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1권 - 15화 (428/513)

《428》2부 21권 - 15화

이제 막 병실로 올라온 환자여서 짧게 보고 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유충일이 워낙 감동하는 낯빛이어서 잠시 더 머물며 담아두었던 말을 전하기로 했다.

“자주 들르지 못했지만, 항상 신경 쓰고 있었다. 무리한 지시를 내려서 이렇게 된 것도 알고 있고.”

“아닙니다, 형님.”

자꾸만 울컥울컥하는 모양이었다.

피멍이 가시지 않은 목덜미와 팔뚝을 하고도 유충일이 눈시울을 또 붉혔다.

“이번에 마카오에 다녀오고 나면 그 뒤에 멕시코로 나가야 해. 그쪽 공사를 카르텔이 방해할 텐데 그걸 막아줘야 하거든.”

“예, 형님.”

이제 겨우 병실로 올라온 유충일에게는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강성태는 당장 임무를 내릴 것처럼 상황을 하나씩 설명했다.

“천안에서 보니까 지방의 숙소는 아직 체계가 안 잡혔더라고. 여수 쪽에서 밀수도 계속되고. 내가 아는 광주 대장은 유충일이니까 얼른 일어나서 도와줘.”

“저보다는 용동이 형님이 힘이 되실 겁니다, 형님.”

강성태의 솔직한 심정을 들은 유충일이 간절한 음성으로 고룡동을 추천했다.

“고룡동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게 알고, 내가 원하는 건 지금껏 없는 조직이다. 한때 삐뚤게 살았더라도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보자.”

고개를 숙인 유충일이 “예, 형님.”하고 답을 내놓았다.

팔을 들어 그의 손을 다독인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치곤이에게 들렀다가 갈 테니까 성호 이야기 좀 들어. 오늘 클럽 영업도 없는 날인데 뭐하러 보내?”

“예? 형님?”

“나도 그랬어. 촌스럽게 클럽이 일주일 내내 영업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눈을 끔벅이는 유충일을 향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린 강성태는 문을 향해 걸었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유충일이 침상에서 상체를 최대한 기울였고, 조성호가 따라 나왔다.

“치곤이를 편하게 보고 싶으니까 들어가.”

“살펴가십시오, 형님.”

조성호를 만류한 강성태는 곧장 최치곤의 병실로 들어갔다.

유충일과 비슷하게 침대를 세워둔 최치곤은 TV를 켜놓은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냐?”

강성태를 본 최치곤이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껐다.

탁자에 가지런하게 개켜진 수건, 한쪽에 단정하게 쌓여있는 그릇들, 깔끔하게 정리된 커피와 종이컵까지, 병실 곳곳에 이은주의 흔적이 가득했고, 심지어 최치곤과 어울리지 않는 섬유 유연제 향기가 소독약 냄새와 함께 맴돌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해서인지 최치곤은 며칠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얼굴빛마저 좋아 보였다.

“마카오에 간다더니 그거 때문에 왔냐?”

부인할 이유가 없어서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닷새라고 했지?”

“응.”

“알아서 해. 내가 마카오 골목 찾아다니게 하지 말고. 하긴, 그 정도 되면 신강남파 전체가 나서겠네.”

“올 때 뭐 사다 줄까?”

질문 내내 강성태를 염려하는 표정이던 최치곤이 잠시 망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 드릴 양주 한 병만 사다 주라.”

이놈 봐?

이제 진짜 철이 드는 건가?

“왜? 몸이 아프니까 아버지 생각나냐?”

“그게 아니라 전화하셨더라고. 진짜 잘 지내냐고? 외국에 들락거린다고 둘러대고 바쁜 거 정리되면 내려간다고 했거든. 그때 면세 딱지 붙은 양주라도 한 병 들고 갔으면 싶어서.”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로 사 올게.”

답을 들은 최치곤이 팔을 뻗어 강성태의 손을 다독였다.

병원 침대의 하얀 매트 탓에 최치곤의 손이 유독 검게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새겨진 선명한 칼자국이 강성태의 눈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민병련을 빼내며 생긴 상처였고, 이렇게 싸워준 덕분에 유충일을 구할 수 있었다.

“은주 씨는 자주 와?”

“다른 소리 말고 멀쩡하게 돌아와.”

강성태는 최치곤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 출발이냐?”

“새벽 세 시.”

“그럼 얼른 가. 가서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최치곤의 침대 옆에서 몸을 세웠다.

“간다. 돌아오는 대로 들를게.”

누구보다 강성태와 함께하고 싶을 최치곤이었다. 그러나 당장 방법이 없어서 그저 손을 들어 보이는 게 전부였다.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때였다.

**

서라대학병원 앞 고수부지였다.

아파트 건물 꼭대기에 걸린 태양이 줄줄이 늘어선 구름을 붉게 물들인 뒤에, 벤치에 앉은 강성태와 안다미를 비춰주는 시간이었다.

“혹시 멕시코에서처럼 위험한 건가요?”

강성태는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면 위험한 거네요.”

일회용 컵을 내려다보았던 안다미가 시선을 들었다.

“성태 씨를 만나고 꿈이 생겼어요. 멕시코나 아프리카에서 가난 때문에, 또는 소외된 장소라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진료하는 일이요.”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안다미라면 포기하지 않을 거 같았다.

신도시에서 나오는 수익을 돌리면 어느 정도 비용도 부담할 수 있겠다.

“반대하지 않아요?”

“다미 씨가 하고 싶은 일이잖습니까?”

“이건 나뿐만 아니라 아빠하고 유 원장님의 바람이기도 해요.”

강성태는 의아한 표정으로 안다미를 보았다.

“아버님은 그렇다고 쳐도 유 원장님은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도마뱀이라도 내놓으라고 하실 분 아닙니까?”

“푸훗.”

커피를 마시던 안다미가 상체를 급하게 기울이며 앞으로 뿜었다. 커피전문점에서 받아왔던 냅킨으로 입술과 손을 닦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해요?”

“다미 씨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서 웃은 거 아닙니까?”

강성태의 말을 듣자, 아프리카 주민에게 손을 내미는 유헌우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안다미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사실 원장님이 왜 그렇게 현금을 요구하는지 잘 몰라요. 기록하지 않고 병원에서 사용하는 약품과 장비 구입에 꽤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만 알아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만약 유헌우가 공식적으로 치료하려면 모두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상처이기 때문이었다.

“원장님 동생이 폭력 조직에 있었어요. 병원에 가자는 걸 거부하다가 사망했다고 들었고요. 그 뒤로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은 없게 하겠다고 나섰고요.”

그런 상처가 있었구나.

겉으로 봐서는 짐작도 못 할 만큼 뻔뻔한 태도 안쪽에 그런 고통이 있었다.

강성태는 그 뒤에도 한 시간쯤 안다미와 시간을 보냈다.

주변이 어둑하게 변하며 벤치 근처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때 안다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에 강성태에게 다가와 품에 안겼다.

고개를 기울인 강성태는 안다미의 입술을 찾았다.

잠시 후, 강성태는 안다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카오 다녀오면 우리 진짜 여행가죠. 다미 씨와 함께 바다 보고 싶어요.”

안다미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강성태는 쿠크리를 꺼내 천을 벗겼다.

일반 항공편을 이용한다면 직접 가져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강명그룹이 전용기를 제공하면서 함께 할 수 있었다.

강명그룹이 왜 그렇게 지경그룹에 경쟁의식을 느끼며 예민하게 구는지 알 길은 없지만, 당장은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위험해. 여기에서 멈춰.’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워진 감각이 마카오가 위험하다며 달려들고 있어서 강성태는 쿠크리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냥 멈추고 지금 지닌 돈으로 안다미와 행복하게 살아.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이전에 이렇게까지 선명한 감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어쩌면 괴물로 느껴질 만큼 빨라진 회복력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최치곤과 안다미를 꼭 만나보고 싶더라니.

이래서였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의지를 접는 건 강성태가 아니었다.

“나를 믿고 목숨을 맡긴 곤잘레스 회장부터, 내가 가자는 방향으로 목숨 걸고 나선 동료들을 버리지 못해. 가는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도전할 가치는 있잖아? 우리 둘이 그렇게 싸워왔고.”

마치 쿠크리가 알아듣는다는 듯 나직하게 말을 건넨 강성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후, 강성태는 쿠크리를 들고서 거실로 나왔다. 그런 뒤에 커피를 내려 식탁에 앉았다.

우우웅.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형님. 이쪽 조직원들과 합류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먼저 출발한 아르윈이 보낸 문자였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마실 물까지 전부 구해서 호텔로 들어가. 내가 갈 때까지 누구도 믿지 말고, 저쪽 동향만 파악해서 알려줘.]

[알겠습니다, 형님.]

문자를 확인한 강성태는 머그잔을 들어 갓 내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틀이었다.

곤잘레스 회장이 도착하기 전, 이틀 안에 깔끔하게 정리하고 무사히 회의를 마친다.

강성태는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을 하나씩 점검했고, 이어서 그동안 받았던 자료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홍콩 도심을 벌컥 뒤집어 놓고도 강성태 일행을 놓치는 바람에 위기에 빠진 섭충명이 이를 북북 갈며 벼르고, ‘레이나 짱’으로 톡톡히 망신을 떤 아카시 미키야토가 조직원들을 이끌고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 유리 마고첸프와 일곱 명은 아예 암살을 목적으로 몸을 숨긴 상황이었다.

삼합회도, 강성태도, 특급호텔마다 객실을 잡아놓고 대기 중이어서 어느 곳에서 어떻게 붙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생각을 정리하던 강성태 앞에서 식탁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성태야. 통화되니?

“장 여사 전화인데 무조건 받아야지.”

- 얘가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실없어 보여.

장난스럽게 건넨 대꾸에 장숙경은 강성태가 망신 떨지 않을까를 염려하고 있었다.

“혼자 있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 그래. 오늘 아파트 잔금 치렀어.

“잘하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모.”

- 그렇게 말해주니까 조금 낫긴 한데, 왜 이렇게 죄를 짓는 거 같니?

“이모.”

강성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장숙경을 불렀다.

“아들이라며? 자꾸 이렇게 민재랑 나랑 차별할 거야?”

- 누가 차별을 해? 너를?

“그냥 아들이 아파트 사줘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좋아해 주라. 그래야 나도 힘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죠.”

뭔가 울컥한 게 있는지 그 독한 장숙경이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장숙경의 여동생이자 강성태의 모친을 떠올린 거 같은 느낌이어서 함부로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 출장은 언제 가?

“내일 새벽 세 시요. 오면 우리 새집에서 삼겹살 구워 먹어요.”

-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오는 대로 연락하고.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피붙이라고 해도 여동생의 아들을 차별 없이 친자식처럼 키운다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절대 아니었다.

“고마워요, 이모.”

혼잣말을 내놓은 강성태는 옅은 웃음을 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의를 제대로 마치고 돌아온다는 각오가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었다.

**

새벽 2시에 강성태의 빌라 주차장에 승용차가 도착했다.

이병렬과 김진용이 내려 강성태를 맞았고, 이어서 함께 승용차에 탄 뒤에 출발했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도로에서 기다리던 신강남파 일행의 승용차와 승합차가 줄줄이 공항을 향해 강성태가 탄 승용차를 뒤따랐다.

“우리가 원래는 곤잘레스 회장과 움직이기로 돼 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마카오로 날아가니까 종환이가 더 서운해하더라고.”

이병렬의 말을 들은 강성태는 조수석에 앉은 김진용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명단에서 빠졌던 김진용도 서운한 건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래도 처음부터 제외된 게 그나마 좀 더 낫지 않을까.

“안산 식구들 데리고 천안 뒷수습하는 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더니 눈에 불이 활활 타오르더라고. 그 새끼 혹시 천안에 화풀이하는 거 아닌지 걱정되던데?”

계획은 항상 변수가 있게 마련이었고, 천안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막말로 안산 식구들이 천안에 내려갔는데 반기를 드는 놈들이 생긴다면, 당장 수습할 가장 적당한 인물이 이종환이었다.

“아, 참. 거기 업소 사장들 이야기는 들었지? 어떻게 해? 그냥 모른 척할까?”

“그것도 종환이한테 맡겨. 그 정도 권한은 줘야지.”

강성태의 말에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용아. 어느 조직이나 보스가 자리를 비우면 꼭 사고 치는 멍청한 새끼들이 있다. 가뜩이나 숙소 털어놔서 반항하는 새끼가 나올지 모르니까 우리 돌아올 때까지 항상 긴장하고 있어.”

“예, 형님.”

새벽 시간이라 승용차가 무섭게 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전용기는 뭐가 달라?”

“규모가 다르지. 모든 좌석이 비즈니스나 일등석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돼.”

“기내식도 나오고 그래?”

“그야 강명그룹이 어디까지 준비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은선곤이 그 정도는 챙겼을 거 같은데?”

비행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병렬의 솔직한 질문에 강성태는 아는 대로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승용차의 창밖으로 나직한 빛에 의지한 김포공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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