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2부 22권 - 6화
제3장. 피를 먹으며 이루어진다.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는 잔인하도록 느리게, 이별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빛살처럼 빠르게 흐르지만, 사실 시간이란 놈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개념이었다.
면담이 거듭될수록 곤잘레스 이두안은 만족한 표정으로 사업 파트너들을 배웅했고, 그와 달리 거실과 복도를 지키는 신강남파 식구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피로가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일 오전에 있을 본회의를 끝으로 경호 업무를 벗어던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특히, 칭찬할 사람은 이병렬과 유섭우, 아르윈이었다.
강성태에게 도움 되겠다며, 또 이 기회에 신강남파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겠다며 이병렬과 유섭우, 두 사람이 있는 힘껏 덩치들을 이끌었고, 아르윈은 아예 본회의가 끝난 뒤에 숨을 다하는 사람처럼 휴식을 외면한 채 움직였다.
저녁 만찬을 앞두고, 정작 고통받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삼합회의 섭충명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호세 로페즈 니에토였다.
부속 객실의 휴게실에서 말을 잊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로페즈는 뒤늦게 지금까지의 과정이 머리에 떠올랐고, 상관의 지시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독한 눈매로 뒤를 돌아보았던 로페즈는 그대로 몸을 돌려 부속 객실의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잠시 들어와.”
그가 인솔한 대원 네 명이 무슨 일이지, 하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친 직후에 훈련받은 몸짓으로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앉자.”
편하게 자리를 권했으나 로페즈의 표정과 눈매를 확인한 네 명이 긴장을 풀지 못하는 태도로 소파에 앉았다.
“우리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특수부대원이다. 그 점은 다들 알 테고.”
상석에 앉은 로페즈가 깡마른 볼을 오른손으로 긁다시피 쓸어내린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답을 하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란다.”
대원 넷을 차갑게 돌아본 로페즈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중에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암살을 명령받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솔직하게 말해.”
그의 요구가 나온 직후에 얼음물을 퍼부은 것처럼 서늘한 냉기가 소파 주변을 휘감았다.
“이해하기가 어려웠지. 왜 우리를 경호 업무에 파견했을까 하고. 전에 여기 경호책임자가 카르텔과 손잡은 우리 가페 대원들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곤잘레스 회장이 엄청난 투자를 해주면서 관계를 원만하게 풀었고.”
무언가를 씹는 것처럼 볼을 씰룩인 로페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보답으로 곤잘레스 회장의 경호에 나선 줄 알았다. 우리 조국 멕시코의 발전을 위해서.”
호세 로페즈 니에토가 구릿빛 얼굴을 천천히 돌려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불행하게 카르텔과 연관된 대원들이 우리 가페에 아직 많다. 우리 중에도 가족이나 친척, 혹은 동료가 카르텔과 연결됐을 수도 있고. 다 이해한다. 우리 조국의 현실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 지금은 내게 솔직하게 말해다오. 따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
진지한 질문이었고, 돌덩이만큼이나 묵직한 요청이었다.
진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경호책임자가 그러더군. 테러가 있을 거라고. 나는 자신 있게 그들과 맞서 싸울 거라고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들을 막지 못하거나 회피한다면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도 좋다고 약속했고.”
말을 마친 로페즈가 품에 손을 넣어서 권총을 꺼냈고,
철컥.
대놓고 노리쇠를 당긴 후에 엄지로 안전고리를 풀었다.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더할 수 없이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다들 총을 내놔.”
고개를 반쯤 떨구고 있던 대원들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는데 로페즈는 ‘덤비려면 얼마든지?’ 하는 표정이었다.
“너희 네 명이 모두 같은 임무를 받았었나? 곤잘레스 회장을 사살하고 나면 인솔자인 내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너희는 적당하게 빠져나가라고?”
“저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 없습니다.”
가장 오른편에 있던 대원이 로페즈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하기는,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이미 안전고리까지 풀어낸 로페즈를 감당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심스럽게 권총을 꺼낸 대원이 테이블에 올린 뒤에 앞으로 밀었고, 왼손을 내밀어 권총을 받은 로페즈가 남은 대원 셋을 돌아보았다.
“나 역시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한 칸 건너뛴 로페즈의 정면 대원이 권총을 꺼내 바로 앞에 놓아주었다.
남은 대원 둘은 시선을 떨구고 있을 뿐, 움직임이 없었다.
이런 거였구나.
저 두 놈이 곤잘레스 이두안의 머리통에 방아쇠를 당기는 계획을 세웠고, 죄는 인솔자인 로페즈 니에토가 뒤집어쓴다.
이후의 과정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멕시코로 돌아간 저 두 놈은 불명예제대를 하더라도 카르텔의 도움으로 부를 누리는 더러운 결말이었다.
탱크가 단 한 대도 없는 육군, 미국에 의존하는 공군과 해군, 훈련을 위한 탄환조차 부족한 군대, 세계 최하위 전투 능력에 형편없는 대우를 핑계로 부패한 군인.
아무리 현실이 그렇더라도 추악한 임무를 받은 두 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삼키기 위해 로페즈 니에토는 자꾸만 볼을 씰룩였다. 게다가 테러를 막겠다고 나서면 멕시코로 돌아가 살해될 테고, 모른 척하면 강성태의 총에 머리가 날아간다.
이래저래 로페즈 니에토는 함정에 빠진 꼴이었다.
**
곤잘레스 이두안의 집무실 앞의 거실에 들어선 로페즈 니에토는 바로 강성태를 향해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말투는 이전과 같았으나 태도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떻게 보면 마치 마음에 들지 않는 군대의 상사를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아니면 조용하게?”
“조용한 곳이 좋겠소.”
존 보스만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다시 시선을 돌려 로페즈 니에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고, 상처받은 고양이처럼 독이 오른 눈빛을 하고서도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까 통제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서면 복도에서 무조건 제압해.”
“알겠습니다, 미스터 강.”
존 보스만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따라오라는 시선을 던지고는 거실 구석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커피 좀 줄까?”
“나중에 하겠소.”
순수하게 대화를 하려는 사람은 차라리 물을 청할지언정, 절대 차나 음료를 거절하지 않는다. 로페즈는 음료를 모두 거부했다. 그렇다면 지금 있을 대화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회의실로 들어간 강성태는 먼저 자리에 앉아 맞은편에 자리하는 로페즈를 바라보았다.
“우리 대원 네 명 중 두 명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암살을 지시받은 모양이오. 조금 전에 알았소.”
정작 의심하고 있던 로페즈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툭 암살 지시를 털어놓았다. 시작부터 워낙 화끈한 고백이 나온 바람에 강성태는 한 대 얻어맞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른 두 명은 믿을 수 있고?”
“내 판단으로는 그렇소.”
그렇다면야.
강성태는 알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로페즈가 암살을 털어놓은 덕분에 적어도 곤잘레스 이두안의 근처에서 가페 대원들을 밀어낼 명분을 얻었다.
“오늘 테러가 있소?”
“그보다는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를 먼저 알려주었으면 싶은데? 그래야 나도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하지 않을까?”
“그도 그렇겠소.”
미련하지는 않은데 영특하지도 않은 군인, 로페즈의 현재 모습이 강성태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마른침을 삼켰던 그가 가페 상관과의 통화부터 휴게실에 대원들을 불렀던 상황을 말투까지 흉내 내며 고스란히 강성태에게 전해주었다.
“젠장.”
강성태의 말에 눈 끝을 꿈틀했으나 로페즈는 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멕시코 정부에서 중국 정부에 연락했다면, 내가 기대했던 삼합회의 테러가 없어질 수 있어서 나온 욕이다. 당신한테 욕한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게 그렇게 되는 거요?”
이 인간은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갑갑한 얼굴로 입맛을 다신 강성태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 구석으로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던 로페즈가 커피를 따르는 강성태를 보며 착잡한 느낌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
“커피보다는 부탁이 있소.”
“말해.”
“명예롭게 죽게 해주시오.”
“어떻게? 이마에 아너(honor)라고 커다랗게 써줄까?”
커피를 따라서 탁자로 움직이는 강성태를 로페즈가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제 종일 관광에 카지노와 해산물 뷔페를 돌아다니고, 그전에는 야쿠자 회장의 머리통을 날리면서 겨우 만들어놓은 테러를 당신이 없던 일로 돌려 버린 꼴이다. 그런데 내게 명예로운 죽음까지 내놓으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냐?”
테러를 자신한 뒤에 저런 계획이 있었나?
머리가 팽팽 돌지 않는 멕시코 특수부대원이 강성태를 보며 감탄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좋아. 테러는 내가 해결한다고 치고, 어떻게 해주면 당신이 명예롭게 죽는 거지?”
“테러범을 내가 상대하겠소.”
“혼자서?”
“이대로 내가 멕시코에 돌아가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죽소. 카르텔에 관해서는 알 거 아니오?”
달각.
강성태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멕시코에 가서 카르텔 손에 죽느니 이곳에서 경호하다가 죽고 싶다? 원하는 게 그거야?”
“그렇소.”
“염병.”
거친 말을 뱉은 강성태를 로페즈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 이번 것도 오해하지 마. 짐이 자꾸 늘어나는 거 같아서 혼자 뱉은 욕이니까.”
“나는 짐이 아니오.”
빌어먹을 벽창호.
로페즈를 보며 강성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장 혹시라도 이성을 주워들었는지 모를 섭충명을 자극해야 한다는 부담이 강성태에게 훅 달려들었다.
섭충명을 자극해야 한다, 이거지?
강성태는 신강남파 덩치들이 서 있는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보고를 들은 섭충명의 이마에서 빠직 핏줄이 돋아올랐다.
“다시 말해봐.”
“호텔에 마련된 가든에서 한국식 바비큐 파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숯불에 돼지고기를 굽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걸 좀 보십시오.”
디지털카메라로 멀리서 잡은 동영상이었다.
고기를 굽는 집게를 소총처럼 겨눈 덩치가 방아쇠를 당긴 듯 상체를 뒤로 젖히자,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덩치가 벌렁 넘어가며 죽는시늉을 했고, 함께 앉아 있던 덩치는 손과 발을 이용해 바닥을 기었다.
세 살짜리 아이도 아카시 회장의 죽음, 그리고 저격에 놀라 당황하는 섭충명을 비웃는 거라고 짐작할 모습이었다.
“흐하하하하! 졸라리 불쌍하지 않냐!”
한국말이었다.
멀리서 찍었는데도 워낙 커다랗게 떠들어서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였다.
섭충명은 한국어를 하는 조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핏줄이 올라와 벌겋게 충혈된 그의 눈에 질린 듯 조직원이 입을 열었다.
“졸라리 불쌍하지 않냐? 하기는, 기어서 가는 걸 어떻게 죽이겠냐? 우리 형님은 너무 착하신 게 문제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개자식이!”
조직원의 손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낚아챈 섭충명이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콰자작!
“권총을 챙겨! 오늘 밤에 이 개자식을 못 죽이면 내 손으로 이 몸뚱이의 껍데기를 벗기고 인체의 신비전에 서겠다!”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고 느낄 만큼 독하고 강렬한 섭충명의 각오가 터져 나왔다.
**
만찬 시작 한 시간 전이었다.
강성태는 만찬장의 벽을 타듯이 덩치들을 세웠고,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을 호텔 직원 복으로 갈아입혔으며, 키란에게 입구를 맡겼다.
“조명은?”
“원하시는 대로 준비했습니다.”
강성태의 질문에 존 보스만이 바쁘게 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팽팽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JBC를 포함한 여러 방송국과 언론사에서 취재까지 나와 이곳저곳에서 방송용 조명을 켜고 만찬장을 담고 있었다.
“병렬아! 회장님 동선 다시 확인해.”
“오케이.”
이병렬이 유섭우와 함께 곤잘레스 이두안이 움직일 동선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 모두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위급한 순간에 곤잘레스 이두안을 지켜줄 방탄벽이었다.
테러가 있으리라 확신하는 만찬이었다.
만찬장 입장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진해지는 긴장이 경호팀과 신강남파 덩치들을 뻑뻑하게 만들고 있었다.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만찬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은선곤이 방송 카메라 여러 대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몇 명은 만찬장의 분위기를 담으려 원탁 테이블에 놓인 접시와 이름표 등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이 만찬장에 섭충명이 뛰어들면서 멕시코 정부와 중국 정부, 삼합회의 관계가 틀어진다.
또, 이번 테러를 계기로 중국 삼합회는 야쿠자들과의 관계가 비틀어질 테고, 더 나가서 베트남, 태국 조직과도 척을 지게 된다.
목적이 분명하고 성과가 확실하지만, 한 명이라도 희생자가 나오면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테고, 만에 하나 곤잘레스 이두안이 죽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다.
“후-.”
숨을 길게 내쉰 강성태는 입구에 선 키란을 먼저 눈에 담았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이병렬과 유섭우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