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1권 - 6화 (419/513)

《419》2부 21권 - 6화

강성태가 떠나고 나서 아르윈은 그의 조직원들을 소파와 주변에 앉혔다.

긴장과 흥분을 억지로 누르며 조직원들이 기다리는데도 정작 그는 턱을 괴고 앉아 시간을 끌었다.

확실히 강성태는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조직의 모습을 하나씩, 둘씩, 분명하게 바꾸고 있었다.

조직을 왜 흡수하겠나.

새롭게 장악한 지역에 누군가 유흥업소를 차리려면 먼저 인사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지분을 나누거나, 아니면 조직원들을 직원으로 넣어서 수익을 챙기기 때문이었다.

타 조직과 전쟁을 벌일 때도 불러 쓰면 그만이고, 혹시 빵에 가는 조직원 수발을 해주면 더 바랄 게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에 50억 원을 보내고 다시 아르윈에게 5억 원, 조직원 한 명당 1억 원을 제시했다.

생각을 정리하던 아르윈은 정신이 나간 듯 실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운 좋았다. 진짜.

안산의 창고에서 권총을 들이댔을 때, 강성태가 독하게 나섰다면 지금쯤 어디 한군데 부러진 몸으로 필리핀에서 끙끙대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여전히 그를 지켜보는 조직원들 앞에서 아르윈은 먼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급한 연락을 위해 저장해둔 번호를 눌렀다.

국제전화 특유의 신호음이 길게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위급한 상황이라고 여겼는지, 가디언스파 보스는 무거운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르윈입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얼마나 급해?

“바로 말씀드리고 답을 얻어야 합니다.”

아르윈의 답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 잠시만 기다려.

보스의 음성이 넘어왔고, 이어 어딘가로 걷는 소리, 그 뒤에 테라스 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이야?

보스의 음성이 더욱 무거워진 느낌으로 건너왔다.

“신강남파 강성태 보스께서 조금 전에 방문하셔서 보스께 요청 사항을 전하셨습니다. 보스께서 계좌 번호를 주시면 한화로 50억 원에 해당하는 달러를 보내고.”

- 잠깐만.

필리핀 보스의 반응이 어쩐지 강성태 앞에서 멍했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해서 아르윈은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 얼마라고 했지?

“한화로 50억 원입니다.”

- 원하시는 게 뭐냐?

보스의 목소리에 열기가 담겼고, 그와 동시에 강성태를 대하는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히트맨 20명, 권총과 탄환, 가능하다면 저격용 소총을 요구하셨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사상자가 나올 수 있겠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고 일을 마치는 게 목표라고 하셨습니다.”

- 허! 그쪽 보스께서는 우리를 얕잡아 보시는 모양이구나?

혹시 필리핀 보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점이 있었나?

직전까지 열기를 띄웠던 보스가 느닷없이 삐딱한 반응을 내놓는 바람에 아르윈은 긴장한 표정으로 통화에 집중했다.

- 저격용 소총이 아니라 중기관총이라도 구해 드린다고 말씀드려. 그리고 이미 마카오에 보낸 히트맨만 30명이 넘는다. 그놈들 모두 마음껏 부리시라고 전해 드리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르윈은 이어서 이쪽 조직원이 함께 넘어가는데 각각 돈을 받는다는 설명을 전했다.

- 아르윈.

“예, 보스.”

- 그런 돈에 손을 내밀었다가는 한국의 보스가 나를 신뢰하지 못할 거다. 그건 너와 그곳에 있는 조직원의 몫이다.

“감사합니다, 보스.”

필리핀 조직에서 한화 5억 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르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디언스파 보스는 그 정도쯤 하는 느낌으로 넘겨주고 있었다.

이 또한 강성태의 힘이었다.

- 목숨을 걸고 한국의 보스를 모셔. 혹시 한국의 보스에게 실수하는 놈이 나온다면 그놈의 목을 잘라버리는 건 물론이고, 여기 가족들 모두 몸뚱이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이점을 분명하게 전해.

“충분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 흐하하하하.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그러고 보니 가디언스파 보스의 저토록 통쾌한 웃음은 7년 만이었다.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숨을 길게 내쉰 뒤에 고개를 들었다.

“보스께서 허락하셨다. 이곳에서 받는 돈은 모두 너희 몫으로 하라신다.”

주먹을 움켜쥐는 조직원이 나올 정도로 아르윈의 조직원들에게 한화 1억 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히트맨만 해도 그렇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직도 필리핀에는 출생기록조차 없는 아이들이 득시글거린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해서 주로 히트맨이 되는데 친분이 있다면 한국 돈 5백만 원, 이리저리 소개받으면 2천만 원 정도에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출국 준비해.”

“예, 형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조직원들이 아르윈을 향해 상체를 깊게 숙였다.

**

강성태는 은선곤과 함께 마포의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오늘 사고가 있었는데.”

먼저 정영권의 일을 은선곤에게 들려준 강성태는 이어서 반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절대 맞서지 말고 조용하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회의 이틀 전에 마카오로 넘어갈 생각이다. 함께 가는데 다른 문제는 없지?”

“업장 자료는 이미 회계팀과 기획실에서 요청, 분석, 개선 방향을 추리고 있어서 제가 없어도 충분합니다.”

기획이나 서류 관련 업무를 의논할 때 은선곤은 면도날을 보듯이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다. 마카오의 특급호텔 명단을 넘겨줄 테니 강명그룹이나 그룹 컨소시엄 이름으로 특실과 스위트룸, 일반실을 하나씩 예약해 줘.”

“마카오 회의 일정에 맞춰야 합니까?”

“내가 마카오에 도착하는 날부터.”

강성태의 답을 들은 은선곤은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이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모든 호텔의 예약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강성태가 예상한 답이었다.

실제로 마카오에 있는 특급호텔 전부를, 그것도 특실과 스위트룸, 일반실을 하나씩 같은 날짜에 모두 예약하는 건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찍 예약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면 중국 측에서 대응할 시간이 생겨. 그래서 일부러 급하게 잡았다. 확인해 보고 강명그룹이 어렵다면 답을 빨리 줘.”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회장님?”

“지경그룹에 부탁하려고.”

늘 태연하던 은선곤이 뜨악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어제 말하려고 했었는데 워낙 일찍 취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어.”

어차피 전할 이야기여서 강성태는 병실에 찾아왔던 곽대출과의 대화 내용을 있는 대로 전해주었다.

“부회장이 그러시던데? 만약 강명그룹이 부탁을 거절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지경그룹 곽대출을 만났다고 말하라고. 실제로 연락하라는 말도 들었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혹시 다른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호텔 예약을 위해 움직여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명심해. 강명그룹이나 컨소시엄 이름으로 예약해야 해.”

“예, 회장님.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몸을 세운 은선곤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호텔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지니는 독특한 눈빛이나 태도, 움직임이 있다면, 은선곤은 많이 배우고, 세련됐으며, 교양있는 사람들만이 보이는 절제와 날카로움, 차가움이 그의 사소한 행동에 모두 묻어 있었다.

저 정도 남자와 함께하는 아프리카라면 아저씨도 강성태에게 합류하지 않을까?

“우리 언제 볼 수 있습니까?”

“살아 있다면 기회가 있지 않겠냐?”

“전화할 수도 있잖습니까?”

강성태의 질문에 아저씨는 세상 다 산 듯한 웃음을 픽 웃었다.

“내가 너처럼 병아리일 때 말이다. 진짜 좋아하던 선배가 계셨다. 나를 구해준 대신 죽도록 맞기도 했었는데.”

“구해줬는데 왜 맞습니까?”

“성격이 워낙 개차반이었거든. 그분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분이 아프리카에 계신다고 들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거기는 한번 꼭 가 볼 생각이니까 보고 싶으면 아프리카로 와.”

뭔 소리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은 아저씨는 노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족아 미안하다….”

그가 삼켜버린 뒷말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가야겠지? 아프리카?

강성태는 모처럼 아프게 웃었다.

**

이병렬은 영등포 공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전화를 넣었다.

- 임장진입니다,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그래. 너 지금 바쁘냐?”

- 아닙니다, 형님.

“그럼 지금 영등포 공장으로 와. 거추장스럽게 동생들 달지 말고, 운전하는 놈하고 단출하게 와.”

- 지금 말씀이십니까, 형님?

임장진의 질문에 이병렬은 통화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게 픽 웃었다.

-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조수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임장진이 이놈 평가는 어때?”

“영권이가 지금껏 설친 거 절반은 장진이 덕분이라고 보시면 적당합니다, 형님. 주변 평가도 나쁘지 않고, 동생들도 잘 따르는 편입니다.”

김진용의 답을 들은 이병렬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지난번에 부산에도 있었냐? 강치 형님 잡을 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하기는 당시에 동원한 인원이 워낙 많아서 누가 있었는지 일일이 알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정영권은 박노익을 지키라는 지시에 HK 맨션 주차장에만 있어서 딱히 눈에 들어올 기회도 없었다.

40분쯤 달려 공장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김진용이 조봉진과 함께 문을 여는 사이에 승용차 한 대가 공장 골목에 들어섰다.

임장진이 탄 승용차였다.

그가 정영권의 일을 알고 달려오는 건지, 모르는 상태인지는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골목 앞에 숙소 동생들을 쭉 깔아놓은 상태에서 연장을 품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병렬은 뒷짐을 진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문을 연 김진용과 조봉진이 이병렬의 뒤에 섰을 때, 새롭게 들어온 승용차가 앞에 멈췄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임장진은 키와 체격만 놓고 보면 확실히 김진용보다 약간 작았다. 그러나 마치 김진용의 축소판처럼 비율이 똑같아서 꽤 단단해 보이는 체형이었다.

김진용에게도 인사한 임장진이 조봉진의 인사를 받고는 이병렬의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 연장을 꺼낼지 모른다.

골목 앞에 숨은 임장진의 숙소 덩치들이 달려들 수도 있고.

김진용이 눈빛을 무겁게 가라앉히고 바라보는 앞에서 이병렬은 고개를 돌렸다.

“너 숙소 관리하지?”

“그렇습니다, 형님.”

“만약에 말이다. 네 숙소 동생 중 한 명이 나한테 연장을 들면 어떻게 할래?”

“예? 형님?”

“네가 관리하는 숙소에 있는 동생 놈이 애들 통장에 넣어준 짜모 삥땅 쳤다가 나한테 들키니까 연장 들고 달려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임장진은 대꾸하지 않은 채 이병렬이 타고 온 승용차와 열려 있는 공장문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삥땅 쳤더라도 네 숙소 동생이니까 나한테 칼부림했더라도 쉽게는 못 내놓겠다는 거냐?”

임장진이 아무리 강남에서 숙소 관리하는 정영권의 일빳다라고 해도, 신강남파 넘버 투로 강성태와 온갖 싸움을 함께한 이병렬을 맞서기에는 아직 그릇이 작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관리하는 숙소에서는 돈을 빼돌리는 동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형님.”

답을 들었는데도 이병렬은 여전히 삐딱한 눈매를 풀지 않았다.

“내 앞에서 매사끼를 한 번만 더 보이면 주둥이를 찢어버릴 거니까 대답 똑바로 해. 나한테 연장 들고 달려든 것도 네가 책임지겠다는 거지?”

이병렬의 태도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아서 임장진은 마른침을 삼킬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씨발 정영권이 아래는 모조리 개새끼들뿐이네.”

고개를 삐딱하게 튼 이병렬의 눈매가 진짜 무서웠다. 그런데도 시선을 떨구는 임장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는데 불편한 느낌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클럽 하나 깔고 있으니까 사는 게 졸라리 만만했나 본데 그 업장에서 꿀 빠는 것도 모두 신강남파 그늘에 있어서 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시선을 떨군 임장진은 여전히 답이 없었고,

“숙소 동생들 데리고 왔으면 불러.”

그런 임장진을 향해 이병렬은 나직하게 독기를 뿜어냈다.

“진용아.”

이병렬은 손을 뒤로 넘겨 손바닥을 위로 들었다.

숨소리만 들어도 이병렬의 뜻을 알아채는 김진용이 품에서 회칼을 꺼내 칼자루를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얼른 불러, 숙소 동생들. 네가 날 밟을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이병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진용이 공장문 바로 안쪽에 세워두었던 배트를 집어 들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늦었어, 이 개새끼야.”

“형님? 제가 형님….”

임장진이 뒤늦게 변명을 쏟아내려는 때였다.

“이런 씨발 새끼!”

부으응! 퍼윽! 퍽! 퍼으윽!

김진용이 휘두른 배트가 임장진의 머리와 어깨, 목덜미에 연달아 떨어졌다.

이마에서 피를 주르륵 쏟아낸 임장진이 비틀거리다가 승용차를 붙들고 억지로 버텼다.

털썩.

그리고는 정신이 없을 상황에서도 그는 공장 앞 골목에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

이병렬은 임장진의 눈높이에 맞추듯 쪼그려 앉아 그를 들여다보았다.

“사람이 있잖냐. 잘못하거나 실수할 수 있어. 왜? 사람이니까. 그런데 잘못한 점을 지적받거나 들켰을 때 반응이 그 새끼의 원래 모습이다. 알았냐?”

“형님께서 연장 드시기에 저 작업하시려는 줄로 오해해서 그랬습니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형님.”

임장진이 급하게 말할 때마다 얼굴에서 흐른 핏물이 튀어 이병렬의 셔츠를 점점이 물들였다.

“그래? 그럼 하나만 묻자. 숙소 동생들 데려왔어? 아니면 혼자 왔어?”

“혹시 몰라서…. 죄송합니다, 형님.”

“씨발 새끼. 보스가 새로운 길을 열겠다고 매달 돈 찍어줘 가며 죽을힘을 다하는데 클럽 하나 깔고 앉았다고 썩은 내를 풍겨?”

픽 웃은 이병렬이 무릎을 짚어가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김진용을 돌아보았다.

부으응! 퍼윽! 퍽! 퍼윽!

김진용이 매섭게 배트를 휘둘렀고, 승용차 앞에 꿇어앉았던 임장진이 털썩,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널브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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