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1권 - 1화 (414/513)

《414》2부 21권 - 1화

제1장. 방법이 없잖아요?

김민정이 가져다준 커피 향처럼 김진규의 감정이 은은하게 좁은 거실 안으로 퍼졌다.

‘이모. 받아주세요.’

시선을 돌리는 강성태를 장숙경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억지로 만들어낸 표정이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으려 굳게 다문 입술, 붉게 물든 눈 안에 감추어둔 감동이 강성태에게 고스란히 보였다.

“돈 바라고 너 키우지 않았어.”

“알아요, 이모. 하지만, 부모님 집 해드리는 장남 하고 싶어요. 나, 이 집 큰아들 아니었어요?”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감정을 대신해 마른침을 삼킨 장숙경이 김진규를 흉내 내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모는 알아준 것만으로…. 아냐. 아무튼, 됐어. 이모부 말씀대로 마음은 받았으니까 이거 집어넣어.”

이런 반응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함께 산 게 아니어서 그렇다.

강성태는 도움을 바라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선곤이 입을 열자 김진규와 장숙경, 김민재와 김민정이 조금은 냉정을 찾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는데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홍콩 공항에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과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아!”

확실히 김진규와 김민재는 그 보도를 본 모양이었다.

“그분이세요? 성함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특히, 김민재는 이제 확실히 알겠다는 투로 은선곤을 바라보았다.

“내용은 멕시코에 신도시 건설 사업입니다. 제가 국내 그룹사가 만든 컨소시엄의 대표를 맡게 됐습니다.”

은선곤의 말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저렇게 대단한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그것도 강성태와 달랑 둘이서?

이모네 가족의 표정 변화를 읽은 강성태는 올라오는 웃음을 슬며시 삼켰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이번 신도시 건설 사업의 한국 쪽 파트너로 우리 강성태 회…, 사장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몇 가지 조건을 조율 중인데 원하신다면 이 아파트를 강명그룹에서 제공하겠습니다.”

“강명그룹이요?”

“강성태 사장님이 아니셨다면 이번 신도시 건설 공사가 중국 업체로 넘어갈 뻔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조만간 있을 마카오 회의에서도 강성태 사장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장숙경과 김민정의 시선이 강성태를 향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모. 강명그룹에서 아파트를 선물하는 건 뇌물 같잖아요. 그러니까 받으세요. 그래서 제가 마카오 회의 다녀오면 우리 그 집에서 집들이해요.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은 김치찌개랑 해서요.”

날카롭던 장숙경의 눈매가 강성태의 한 마디에 스르륵 녹아내리고 있었다.

“성태야. 나중에 결혼하면 너 살 집으로 해.”

“이모는? 참. 은선곤 씨. 미안한데 나 이번에 마카오 회의에 다녀오면 얼마 받는지 우리 이모님께 말씀 좀 해주세요.”

“달러로 받으실 테니까, 한화로 대략 50억 원쯤 되고.”

이모네 가족이 눈만 끔벅이며 은선곤을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공사 발주가 시작되면 0.1퍼센트의 수수료를 합법적으로 받으시니까 1차로 120억 원쯤 되겠습니다.”

안다미를 구하기 위해 멕시코에 다녀오면서, 그 외에 홍콩 일로 보리스에게서 받은 돈을 모두 합치면 얼추 비슷한 금액이었다.

“이모. 이제 됐어요?”

“아직 들어온 건 아니잖아?”

역시 날카롭기가 면도날다운 장숙경의 지적이 있었고,

“마카오 출장 대금은 강성태 사장님께서 회의 뒤로 미루는 바람에 지급이 안 됐습니다. 원하시면 내일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은선곤의 재치가 바로 번득였다.

“이모. 내가 지금껏 일해서 번 돈으로 사드리고 싶었어요. 이걸 받아주셔야 이제부터 들어오는 돈은 제 미래를 위해 마음 놓고 쓸 수 있을 거 같고요.”

말려들었다. 장숙경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시선으로 김진규를 돌아보는 것으로 대강 상황은 정리된 느낌이었다.

“민재야. 형이 먼저 효도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하냐? 이거 이상 해드릴 수 있겠어?”

“누가 형이야?”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농담을 건넸던 김민재가 장숙경의 날카로운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하게 풀어냈다.

“이모부. 이모. 큰아들이 드리는 선물입니다. 기분 좋게 받아주시고, 그냥 기특하다고 칭찬 한 번 해주세요. 저, 그런 아들 해보고 싶었습니다.”

더는 거절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김진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은선곤 씨 때문에 이만 일어날게요. 마카오 가기 전에 들를 테니까 김치찌개 해주세요.”

“성태야. 너 이거 부끄러운 돈 아니지?”

“제가 일해서 꼬박꼬박 모은 돈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벌었어요.”

‘우리 가족’이란 표현에 왈칵 감정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눈이 붉게 물드는 장숙경을 보며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우리 장 여사 한 번 안아볼까?”

어딜 손님 계신데?

눈을 치켜뜨는 장숙경의 뒤로 걸어간 강성태는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히잉.”

울지 않으려 애쓰는 바람에 울음이 묘하게 들렸는데 누구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이모. 받아줘. 나 정말 이거 하고 싶었어. 그리고 진짜 사랑해, 이모. 고마워요.”

답을 못하는 장숙경이 손을 들어 뒤에서 안아주는 강성태의 팔을 자꾸만 다독였다.

김진규와 김민재, 김민정이 붉게 물든 눈으로 바라보았고, 은선곤은 어쩐지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략 10분쯤 더 지나서 마카오에 가기 전에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김진규는 강성태의 선물을 받았다.

오래된 숙제를 마친 후련한 심정으로 강성태는 은선곤과 함께 오래된 이모의 빌라를 나섰다.

“고생했어.”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많이 뵙고 싶어졌고요.”

강성태가 고개를 돌린 옆에서 은선곤은 좁은 인도의 가로등을 얼굴과 어깨에 받으며 걷고 있었다.

“술 한잔 할래?”

“그래도 됩니까?”

강성태의 상처들을 걱정하는 은선곤을 보며 강성태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은 안다미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그리며 외로운 집에 가야 하는 은선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유독 그런 날이 강성태에게도 있었다.

최치곤과 폭탄주를 마시며 킬킬대야 겨우 위로가 되는 날, 더구나 오늘 은선곤은 강성태의 부탁으로 연기까지 펼쳤으니 술 한잔 사줄 이유는 충분했다.

모처럼 들른 포장마차는 저녁 손님을 보내고, 다시 북적일 늦은 시간을 기다리는 한적한 모습이었다.

“어머? 삼촌?”

“안녕하세요?”

“왜 그렇게 뜸했어? 치곤이 삼촌도 통 안 오고.”

포장마차 이모가 ‘이렇게 고급스러운 손님을 여기 데려와도 돼?’ 하는 눈으로 은선곤을 살폈다.

“이모. 우리 족발하고, 꼼장어, 계란말이, 그렇게 우선 주세요. 술은 마시던 거로.”

“알았어, 삼촌.”

강성태는 은선곤과 함께 늘 앉던 안쪽 자리로 향했다.

이런 종류의 포장마차가 생소한 모양인지 가방을 옆에다 내려놓은 은선곤이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재킷도 벗지?”

“예?”

“여기는 그냥 편하게 먹는 장소야. 조금 지나면 옆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도 높일 거고. 우리 둘이 재킷에 딱딱하게 앉아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예에.”

마치 드레스 코드를 맞추려는 사람처럼 재킷을 벗은 은선곤이 옆자리에 내려놓고 단정하게 개켰다.

이 자리에 이병렬, 김진용, 최치곤이 있었다면 저 모습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하나씩 적응해 가는 거지.

마침 포장마차 이모가 소주와 맥주, 약간은 말라버린 당근과 오이를 가져다주면서 은선곤의 어색함을 덮어주었다.

“뭐 마실래?”

“회장님과 같은 거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강성태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씩 섞었다.

“나는 이렇게 마셔. 그래도 되겠어?”

“양주로 단련된 몸입니다, 회장님.”

당찬 대꾸에 강성태는 똑같은 폭탄주를 하나 더 만들었다.

“오늘 고마웠어.”

“보기 좋았습니다, 회장님.”

강성태가 내민 잔에 조심스럽게 잔을 부딪쳤던 은선곤이 반쯤 마셨다가 눈치를 살피고는 나머지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괜찮아?”

“맛있습니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러나 맛있다는 사람에게 ‘너는 여기까지.’라며 자를 수 없어서 강성태는 다시금 잔을 채웠다.

석 잔을 더 마셨고, 이어서 나온 족발과 어묵 국물을 조금씩 먹고 난 뒤였다.

“아웅.”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던 은선곤의 입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럴 거 같았다.

최치곤과는 달라서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모처럼 들른 포장마차의 분위기가 좋아서 강성태는 말없이 폭탄주를 한 잔 더 만들었다.

“저두…, 주십시오.”

강성태가 시선을 든 앞에서 은선곤은 버티고 싶은 열망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그래. 마시자.

그룹 비서실에서 촉망받던 인재가 홍콩에 날아가 끔찍한 모습을 봐야 했고, 또 깡패들이 하는 사업을 관리하려면 속도 타겠지.

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힘들었을 테고.

강성태는 말없이 잔을 만들어 은선곤 앞에 내밀었다.

“푸후-.”

저런 모습을 보이고 나면 최치곤은 반드시 퍼졌다.

대략 30분쯤 걸렸었나?

“저 말입니다아-.”

고개를 떨군 채 웅얼거리는 은선곤 앞에서 강성태는 폭탄주를 시원하게 마신 뒤에 조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형이 한 분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릴 적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제가요.”

이건 술기운을 빌려 하는 주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성태에게 하는 말도 아니어서 은선곤이 본인에게 하는 독백 느낌이었다.

투명한 소주를 따른 강성태는 갈색 거품을 일으키는 맥주를 그 위에 부었다.

“진짜 형 말입니다. 제가 맞았다고 하면요. 이유 따지지 않고 달려와서요. 백인이든,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때려주는 형이요. 힘들 때 찾아가서, 형! 나 힘들어, 하고 투정 부릴 수 있는 형이요.”

아직 상체가 탁자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최치곤의 경우에 비춰볼 때 15분쯤 남았다.

샤프하게 보이는 은선곤의 은색 안경이 반쯤 흘러내려 얼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제가요.”

거기까지였다.

최치곤에 비해 반도 못 마셨고, 버티는 시간도 짧았지만, 은선곤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강성태는 팔을 뻗어 탁자로 스르륵 무너지는 은선곤의 상체와 머리를 붙들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빼서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았다.

“어흐.”

밤샘 공부를 한 학생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잠든 것처럼 은선곤은 탁자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자세로 잠들었다.

어쩌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런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해, 삼촌?”

“조금 자게 두려고요.”

“술을 별로 못 마시는 거 같은데 삼촌 주량을 몰랐던 거야?”

“오늘 많이 피곤한가 봐요.”

답을 한 강성태는 소주병을 들었다가 이모를 보았다.

“세 병이면 돼?”

“두 병만 주세요. 맥주 한 병 하고요.”

“오늘은 삼촌도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네.”

두 팀 있는 손님들이 강성태의 외모와 술 마시는 모습, 그리고 지금의 주문에 놀란 듯 바라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가져갔다.

하루쯤 부담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기억도 흐릿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억울했던 죽음을 흘려보내기 위한 순간이 강성태에게 필요했다.

언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이제 다시는 평범한 모습으로 포장마차에 앉지는 못하리란 아쉬움이 맥주의 거품처럼 올라왔다가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곽대출 부회장을 만났다는 말을 못 했다.

양주로 단련됐다더니?

엎어져 있는 은선곤을 보며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심정으로 웃었을 때였다.

우우웅.

강성태의 아쉬움을 안 것처럼 안다미의 문자가 스마트폰에 올라왔다.

[오늘 바빠요?]

스마트폰을 확인한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저 지금 신월동 포장마차에 있습니다.”

- 뭐예요? 그럼 말을 하죠. 혹시 다른 분이랑 함께 있어요?

“강명그룹 직원이 테이블에 엎드려서 자고 있네요.”

- 심하다.

장난기 가득한 안다미의 투정이 넘어와서 둘이서 함께 웃었다.

- 할 이야기도 있고 한데, 내가 가도 돼요?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고민해 봐야겠는데요.”

- 내 차로 호텔에 데려다주죠. 그게 그분한테도 편할 거 같은데, 어때요?

“그래도 되겠어요?”

- 바쁜 낭군님 만나려면 방법이 없잖아요? 이렇게라도 고생해야죠. 바로 갈 테니까 너무 마시지 말아요. 알았죠?

시원시원하게 답을 건넨 안다미가 바쁘게 통화를 끝냈다.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앞에 놓아두었던 잔을 기분 좋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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