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2부 22권 - 2화
존 보스만은 복잡한 표정으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멈추세요.”
환장할 노릇이었다.
경호 책임자인 그가 고룡동의 제지를 받아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곤잘레스 이두안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아닌 강성태와의 약속이었고, 실제로 지금 전하려는 소식이 그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고룡동의 무식하고 투박한 경호를 통과하고서야 존 보스만은 곤잘레스 이두안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고룡동과 신강남파 조직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건 곤잘레스 이두안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심히 지친 얼굴로 그가 존 보스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러시아 용병 여섯 명이 승용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두 명은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중태라는 보고입니다.”
누구보다 냉정한 곤잘레스 이두안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존 보스만을 바라보았다.
“심장마비라고 했나?”
“현지에서 분석한 사인이 그렇답니다.”
“특수부대원들이 동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걸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무서운 걸 본 모양이지?”
뻔뻔한 태도로 던진 곤잘레스 이두안의 질문에 존 보스만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태국과 베트남 조직원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점심에는 일본의 야쿠자 두목이 머리가 날아가 죽었다더니 오후에는 러시아 용병이 심장마비로 동시에 사망했다는 보고를 듣게 되는군. 마카오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나?”
“회의 장소 변경을 요청하시겠습니까?”
“우리 경호 책임자의 의견은 어떤가?”
“불행하게 아직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의견을 들은 뒤에 결정하지.”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존 보스만이 아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가 나간 다음이었다.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슬며시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상체를 세웠다.
“보리스 파리오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정말 안타깝군.”
웃음과 함께 혼잣말을 흘린 그는 시선을 돌려 책상 주변을 돌아보았다.
책상 앞에 두 명, 의자 좌우인 거실 창 앞에 두 명, 모두 네 명의 신강남파 조직원들이 그를 빙 둘러싼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경호를 세운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삼합회의 희생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걸 설명할 방법이 없잖은가, 그렇지 않나?”
그가 쏟아내는 영어를 신강남파 조직원들은 못 알아듣는다.
그렇더라도 곤잘레스가 혼잣말을 내놓았으니 한 번쯤 시선을 줄 만도 한데, 어떻게 된 인간들이 나무로 깎아놓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고룡동이란 책임자의 지시만 따르는 터라, 이게 안전한 건지, 불안한 상황인지, 곤잘레스 이두안조차 헛갈릴 지경이었다.
**
사람이 도박을 통해 지닌 걸 모두 날리고 나면 마지막에 내놓을 건 몸뚱이밖에 없다.
섭충명의 현재 상황이 꼭 그랬다.
- 실망이 커. 이렇게 되면 부산주가 인체의 신비전에 출현해줘야 할 거 같은데?
스마트폰을 든 섭충명은 그답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중국 공산당의 체제에 대항하던 반체제 인사들이나 사형수들을 골라 몸을 해부해서 사람의 몸뚱이 속을 고스란히 보여주던 행사가 바로 인체의 신비전이었다.
지금 섭충명의 상황이라면 죽이기는커녕,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껍데기를 홀랑 벗겨 방부제 통에 담글 게 확실했다.
“멕시코 정부가 보낸 가페의 대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곤잘레스 이두안과 강성태를 제거하고 자결하게 해주십시오.”
-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제가 직접 달려들겠습니다. 그 둘의 머리에 총알을 꽂아 넣을 수 있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간절한 섭충명의 애원에도 삼합회의 두목이자 산주의 답은 없었다.
“산주! 그들이 아무리 제 몸에 총알을 박아넣어도 방아쇠 두 번을 당길 독기는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보여드렸던 충정을 생각하셔서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 혼자서 곤잘레스 이두안의 경호원을 뚫고 다가가 그의 머리에 총알을 넣겠다?
“제 호위대 열 명과 함께 가겠습니다. 제가 실패하더라도 그 틈에 가페 대원들의 손을 쓴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곤잘레스 이두안만큼은 제거할 수 있습니다.”
- 흐음.
곤잘레스 이두안을 제거한다는 말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넘어왔다.
“반드시 멕시코를 보스께 올리겠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섭충명이 애절한 각오를 전했고,
- 하오.
그토록 바라던 답이 넘어왔다.
**
윈팰리스 호텔로 돌아온 강성태는 존 보스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먼저 들려주었고, 이어서 곤잘레스 이두안의 출발 시각을 확인했으며, 그의 현재 경호상태와 동선을 세심하게 확인했다.
“호텔은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로 정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대비해.”
- 미스터 강? 호텔을 벌써 확정해도 됩니까?
존 보스만이 근심어린 질문을 건넸다.
경호를 핑계로 가페의 대원들이 붙어 있는 상황이라 공항 도착 전에 호텔을 정하면 그 정보가 삼합회에 넘어갈 거라고 염려하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발표해도 괜찮아. 위약금을 물더라도 다른 곳의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에 곤잘레스 회장이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건네. 나도 저녁에는 그쪽으로 숙소를 옮길 예정이다.”
- 알겠습니다.
강성태가 단단하게 지시하자 존 보스만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회장님께 전화 한 통 드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호텔을 옮긴 뒤에 조금 여유롭게 전화 드리는 거로 하자. 그리고 존.”
- 말씀하십시오.
“마카오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존 보스만, 한 명이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친 다음이었다.
지금껏 장식용인 양, 얌전하게 있던 은선곤이 몇 개의 서류철을 들고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JBC 방송국에서 취재 요청이 있었습니다. 다른 방송국에서도 보도할 예정이기는 한데, 회장님과 저에 대한 독점 인터뷰를 부탁하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회장님은 몰라도 은선곤은 한 번쯤 해줘도 되지 않을까? 혹시 인터뷰하는 게 그룹 컨소시엄에 문제가 되나?”
“홍보 효과가 있어서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자.”
이왕 말이 나온 시점이었다.
강성태는 조금 전에 정한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로 숙소를 옮긴다는 내용과 회의 진행에 있어 은선곤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을 설명했다.
“따로 지시해 두기는 하겠지만, 명심해. 내가 키란과 함께 긴급한 상황에 뛰어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병렬이 곁에 있어.”
“긴급한 상황이라고 하시면 유혈 사태를 말씀하십니까?”
“경호 업무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아.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이 한 번은 있을 거다. 그때 우리 쪽에서 인질이나 희생자가 나오는 게 가장 아프거든.”
“명심해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아카시 미키야토를 저격하고 오는 사이, 얼마나 마음을 다졌는지 은선곤이 제법 다부진 답을 내놓았다. 피가 튀는 현장에서 얼마나 잘 적응할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각오가 어느 정도 도움 될 거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은선곤과의 대화를 마치고 난 뒤였다.
“형님?”
문 앞을 지키던 키란이 강성태를 불렀고,
딩동댕동.
잠시 뒤에 벨이 울렸다.
진돗개도 아니고, 복도에서 걷는 소리를 듣고서 누군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놀라는 은선곤의 시선 앞에서 문에 달린 렌즈를 들여다보았던 키란이 다시 시선을 주었다.
키란이 입을 열기 전이었다.
“아르윈입니다, 형님.”
바깥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필리핀 조직원 두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아르윈은 강성태에게 인사했고, 이어 키란과 은선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전했다.
“저격용 소총은 내가 몸을 숨겼던 장소에 묻어뒀다. 바위 아래라서 찾기 쉬울 테니까 나중에 회수하고, 잠시 뒤에 우리 인원 모두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로 숙소를 옮겨.”
“인원 전체를 말씀하십니까, 형님?”
강성태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병렬이부터 한국에서 온 필리핀 조직원까지 모두. 그리고 모레 오전에 도착하는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역시 그 호텔 특실에 묵을 테니까 참고해.”
“예, 형님.”
아르윈이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다음이었다.
“오늘 밤은 다 같이 저녁 먹었으면 싶고, 내일은 버스를 빌려서 마카오 관광이라도 할까 하는데 준비가 될까?”
“예? 형님?”
“다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호텔에 장소를 요청하고, 내일 오전과 오후에 두 팀으로 나눠서 마카오 관광을 했으면 하니까 버스를 빌렸으면 싶다.”
눈을 끔벅이며 대답조차 못 하던 아르윈이 한순간 입술에 야릇한 미소를 그렸다.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그는 강성태의 의도와 계획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하기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필요한 무기들을 준비했고, 조직원들과 히트맨을 통제했던 인물이어서 어느 정도 눈치챌 수는 있겠다.
‘알아차렸어?’
‘대강 알 거 같습니다.’
강성태와 아르윈이 비슷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대로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확실히 섭충명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짐작한 눈치였다.
**
아르윈이 준비한 시티 오브 드림 마카오의 연회장은 묘한 느낌의 저녁이 진행 중이었다.
뷔페식이었다.
각자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거나 테이블에서 포크를 움직였으나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식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뭐야, 진짜?”
결국, 참지 못한 이병렬이 불평처럼 이유를 묻고 나섰다.
“죽네, 죽이네 하던 거 아냐? 각자 호텔에 흩어져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해놓고 저녁에 느닷없이 이렇게 모은 건 또 뭐야? 이러다가 삼합회가 달려와서 총질해대면 우리 함께 갑니다, 이거 아냐?”
식전 댓바람에 있었던 필리핀 히트맨들의 소식을 들었고, 권총까지 하나씩 허리에 차고 있다 보니까 이제는 총질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강성태는 포크를 들어서 와인 잔 형태의 물잔을 가볍게 두들겼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원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신강남파 덩치들과 필리핀 조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부터 고생 많았다. 덕분에 깔끔하게 태국과 베트남 조직을 정리했고, 일본 야쿠자 회장을 제거했으며, 마지막으로 러시아 용병까지 해결했다.”
대강이나마 들어서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남은 건 삼합회다. 물론 그놈들이 가장 위험하지. 병렬이의 염려대로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지금 달려와서 총질을 해대면 사상자도 많이 나올 테고.”
이병렬을 돌아보았던 강성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변에 앉은 덩치들과 조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별동대라고 생각하자고 했었다. 신강남파 별동대라고. 여기에서, 혹은 내일 우리가 삼합회에 공격당하면 곤잘레스 회장은 회의 장소를 마카오에서 한국으로 변경할 수 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아르윈과 은선곤, 키란을 제외한 나머지 덩치들과 조직원들이 시선을 마주쳤다가 얼른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국과 베트남, 러시아 용병, 일본의 야쿠자 회장이 사망한 사건이 조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이 커지면 그 이유로 회의 장소가 한국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잖아?”
“태국과 베트남, 러시아, 일본이 이번 사건에 얽혀 있어. 마카오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는데 중국 본토나 홍콩을 곤잘레스 회장이나 회의 참가자들이 인정하겠어?”
이병렬의 질문에 강성태가 숨도 쉬지 않고 답을 해주었다.
“이야, 씨발!”
그리고 그 직후에 이병렬의 거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왁자지껄할수록 삼합회는 속이 시커멓게 탈 거다. 그렇게 되면 무리해서 움직일 확률이 높지. 또 하나, 술을 내지 않았다. 유쾌하게 먹고 떠들지만, 긴장을 풀지 말라는 의미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유섭우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유섭우. 삼합회 정도는 해볼 만하잖아?”
“기회만 주십시오, 형님.”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강성태는 가장 멀리 있는 원탁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삼합회가 달려오면 지금 그 자리가 가장 위험해. 안으로 바꿔줄까?”
“아닙니다, 형님! 삼합회를 가장 먼저 들이받을 수 있는 자리를 주셔서 오히려 영광입니다!”
질문만큼이나 당찬 대꾸였다.
“내가 원하는 신강남파의 모습이 바로 이거다. 상체만 깊숙하게 숙이는 게 깡패가 아니라, 지역을 손에 쥐고 평범한 이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밤을 지켜주는 조직,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신강남파의 싸움에서 가장 앞에 설 별동대고.”
숙연한 분위기에 사명감이 피어나는 바람에 울컥 올라온 감정을 삼키는 덩치들이 제법 있었다.
“삼합회, 베트남 조직, 태국 조직, 일본 야쿠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때 우리에 대한 평가가 나오겠지. 물론 지금 우리가 식사하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강성태의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보스. 이제 식사해도 되지?”
뻔뻔한 이병렬의 질문이 조용한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상하게 식욕이 확 사네. 너희는 어때?”
“배고픕니다, 형님!”
“깡패 뭐 있냐, 씨발! 졸라리 먹고 보는 거지!”
“감사합니다, 형님!”
픽 웃는 강성태 앞에서 이병렬이 몸을 세웠다.
“뭐 하냐? 음식 가지러 가자?”
언젠가 강성태가 했던 말을 흉내 낸 듯한 이병렬의 권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