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2부 21권 - 7화
제3장. 뭐 하냐? 얼른 가자.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만큼 이틀이 바쁘게 흘렀다.
가장 먼저 해결된 건 정영권의 빈자리였다.
“보스만 괜찮다면 유충일에게 클럽 맡기려고.”
강성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권유였다.
“강치 형님 잡을 때부터 인천까지 흘린 피가 있는데 광주에 그 정도는 주는 게 맞지. 그쪽 식구들 어깨에 힘도 들어갈 테고.”
“충일이가 되겠어?”
“이제 겨우 병실로 옮긴 놈이 그럴 수가 있나? 대신 조성호 있잖아? 그놈에게 맡기려고. 그래도 명목상 충일이에게 넘어가는 거니까 광주 쪽 식구들이 보기에는 뿌듯하겠지.”
“태완이 형님하고 의논한 거지?”
“형님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더라고.”
이병렬과 조태완이 함께 결정한 일에 굳이 반대 의견을 낼 이유는 없었다.
“그거 말고도, 태완이 형님과 의논했는데 서울과 경기도는 내가 관리하고, 충청도와 호남은 배근이 형님, 경상도와 부산은 교창이 형님에게 맡겼으면 하는데 어때?”
그렇게 하면 세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게 아닌가?
강성태의 표정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렇게 나눈 거야. 서울과 경기도를 맡길 사람이 있으면 가장 좋은데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잖아. 실제로 일이 생기면 내가 배근이 형님과 교창이 형님에게 지시를 내릴 거고.”
“그렇다면야….”
“이보세요, 보스? 누가 뭐래도 내가 신강남파 넘버 투야. 어디서 굴러온 돌들을 나랑 비교해?”
농담처럼 말을 건넨 이병렬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무엇보다도 강성태가 그의 위치를 인정해준 게 고마운 눈치였다.
정영권과 임장진, 그리고 그쪽 숙소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제 이병렬이 알아서 결정할 수준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기분 좋은 소식은 은선곤이었다.
그는 하루 반나절 만에 강성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예약 완료했습니다.
“벌써?”
- 곽 부회장님께서 찾으셨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바로 컨소시엄에 속한 그룹 전체에 협조를 구하셨습니다. 국내 굴지의 여행사 여덟 곳이 모두 나서서 해결했습니다.
새삼 느끼지만, 그룹의 힘은 참 무섭다.
“회장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줘.”
-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텔 예약을 해결한 강성태는 이어서 아르윈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필리핀에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지금 혼자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
- 말씀하셨던 무기들을 모두 확보해서 내일 마카오로 보낸다는 연락입니다.
“내가 원했던 무기를 모두 확보했다고?”
- 저격용 소총은 맥밀란 Tac-50이고, 조준경과 액세서리, 탄환까지 하드 케이스에 넣어서 보낸답니다.
스마트폰을 붙든 상태에서 강성태는 식탁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참 오랜만에 이 정도로 놀랐다.
혹시나 해서 건넸던 요청에 미군 스나이퍼들이 사용하는 저격용 소총을, 그것도 액세서리까지 모두 구해서 보내줄 거라고는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필리핀 보스에게 내가 정말 고마워한다고 전해줘.”
- 예, 형님. 그리고 오늘 오전에 약속하셨던 돈이 입금됐다는 말씀과 함께 마카오 회의 뒤에 필리핀에 들렀다가 귀국하시면 어떻겠냐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당장은 곤잘레스 회장의 일정 때문에 어려울 거 같고, 이번 일을 마무리하고 기회를 보자. 그렇게 전해줘.”
- 알겠습니다, 형님.
숨 막히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호텔도 바라던 대로 예약됐고, 저격용 소총까지 구했으니 이제 남은 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계획을 실행하는 일이었다.
그룹의 힘도 그렇지만, 곤잘레스가 제공한 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강성태는 조태완과 이병렬이 추린 60명의 명단을 살폈다.
무술 특기를 적은 인원의 대부분이 태권도 초단이었고, 그 외에 복싱, 유도, 레슬링을 적었는데 당장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광주광역시장배 아마추어 복싱 대회 동메달.]
특이한 이력에 시선을 들었던 강성태는 고룡동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 외에 조성호가 있었고, 가장 익숙한 사람은 이병렬과 김진용, 조봉진, 이종환이었다.
[아마추어 복싱 챔피언.]
강성태는 이병렬의 이름 옆에 적힌 특이사항을 보고는 또다시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
서른 명을 추린 강성태는 조태완이 구해준 남양주의 모텔에 그들을 모두 모았다.
테트리스 게임의 메인 화면에 나오는 궁전 형태의 외관과 방마다 아치형 창을 지닌 흰색 건물이었는데 복도에 깔아놓은 붉은 카펫은 검은 물이 들었고, 엘리베이터는 기우뚱 움직일 정도로 오래된 모텔이었다.
“잠깐만.”
곰팡내가 은은하게 올라오는 모텔의 복도였다.
강성태는 가장 안쪽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덩치들을 멈춰 세웠다.
“방금 막아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건 조직 간의 다툼이 아니니까 손을 들거나 인상을 쓰는 건 안 돼. 잘 봐.”
강성태는 이병렬의 앞으로 걸어가 몸을 돌렸다.
“키란. 접근해.”
강성태의 지시에 키란이 이병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상 쓰지 말고.”
강성태는 키란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슬며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처럼 접근하는 사람이 경호 대상에게 다가가는 동선만 막아주면 돼. 나머지는 곤잘레스 회장의 경호원이 해결하니까.”
시범을 보인 다음이었다.
“만약 키란이 무기를 꺼내면?”
지켜보던 이병렬이 갑갑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조를 짜줬잖아. 키란의 방향을 맡은 조가 누구야?”
“예, 형님.”
고룡동이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동선을 막았는데 접근하는 사람이 무기를 꺼내 들면 고룡동과 조원 전체가 달려들어서 눌러. 이때도 절대 때리거나 폭행하지 말고, 팔을 꺾거나 목을 눌러.”
“어떻게 하는 건지 그것도 보여줄 수 있어?”
이병렬의 요청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해보는 움직임이다 보니 말로만 들어서는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고룡동. 조원들 데리고 내 뒤에서 움직여. 그리고, 이번에는 거기 너.”
“예, 형님.”
신월동에서 선발된 덩치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키란처럼 다가오다가 내가 막아서면 지갑을 꺼내.”
“지갑을 말씀입니까, 형님?”
“권총이라고 생각하고 꺼내. 만약 지갑으로 나를 겨누면 네가 이긴 거다. 바싹 붙지 않아도 되니까 지갑으로 나를 겨눌 만큼 충분한 거리에서 뽑아.”
의아한 표정으로 “예, 형님.”이라고 답한 덩치가 복도 끝으로 움직였다.
“키란. 동선 좀 잡아줘.”
지시를 마친 강성태는 이병렬과 고룡동, 광주 덩치들과 함께 모텔 방의 문 앞으로 움직였다.
이병렬이 곤잘레스 회장의 대역이었다.
“앞쪽에 경호원들이 먼저 나갈 테고, 이어서 곤잘레스 회장이 나가.”
강성태의 지시에 이병렬이 문에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강성태는 이병렬의 반걸음 뒤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고룡동과 조원들이 두 줄로 따랐다.
키란이 눈짓을 던지자 신월동 덩치가 걸어왔다.
강성태가 동선을 막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직후였다.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덩치가 재킷 안에 손을 넣었다.
이 정도 거리면 자신 있다고 여긴 눈치였다.
이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지 재킷에서 빼는 손이 정말 빨랐다.
후욱.
강성태는 뒤에서 누군가 밀친 것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놀란 덩치가 더욱 빠르게 지갑을 꺼내 팔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몸을 날린 강성태는 덩치의 오른손목을 잡고 발목을 걸어 그대로 밀었다.
콰드등.
덩치가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강성태는 오른쪽 팔뚝으로 그의 목을 세차게 눌렀다.
“크흑. 큭.”
지갑은 이미 복도 바닥에 떨어졌고, 목을 눌린 덩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복도를 달렸다.
“후.”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먼저 쓰러져 있던 덩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뒤에 무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진압할 때 다 같이 달려들라고 했었지? 지갑으로 하니까 장난 같아서 못 하겠어? 아니면 건들거리다가 주먹을 날리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냐?”
훈련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강성태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덩치들을 꾸짖었다.
“지금 이렇게 하는 동작이 몸에 배도 정작 현장에서 권총을 보면 몸이 굳어. 한순간 멈칫하면 이마나 목, 심장에 구멍이 뚫려 죽는 거고. 엉뚱한 사람 데려가서 죽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유치해서 못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돌아가.”
강성태가 나직하게 경고한 다음이었다.
“보스. 칼을 들고 맞서는 건 알아서 하겠는데 이건 처음 해보는 거라 나부터 몸이 안 움직였어. 여기 고룡동이도 비슷할 거야.”
이병렬이 시선을 돌리자, “죄송합니다, 형님.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확실히 하겠습니다.” 하며 고룡동과 광주 덩치들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이병렬이 나서서 중재한 일이라 강성태는 먼저 숨을 길게 내쉬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곤잘레스 회장의 경호는 중요하지. 하지만, 경호만 생각했다면 굳이 삼십 명이나 데려갈 필요는 없다.”
이병렬과 덩치들이 강성태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마카오에서 나는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카르텔, 그 외에 나라마다 있는 조직들에게 강성태가 아닌 신강남파가 등장했음을 알릴 생각이다. 여기 있는 삼십 명이 어떻게 보이는 가에 따라 양아치 집단인지, 함부로 붙기 어려운 조직인지가 결정된다.”
이왕 말이 나온 상황이었다.
“신강남파는 그저 그런 깡패들이 모인 폭력집단이 아니라 멕시코의 신도시를 장악하고, 이어서 아프리카에 새로 지어지는 모든 도시를 손에 넣을 조직으로 성장할 거다. 그리고 그 계획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힘이 너희들이다. 이게 그 시작이니까.”
이제야 강성태의 계획을 알게 된 덩치들이 흥분과 사명감이 올라온 얼굴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들었지? 이 씨발 새끼들아? 양아치 짓이나 하고 싶은 새끼들이 있으면 꺼져. 시간 아까우니까.”
멋진 강성태의 포부 뒤에 이병렬의 원색적인 질책이 뒤따랐다. 그런데 말이다. 깡패는 깡패인 건지, 그의 욕설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키란. 위치하고 동작 좀 잡아줘.”
강성태가 뒤로 물러나자 이병렬이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 뒤에 상체를 기울이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나가자.”
어차피 키란이 곤잘레스 회장의 대역을 할 참이어서 이병렬이 당장 할 일은 없었다.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계단을 이용해 모텔의 로비로 내려왔다.
칠이 벗겨진 테이블, 바늘이 멈춰진 시계, 구석에 쌓아둔 청소용품과 일회용 비품까지, 이런 곳에서 손님이 들어올까 싶을 정도로 프런트는 엉망이었다.
망가진 집기들을 피하는 것처럼 이병렬은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텔 출입구를 가리기 위해 오징어 다리처럼 길게 잘라 매달아 놓은 비닐이 바깥의 풍경을 가려주어서 차라리 주차장이 더 아늑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만 가보려고.”
한 시간쯤 지나면 퇴근 시간이라 아직은 여유로운 모텔 앞 국도를 승용차와 트럭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천안, 이 새끼들이 아무래도 수상해. 숙소 동생들 중 신용불량자가 많아서 현찰로 돈을 줬다는 것도 이상하고.”
“본인 통장 아니면 부모 통장을 이용하게 했잖아?”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뭔가 모사를 치는 느낌이거든. 그래서 지금 한 번 돌아보려고.”
강성태는 가느다란 파이프와 비닐 천막으로 칸칸이 만들어놓은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누구랑 가는데?”
“다들 졸라리 바쁘잖아? 봉진이 데리고 가야지. 에이, 씨발. 보스를 잘 만났더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네.”
말을 마친 이병렬이 히죽 웃었다.
“진용이는 뭐 하는데?”
“조성호 데리고 클럽에 가 있지. 혹시 지랄 떠는 놈이 있을까 봐 종환이랑 섭우도 함께 보내놨고.”
다른 사람은 참 꼼꼼하게 잘 배려하는데, 정작 본인 일은 설렁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있어서 그런다기보다는 어려운 여건이어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으로 보였다.
“그럼 먼저 출발할 테니까 저녁 먹어가면서 해.”
마카오에 함께 가기로 한 것도 이병렬을 다급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혹시 어디에선가 반기를 들지 모를 인간들을 출국하기 전에 모조리 정리하고 싶어서 말이다.
고작 사흘인데도 한국에 남아 있을 김진용과 이종환, 유섭우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강성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함께 가자.”
걸음을 옮기려던 이병렬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가지 탕수육이 먹고 싶네.”
“천안하고 가지 탕수육이 무슨 관계가 있는데?”
“전에 내가 책 고르려고 포털 검색하다가 본 건데 천안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 양꼬치 가게 골목이 있는데 거기 요리들이 진짜 좋다더라.”
이병렬은 아예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숙소 실상을 한 번은 들여다봐야지. 둘이서 시원하게 천안 눌러주고 가지 탕수육에 폭탄주 한잔 하고 오자.”
강성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폭탄주를?’ 하는 눈으로 이병렬이 마른침을 삼켰다.
“뭐 하냐? 얼른 가자.”
언젠가 병원에서 위기에 빠졌던 이병렬에게 던졌던 말이었다.
멍했던 이병렬이 시원하게 웃은 뒤에 강성태를 따라 승용차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