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2부 21권 - 14화
제5장. 찍어만 주십시오, 형님.
호텔에 도착한 강성태는 고룡동과 광주 덩치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차라리 회칼을 품고 곤잘레스 회장을 노리러 올라가는 거라면 비장한 각오가 서리겠지만, 처음 해보는 임무인 데다, 마카오 회의와 관련해 가장 먼저 뛰어든다는 부담감이 덩치들을 누르는 눈치였다.
주황색의 엘리베이터 벽을 통해 비친 고룡동과 덩치들의 태도에 긴장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엘리베이터 중앙에 있는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서 곤잘레스 회장이 머무는 층에 도착할 때였다.
“고룡동.”
“예, 형님.”
강성태가 불렀고, 고룡동이 나직하게 답했다.
“조성호가 클럽을 맡은 건, 광주 식구들이 고생 많았는데 뭐 하나라도 줘야 한다는 병렬이의 뜻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너를 부른 건 내 선택이었다. 그동안 봤던 고룡동이라면 정말 잘해줄 거라고 믿어서였다.”
말을 전한 뒤였다.
강성태는 열린 문을 손으로 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이런 순간이 계속 이어질 거다. 멕시코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때도 신강남파 고룡동과 동생들이 가장 앞에 서자.”
강성태를 향한 고룡동의 눈시울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맡겨주십시오, 형님. 믿어주신 만큼 꼭 형님 곁에 서 있겠습니다.”
대답은 죽였다.
그런데 그렇게 당부했던 지시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답을 하는 고룡동이 고개를 숙였고, 뒤에 있던 덩치들이 줄줄이 서열에 따라 상체를 기울였다.
고개를 들었던 고룡동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았는데 지금 당장은 재미있다는 투로 웃은 게 전부였다.
강성태는 고룡동 일행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여전히 곤잘레스의 집무실 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는 거로 봐서 아직 비상은 아닌 느낌이었다.
“존 보스만에게 연락 부탁합니다.”
“잠시 검색하겠습니다.”
강성태가 먼저 양팔을 들어 검색을 받았고, 이어서 고룡동과 덩치들이 비슷한 자세로 탐지봉에 몸을 맡겼다.
경호원이 몸을 돌려 벨을 누른 다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강.”
기다렸다는 듯 나온 존 보스만이 고룡동과 덩치들을 둘러보았다.
뭐 이런 덩어리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거대한 체형, 강렬한 인상에 고룡동과 덩치들이 신기한 얼굴로 존 보스만을 살피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온 경호원들은 맞은편 수행원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순순히 존 보스만의 지시를 따랐다고?
강성태의 시선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번 경호 행사의 총괄팀장이 올 때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강성태의 의문에 답을 준 존 보스만이 대각선 맞은편의 객실로 움직였고, 이어 벨을 눌렀다.
잠시 후에 문이 열렸다.
“경호팀장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오.”
문을 잡고 있던 남자가 한쪽으로 비켜서자 존 보스만이 눈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강성태, 존 보스만, 이어서 고룡동과 덩치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갔다.
수행원을 위한 부속실이었다.
집기와 장식이 조금 떨어질 뿐, 구조는 곤잘레스가 머무는 공간과 비슷해서 문 안쪽은 꽤 넓은 거실이었다.
“경호책임자 미스터 강입니다.”
존 보스만이 강성태를 소개했고,
“반갑소. 호세 로페즈 니에토요.”
갸름한 얼굴에 짧은 머리를 위로 세운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강성태입니다.”
강성태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름이 호세(요셉), 로페즈는 아마도 아버지 성, 니에토는 어머니 성일 확률이 높았다. 멕시코 사람의 이름은 대게 세례명을 사용한다. 그런 이유로 워낙 겹치는 이름이 많은 탓에 곤잘레스와 같이 대개 성을 이름 대신 부르곤 했다.
“로페즈로 부르면 됩니다.”
강성태의 경력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알려주며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그는 후안 카를로스, 페르난도, 다비드, 다니엘을 순서대로 소개했다.
눈인사와 함께 악수를 마친 강성태는 고룡동을 손으로 가리켰다.
“밀착 경호를 책임질 고룡동입니다.”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로페즈가 다른 말 하지 않고 고룡동과 악수를 나눴다.
“미스터 강에게 경호 계획이 있다고 들었소.”
“우리 셋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로페즈의 답을 들은 존 보스만이 오른쪽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는 상황이어서 강성태는 바로 로페즈가 데려온 경호팀을 두 개 조로 나눠 존 보스만의 팀에 합류시켰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내부는 고룡동이, 2선은 두 개 팀이 번갈아 맡기로 하고, 존 보스만과 로페즈는 그날의 일정에 따라 위치를 정하기로 하죠.”
짧고 선명한 설명이 끝난 다음이었다.
입을 꾹 다문 로페즈가 당찬 시선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무시당했다고 여길 수 있었다.
처음 계획을 들은 존 보스만처럼.
“우리를 못 믿는 거요?”
실제로 침묵하던 그가 불편한 태도로 질문을 내놓았다.
“내 계획이 그렇게 느껴졌다면 유감입니다.”
짧게 세운 머리, 짙은 눈썹, 진한 쌍꺼풀 아래에서 강성태를 향한 로페즈의 눈에 옅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원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붙어주지.’
강성태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계획을 설명했더니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했다는 명분이라면 멕시코 정부도 다른 말을 하기 어렵다.
물론 앙심을 품은 가페의 반격이 문제이긴 한데, 그건 멕시코에 가서 해결할 문제였고,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풀더라도 강성태에게 호감을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지간하면 말릴 법도 한데 존 보스만 역시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로페즈의 선택을 기다렸다.
“알았소.”
밑도 끝도 없는 로페즈의 답이 나왔고,
“존.”
“예스, 미스터 강.”
“로페즈가 나눈 두 개 조를 업무에 넣고, 우리나라 경호원 있지? 그중에 두 명을 고룡동 팀의 통역으로 배당해줘.”
강성태는 곧바로 존 보스만에게 계획했던 대로 지시를 건넸다.
“정식 경호 업무는 자정부터 시작하지요.”
“경호팀장도 함께 있는 거요?”
“나는 현장을 살피기 위해 내일 먼저 출국할 겁니다.”
“경호에 필요한 무기는 어떻게 조달합니까?”
“실무는 여기 존 보스만과 의논해서 규정대로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연달아 이어진 로페즈의 질문에 강성태는 막힘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럼 이만 일어납시다.”
강성태가 먼저 일어섰고, 이어서 존 보스만과 로페즈가 순서대로 몸을 세웠다.
“잘 부탁합니다.”
강성태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던 로페즈가 마지못해 팔을 뻗었다.
악수를 마친 강성태는 밖으로 나와 고룡동과 덩치들에게 눈짓을 던졌고, 바로 문을 향해 움직였다. 그나마 엘리베이터에서 실수한 덕분인지, 강성태의 눈짓을 받고도 고룡동과 덩치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불편할 거다. 앞으로 며칠은.
화장실에 가도 소변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속이 탄다면 아마 적당한 표현이지 싶은데, 경호라는 게 생각보다 신경이 곤두서는 일인 데다, 로페즈 일행과 함께 하는 어색하고 불편한 동행이 주는 부담도 적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잘 견뎌라, 고룡동.
멕시코 신도시 건설을 위한 신강남파의 첫 번째 임무를 고룡동이 맡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문을 나선 강성태는 존 보스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이만 출발하지. 혹시 걸리는 부분이 있나?”
“오늘 데려온 인원이면 충분합니다.”
의미심장한 답을 한 존 보스만이 만족한 얼굴로 닫힌 수행원 객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고룡동과 덩치들이 1선에 있는 동안, 존 보스만과 다른 경호원들은 로페즈 일행을 감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존 보스만이 2선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로페즈는 함부로 불만을 터트리기도 어려웠다.
“내일 출국하십니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였다.
우우웅.
로비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은 계속 룸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룸서비스도 이용하지 않는답니다.]
마카오에 연락했었던 아르윈의 보고였다.
출국을 앞두고 다섯 시간에 한 번꼴로 삼합회와 야쿠자, 태국, 베트남 조직들의 움직임이 문자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번에는 로비로 나오는 강성태의 손안에서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나야. 통화돼?
어딘가 뾰족하게 들리는 김민재의 음성이었다. 다분히 장난기를 품고 있어서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느낌으로 웃었다.
“뭔데 그렇게 화가 났어? 누가 괴롭혀?”
- 강성태라는 동생이 부모님께 덜컥 집을 사드리는 바람에 장남 체면이 엉망이 됐지.
“말만 들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 너무하는 거 아냐? 서운하다, 진짜.
툴툴대던 김민재의 대꾸에 강성태는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 고마워.
“갑자기? 우리끼리 그런 인사 하면 어색하잖아?”
택시를 잡아가며 통화하기 싫어서 강성태는 로비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 오늘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더라. 네가 준비했다는 게,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좋으셨나 봐. 미안하고, 고맙고, 결국 엄마도 나이를 먹었는지 우시더라고.
이어서 김민재는 얼마 전에 대화 끝에서 장숙경이 나이 먹었다고 느꼈던 순간을 말해주었다.
- 앞으로 이런 이벤트는 반드시 나와 민정이의 허락을 받고 하도록 해. 알았지?
“그래. 이번은 미안하다.”
-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뭐가 되냐?
둘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 오늘 잔금 치렀어. 이사 날짜는 일주일 뒤로 할 거 같아.
“고생 좀 해.”
- 이런 걸 고생이라고 하면 매일이라도 하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김민재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뻔뻔함으로 감싸서 내놓았다.
- 언제 우리끼리 밥 먹자. 민정이도 그랬으면 하더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끝에 통화를 마쳤다.
지난 며칠간 고민했을 이모네 식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
병실에 들어섰던 조성호는 흠칫한 뒤에 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겨우 음식을, 그것도 죽을 먹기 시작한 유충일이 잡아먹을 듯한 눈매로 상체를 악착같이 세웠기 때문이었다.
“야, 이 씨벌럼아. 성태 큰 형님께서 우리 광주 식구들 고생한 거 살펴주셔서 업장을 맡기심사,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석구석 청소허고, 혹시 모지란 구석은 없는가 살피는 것이 도리지, 책임을 맡은 네가 느자구 없이 여길 와야 쓰것냐?”
“죄송합니다, 형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님.”
“할 말이 있으면 아침에 오라고, 영업 끝난 아침에! 영업을 준비해야 할 이 시간에 왜 여기를 와, 왜?”
고개를 떨군 조성호를 유충일은 갑갑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이 바뀌는 만큼 깡패도 바뀌어야 돼. 똑똑한 형님들은 상장사 인수로 갔다가 나올 사람은 벌써 다 나왔고, 클럽, 엔터도 태완이 형님처럼 수완 있게 운영 못 하면 빵이나 들락거리다 끝나는 게 깡패야. 알았냐?”
“예, 형님.”
더는 버티기 어려운 유충일이 팔을 뒤로 짚자 침대 옆에 있던 덩치가 빠르게 다가왔다.
“아흑.”
그렇게 독기 있게 일어나더니 누울 때는 결국 유충일도 신음을 뱉어내고 말았다.
“느자구 없는 새끼.”
“예? 형님?”
“너 말고 인마.”
급하면 사투리, 평소에는 표준말을 사용하는 데 억양만큼은 호남 출신이라는 걸 누구나 알 정도였다.
“뭣허냐? 안 가고?”
“내일 영업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청소까지 다 해놓고 와.”
고개 숙여 “예, 형님.”이라고 답한 조성호가 풀 죽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갔다.
“상처가 벌어졌나 봅니다, 형님?”
“놔둬.”
배 부근을 감아놓은 붕대에 올라온 핏물을 무시한 유충일이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동이 형님이 큰일 한다면서?”
“성태 큰 형님께서 직접 훈련시키고, 마카오에 데려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복 터진 거지. 깡패가 월급처럼 생활비 나오지, 경호한다고 마카오 가지, 더 뭘 바라냐? 이럴 때 헛짓거리하는 놈 있으면 내가 배를 갈라버릴 거니까 숙소에 전화해서 정신 바싹 차리라고 단도리 해.”
“예, 형님.”
답을 들은 유충일은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오늘을 충실하게 밝혔던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조성호를 그렇게 보낸 게 걸렸는지 유충일은 붉은 기운이 물든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조성호가 다시 들어왔다.
저 새끼가 미쳤나?
의아한 가운데 인상을 찌푸렸던 유충일이 뒤따라 들어온 강성태를 보고는 급하게 팔을 옆으로 짚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뭐해? 그냥 있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형님.”
“그냥 있으라니까.”
“예,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어기지 못한 유충일이 몸을 눕혔는데 대신 덩치를 시켜서 침대의 상체를 반쯤 높였다.
“몸은 좀 어때?”
“조금만 지나면 퇴원해도 될 거 같습니다, 형님.”
“이렇게 일어나줘서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형님.”
급하게 답을 내놓은 유충일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깡패들이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로 감성이 풍부해진 탓으로 보였다.
“클럽 맡겨주신 점 감사합니다, 형님.”
“나중에 도시 하나는 맡아줘야지?”
“찍어만 주십시오, 형님.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형님의 지시대로 만들어놓겠습니다.”
환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부진 각오를 유충일이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