마한 청사 건물이 강성태가 걷는 게이트 연결 통로를 향해 독한 느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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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잘레스 이두안의 출국 모습까지 보도한 방송은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한 느낌으로 쇼핑하는 신강남파 덩치들의 모습을 짧게 전했다.
모두 조태완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화면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여전히 어색했는데 그나마 적응했는지 짧은 보도가 아쉬웠다.
출국 보도가 나오고 반나절이 지나도록 강성태는 연락이 없었다.
도착하고 남을 텐데?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회장을 챙겨야 할 테니 강성태는 연락하지 못해도 이병렬이나 유섭우 정도는 잘 도착했다고 전화쯤 해주었으면 싶었다.
밀려난 퇴물이라도 걱정하고 있을 거란 생각쯤 해주면 좋을 텐데.
“저는 그럼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 형님.”
점심과 커피까지 함께하며 시간을 보냈던 박노익이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그도 분명 연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당장 조태완만큼 서운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또 연락하자.”
보스가 바쁜가 보다, 그 말 한마디를 하기가 이상하게 부끄러웠고, 짐작하고 있다고 해도 속을 내보이기 싫어서 조태완은 엉뚱한 대꾸를 내놓았다.
“쉬십시오, 형님.”
박노익이 깍듯하게 고개 숙이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바깥에서 긴장한 음성의 인사가 안쪽에 있는 조태완에게까지 들렸다.
이곳은 조태완이 지내는 장소였다.
어지간한 인물이 와봐야 이곳을 지키는 덩치들은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직하게 인사한다.
누군데 이렇게 요란하게 인사해?
조태완이 시선을 들었고, 인사하던 박노익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문이 열리고 후광처럼 등에 빛을 짊어진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강성태였다.
몇 시간 전에 TV로 보았던 강성태, 만찬장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을 구했고, 멋진 태도로 본회의장을 지켰던 그 강성태였다.
한국에 오면 마주 앉아 홍삼 달인 물을 함께 마시고 싶었던 그 강성태 말이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형님?”
그 뒤로 이병렬이 들어서며 인사했는데 강성태를 향해 고개가 굳어버린 것처럼 조태완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가슴이 울컥해서 대꾸조차 못 하는 조태완이 염려되었던 모양으로 강성태가 다가섰다.
“어떻게 여기를 왔어?”
“형님께 가장 먼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진짜 나이 들었나 보다, 조태완은.
“바쁠 사람이 왜 나까지 신경 써?”
‘이런 게 갱년기 아니냐?’
슬쩍 시선을 던지는 박노익의 옆에서 조태완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강성태에게 투정을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