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2부 22권 - 3화
제2장. 이제 24시간 남았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무섭다. 그리고 그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삶을 아예 포기한 사람이고.
밤새 조직원 한 명만 데리고 객실에서 밤을 지새운 섭충명은 삶을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이게 회의 일정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소위 ‘섭충명의 새끼’ 열 명을 아침 일찍 불러놓고 A4 용지를 내놓았다.
“내일 오전에 곤잘레스 회장이 들어와서 저녁 만찬을 개최한다. 강성태, 이 개자식이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를 제외한 나머지 호텔의 예약을 모두 취소했으니 만찬은 그곳에서 열릴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의 일 이후로 퀭한 몰골이었던 건 부정하기 어렵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금 섭충명은 정기를 빨아먹고 사는 귀신과 지난밤을 보낸 사람처럼 뼈와 거죽만 남은 얼굴이었다.
“일본의 아카시 조직이 우리 산주께 거칠게 항의하는 건 모두 알고 있겠지? 아카시 회장이 사살당했는데 왜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냐는 질문에는 나도 답을 못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사람?”
그래도 ‘섭충명의 새끼’라 불리는 열 명이었다. 답을 내놓는 조직원은 없었는데 반대로 아직 기죽지 않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뭐든 상관없다. 강성태, 그 개자식이 나를 멸시하는 건지, 일본 놈들과 전쟁을 붙이려는 건지, 그건 전혀 상관없단 말이다!”
콰앙.
말끝에서 섭충명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일 만찬장에 들어가겠다. 한 사람당 권총 세 자루를 준비해서 길을 열어. 그리고 내가 강성태와 곤잘레스 이두안을 해결하면 나가.”
“부산주?”
거칠게 부르는 조직원을 향해 섭충명은 손을 들었다.
“사건은 산주가 알아서 무마하겠지만, 일단 홍콩에서의 충돌로 앙심을 품은 내가 원한을 갚기 위해 나선 거로 하자. 혹시 잡히더라도 그렇게 진술해. 그 외에 부탁이 하나 있다.”
입술을 암팡지게 비틀며 시간을 끈 섭충명이 씹듯이 말을 뱉었다.
“내가 실패하고, 죽게 되면 말이다. 이 몸뚱이가 인체의 신비전에 서 있지 않게 처리해다오.”
남자의 시체에서 절대 잃으면 안 되는 부분이 세 곳 있다.
머리, 심장, 그리고 성기, 머리를 잃은 사람은 개로 태어나고, 심장을 빼앗긴 사람은 뱀으로 태어나며, 성기를 잃어버린 사람은 죽어서 귀신조차 걷어차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껍데기를 홀랑 벗겨 사람들이 보는 앞에 머리와 심장, 성기를 드러내면 섭충명은 혹여 환생한다고 해도 개나 뱀이 전부였고, 재수 없으면 이리저리 차이는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었는데 솔직히 그게 무슨 걱정이겠나.
진짜 두려운 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영원히 비웃음거리로 남는 일이었다. 그것도 껍데기를 홀랑 벗긴 몰골로 말이다.
“저게 섭충명이다!”
개망신을 피하고자 하는 섭충명의 애절한 바람을 들은 조직원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카시를 죽이면서도 섭충명을 살려둬서 굴욕에 빠트리더니, 이제는 죽어서도 손가락질 받을 처지에 던져두었다.
말하지 않았으나, 조직원들 모두 강성태에 대한 원한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눈빛과 얼굴이었다.
“다시 말한다. 나는 먼저 강성태의 머리통을 뚫겠다. 그리고 다음은 곤잘레스 이두안이다. 만약 멕시코의 가페 대원들이 곤잘레스를 제거한다면 일이 좀 더 쉽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섭충명이란 이름 석 자를 지키겠다는 그의 의지가 조직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너희는 길만 열어.”
“맡겨주십시오, 부산주.”
비장한 각오가 담뿍 담긴 답에 섭충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였다.
조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재킷의 앞을 여민 조직원이 들어왔다.
지켜보는 조직원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상체를 구부려 움직인 그가 섭충명의 귀에 대고 뭔가를 말해주었다.
“이런 개새끼!”
콰아앙! 콰앙! 콰앙!
분노를 이기지 못한 섭충명이 테이블을 연달아 주먹으로 내리쳤다.
무슨 일인데 저러지?
테이블에 올린 주먹을 부르르, 떠는 섭충명을 그의 새끼 열 명이 긴장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강성태, 이 개자식이 버스를 빌려 관광에 나섰단다.”
섭충명의 말을 들은 조직원들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부산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차라리 버스를 따라붙어서 벌집을 만들어버리시죠!”
“놈이 바라는 게 그거야! 그래서 안 돼! 못 해! 그렇게 해서라도 회의 장소를 한국으로 돌리려는 게 놈이 노리는 거라서 안 된다고! 그렇게 하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 인체의 신비전에 서게 된다고! 그게 아니면 장기를 모조리 빼앗긴 채 다리만 전시장에 걸리든가!”
분해 미칠 거 같은데 당장 어쩌지 못해 터져 나오는 섭충명의 고함은 절규처럼 처절했다.
**
곤잘레스 이두안이 사용하는 집무실 바깥의 거실이었다.
멕시코 가페 출신 호세 로페즈 니에토는 분을 삭이지 못한 태도로 존 보스만에게 다가갔다.
“언제까지 이럴 거요?”
“뭘 말하는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을 거인 특유의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으로 존 보스만이 받았다.
“우리는 경호를 위해 멕시코 정부가 선발한 가페 대원들이오.”
“제 경력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레드 워터 출신이라는 것쯤 알고 있소.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한눈에 봐도 저들은 경호의 기본이 안 돼 있잖소? 아니, 경호는 관두고 기본적인 훈련조차 받지 않은 사람들이잖소?”
“경호팀장의 지시입니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경호팀장에게 당장 연락해서 우리를 근접 경호에 넣어주든가, 아니면 통화라도 하게 해주시오.”
으르렁대던 로페즈 니에토가 막말을 쏟아낸 직후였다.
드득. 드드득.
존 보스만이 위협적인 태도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정장을 입고 신사답게 대해드리니까 가페 출신이 아니면 모두 허접스럽게 느껴지시나 본데, 레드 워터에서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시험해 보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검은 피부, 그 안에서 유독 하얗게 빛나는 눈동자, 호세 로페즈 니에토의 허벅지만큼이나 두꺼운 팔뚝, 무엇보다 얼마든지 붙어주겠다는 각오까지, 존 보스만은 진심으로 보였다.
“정 이렇게 우리를 무시한다면 돌아가겠소.”
“내일 오전에 출국하면 점심 전에 경호팀장을 만날 수 있소.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임명한 경호팀장의 지시를 받지 못하겠다면 돌아가시오. 아! 한 가지만 더.”
검은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반쯤 떠오른 상태에서 존 보스만이 말을 계속 이었다.
“나와 내 팀 역시 경호팀장의 지시에 따라 2선 경계를 맡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오. 멕시코에 돌아가서도 정부에 이 부분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게 좋을 거요. 아니면 나와 대질해서 그 부분에 대해 밝혀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을 거요.”
“크흠.”
멕시코 팀과 기존의 경호팀을 차별하지 않았다.
정당한 경호팀장의 지시를 부당하게 거절하고 돌아간 건 너희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일이다.
분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실제로 식사 시간이나 곤잘레스 이두안이 거실에 잠깐 나오는 순간에도 존 보스만과 그의 경호팀은 2선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후우. 내가 좀 흥분했던 모양이오.”
“이해합니다. 내일 출국이니 잠시 휴식하며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존 보스만의 뻔뻔한 권유에 호세 로페즈 니에토가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의 웃음을 토해냈다.
**
마카오는 돌아볼 곳이 많지 않았다.
오전을 이용해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온 이병렬은 객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후, 씨발. 차라리 칼 든 놈과 맞서고 말지,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버스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더니 발바닥이 다 저릿저릿하다.”
실제로 이병렬은 정말 지친 얼굴이었다.
소파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옆으로 기대 있던 이병렬이 생각난 게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오후에도 버스 타냐?”
“아니.”
“그럼 뭐 하는데?”
“카지노 한번 돌아보려고. 슬롯머신도 해보고.”
“씨발. 이번에는 뒤통수가 근질근질하겠네.”
깡패들에게 욕은 접두사나 접미사와 같다는 말을 조태완이 했었다. 욕을 뱉는 족족 강성태가 주먹을 꽂아 넣는 바람에 나온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병렬 역시 앞이나 뒤에 꼭 욕을 붙였는데 이상스레 밉지 않았다.
“밑천도 주냐?”
“한 사람당 천 달러.”
“따면 내가 가져?”
“물론.”
테이블에 앉아 물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강성태를 이병렬은 물끄러미 보았다.
물을 마신 강성태는 왜 그러냐는 투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짐작한 대로 살아 돌아왔으니까 할 말은 없는데 오전에 삼합회 새끼들이 미쳐 날뛰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막말로 버스에 권총 갈겨대면 너도 별수 없었을 거 아냐? 웃기는? 대답이나 해 봐. 어쩌려고 그랬어?”
“버스에 총질하려면 삼합회 놈들이 어떻게 해야겠냐?”
“뭐?”
“버스가 달리는 동안, 앞뒤에 승용차가 두 대씩, 그 주변으로 오토바이가 깔려있었어. 그리고 저기.”
강성태는 시선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키란을 가리켰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키란이 경계를 섰다. 만약 승용차와 오토바이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승용차나 승합차가 있었다면 키란이 운전수를 한 방에 보냈을 거다. 여기 아니면, 여기를 뚫어서.”
강성태는 오른손 검지로 이마와 심장을 차례로 가리켰다.
“너는 뭐 하고?”
“키란이 놓친 놈이 있다면 잡아야지.”
답을 한 강성태는 슬며시 바짓단을 잡아서 올렸다. 그리고는 발목에 걸린 권총을 이병렬에게 보여주었다.
“카지노에서는 어떻게 할 건데? 거기에는 승용차나 오토바이가 못 들어오잖아?”
“슬롯머신을 할 때 화면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것처럼 살펴. 그럼 뒤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모두 보여. 화면 위에 상금이 붙어 있다. 각도가 앞으로 기울어 있어서 네가 앉은 주변의 10미터 안쪽은 다 살필 수 있고.”
막힘없는 강성태의 답에 졌다는 투로 이병렬은 고개를 저었다.
“필리핀 조직원들이 알아서 지킬 거다. 그리고 고작 우리를 잡자고 카지노에서 총질을?”
강성태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웃었다.
“총격이 벌어진 카지노는 망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마카오 카지노 전체에 당분간 손님이 뚝 끊긴다. 그건 삼합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그러니 당장 카지노만큼 안전한 곳도 없지. 저놈들이 오히려 야쿠자나 태국, 베트남 조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테니까.”
“나한테 천 달러 준다고 했지?”
강성태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넘버 투인데 조금 더 줘야 하지 않냐?”
능글맞은 질문을 던졌던 이병렬이 객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디 갔어?”
“인터뷰. JBC 방송국에서 오전에 도착했거든.”
강성태를 물끄러미 보던 이병렬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삼합회 부두목이란 그 개새끼는 진짜 죽고 싶겠다.”
섭충명이 정말 안 됐다는 얼굴로 웃은 이병렬이 문 앞에 서 있는 키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란? 커피 있냐?”
“드릴까요?”
“부탁하자.”
궁금하고 불안했던 점들을 모두 해결한 이병렬이 세상 태평한 얼굴로 커피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키란이 문 앞에 서 있는 이유를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다.
만약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키란에게 커피를 달라는 요청을 했을 리가 없었다.
**
살아있는 1분, 1초가 지옥에 있는 듯한 고통처럼 보였다. 섭충명은.
“카지노에서 나와 해산물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미치고 팔짝팔짝 뛸 일이었다.
재킷 안과 서랍에 권총이 있었다. 탄창도 여유 있고.
냅다 달려가 시원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욕망을 참기 위해 섭충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왜?
그는 화두를 붙잡은 고승처럼 오로지 한 가지 질문에 매달렸다.
도대체 왜 아카시를 죽이는 그 순간에 섭충명을 살려두었으며, 내일 오전에 곤잘레스 이두안이 들어오는데도 마치 삼합회 따위 아무런 걱정거리도 안 된다는 듯이 관광에, 카지노에, 심지어 해산물 레스토랑을 떼거리로 돌아다니냐는 말이다. 왜? 왜?
지금쯤 똑같은 보고를 들은 삼합회의 산주와 다른 부산주들, 그리고 조직원들이 섭충명을 어떻게 생각하라고?
혹시 노리는 게 그거였을까?
깊어진 눈에는 귀기가 서렸고, 푹 꺼진 눈 아래쪽에는 죽음이 고인 탓에, 뼈와 거죽만 남은 그의 얼굴은 불길 대신 독을 태우는 화로를 머리 위에 올린 등신불처럼 쪼그라들어서 이제는 악만 남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의 새끼들이라 불리는 열 명의 조직원들조차 시선을 마주하기 두려운 눈치였다.
“부산주.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그래도 충성심을 간직한 조직원이 쟁반에 죽을 담아 가져왔다.
죽? 강성태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빨갛게 익은 게를 뜯고 있을 텐데 고작 죽을 먹으라고?
번득, 시선을 들었던 섭충명은 볼을 씰룩이며 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이제 24시간 남았다. 그 정도 굶는다고 죽지 않아. 그만큼 내 안에 독기가 더 단단해지니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나 단단히 먹어 둬.”
그의 말대로였다.
내일 오전에 입국하는 곤잘레스 이두안이 만찬에 참석할 때까지 꼭 하루 남았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장수가 검을 닦듯이 품에서 권총을 꺼낸 섭충명은 탄창을 확인했고, 이어 헝겊을 짚어 노리쇠 부근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살벌한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그의 정수리에 피어오른 물음표가 주변을 지키는 조직원들의 눈에도 보이는 듯싶었다.
도대체 강성태가 노리는 게 뭘까?
왜 섭충명을 이렇게 놔두고서 태연하게 카지노에 들렀다가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낼까?
밤이 깊어지도록 답을 알 길은 없었다.
“강성태가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두 시간 뒤에 조직원이 들어와서 전하는 보고를 섭충명은 처연한 태도로 받았다.
삶을 버린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