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2부 21권 - 16화
제6장. 상대방이 모두 죽을 때까지 붙는 전쟁이다.
4시간가량 걸리는 비행이었다.
김포공항에서 은선곤과 합류한 강성태는 일행들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자가용 비행기라는 생소한 경험이 주는 어색함과 돌아가서 떠들 이야깃거리를 얻었다는 흥분이 덩치들의 얼굴에 떠돌았다.
“내리기 30분 전에 잠시 모일 테니까 피곤한 사람은 눈을 붙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앞에 있는 음료나 음식을 먹으며 쉬어.”
덩치들에게 뒤편의 자리를 지정해준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은선곤이 기다리는 앞쪽으로 움직였다.
“커피 드십시오, 회장님.”
두 사람씩 마주 보는 자리 중앙에 준비된 테이블이었다.
강성태와 이병렬이 함께 앉았고, 맞은편에 은선곤이 자리했다.
강성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은선곤이 몇 종류의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예약해 놓은 호텔들입니다. 어디에서 묵으실지 결정하셨습니까?”
은선곤이 건네준 카탈로그에서 강성태는 윈팰리스 호텔을 정해 내놓았다. 그런 뒤에 바르지오가 준비해 준 자료를 꺼내 펼쳤다.
“나하고 이병렬, 그리고 키란, 식구 다섯 명이 여기에 머무는 거로 하자. 이 일정표는 받았지?”
“바르지오 씨에게 받았습니다, 회장님.”
강성태가 내민 자료를 확인한 은선곤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여기 분수 쇼 일정을 눈여겨봐 둬. 이때 효과음이 터지거든.”
이병렬과 은선곤은 강성태의 의도를 알아챈 눈빛이었다.
“이때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을 해결할 건데 단숨에 모두 해치우기는 어려워. 또 호텔 측이 우리에게 협조할 리도 없어서 사건이 커지면 빠져나오기도 어렵고.”
“어떻게 할 건데?”
“분수 쇼에서 이놈들을 밖으로 불러내야지.”
“방법은?”
“일단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세부 사항은 만나서 조율할 생각이다.”
감도 안 잡힌다는 투로 이병렬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좀 봐.”
강성태는 바르지오에게서 받은 다른 자료를 테이블에 펼쳤다.
“통화 기록으로 확인한 태국과 베트남 조직원들이 묵는 호텔이다. 3성급이라 우리랑 차이가 있는데 이놈들은 필리핀에서 보낸 조직원들과 우리 식구들이 해결해야 돼.”
“방식은?”
“가능하면 칼로 처리하고, 안 되면 권총.”
“영어가 안 되는데?”
“아르윈이 데리고 온 조직원들이 우리말을 하잖아. 그중에서 골라 가이드로 붙이면 충분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병렬의 맞은편에서 은선곤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뒤처리도 생각해 뒀어?”
“호텔마다 베트남, 태국 종업원이 있어. 그들도 치열하게 정보를 얻으려 애쓰고 있어. 그들 시선을 피하는 게 관건이기는 한데 우리 역시 필리핀 호텔 직원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죽는 순간, 세탁물이나 쓰레기로 위장돼서 바다로 사라질 거다.”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이병렬이 흡족한 표정으로 받아들였지만, 은선곤은 죽은 채 세탁물에 덮여 바다에 빠지는 시체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심장이 옥죄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셨던 그가 시선을 의식하고는 주먹을 입 앞에 대고 “큼큼.” 댔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뒤처리하는 과정을 의논하는 이병렬이 두려운 눈치였다. 물론 강성태가 주도한 일이었는데, 그나마 친해진 만큼 두려움이 덜한 느낌이었다.
“은선곤 씨?”
“예, 사장님.”
사장이라는 호칭에 입술을 비틀었던 이병렬이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멕시코 공사를 책임진다고 들었는데 맞지요?”
“예, 그렇게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공사 뺏기는 거 아니오? 멕시코에서는 더할 거라는데, 그럼 얼른 익숙해집시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비록 홍콩에서의 경험이 있었으나 함께 의논하는 건 또 다른 문제여서 은선곤에게는 확실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굳이 이런 계획을 애송이 앞에서 할 필요 있어?’
이병렬이 시선을 돌려 강성태를 보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은선곤. 신강남파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에 이런 의논을 함께하는 건데 부담스럽다면 자리를 옮겨도 괜찮아.”
“아닙니다. 노력해서 적응하겠습니다.”
강성태의 권유에 은선곤이 의외로 단단한 태도로 답을 내놓았다. 물론, 이병렬이 픽 하고 웃는 걸 막지는 못했지만, 강성태는 그 정도면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내놓았다.
“병렬아. 네가 태국하고 베트남 조직을 맡아줘.”
강성태는 바르지오에게 받은 그들의 숫자와 묵는 숙소, 그리고 동선을 설명하고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후. 언제 이런 걸 짰어?”
“할 수 있겠어?”
“해야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설 필요가 있어?”
명단과 그들이 묵는 숙소 사진을 확인한 이병렬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들을 그냥 두면 최악에는 회의장에 난입해서 회의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다. 합의는 물 건너가고, 공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 남기려는 거지. 이런 건 멕시코에서 흔한 일이다.”
각오야 충분하겠으나 아직 멕시코 경험이 없는 이병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과 베트남 조직은 우리나라에도 모두 들어와 있어. 지금은 아르윈이 워낙 뛰어나서 숨죽이고 있지만, 여기에서 부러트리지 못하면 언제고 지방 조직이나 야쿠자들과 손잡고 달려들 놈들이기도 하고.”
설명을 마친 강성태는 은선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멕시코 공사를 진행하게 되면 이놈들은 그곳에도 반드시 나타난다. 은선곤, 너의 목숨을 노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조직원 서넛 죽는 건 문제도 안 된다고 여기는 놈들이다.”
홍콩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는지 은선곤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 식구들과 얼굴을 익혀. 마지막 순간에 은선곤 네가 의지할 사람은 여기 이병렬, 그리고 뒤에 있는 우리 식구들이다.”
“예, 회장님.”
대강 계획을 전했다.
“뒤에 있는 동생들한테는 어디까지 알려줄 거야?”
“당장 오늘 하루와 내일밖에 없는데 감출 게 뭐 있어? 전부 다 알려주고 준비하게 해야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이병렬이 은선곤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 말이오. 한 식구가 된 거면 사장님이니 뭐니 어렵게 하지 말고 형, 동생 합시다. 그래야 나도 좀 더 편하게 대할 거 같은데, 어떻소?”
“예, 사장님.”
“그것참. 형님이라는 말이 뭐 그렇게 어려워? 대신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나도 은선곤 대표로 부를 테니까 지금부터는 편하게 대하자고. 괜찮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칭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좀 더 걸리겠구나 싶었다.
이럴 때는 이세종의 그 뻔뻔함이 은선곤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특급호텔 객실에서 키란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아르윈을 지켜보았다.
늘 강성태를 지극하게 따르던 아르윈은 어디 가고, 처음 보는 조직원들과 필리핀 호텔 직원들이 조직의 보스를 대하듯 조심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거기에 때로는 영어로, 또는 따갈로어로 지시하는 아르윈에게 감히 대꾸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놀라운 사실은 더 있었다.
그들이 조용하게 가져온 하드 케이스 가방에 든 무기였다.
강철로 만든 칼, 권총과 소음기, 탄창, 그리고 저격용 총까지, 수류탄이 빠진 게 이상할 정도의 무기가 아르윈의 숙소로 들어왔다.
“키란. 무기들 좀 살펴줘.”
“예, 형님.”
키란은 먼저 하드 케이스에 담긴 칼을 살폈다.
철컥. 철컥.
이어서 그는 권총을 들어 일일이 노리쇠를 당겼다.
철커덕.
마지막으로 저격용 총을 들어 창밖을 겨눴던 키란은 완벽하게 준비된 액세서리들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이런 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키란의 질문을 받았음에도 아르윈은 정장 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구석에 있는 바로 움직였다.
“커피 마실래?”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습니다.”
“커피와 물, 그리고 포트와 컵도 내가 직접 가져온 거라 마셔도 돼.”
“그럼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다가서는 키란에게 고개를 저은 아르윈이 구석에 두었던 가방에서 실제로 포트와 물, 믹스 커피, 컵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여기는 콘센트가 달라서 이런 걸 써야 해.”
돼지코라고 불리는 어댑터를 연결한 아르윈이 포트에 물을 부었다.
“형님이 필리핀 조직에서 이렇게나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성태 형님께서 필리핀 보스께 어마어마한 돈을 보내셨다. 그거 말고도 멕시코 공사에 필리핀 직원들을 고용하기로 약속하셨고. 처음에는 필리핀 보스도 반만 믿는 눈치였는데 거금을 받고 나자 확신이 선 모양이다.”
커피와 컵을 꺼내놓은 아르윈이 키란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번 작업에서 우리 성태 형님 지시를 어기거나 비위를 거스르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목을 자르고 가족들을 모두 벌집으로 만든다고 대놓고 말씀하셨단다. 그리고 말이다.”
포트를 확인한 아르윈이 테이블을 짚고서 말을 이었다.
“가디언스파 서열 두 번째로 나를 지명하셨다.”
조직 생리를 대강 아는 키란이 “오!” 하는 표정을 지을 정도의 소식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보스는 태국과 베트남 조직을 마카오에서 밀어버릴 생각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당분간 마카오에 들어오는 노동자는 우리 필리핀의 몫이 되지.”
“그렇군요.”
“필리핀 가디언스파가 삼합회와 야쿠자에 맞서는 건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성태 형님께서 가능하게 해주신 거지. 당장 마카오를 손에 넣을 정도로.”
“굉장하기는 한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삼합회가 가디언스파에게 복수하겠다고 나서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번에 붙는 거잖냐. 지면 정말 마카오에는 당분간 발도 들이기 어렵고. 그럴 거면 앞으로 계속 신강남파 그늘에 있어야 하지. 성태 형님을 봐서 함부로 가디언스파를 노리지 못하게.”
“성태 형님이 마카오까지 지배하십니까?”
키란의 질문을 받았으나 아르윈은 먼저 포트를 잡아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 달달한 향이 가득한 컵을 키란에게 건네며 아르윈이 입을 열었다.
“마카오에서 밀려나도 멕시코에 근로자를 파견하게 되잖아. 아프리카라는 새로운 시장도 보여주셨고. 필리핀 정부가 바라는 안정적인 해외 일자리를 가디언스파가 해결하는 건데 무조건 목숨 걸 만하지. 신강남파 그늘에 가디언스파가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이는 일이기도 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게 꽤 복잡한 일이군요.”
키란의 감탄에 아르윈은 보기 좋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니 우리 성태 형님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냐?”
“아!”
단순한 키란의 반응에 아르윈이 좀 더 커다랗게 웃었다.
“그런데 형님이 원래 이런 스타일이셨냐? 내가 보기에 이건 경호가 아니라 아예 마카오를 쓸어버리는 수준이라서 그래. 평소 형님이 보이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기도 하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키란의 답이 앞으로 아르윈이 지켜야할 태도인지 모른다. 그 점을 알아챈 아르윈이 의미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에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도착 한 시간 전에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비행기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긴장한 탓인지 서너 명 졸고 있는 게 전부였는데, 그나마 강성태와 이병렬을 보고는 얼른 자세를 세웠다.
“갑갑하지 않아? 재킷은 벗고 있지?”
“괜찮습니다, 형님.”
유섭우가 답을 내놓는 바람에 서열에서 밀리는 덩치들은 감히 옷을 벗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카오에 도착해서부터 돌아올 때까지 해야 할 일을 설명할 텐데 틀에 박혀서 움직이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 형님이라고 고개 숙이고, 예의를 지키려다가는 우리가 먼저 죽어. 그러니까 당분간은 편하게 하자.”
강성태는 유섭우를 향해 당부를 전했다. 그리고 곁에서 이병렬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유섭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 뒤에 뒤를 돌아보았다.
재킷을 벗는 일마저 서열에 따르는 줄 몰랐던 강성태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과정이 번잡하기는 했으나 모두 재킷을 벗어 다리에 두었다.
“모텔에서 대강 설명했던 내용의 세부 계획을 전한다. 유섭우.”
“예, 형님.”
“식구들 다섯 명과 함께 시티 오브 드림이라는 호텔로 가서 객실에 들어가.”
강성태는 호텔 팸플릿을 유섭우에게 건네주었다.
“객실에 있으면 아르윈의 조직원이 새롭게 합류한 필리핀 조직원들과 찾아갈 거다. 오전부터 대기하다가 그들이 지정해주는 태국 조직원들을 모두 제거해.”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던 덩치들 사이에 “제거해.”라는 말이 돌기 무섭게 갑자기 찬바람이 불 듯 긴장과 살기가 훅 맴돌았다.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모두 22명이다. 동선은 아르윈의 조직원들이 알고 있으니까 그들을 믿고 움직여.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칼질, 총질도 괜찮아.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뚫고 나와.”
“알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이어서 세 팀에 머물 호텔과 제거해야 할 대상을 설명해주었다.
“명심해. 이건 어느 정도 승기를 잡으면 물러나는 조직 간의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이 모두 죽을 때까지 붙는 전쟁이다. 방심하면 저들이 노린 칼이나 권총에 우리가 죽는다.”
강성태는 앉아 있는 덩치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잠시 틈을 주었다.
“오늘과 내일, 이틀이다. 그 이틀 안에 마카오 회의를 방해하는 조직들을 완전히 무너트린다. 한 사람당 1억 원을 주는 건 생명 수당이 포함됐기 때문이고, 이 싸움에서 밀릴 정도라면 멕시코는 아예 포기하는 게 좋아.”
강성태의 말이 끝났을 때, 야간 비행에 느슨해졌던 덩치들의 표정이 당장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칼부림을 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날카롭게 바뀌었다.
“우리가 특수부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강남파 별동대는 된다고 본다. 또, 멕시코에 가서도 비슷한 싸움을 하게 된다면 여기 있는 인원을 먼저 떠올릴 테고.”
이병렬을 돌아본 강성태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묻는다.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거나, 갑자기 오한이 느껴지는 사람, 또는 이번 싸움이 내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전 9시 전에 내게 문자를 보내. 다시 말하지만, 이건 특수부대에서 인원을 선발해 작전에 나서기 전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실제로 빠지는 인원이 있어?”
강성태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이병렬이 꼬리를 문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자리에 앉은 덩치들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8년 동안 다섯 명.”
답을 한 강성태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덩치들을 보았다.
이곳에는 강성태의 과거 경력을 모르는 덩치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능숙한 영어, 키란, 쿠크리를 몇 차례나 보았던 덩치들이 ‘우와! 특수부대 출신이었어?’ 하는 눈으로 강성태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