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2권 - 1화 (434/513)

《434》2부 22권 - 1화

제1장. 섭충명은 죽는구나.

크지 않은 산을 뒤지던 삼합회와 야쿠자들이 물러갔다.

먼저 아카시 미키야토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고, 앞뒤의 진출로를 오래 막아두어서 경찰이 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더는 버틸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비트 안에 있으면 빛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리고 키란은 이런 경우에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비트의 벽에 손바닥과 얼굴을 붙이고 버티던 키란이 입술을 늘인 뒤에 “찌익. 찍.” 하는 쥐 소리를 토해냈다.

손을 이용해 비트의 옆구리를 파기 시작하자 잠시 후에 흙이 무너지며 강렬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빛에 적응한 강성태와 키란은 저격용 소총을 그 자리에 묻어두고 느긋하게 비트에서 나왔다.

멍청하게 직선으로 내려가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어서 강성태는 키란과 함께 필리핀 조직원들이 기다리는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시에라마드레 산맥을 뛰어다니던 두 사람에게 이 정도는 그야말로 동네 뒷산 수준이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멀찍이 차를 세워두었던 필리핀 조직원들이 급하게 다가왔다.

아카시 미키야토의 사망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옷을 가져다준 필리핀 조직원 둘은 아예 사신을 보는 듯한 태도로 강성태와 키란을 대했다.

“특별한 소식이 있나?”

“아카시 미키야토가 죽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리고 아르윈 형님이 전화를 기다리십니다.”

“주변은?”

“아까 경찰이 오면서 포기하고 모두 철수했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조직원들에게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믿어도 될 수준이었다.

“일단 윈팰리스 호텔로 가자.”

“모시겠습니다.”

뒷자리에 키란과 강성태가 타자 필리핀 조직원들은 바로 승용차를 움직였다.

기다리고 있다니까.

달리는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는 아르윈의 번호를 눌렀다.

- 아르윈입니다, 형님.

“지금 산에서 내려와 출발했다. 호텔까지 대략 20분에서 30분쯤 걸릴 거 같은데 그쪽 상황은 어때?”

- 러시아 용병들이 승용차 두 대를 렌트했습니다. 움직임으로 봐서 형님을 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입술을 내민 강성태는 ‘당연히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 대한 준비는?”

- 렌트한 승용차가 주차장에 있는 데다, 염려하신 경계조차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 알겠습니다, 형님.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호텔에 도착하시면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러시아 용병들이 움직일 테니, 그때쯤 해결되겠다.

통화에서 질문하지 않았지만, 아르윈은 왜 섭충명을 놔두고 아카시 미키야토를 사살했는지 궁금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키란과 마찬가지로 질문하지 않았다.

리더가 능력을 보이면 믿음이 생기고, 조직은 이렇게 발전한다.

또한, 지시를 내리더라도 실행해야 하는 사람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요구해야 책임감과 사명감도 생긴다.

하나씩 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죽겠지? 섭충명?

너는 해줘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 죽으면 안 돼.

섭충명을 떠올린 강성태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바르지오 만시니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미스터 강?

“지금 빠져나왔다. 그 바람에 연락이 늦었어.”

- 연락이 끊겨서 긴장하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 그나저나 왜 섭충명을 놔두고 야쿠자 회장을 사살한 거지? 자네라면 충분히 섭충명을 노릴 수 있지 않았나?

키란과 아르윈이 참아냈던 질문을 바르지오가 내놓았다.

섭충명에 대한 원한이 깊은 탓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참이라 충분히 이해 가는 반응이었다.

“어떤 무대든 메인 이벤트는 마지막에 나와야지. 그가 해줘야 할 역할이 있기도 하고.”

- 그런가?

아쉬운 감정이 담뿍 묻었던 바르지오의 반응이 기대에 가득 찬 질문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용병들을 해결할 텐데 그 뒤에 섭충명의 동선을 상세하게 파악해주고, 가능하면 CCTV 영상도 확보해주었으면 싶다.”

- 그건 염려하지 마, 미스터 강. 아! 그리고 존 보스만의 두꺼운 목이 길게 늘어지는 모양인데 어지간하면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어떤가?

“러시아 용병까지 해결한 뒤에 연락하자. 쉽게 진행되는 거 같지만, 삐끗하는 순간에 모든 게 망가질 수 있어.”

- 알았다. 그럼 이 통화까지는 전해줘도 되겠지?

“물론이다. 그럼 러시아 용병들을 해결하고 통화하자.”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메인 이벤트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

유리 마고첸프는 현장에 있었던 삼합회 조직원에게 아카시 미키야토의 사망 장면을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물었다.

총소리가 나고부터 머리가 터질 때까지 몇 초나 걸렸는지, 머리가 터진 아카시 미키야토가 뒤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앞으로 엎어졌는지, 당시에 바람은 어디에서 얼마나 불었는지, 앉아 있는 방향은 어땠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짐작했을 텐데 근처를 확인하기는 했소?”

- 말대로 총알이 날아온 방향과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호텔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소.

“그렇다면 분명 저격한 장소에 숨어 있을 텐데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소?”

- 아카시 미키야토 회장의 시체를 처리해야 했고, 주변 도로를 너무 오래 막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해서 지금은 모두 빠져나왔소.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유리 마고첸프는 한심하다는 투로 한숨을 뱉었다.

“만약 한 시간 뒤까지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해가 떨어지는 시점에 밖으로 나올 확률이 높소. 아직 그곳에 있을지 모르니 우리가 일단 가서 확인하겠소. 혹시 총소리가 나면 해결해 줄 수 있소?”

- 강성태의 시체만 넘겨준다면 기관총을 사용해도 알아서 처리하겠소.

간절한 느낌의 대꾸를 들은 유리 마고첸프가 무시하는 듯한 비릿한 미소를 그려내며 통화를 마쳤다.

객실 네 개에 두 명씩,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유리 마고첸프를 포함해 여덟 명이었다.

“무장해서 움직인다. 언제고 객실을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연락해.”

나직한 러시아 말로 지시한 유리 마고첸프는 삼합회를 통해 지급 받은 대검과 권총을 허리와 발목에 걸었다.

의자에 앉은 그가 발목의 권총을 단단히 묶고 상체를 세웠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강성태가 산에서 내려왔소. 윈팰리스 호텔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과 뒤에 필리핀 조직원들로 보이는 승용차가 함께 움직이고 있소.

“그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소?”

- 10분쯤 예상하면 맞을 겁니다.

시간을 확인한 유리 마고첸프가 급하게 몸을 세웠다.

“호텔에서 총격이 있을지 모르오.”

- 뒤는 우리에게 맡기면 됩니다.

습관처럼 비릿하게 웃은 유리 마고첸프가 통화를 마쳤다.

“연락해. 바로 윈팰리스 호텔로 움직인다.”

오전의 일들을 듣고 나서 호텔을 통해 승용차 두 대를 렌트해 놓아서 당장 현장을 찾는 데 문제도 없었다.

“준비됐습니다.”

함께 지내던 대원의 보고에 유리 마고첸프는 객실을 나섰다.

복도에 둘, 엘리베이터 앞에 둘, 그리고 반대편 복도에 둘, 유리 마고첸프와 함께 객실을 나선 대원 하나, 이들은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힌 대로 자리를 지켰고, 순서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삼합회의 안내를 받으면 좀 더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강성태를 제거하는 일에 삼합회 따위의 아마추어가 섞이면 자칫 아군의 희생으로 이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숫자를 확인하며 유리 마고첸프는 사진으로 보았던 강성태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격용 소총으로 머리를 날리고, 비트를 파고 숨어?

딴에는 전문가 흉내를 내는 모양인데 제대로 훈련받은 진짜배기 특수부대 교관과 대원들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는 점을 잠시 후에 뼈저리게 확인시켜 줄 생각이었다.

물론 결과물은 강성태의 시체가 될 테고 말이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유리 마고첸프 일행은 정해진 순서대로 차량으로 움직였다.

여덟 명이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타는 방식이었다.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느니 하는 깡패들의 같잖은 방식을 따라 할 것 없이 각자 자신이 올라탈 자리로 움직여 직접 문을 열고 동시에 차에 올라탔다.

이럴 때 달려들어서 총을 들이대면 어떻게 하냐고?

러시아 특수부대를 너무 얕잡아 보니까 나오는 질문이었다.

이미 시선으로 각자 경계할 방향을 확보하고 있어서 누군가 조금만 수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권총을 꺼내 반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췄다.

반응 속도도 그렇다.

어설픈 깡패 따위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피를 뿜을 수밖에 없을 만큼 훈련된 정예였다.

당장 승용차가 두 대인 이유도 만약 한 대가 공격받으면 다른 한 대는 공격하는 자를 들이받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유리 마고첸프가 지시할 때까지 시동조차 걸지 않고 대기하며 주변을 살피는 상황이었다.

“출발해.”

마침내 유리 마고첸프가 지시를 내렸고,

부르릉.

운전석에 앉은 대원이 시동을 걸었고, 그걸 신호로 뒤차에서도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그 직후였다.

“커흑.”

운전석에 앉은 대원이 기묘한 신음을 토해내며 조수석의 대원을 힘겹게 돌아보았다.

붉어진 볼, 커다랗게 뜬 눈, 입에 물린 거품, 무언가에 중독된 얼굴이었다.

“내려!”

급하게 고함을 지른 유리 마고첸프가 손잡이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끄윽.”

그는 윤활유가 말라버린 엔진처럼 뻑뻑하게 굳어버린 심장과 아교를 부어 넣은 듯 꽉 막힌 코와 입을 버둥거리며 숨을 쉬기 위해 애썼다.

‘이게 왜…?’

KGB에서 사용하는 독극물, 부검에서도 흔적이 남지 않는 신경독이 어떻게 네 명을 모두 중독시킬 수 있었을…?

버둥대는 그의 시선에 손잡이를 붙든 손이 들어왔다.

‘이런 개자식!’

러시아가 자랑하는 특수부대 교관 유리 마고첸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

보고를 받은 아르윈은 감탄을 넘어 기가 막힌 심정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확하게 확인한 부분만 다시 말해봐.”

- 유리 마고첸프를 포함한 여섯 명은 차 안에서 사망했고, 두 명은 병원으로 후송됐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유리 마고첸프가 죽은 건 확실하지?”

- 천으로 얼굴을 묶어서 이송하는 걸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우리 쪽 피해나 수사에서 걸릴 위험은?”

- 말씀하신 대로 와이퍼 아래 송풍구 연결 부위, 손잡이, 창에 분사한 게 전부여서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불려간다고 해도 독극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조사해서 걸릴 부분이 없습니다.

“수고했다.”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뒤에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이럴 수도 있나?

마카오로 출발하기 전에 강성태가 요구한 건 히트맨, 저격용 총, 독극물, 권총, 칼이었다.

히트맨과 칼은 태국과 베트남 조직원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했다. 다음으로 저격용 총은 아카시 미키야토를 사살하는 데 이용했으며, 독극물로는 러시아 용병을 승용차 안에서 몰살시키다시피 했다.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방법을 계획했을까?

아니, 그보다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요구했던 무기들을 이용해 적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아직 강성태가 사용하지 않은 무기는 권총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제거 대상은 섭충명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강성태는 권총을 이용해 섭충명을 제거할 장소와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무섭다, 강성태는.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이런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고, 그렸던 그대로 적을 제거하는 강단과 실력에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것만이어도 놀랄 일인데 태국과 베트남 조직원들을 살해한 오전의 사건이 언론에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사건이 시끌시끌하게 터지면 아르윈이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도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안전을 이유로 회의 장소를 한국으로 변경하자고 요구할 수 있었다.

강성태를 체포한다고?

무슨 명분과 어떤 이유로?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곤잘레스 이두안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경호 책임자를 체포하는 마카오의 경찰을 믿을 수 없다며 회의 장소 변경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섭충명은 죽는구나.’

아르윈은 강성태가 세운 계획안에서 섭충명이 도망갈 방법이 없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짐작하는 그 역시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섭충명이 죽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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