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2부 21권 - 3화
제2장. 원하면 언제고 칼빵 놔.
꿈처럼 흘러간 밤은 가슴에 남았고, 감촉은 심장에 가라앉았으며, 감각은 뇌리에 새겨졌다.
이른 아침, 안다미를 배웅한 강성태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행복을 맛본 느낌이었다.
그녀의 승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고서야 강성태는 빌라로 돌아왔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행복 끝, 고생 시작.
마치 강성태에게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처럼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부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 존 보스만입니다, 미스터 강. 곤잘레스 회장께서 찾으십니다.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만, 전화로는 더 이상 말하기 어렵습니다.
거인 체형 특유의 굵직한 존 보스만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으로 심각함은 충분히 전달받았다.
“지금이 출근 시간이라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한 시간은 걸려.”
- 그 정도 여유는 괜찮습니다. 한 시간 뒤쯤 도착한다고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부탁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방으로 들어가 정장과 셔츠를 꺼냈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 삶의 행복을 느꼈던 바로 그 방에서 지금은 죽고 죽이는 일에 대비하기 위해 옷을 꺼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언제고 이 과정을 모두 들려줄 순간이 있다면, 안다미나 이모네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각오가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강성태는 정장을 갖춰 입고 빌라를 나섰다.
출근 시간에 접어들고 있어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평소라면 시선도 주지 않았을 모범택시가 다가오고 있어서 강성태는 손을 들었다.
“기사님. 강남 호텔까지 부탁드려요.”
장소를 알려준 강성태는 뒷좌석에 앉아 잠시 밀쳐두었던 현실을 꺼내 들었다. 사실 곤잘레스의 호출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마카오 회의를 본격적으로 대비해야 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강성태를 스마트폰이 다시 깨웠다.
“여보세요?”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눈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는데 당장 들리는 음성만큼은 평소 깔끔하고 세련된 은선곤이었다.
“속은? 괜찮아?”
- 어제 죄송한 모습을 보였나 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그냥 많이 마셨던 거야. 이런 건 그냥 적당하게 웃으며 넘어가.”
- 죄송합니다.
멈칫했던 은선곤이 반 박자 뒤에 사과를 다시 전했다.
“아침은?”
- 우선 씻었습니다. 전화 드렸으니 이제 먹을까 합니다. 다른 일이 없다면 어제 보고드렸던 내용을 정리하러 사무실로 나가겠습니다.
“그래. 고생 부탁해.”
가볍게 웃으며 답을 한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에게 어젯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혀엉. 나 억울해요.”
침대에 누워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내놓던 모습을 보면 가슴에 눌러두었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낸 날이 아닐까?
무슨 일이든 한편이 돼 줄 형이 있었으면 싶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강성태의 동생이 억울한 일을 가슴에 묻는 건 아니지 싶어서였다.
**
이병렬은 아침을 일찍 먹은 뒤에 김진용, 조봉진과 함께 집을 나섰다. 누가 뭐래도 신강남파 넘버 투의 위치치고는 단출한 이동이었다.
“너는 진짜 회사에 안 나가 보냐?”
“성태 형님께서 은선곤 씨에게 회계 감사를 맡기셔서 제가 없는 게 오히려 도움 됩니다, 형님.”
이병렬을 위해 뒷문을 열어준 김진용이 고개를 숙인 뒤에 조수석에 올랐다.
안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을 어떻게 하기에 대표이사가 없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되냐?”
“감사라는 게 윗사람이 없어야 편하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하기야, 우리가 회계니 뭐니 봐야 까만 게 글씨고, 하얀 게 종이라는 거 말고 더 있냐? 요즘은 대학 나온 놈들도 생활한다고 오기는 하더라만, 그 새끼들도 뭐 물어보면 다 똑같더라.”
이병렬이 혼잣말처럼 감성을 내놓을 때 조봉진이 차를 움직였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막 도로에 합류했을 때였다.
“그런데 형님. 성태 형님께서 왜 갑자기 돈을 챙기시는 겁니까, 형님?”
핸들을 잡은 조봉진이 나직하게 질문을 건넸다.
훅, 냉기가 서리도록 뻑뻑한 침묵이 승용차 안을 휘감은 다음이었다.
“차 세워.”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은 이병렬의 음성이 조봉진의 뒤통수에 꽂혔다.
“차 세우라고, 이 새끼야.”
“예, 형님.”
놀란 조봉진이 막 합류했던 도로의 바깥쪽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 스위치를 눌렀다.
“내려.”
“예, 형님.”
이병렬이 지시하고, 조봉진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김진용이 뒷문을 열어주려고 했으나 이병렬은 대뜸 고리를 당겨 차에서 내렸다.
“후-.”
겁먹은 얼굴로 승용차를 돌아 다가온 조봉진을 향해 이병렬은 긴 숨을 내쉬었다.
느닷없이 선 승용차 탓에 빵빵대던 택시가 김진용의 덩치와 인상, 이병렬, 조봉진을 보고는 얼른 핸들을 틀어 세 사람을 비켜 가고 있었다.
“이리 와.”
짜아아아악!
사람들이 모두 보는 대로변이었다.
이병렬은 섬뜩할 정도로 조봉진의 뺨을 세차게 갈렸다.
휘청, 차에 팔을 짚고서야 조봉진이 겨우 몸을 세웠는데 볼과 턱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고, 왼쪽 입술 끝이 터져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너, 왜 맞는지 알아?”
“성태 형님을 입에 올렸습니다, 형님.”
“이런 개새끼가!”
짜아아아악!
이전보다 더 휘청인 바람에 쿵, 소리가 나도록 차에 부딪혔던 조봉진이 얼른 몸을 세웠다.
가장 바깥쪽 차선에 멈춘 탓에 줄줄이 차들이 밀려 섰는데 행여나 김진용과 시선이 마주칠까 전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인도를 걷는 이들도 멀찍이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야, 이 개새끼야! 보스가 말밥을 주든, 카드를 치든, 숙소는 배 쫄쫄이 굶던 게 깡패였어. 그게 숙소 생활이고. 그걸 바로 잡아서 너도, 나도, 여기 진용이도, 하다못해 안산에 그 거지 같던 숙소 애들한테까지 통장에 일일이 돈 꽂아주는 게 우리 보스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병렬은 잠시 숨을 길게 내쉬며 감정을 눌렀다.
“내가 가장 믿는 게 여기 진용이랑 치곤이, 너다. 그리고 우리 보스가 등에 칼을 맞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뒤를 내주는 게 나고. 그런데 네가 그딴 소리를 입에 담아? 내가 아니라 다른 조직이나 지방 숙소 애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죄송합니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형님.”
“후우-.”
떨군 고개, 붉게 물든 뺨, 피가 흐르는 코와 입술, 조봉진을 들여다보던 이병렬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봉진아.”
“예, 형님.”
“내가 너한테는 뒤 내놓을라니까 원하면 언제고 칼빵 놔.”
“형니-임?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형님.”
“대신에 나도 이렇게 따귀를 치면 쳤지, 너 모르게 뒤 파지 않을 테니까 그건 알아. 알았냐?”
“형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래, 이 새끼야. 보스가 우리 중 누구를 의심했거나 돈을 챙길 거였으면 조용하게 처리했지, 저렇게 대놓고 회계팀을 보냈겠냐? 설사 의심했다고 치자. 그럼 우리 말고 누군가 삥을 친 개새끼가 있었던 거겠지.”
고개를 떨구고 “예, 형님.” 하는 조봉진을 이병렬은 안쓰럽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에이, 씨발 새끼.”
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김진용이 이병렬을 위해 뒷문을 열어주었다.
**
카페처럼 꾸민 1층으로 조태완이 내려오자 정영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정영권에게 자리를 권한 조태완은 김석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홍삼 달인 물을 준비하기 위해 김석문이 움직였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해?”
“영업 마치고 찾아뵙느라고 지금 왔습니다, 형님. 의논드린 뒤에 이따가 낮에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려고요.”
마침 김석문이 홍삼 달인 물이 든 잔을 내려놓아서 잠시 틈이 있었다.
“저기, 형님. 동생들 잠깐만 물려주십시오, 형님.”
입술을 내밀며 정영권을 바라보던 조태완이 고개를 비틀었다.
“여기 애들을 물릴 정도 이야기면 나중에 보스랑 함께 듣자. 그게 아니면 병렬이라도 부르든가.”
“두 분 형님 앞에서는 어려운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형님.”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냐고?”
“형님께서 우리 조직 제일 큰 어른이시잖습니까, 형님?”
정영권의 대꾸를 들은 조태완은 같잖다는 느낌의 웃음을 먼저 보였다.
“보스가 이렇게 대우해줘서 고문이니 뭐니 동생들 데리고 지내는 거지. 다른 조직에서 나처럼 물러난 퇴물이 이렇게 동생들 꾸리고 있으면 벌써 연장 맞고 아예 찌그러졌을 거다.”
어금니를 붙인 채로 말하는 바람에 조태완의 충고는 씹듯이 들렸다.
“그러니까 괜히 불편하게 하지 말고 여기 동생들 듣는 자리에서 말하든가, 아니면 나중에 보스나 병렬이 불러서 함께 이야기해.”
조태완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정영권이 비빌 틈은 없어 보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정영권은 시간을 끌었다. 그런 뒤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성태 형님께서 은선곤인가 하는 그룹 비서실 출신 직원에게 회계 장부를 들춰보라고 하셨습니다, 형님.”
유리잔에 팔을 뻗던 조태완은 시선만 들었다.
“형님도 아시지만, 클럽을 운영하려면 여기저기 찔러줘야 하는 돈이 제법 되잖습니까? 그걸 모두 까보라는데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보여주면 되잖아?”
말문이 막혔는지 정영권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게 밖으로 나가면 클럽 문 닫습니다, 형님. 또 지금 제가 데리고 있는 동생들하고, 다른 클럽 식구들도 말은 못 하지만, 의심받는 거 기분 나빠하고요, 형님.”
한숨을 푹 내쉰 조태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
정영권이 뭔가 말하는 순간이었다.
휘익! 퍼석!
“아흑!”
조태완은 잡고 있던 유리잔으로 정영권의 이마를 세차게 찍었다.
드드득.
그리고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이마를 감싸고 있는 정영권의 머리칼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콰응! 쾅! 콰응! 콰응! 쾅!
테이블에 찍어누른 정영권의 머리를 주먹으로 연달아 내리친 조태완은 고개를 돌려 의자를 집어서 높다랗게 쳐들었다.
휘익! 콰자작!
깨진 이마, 상반신을 흠뻑 적신 홍삼 달인 물, 이마와 코에서 터진 피, 비참한 몰골의 정영권이 옆으로 기울어진 뒤에 부서진 의자의 잔해들 위로 널브러졌다.
콰드등.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버티던 테이블이 넘어가는 데도 조태완은 오랜만에 보이는 독한 눈매로 빤히 지켜보았다.
김석문이 급하게 수건을 가져와 피가 떨어지는 조태완의 오른손을 감싸주는 동안, 널브러졌던 정영권이 꿈틀대며 바닥을 짚었다.
“이런 개 호로 새끼. 동팔이가 지랄할 때 숙소 동생들 데리고 따라준 게 고마워서 클럽을 맡겼더니 뭐? 의심받는 게 기분 나빠?”
정영권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고 판단했는지 김석문이 눈짓으로 덩치 둘을 불렀다.
“너희들도 잘 봐둬. 모사가 다른 게 아냐. 이렇게 보스 뒤빡치고 다니는 게 모사지.”
주변을 둘러본 조태완이 시선을 내렸을 때, 겨우 몸을 일으킨 정영권은 넘어진 테이블과 부서진 의자 조각 틈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네가 매사 끼 있는 거 알 사람은 다 알아,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클럽을 맡겨준 보스를 씹어, 이 개새끼야!”
터지고 갈라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볼을 타고 턱에서 뚝뚝 떨어져 정영권의 무릎 앞에 고이고 있었다.
인상과 덩치로 보면 정말 강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깡패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정영권은 확실히 대가 부족했다.
“병렬이한테 연락해.”
“형님?”
급하게 정영권이 고개를 들었는데 조태완의 차가운 눈빛을 이기지는 못했다.
“정치는 다른 조직하고 붙었을 때나 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 이렇게 안에서 지랄하면 모사치는 거고. 그것도 보스 뒤빡을 치려고 이 아침에 나를 찾아와? 에라, 이 개새끼야!”
조태완이 고개를 돌리자 김석문이 얼른 스마트폰의 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태완이 형님 모시는 김석문입니다, 형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아직 서열이 아래라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이병렬에게 양해를 구한 김석문이 스마트폰을 조태완에게 넘겼다.
고개를 돌린 조태완이 손을 내밀 때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정영권이 재킷 안으로 손을 넣고는 불쑥 몸을 세웠다.
“씨바-알!”
그의 고함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형니-임!”
김석문이 조태완의 어깨를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