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2부 22권 - 5화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내 명예와 자존심을 걸 수는 있어도 군인인 나는 가페의 명령에 따를 뿐, 결정권을 지니지는 못했소.”
조금은 갑갑한 얼굴로, 그러나 적당한 핑계를 찾은 듯한 표정으로 로페즈가 대꾸를 내놓았다.
“그것참 편리하군요. 그렇다면 반드시 최측근 경호를 맡아야 한다는 건 명령을 받아서입니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요구한 겁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받은 로페즈가 눈을 꿈틀했다.
“기존에 있는 우리 경호팀 역시 레드 워터에서 선발한 만큼, 모두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멕시코 정부에서 반드시 최측근 경호를 미스터 로페즈의 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나 역시 그 점에 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존 보스만에게 고개를 돌렸다.
“곤잘레스 회장과 레드 워터의 제이 브라이튼에게 연락해서 지금 내용을 멕시코 정부에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미스터 강.”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존 보스만이 답을 내놓았다.
“뭐 하자는 거요?”
곧바로 거친 로페즈의 항의가 날아들었고,
“하나만 선택해. 지금 항의하는 게 멕시코 정부의 명령이야, 아니면 가페 대원이라는 자부심에 멕시코 정부를 핑계 댄 거야? 자존심도 명예도 걸지 못하는 특수부대원에게 어떻게 최측근 경호를 맡겨?”
그만큼 강렬한 강성태의 지적이 로페즈를 향해 달려갔다.
“자존심과 명예는 걸겠다고 하지 않았소? 다만, 앞으로 가페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가 약속하지 못한다는….”
급하게 오가던 대화의 끝에서 로페즈가 말끝을 삼켰다. 그런 뒤에 그는 제대로 얻어맞았다는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가 급하게 뱉어낸 말에 앞으로 가페가 계속 멕시코 공사를 방해할 거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알고 싶은 건 다 안 셈이니 내가 양보하지. 테러는 분명하게 있을 거다. 범인을 제압하지 못하거나 외면한다면 내가 너와 너의 대원들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도 다른 소리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 그것도 가페의 허락이 필요한가?”
“약속하겠소! 그 정도는!”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 받아들인다면 충분하지.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약속을 확인하는 것처럼 로페즈를 들여다본 뒤에 몸을 돌렸다.
거실 한쪽에 있는 작은 회의실이었다.
굵직한 걸음으로 강성태를 따른 존 보스만이 문을 닫고는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정말 테러가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저 친구들은 그 기회에 회장님을 노릴 겁니다.”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면 되지.”
“테러범들은 누가 감당합니까?”
마치 자신은 경호원이 아니라는 듯한 질문이어서 강성태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존 보스만을 빤히 보았다.
“아! 물론 나 역시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알고 있다면 사전에 막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로페즈와 그의 대원들이 올 때 우리가 염려했던 건 그들의 총구가 회장님을 겨누는 거였다. 테러범들이 들이닥칠 때, 저들은 실제로 회장님을 노릴 계획이었던 거 같고.”
직전의 대화를 떠올린 모양으로 존 보스만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테러가 발생하면 나는 정당하게 저들에게 총구를 겨눌 명분을 얻었어. 그거면 된 거 아닌가?”
“그럼 미스터 강이 로페즈를 자극했던 이유가 그 목적 때문이었습니까?”
“하나 더 있지. 적어도 멕시코에서는 삼합회가 설치지 못하게 하는 거, 다음으로 일본의 야쿠자와 가페가 삼합회에 적개심을 품게 하는 거. 그 정도면 멕시코에서 지내기가 훨씬 수월하겠지.”
이젠 묻기가 겁난다는 얼굴로 존 보스만이 고개를 저었다.
“지켜봐. 그리고 테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회장님 곁을 지켜. 나머지는 내가 키란과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번 계획을 위해 야쿠자 두목을 사살하면서도 삼합회 간부를 그대로 둔 겁니까?”
똑똑한데?
강성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웃자, 존 보스만은 입술을 둥글게 만들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
강성태와 함께 움직이는 신강남파 식구들이 복도와 거실에 자리하는 바람에 2선 경호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덕분에 로페즈가 거실을 나서도 특별히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행원들을 위한 복도 맞은편의 부속 객실로 자리를 옮긴 로페즈는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호세 로페즈 니에토입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로페즈는 조금 전 강성태와의 대화를 있는 대로 상관에게 보고했다.
- 이, 멍청아! 누가 네 멋대로 그따위 약속을 하라고 했나!
딴에는 일을 잘 풀었다고 자신하며 전했던 보고에 대뜸 거친 반응이 날아왔다. 그 바람에 로페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 한국까지 날아갔다가 굳이 마카오까지 간 이유가 뭐야? 곤잘레스 이두안이 없어야 시에라마드레 지역의 공사가 중국 정부와 보리스 파리오 회장에게 넘어가는데, 뭐? 테러를 막겠다고?
“죄송합니다만, 저는 중국 정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습니다.”
- 임무는 알고 있었잖아! 임무는!
“이미 2선으로 밀려난 상황이라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멕시코에서 곤잘레스 회장을 손에 넣는 게 좋으리라 판단했습니다.”
- 그걸 왜 네가 판단하냐고!
물론, 로페즈는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곤잘레스 회장의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넘어오는 상관의 분노를 감당하면서 로페즈는 안에서 서서히 분노가 끓어올랐다.
“원하시는 게 곤잘레스 회장의 죽음입니까?”
-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나?
강성태를 흉내 내듯 슬며시 던진 질문에 더할 수 없이 명확한 대꾸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로페즈는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당했다. 깨끗하게.
강성태와 약속한 점이 있으니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한다면 지금 상관의 의도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꼴이 되고, 약속을 지키면 상관의 지시에 정면으로 맞서는 꼴이 된다.
더구나, 테러가 일어났는데 모른 척한다면 강성태가 로페즈와 대원들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도 좋다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 강성태는.
그래서 자존심과 명예를 걸라고 유도했고, 마지막에는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도 된다는 답까지 얻어냈다.
로페즈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 혹시 다른 약속이나 대화는 없었나?
차마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라고 했다는 보고를 할 수는 없어서 로페즈는 입을 뒤틀었다.
- 다른 게 있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 좋아. 내가 우선 중국 정부와 연락하고 전화할 테니까 그때까지 대기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로페즈는 폐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오로지 만찬 시간만을 기다리던 섭충명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 왜 대답이 없어?
“산주. 저는 이미 만찬장에서 강성태와 곤잘레스 회장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산주께 허락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명예를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계획이 바뀌었다고 하잖아. 멕시코 정부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급하게 하는 협조 요청을 어떻게 거절해? 네가 원하는 게 우리 삼합회의 명예야, 아니면 섭충명 개인의 이름값이야?
이럴 수는 없다.
아무리 망가졌다고 해도 삼합회의 부산주인 섭충명이 이대로 얌전히 있다가 껍데기를 홀랑 벗긴 몸뚱이로 인체의 신비전에 서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 당국이 원하는 건 멕시코 공사지, 반드시 섭충명, 네 손으로 강성태나 곤잘레스를 죽이라는 게 아니잖아. 그들은 멕시코 대원들에게 맡기고 이번 일은 내 지시대로 해. 너에게는 다른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대외적인 체면을 중시하고, 용서라는 게 없는 삼합회의 특성상, 산주는 반드시 섭충명에게 잔인한 처벌을 내릴 게 분명했다. 이전에 섭충명이 부하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지금 가장 빠른 비행편을 알아봐서 북경으로 와.
“알겠습니다, 산주.”
순순히 답을 하는 섭충명의 눈이 악랄한 느낌으로 번득였다.
**
확실히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으로, 마카오에 도착하기 무섭게 곤잘레스 이두안은 연달아 사업 파트너들의 방문을 받았다.
모두 만찬장에 참석할 이들이었고, 멕시코 사업에 참여한 기업인들이며, 또 내일 있을 본회의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사람들이어서 곤잘레스 이두안은 오히려 방문이 반가운 느낌이었다.
세 번째 면담을 마친 다음이었다.
거실까지 나와 사업 파트너를 배웅한 곤잘레스 이두안이 강성태를 향해 눈짓을 던졌다.
‘잠깐 안에 들어갈 테니까 좀 더 주의해.’
존 보스만에게 시선으로 안을 가리킨 강성태는 곤잘레스를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 하겠나?”
“감사합니다.”
도자기 주전자를 든 곤잘레스 이두안이 두 개의 찻잔에 연달아 커피를 따랐다.
책상의 위치, 탁자, 소파, 커피 테이블, 세계 어디를 가도 그의 집무실은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음식마저 같아서 곤잘레스 이두안에게 해외 출장은 그저 비행기를 타고 또 다른 집무실에 들르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저렇게 평생을 사느니, 이병렬의 말마따나 칼을 든 적과 맞서는 게 강성태에게는 훨씬 편안한 일이었다.
“들게.”
“감사합니다.”
곤잘레스가 건네준 찻잔을 받은 강성태는 모처럼 제대로 된 커피를 입에 머금고 향과 맛을 함께 즐겼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일 오전 회의에서 모든 게 결정 나지. 어떤가? 그렇게 되겠나?”
“오늘 중으로 특별한 일이 있겠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슬쩍 강성태를 보았던 곤잘레스가 쓰다, 달다, 말없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평생을 납치와 테러의 협박에서 살아온 그에게 강성태의 말이 반가울 리는 없겠지만, 모른 상태에서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테러가 있으리라는 확답을 들은 게 오히려 위안이 되는 눈치였다.
“회의가 내 뜻대로 끝날 수만 있다면 작은 소란이야 감당해야지.”
“회장님.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됩니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궁금한 얼굴로 강성태의 질문을 기다렸다.
“멕시코의 도시 건설에 모든 걸 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공사가 진행되고, 나중에 완성된다면 더는 이런 사업을 진행하지 않으실 겁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뭔가 알 거 같다는 얼굴로 가벼운 웃음을 그렸다.
“사람은 늘 선택을 강요받지. 성장이냐, 안정이냐. 성장은 늘 고난과 고통을 수반하고, 안정은 나태와 부패를 불러들인다네. 그래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네.”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답이어서 강성태는 이어질 곤잘레스의 말을 기다렸다.
“자네는 어떤가? 한국에서는 대항할 곳이 없는 조직을 이룬 거 같던데, 거기에 만족하나? 쉽지 않겠지.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고, 자네 나름대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니까. 이럴 때 말일세.”
남은 커피를 입에 넣은 그가 찻잔을 내려놓은 뒤에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 자네에게 묻는 거지. 한국에서 조직을 이끌면 충분히 행복할 텐데 굳이 마카오까지 와야 했냐고? 자네의 답은 뭔가?”
“숙명이라는 게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보다는 자네가 더 큰 쪽을 선택해서 고난과 맞설 건지, 아니면 나태와 부패를 경계하며 안정을 찾을 건지가 우선이겠지. 자네의 의지가 곧 숙명 아닐까? 삼합회, 야쿠자, 또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자네의 의지. 조직원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고 싶은 욕망.”
경호대상과 경호원으로 지내던 이전에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진지한 대화였다.
“회장님이 정말 원하시는 건 뭡니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품고 있던 질문을 내놓았다.
“단순히 돈을 원한 거라면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나는 부패한 정치인, 사악한 카르텔을 밀어낼 정도의 부와 힘을 지니고 싶네. 그래서 내 조국 멕시코가 대한민국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라. 앞으로 로라가 살아갈 내 조국 멕시코가 말일세.”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언젠가 말했었지? 가페에도, 평범한 시민 중에도, 사업가들 사이에도 나와 같이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네. 그 목적을 위해 내가 선택한 최후의 파트너가 자네이고.”
강렬한 느낌으로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며 건넨 말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 목적, 전 재산을 붓다시피 시에라마드레 산맥을 개발하겠다고 나선 이유, 그리고 테러가 있을 거라는 데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여유가 지금의 대화로 모두 설명되었다.
“자네도 느꼈겠지? 내가 단순한 경호팀장이 아니라 파트너로 자네를 대한다는 걸 말일세. 더 솔직하게 말하지. 안전을 위해 한국에 갔었네. 그런데 자네가 의사들을 구해내는 걸 보며 나는 멕시코가 자네의 손에서 구원받을지 모른다는 꿈을 품었지.”
말끝에서 옅게 웃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한국에서 조직을 이끌게 된 게 자네의 의지요, 숙명이 아닐까? 그러니 이제는 나를 지켜주고, 우리 멕시코를 대한민국처럼 안전한 나라로 만들어주게. 조직의 발전에 이보다 더 큰 기회가 있겠나, 파트너?”
한순간, 곤잘레스 이두안이 던진 그물에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정확하게는 운명이라는 놈이, 아니면 숙명이란 자식이 던진 그물에 걸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