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1권 - 2화 (415/513)

《415》2부 21권 - 2화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계산을 치르고 20분쯤 뒤에 안다미가 들어섰다.

“아효! 어서 와요, 의사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포장마차 이모의 격한 환영을 적당하게 넘긴 안다미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먼저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는 은선곤을 보았고, 이어 술병을 살폈다.

“이것만 마셨어요?”

“앞에서 몇 잔 더 했습니다.”

“나, 이러다가 낭군님 따라서 알코올에 중독되는 거 아닌지 몰라.”

안다미의 농담을 웃음으로 받은 강성태는 맞은편으로 몸을 움직였다.

“함께 부축해요.”

“그러지 말고, 재킷만 들어주세요.”

은선곤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의 옆구리에 팔을 끼운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아흐.”

“호텔에 가자. 조금만 걸어.”

“형님께 폐를 끼치면 안 됩니다. 그게 동생의 도리입니다.”

보통 술주정은 불쾌하기 마련인데 은선곤은 귀여운 한편,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포장마차 이모가 가게 문을 열어주었고, 이어서 안다미가 바로 앞에 세워둔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길게 누운 은선곤의 다리를 접어서 안으로 넣은 다음이었다. 신음을 토해낸 은선곤이 몸을 비틀어 완벽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어디로 가죠?”

“여의도나 강서구 호텔 중 하나가 좋을 거 같은데요.”

강성태의 답에 고개를 갸웃했던 안다미가 승용차를 몰아 도로에 들어섰다.

데이트를 위한 드라이브라면 분위기가 참 좋았을 밤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참. 성태 씨 멕시코에 가요?”

이걸 안다미가 어떻게 알지?

질문을 받은 강성태는 오히려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마카오에 가거든요. 그곳에서 결정 날 거라서 뒤에 말하려고 했었는데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은주랑 통화했었어요. 조금 일찍 끝나는 날이라 커피 알리고에 들를까 했었거든요. 방지병원에 있다면서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치곤 씨가 함께 가자고 했다던데요?”

빠르다. 진짜.

이은주에게 프러포즈하고 싶은 최치곤의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퇴원하고도 한참 뒤에 가도 충분한 일을 뭐 그리 급해서 떠들었을까.

“나는요?”

최치곤을 떠올리는 강성태를 향해 안다미의 질문이 달려들었다.

“왜 대답을 못 해요?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와! 이 남자 봐. 치곤 씨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은주에게 멕시코에 함께 가자고 했다는데 나는 그냥 한국에 있어라, 이거예요?”

농담 반, 진담 반의 서운한 눈빛으로 안다미가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한참 뒤의 일입니다. 함께 가게 된다면 다미 씨가 근무할 병원도 알아봐야 합니다.”

“도시를 새로 짓는다면서요? 병원은 계획했을 거잖아요?”

안다미의 표정이나 음성으로 봐서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정말 안다미가 카르텔이 법인 멕시코에서, 그것도 납치당했던 그 장소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더구나 강성태와 신강남파는 중국, 일본, 멕시코의 공동의 적일 텐데?

강성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한 채 운전하는 안다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에 곤잘레스 회장이란 분이 멕시코에 의료 봉사를 요구했었던 거 기억하죠? 새롭게 건설되는 신도시에 병원을 지으면 스태프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곤잘레스 회장이 우리 병원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면 나는 당연히 그런 요청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정말 병원이나 의료진에 대해 생각 안 해봤어요?”

“예.”

나직하게 대답한 강성태는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안다미의 말대로 함께 가는 문제를 아직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의료진에 관해서도. 그 부분은 곤잘레스의 영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멕시코에 함께 갈 생각으로 물어본 건데 왜 갑자기 그렇게 심각해요?”

질문을 던진 안다미가 호텔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은선곤을 눕히는 게 먼저였다.

차에서 내린 강성태는 객실을 확인해 비용을 지불했고, 안다미와 둘이서 은선곤을 데리고 들어갔다.

구두만 벗겨 침대에 눕힌 은선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을 때였다.

“혀엉. 나 억울해요.”

술주정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말을 은선곤이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모두 가슴 속에 갑갑한 사연 하나쯤 품고 사는 게 세상이니까.

이불을 좀 더 당겨준 강성태는 안다미와 함께 주차장으로 나섰다.

“왜 그래요? 내가 멕시코에 간다고 해서 기분 나빠 그래요?”

약간은 굳어 있는 강성태의 표정이 걸린 모양인지, 안다미가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이런 건 굳이 숨길 필요 없는 일이었다.

“전에 본 용병 시절 사진 기억하시죠? 로라 사진도요. 마카오 회의에서 멕시코 공사가 확정되기 때문에 중국 측이 집요하게 곤잘레스 회장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총괄 경호 책임을 내가 맡았고요.”

듣고는 있지만, 지금 강성태가 말해준 내용과 의료팀 요청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대해 아직 안다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나를 놓쳤던 카르텔이 반드시 복수하겠다며 달려들 테고, 그 외에 중국과 일본의 폭력조직도 기회를 엿볼 겁니다. 다미 씨가 정말 위험해질 수 있고요.”

“그럼 그렇게 위험한 곳에 가겠다는 거였어요?”

“물론 멕시코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을 만들어야죠. 그렇지 않다면 다미 씨와 한국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되고요.”

일부러 어깨를 들썩여가며 강성태는 과장되게 답을 건넸다.

여기까지가 좋다. 설명은.

급하게 결정할 필요가 없는 일로 모처럼 함께하는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갑니까?”

“성태 씨 집이요.”

“그럼 뭐라도 사 가야죠?”

“트렁크에 있어요.”

“술이나 간단한 안주를 살까 했는데요?”

“샴페인이랑 치즈, 크래커, 그리고 과일이 있는데 더 필요해요?”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울 만큼 완벽한 준비였다.

멕시코에 함께 가겠다는 의지, 샴페인, 이건 혹시 안다미가 보내는 진하디진한 그린 라이트인가?

조수석에 앉아 앞을 보는 강성태는 이상하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런데 저분은 왜 만난 거예요?”

안다미의 질문에 강성태는 이모 장숙경을 방문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성태 씨, 정말 잘했어요. 내가 낭군님은 진짜 잘 만났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안다미는 이상스레 ‘낭군님’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힌트를 사방에 뿌려대는데도 몰라준 거라면 안다미가 서운할 만도 하겠다. 물론 김칫국을 사발째 마시는 걸 수도 있겠고.

마침내 강성태의 빌라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운 안다미가 트렁크를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브랜드가 적혀 있는 비닐 쇼핑백 안에 꽤 비싼 샴페인과 치즈들이 담겨 있었다.

고작 치즈에 군침이 도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마른침이 넘어가는지, 우르르 달려오는 삼합회 놈들과 맞선 것만큼이나 심장이 두근대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도어 록을 열고 들어간 강성태는 쇼핑백을 식탁에 올렸다.

“어디에서 마실까요?”

“식탁에서 먹어요. 손부터 씻고요.”

누구 말인데 그걸 어기겠나.

강성태는 먼저 손을 깨끗하게 씻고,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뒤에 그나마 가장 작은 셔츠와 운동복 바지를 골라 거실로 나섰다.

“혹시 괜찮으면 이거 입고 있을래요?”

시선으로 옷을 확인한 안다미가 예쁘게 웃은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잔, 접시를 준비하며 쿵쾅대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있을 때였다.

강성태의 셔츠를 입은 안다미가 옷을 매만지며 나와서 양팔을 벌렸다.

“어때요?”

여고생들이 치마 속에 운동복 바지를 입은 것 같기는 했는데 강성태의 셔츠를 입은 안다미는….

“왜 말을 안 해요? 이상해요?”

“심장이 두근대는데 그걸 표현할 적당한 말을 못 찾았습니다.”

“가만 보면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니까.”

장난스럽게 말을 던진 안다미가 요정처럼 다가와 달빛처럼 강성태의 품에 안겼다.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강성태는 안다미를 깊게 안으며 알지 못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아야 할 목적이 품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잠시 그렇게 안다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목덜미와 등을 어루만진 다음이었다.

“우리 이제 샴페인 마셔요.”

진도의 중간을 뚝 자른 안다미가 식탁을 바라보았다.

나대는 심장을 초인적인 의지로 누른 강성태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샴페인의 마개를 돌리며 강성태가 질문을 건넸고,

“내 생일이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답을 안다미가 내놓았다.

강성태는 멍한 얼굴로 샴페인 병과 코르크 마개를 붙잡은 채 안다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샴페인을 어쩌면 오늘 못 마실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함께 있어서 더 바라는 것도 없어요. 내가 생일이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럼 아버님은요?”

“아빠는 아침에 선물 주셨어요. 오늘 성태 씨 만날지 모른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셨고요.”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다미 씨. 아버님 안 주무실 거 같으면 전화 드리죠. 다미 씨 생일에 아버님 혼자 집에 계신 거, 나 같으면 서운할 거 같은데요?”

강성태의 말에 안다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정말 철벽이다, 철벽. 우리 아빠는요, 오늘 아침에 선물 주시고, 세미나 가셔서 내일 오세요.”

안다미의 웃음은 눈부셨다.

“이 정도 사인을 줬는데도 모르는 척하면, 내가 싫거나 성태 씨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거지요.”

몸에 이상이 있을 리가?

힘이라면 강성태지!

강성태는 보란 듯이 힘껏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

곤잘레스 이두안은 아침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을 모두 물리친 뒤에 존 보스만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존 보스만은 늘 하던 대로 양손을 앞으로 마주 잡고 지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커피?”

“감사합니다만 거실에서 마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는 고급스러운 찻잔에 그가 좋아하는 커피를 반쯤 따랐다.

“중국과 보리스 파리오가 아예 독을 삼키는 느낌이다.”

곤잘레스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존 보스만이 고개를 비틀며 이어질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새로운 경호팀이 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이 조금 전에 있었거든.”

“회장님께서 요청하셨습니까?”

“나는 미스터 강과 자네만 믿어.”

“그렇다면 누가 경호팀을 보내는 겁니까?”

“멕시코 정부.”

짧게 답을 내놓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남은 커피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경호팀을 지원하겠다는 말이 내게는 암살팀을 보낸다는 소리로 들리더군. 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가페 대원을 넣겠다니, 아무리 급해도 중국과 멕시코가 나를 너무 우습게 생각한 거지.”

설명을 마친 그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뒤에 거대한 거실 창을 등지고 서서 존 보스만을 바라보았다.

은발, 그의 이니셜이 새겨진 셔츠, 벨트, 명품 바지와 구두, 완벽하게 갖춰 입은 그가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마카오 회의에 관해 멕시코 정부에 알려준 적이 없어. 그런데도 멕시코 정부가 경호팀을 내게 보내겠다고 통보해 왔지. 제안이 아니라 통보.”

이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이해했는지 유독 하얗게 보이는 존 보스만의 눈이 문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거절하기도 난처해. 시작부터 멕시코 정부의 제안을 무시한 꼴이니까. 이게 누구 수작인 거 같은가?”

“중국 정부, 아니면 카르텔의 소행 같습니다.”

“그 두 곳이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물론 전에 닥터 안과 동료들을 빼앗기면서 망신당한 가페도 계산에 넣어야겠지.”

“굳이 지금 이렇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멕시코 정부의 제안을 거절하면 뭔가 핑계가 되지 않겠나? 멕시코가 이곳 한국처럼 공정한 사회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답이 있지 않을까?”

“흐음.”

무겁게 들리는 존 보스만의 숨소리가 나온 다음이었다.

“이런 걸 한국에서는 가드가 불가능한 기술이라고 하더군. 미스터 강이나 자네가 멕시코 정부의 경호원을 사살하면 그 나름으로 문제가 되고, 그렇다고 놔두면 내 머리에 구멍이 날 테니 말일세.”

“미스터 강을 불러서 의논하시는 게 당장은 가장 현명한 방법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러니 나가서 미스터 강을 불러주게. 그리고 지금 의논한 건 자네만 알고 있어. 이유는 나중에 따로 설명하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짧게 숙인 존 보스만이 무겁게 움직여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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