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2부 21권 - 17화
밤 비행이었다.
날개 끝에서 반짝이는 붉은색 불빛이 전부인 하늘 저 아래로 하나둘 도시의 하얀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페리를 이용하면 더 빠르겠지만, 이 시간에 운항하지 않는 관계로 공항에서 마카오까지는 버스로 이동한다. 마카오에서 입국심사가 더 있으니까 여권 확인하고, 입국 후에는 호텔별로 다른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질문?”
설명을 마친 강성태는 갑갑한 얼굴로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자꾸 눈치를 보는데 이래서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해. 궁금한 걸 삼키면 그 대가는 목숨이라니까.”
강성태의 뜻이 전해졌을까?
중간에 있는 덩치가 손을 들었다.
턱으로 그를 가리키자 시선이 우르르 뒤를 향해 움직였다.
“형님이나 병렬이 형님께 연락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 혹시 의심스러운 장면이 있어서 필리핀 조직원들에게 말하지 않고 곧장 여쭤볼 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형님?”
자리에서 일어난 덩치가 질문을 마친 뒤에 강성태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동시에 얻은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대놓고 옅게 웃었다.
함부로 나선 건가?
덩치가 시선을 떨구었을 때였다.
짝짝짝짝짝.
강성태는 칭찬하는 느낌이 분명하게 손뼉을 쳤다.
‘이게 칭찬받을 질문이야?’
시선으로 묻는 이병렬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질문이다. 의아한 일이 생기거나 필리핀 조직원에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여겨지면 언제고 내게 전화해. 번호 모르는 사람?”
강성태는 아예 대놓고 번호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신강남파 별동대로 한다. 괜히 눈에 띄는 이름 붙여 봐야 나중에 구속될 확률만 높아진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돼야지 않을까 생각한다. 별동대의 특권은 앞으로 누구를 만나든 고개만 숙인다.”
“감사합니다, 형님.”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덩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예 인사하지 말라고 다그쳐서 어색해지느니 이렇게 고개만 숙이는 게 훨씬 서로 편할 일이었다.
“다른 질문?”
박수를 받은 덩치 덕분인지, 몇 명이 더 질문했으나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대신,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또 가볍게 고개 숙이는 인사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질문이 대강 끝난 시점이었다.
“은선곤!”
강성태는 팔을 들어 앞에 있던 은선곤을 불렀다.
“앞으로 멕시코 건설 공사를 책임질 은선곤 대표다. 우리와 한 식구 같은 분인데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 나이 따지지 말고 대표님으로 부르고, 조심해서 대해.”
“은선곤입니다. 앞으로 강성태 회장님과 오래도록 함께하겠습니다.”
은선곤의 짧은 인사가 끝났을 때였다.
띵. 띵. 띵. 띵.
비행기 특유의 알람음과 함께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파란색 등이 깜박였다.
**
그동안의 심적 스트레스에, 어제, 오늘, 이틀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섭충명은 얼굴이 조막만 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가뜩이나 치켜 올라간 눈이 더욱 사납게 변했고, 얇디얇은 입술은 검게 죽어 있어서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흉한 인상이었다.
책상에 꽤 많은 양의 사진과 자료를 펼쳐놓은 그가 핏발 선 눈을 위로 들었다.
“베트남과 태국 조직들의 준비는 확인했지?”
“무기들을 모두 지급했고, 지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손을 앞으로 잡은 삼합회 조직원의 보고였다.
“괘씸한 새끼….”
답을 들은 섭충명은 대뜸 욕을 뱉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섭충명이 오늘도 잠들지 못한 이유, 강성태라는 사실을 함께 있는 삼합회 조직원 모두 알았다.
물론 호텔 예약이야 거의 일주일 전에 확인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강성태가 이렇게 불쑥 이틀 전에 입국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고 마카오에 먼저 들어올까?
입안에 강성태가 담겼다는 듯 어금니를 질겅질겅 씹어대던 섭충명이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계획은 나무랄 곳 없었다.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이 먼저 암살을 노리고, 실패할 경우에는 태국과 베트남 조직이 회의장에 난입해 권총을 난사하는 계획이었다.
살해 이유야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가장 내세우기 좋은 핑계가 멕시코 공사를 진행하면서 노동자가 소외된 태국과 베트남 조직의 도발적인 테러였다. 심지어 법원에서 사형을 받아도 중간에 풀어주기로 상부와 이야기마저 짜두었다.
무엇보다 곤잘레스의 동선 파악과 협조를 위해 멕시코 정부에서 경호원까지 보내놓았다.
다 좋다. 러시아 특수부대, 태국과 베트남 조직원, 경호원으로 위장한 가페 대원, 그러나 섭충명에게 가장 힘이 되는 한 가지를 택하라면 회의 장소였다.
마카오다, 마카오.
누가 뭐래도 마카오는 삼합회의 세상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첫 번째 타깃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특수부대와 태국, 베트남 조직원들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목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강성태였다.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여러 개 판다지 않던가.
앞에 언급한 인원이 모두 곤잘레스 이두안에게 매달려야 할 경우를 생각해 야쿠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마카오였다.
회칼이 주 무기가 아니라 야쿠자가 더욱 즐겨 사용하는 권총이 대세인 세상, 마카오.
그런데 말이다.
“이 미친놈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연히 곤잘레스 이두안과 함께 움직일 거라 기대했던 강성태가 불쑥 마카오에 입국한다는 소식에 섭충명은 지난밤을 고민과 긴장에 휩싸여 하얗게 지새웠다.
뭔가 있다, 이 미친놈에게는.
홍콩 도심을 끓는 팥죽에 주걱을 넣은 것처럼 휘젓는 무모함,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짓거리를 하고도 유유히 빠져나가는 치밀한 여유, 돌아보면 그는 무모하게 행동하는 뒤편에 무섭도록 치밀한 계획을 깔아두고 있었다.
그거뿐이면 지난 이틀 중 하루는 잤을 거다.
오토바이에 달랑 네팔 용병 한 명 태우고도 삼합회 수십 명을 얕잡아보는 기개는 또 어떻고?
콰앙.
삼합회 조직원들이 긴장한 채 바라보는 앞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섭충명은 어쩐지 강성태에게 주눅 드는 듯한 느낌에 연달아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후우.”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섭충명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한국에서 입국한 필리핀 놈들은?”
“종일 객실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거지 같은 놈들이 특급호텔 맛을 보더니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하나?”
조직원의 보고를 확인한 섭충명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행여나 호텔을 나선 필리핀 조직원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조직간 분쟁을 핑계로 방아쇠를 당기거나 두꺼운 칼을 먹이라는 지시를 내려둔 참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면 강성태란 놈이 마카오에 들어선다. 한 호텔에 모두 투숙할 수도 있지만, 분산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호텔마다 묵는 인원수와 객실 번호를 모두 확인해. 특히, 강성태가 어디에 묵는지를 철저하게 파악해.”
“알겠습니다, 산주.”
밤을 꼬박 새우고 내렸다기에는 너무나 빤한 지시였다. 그러나 이 지시를 내리기 위해 섭충명은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가 지웠다.
실제로 그는 아직 떨치지 못한 계획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마카오에 들어서는 즉시, 버스에 대고 권총을 난사하는 일이었다.
강성태는 말할 것 없이, 함께 온 한국의 깡패들이 피범벅 돼서 버둥대다 고꾸라지는 장면을 상상한 섭충명이 살인마처럼 웃었다.
이왕이면 말이다.
강성태는 바로 죽지 않고 버둥댔으면 싶었다.
그때 버스에 올라간 섭충명이 그의 머리통을 세게 밟고는 “지옥에서도 삼합회와 내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라는 한마디를 던진 후 방아쇠를 꽈악….
소름 끼치도록 짜릿한 상상을 펼치던 섭충명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조직원을 보고는 “크흠.”하는 헛기침과 함께 눈빛을 바꾸었다.
**
홍콩에 도착한 일행은 기다리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공항 건물로 들어섰다.
만에 하나, 삼합회의 장난질이 있다면 강성태의 쿠크리를 압류당하는 건 물론이고, 입국심사에서 거부당해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공항에 억류될 수도 있었다.
믿을 곳은 강명그룹이었고, 믿을 사람은 은선곤이었다.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입국심사에서 강명그룹은 강성태가 흡족할 수준의 일 처리를 보여주었다.
특별한 하자나,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입국심사와 세관을 거친 일행은 곧장 공항 앞에 준비된 버스에 올랐다.
먼동이 뿌옇게 피어오르는 시간이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것처럼 출발한 버스가 잠시 뒤에 강주아오 대교에 들어섰다.
“전에 여기서 탈출했었다는 거 아냐?”
이병렬이 지나가는 말처럼 내놓은 질문에 통로 건너편에 앉았던 은선곤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기는 해산물이 유명하다던데 호텔에서도 맛볼 수 있나? 아 참, 홍콩도 회를 먹냐?”
연달아 이어진 이병렬의 질문을 들으면서 은선곤은 회칼을 떠올린 눈치였다.
악몽을 꾸고 난 사람처럼 은선곤은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저러다가 자칫 회칼과 해산물에 트라우마가 생기면 앞으로 두 가지가 연관된 음식을 먹기 힘들어진다.
“회나 해산물은 호텔에서도 주문할 수 있지?”
“그렇게 들어오는 음식은 손대지 말라는 거 기억하지? 혹여 주문하지 않은 룸 서비스라고 벨을 눌러도 문을 비켜서서 확인하라고 알려준 거 같다.”
“이런, 이 씨…! 개새끼들 때문에 홍콩에서 라면하고 즉석밥만 먹게 생겼네.”
뻔뻔한 표정으로 투덜대는 이병렬을 보며 강성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긴장한 덩치들에게 홍콩, 마카오가 별거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병렬이 일부러 투덜거리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바다 저 너머에서 시작한 빛이 삽시간에 세상에 젖어 들어 곧 있을 일출을 예고하는 새벽이었다.
강성태는 창밖을 보며 섭충명과 사진으로 기억하던 아카시 미키야토, 그리고 유리 마고첸프를 떠올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그들이 기대하는 계획쯤 뇌리에 선명했다.
워낙 징그럽게 경험했었던 방식이어서 그렇다.
“보스. 정말 계획대로 해도 문제없겠어?”
유난히 큰 음성으로 떠들던 이병렬이 상체를 기울이며 나직하게 질문을 건넸다. 마카오에 다가가는 만큼 그 역시 하나둘 염려와 긴장이 피어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절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방법이니까 그만큼 성공 확률이 높아.”
“하긴. 내가 여기를 지키는 사람이었어도 보스처럼 달려들 거란 생각은 절대 못 할 거다.”
확실히 이병렬만큼은 강성태의 의도를 바로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답을 해준 강성태는 다시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맞기 전이라서 지금은 멋진 계획을 세운 거 같지?
그런데 이상하게 긴장되지 않아? 섭충명?
죽기 직전에는 다 그래.
옅게 웃는 강성태의 얼굴을 가득 담았던 버스의 창문에 이번에는 곤잘레스 이두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선제공격을 반대하던 그가 지난번 화이트 테일의 구출을 위해서 홍콩으로 직접 날아왔었고, 비록 세부 내용을 듣지 못했지만, 경호책임자인 강성태가 이틀 먼저 출국한다는 데 침묵했다.
침묵은 긍정의 표시니까.
그리고 이번 회의가 그만큼 위험하다고 여기는 거니까.
앞의 두 가지 이유는 하나의 결론을 향하고 있었다.
마카오 회의를 무사히 마쳐서 멕시코 공사를 가져다줄 것.
어쩌냐, 섭충명?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날 방법이 없을 거 같은데?
섭충명을 다시 떠올린 강성태가 새벽의 바다만큼이나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
더 베네치안 마카오 리조트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창가에 선 아카시 미키야토는 뒷짐을 진 채,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손태가 키테 이루(강성태가 오고 있다). 준비와(준비는)?”
“시지오 마테이마쓰(지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시(좋아). 콘도와 카나라즈 야츠노 쿠비오 킷테 아카시노 타이멘오 사가스(이번에는 반드시 놈의 목을 끊어서 아카시의 체면을 찾는다).”
“와카리마시타(알겠습니다), 카이초오(회장님).”
묵직한 대화의 끝에서 아카시는 왼손을 들어 바깥으로 두어 번 흔들었다.
조직원이 나간 뒤였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하루해가 피처럼 붉은색을 뿜어내 아카시 미키야토를 뒤덮었다.
“와타시타치 니혼노 쇼오초오와 치니 빗쇼리 누레테 노보루아노 쿄오레츠나 타이요오다(우리 일본의 상징은 피에 흠뻑 젖어 떠오르는 저 강렬한 태양이지). 토키니와 아메리카진 토키니와 추우고쿠진노 토키모 앗타가(때론 미국 놈, 때론 중국 놈일 때도 있었지만), 콘도바카리와 간손테 마사니 키사마노 치니 소마루다로오(이번만큼은 강성태, 바로 네놈의 피로 물들 거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카시 미키야토는 흐뭇함과 만족, 야비함을 적절하게 뒤섞은 미소를 그려냈다.
베트남이나 태국 조직원쯤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일본 지폐로 얼마든지 부린다. 그가 지시만 내린다면 마카오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특급호텔 로비에서 강성태의 심장에 얼마든지 구멍을 뚫어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카시 미키야토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이번 차웅진의 일로 왜 일본 정부가 침묵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대신 일본의 검찰과 경찰이 아카시 미키야토 조직에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잊어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조직 간의 싸움은 조직끼리 마무리 지어라.
억압하지 않을 테니 싸움이 벌어졌다면 대일본 제국의 조직답게 이기고 돌아와라.
정부의 침묵을 아카시 미키야토는 그렇게 해석했고, 강성태를 쓰러트릴 자리에 직접 날아왔다.
그의 심장에 구멍을 뚫는 것은 아카시 조직원의 몫이었다.
“사코이, 간손테(어서 와라, 강성태). 고고가 아나따노 하카데아루(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흐하하. 흐하하하. 흐하하하하하.”
혼잣말을 마친 아카시 미키야토가 떠오르는 태양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