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2부 20권 - 16화
제6장. 냄새나는 것에는 뚜껑을 덮어라(臭い物に蓋をする).
강성태를 얕보았다가 야쿠자들이 반 넘게 죽어 나가면서부터 차웅진은 마음이 급했다. 그 탓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연달아 저질렀다.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살아오면서 접한 삶의 가르침에 있었다.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끈질기게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건 무례한 인간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 잘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들추고 비난하기보다는 못 본 척하며 눈감아주는 게 차웅진이 아는 삶의 도리요, 미덕이었다.
당연하게 일본에도 돌이키지 못할 사고는 생긴다.
그럴 경우, 일본은 책임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피해를 본 사람들마저 그 정도면 충분히 책임졌다고 판단하고 더는 사건을 들추지 않는 게 관례였다.
차웅진은 그렇게 배우며 살았다.
물론, 지금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기 목숨은 소중하다고 여기는 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어떤 일이든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마지막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식으로 일을 무마했다.
그가 보고 배운 삶의 방식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꾸겠나.
지난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오던 차웅진을 느닷없이 나락으로 빠트린 건 모두 강성태가 쓸데없이 일본의 개니, 매국노니 하며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녔던 권위는 이가 부러지도록 얻어맞는 순간, 모두 무너졌고, 거느리던 야쿠자들이 반 넘어 죽었음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냄새나는 것에는 뚜껑을 덮으라는 일본의 속담이 있었다.
원인이나 과정 따지지 말고 일단 일을 무마하는 게 우선이라는 의미였다.
바라기는 강성태가 아카시 회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인데, 그건 마치 호랑이가 개 앞에서 배를 드러내고 애교를 떠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카오로 가면 차웅진은 죽는다.
그렇다고 아카시 회장의 지시를 어기고 출국을 거부하면, 그가 거느리던 야쿠자의 손에 비참한 죽임을 당할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강성태를 죽인다.’
차웅진은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아서 나름대로 다른 계획도 세워두었다.
돈 싫다는 인간 여태 본 적 없었다.
심지어 강성태 역시 그의 전 재산을 원할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답이 있었다.
아무리 강성태가 돈에 환장했다고 해도 아무렴 영악한 그놈이 촬영장에 혼자 오겠나.
분명 어딘가에 조무래기들을 숨겨 놓고 흥정을 하려 들 게 분명했다.
또 있다.
강성태도, 차웅진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수습이 어렵다.
더구나 권총에 니폰 도까지 동원되면 워낙 사상자가 많이 나오고 그만큼 처참한 장면이 연출되는 터라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강성태 역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서재에 무릎을 꿇고 앉은 차웅진은 탁자에 올려둔 일본도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전 재산을 건네주겠다.
그걸 받는 대신 아카시 회장께 최소한 사과라도 해라.
강성태를 만나서 먼저 타협점을 찾아보고, 그게 안 되면 방아쇠를 당길 참이었다.
일본이, 아카시 회장이 건재하는 한, 기회는 반드시 오게 돼 있다. 그러니 오늘은 강성태라는 냄새에 뚜껑만 닫으면 성공한 하루였다.
**
오전을 책을 읽으며 보낸 강성태는 점심을 먹은 후에 조용하게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쳤다.
책을 읽는 내내 계획을 점검했고, 여러 차례 되돌려 보았으나 문제가 될 만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강성태의 눈에 감출 수 없는 독기가 피어났다.
알지 못하는 변수가 있을까?
아니면 추악한 사이트의 운영진 놈들을 찾아간 이병렬에게 사고가 생기나?
강성태는 자료를 통해 확인한 아카시 미키야토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평생 다른 사람에게 굽혀본 적 없는 거만함과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입술 주변에 새겨진 팔자주름처럼 진하게 뭉쳐있는 오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혹시 아카시 미키야토가 비밀리에 다른 수단을 동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바르지오 만시니가 전화 통화, 팩스, CCTV를 동원해 수집하는 정보에도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용병과 경호원 시절에도 늘 변수는 존재했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촬영장에 가서 해결하는 게 정답이었다.
“가볼까?”
동료에게 건네는 것처럼 혼잣말을 내놓은 강성태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옷장 아래에 둔 상자를 꺼내 열었다.
새로 감싼 갈색 천에 싸여 있던 쿠크리의 손잡이가 방안의 나직한 조명을 품어 은은하게 빛났다.
칼자루만 잡아서 꺼내도 충분했다. 그러나 강성태는 양손을 넣어 쿠크리의 칼날 아래와 손잡이를 동시에 잡아 들었다.
야쿠자? 백 명? 권총?
‘부산의 조강치와 홍콩에서 날뛰던 삼합회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분명하게 알려주고 오자.’
쿠크리를 가슴 앞에 든 강성태는 다시 만난 동료를 듬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
서재에 앉아있던 차웅진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 서류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변호사는?”
- 수수료 수익을 기대해서인지 약간 흥분한 상태로 보입니다. 서명 장소로 함께 이동해야 한다는 제안에 오히려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답을 들은 차웅진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알았다. 촬영장의 준비는?”
- 건물은 모두 폐쇄했고, 부산과 인천에서 올라온 인원까지 합세해서 촬영장을 완벽하게 장악했습니다. 아카시 회장님의 지시대로 카지노에 있던 경호 인력도 전부 도착해 있습니다.
“무기는?”
- 충분히 지급했습니다, 회장님.
“그렇다면 강성태에게 연락하겠다. 마지막까지 방심하는 일이 없도록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마라.”
통화를 마친 차웅진은 잠시 테이블에 올려둔 니폰 도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강성태, 강성태, 강성태, 이놈.’
숨을 두 번쯤 내쉰 차웅진이 스마트폰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부러진 이 탓인지 입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지만, 야쿠자들이 건네준 마약성 진통제 덕분인지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다.
번호를 누른 차웅진이 스마트폰을 귀에 댄 다음이었다.
- 말해.
그 흔한 ‘여보세요?’조차 생략한 강성태의 대꾸가 건너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강성태의 음성에는 일본인 남자들이 가장 열광하는 소위 기백이 가득했다.
과거에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필시 장군이 되었을 놈이고, 운이 좋아 일본에 태어났다면, 최소가 이름을 떨치는 사무라이요, 제대로 컸다면 영지를 거느린 쇼군이 됐을 기백이었다.
- 차웅진이다. 앞으로 두 시간 뒤에 양주의 영화 촬영소에서 보자. 다시 말하지만, 너 혼자 와라. 그렇지 않으면 변호사의 목숨은 없다.
“세 시간 뒤로 해. 그리고 내가 촬영소에 들어가기 전에 서류에 미리 사인해 둬. 내가 보낸 변호사를 통해 서류의 사인을 확인하면 들어가지.”
- 크흠.
“한 가지 더. 두 명과 함께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 약속은 너 혼자 들어오는 거였다.
“내가 정한 게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요구한 거지. 그렇게 알고 세 시간 뒤에 보자. 안 내키면 지금 말해.”
무심코 이를 악물던 차웅진은 느닷없이 왼쪽 얼굴 전체를 찢어내는 것처럼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 왜 대답이 없어?
“알았…다.”
차웅진이 겨우 답을 한 직후에 강성태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통화를 뚝 끊었다.
**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곧바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이종환입니다, 형님.
“방금 연락이 있었다. 약속은 세 시간 뒤로 했는데 준비는?”
- 말씀하신 대로 따로 움직여서 조용하게 모여 있습니다. 이쪽 동생들이 살펴보고 있는데 입구를 바리케이드로 막아뒀답니다. 형님.
강성태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한 시간 정도면 차웅진이 도착할 거다. 그 뒤에 말한 대로 움직여. 혹시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절대 무리하지 마.”
- 예, 형님. 그리고 형님.
전화를 끊으려는 강성태를 이종환이 급하게 붙들었다.
- 병렬이 형님이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올 거 같았어.”
강성태의 대꾸가 웃겼는지 웃음을 참는 이종환의 묘한 숨소리가 대답 대신 건너왔다.
별거 아닌데 따라 웃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종환과의 통화 덕분에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양주에서 양평 방향으로 달리는 국도였다.
도로 저 앞에 ‘영화 촬영소’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새긴 바위가 보였다.
“들어가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은 주저하지 않고 양주 영화 촬영소의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2차선 포장도로였다.
50미터쯤 들어가자 여러 겹의 바리케이드가 교차로 서 있어서 아르윈이 핸들을 좌우로 틀었고, 그만큼 차가 출렁였다.
흔들리는 승용차 안에서 강성태는 좌우를 살폈다.
바리케이드 양쪽으로 셔츠와 정장 차림의 덩치들이 두 명씩 서 있었는데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세를 잡은 승용차는 왼편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달렸고, 이어 급하게 치솟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대형 승용차의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올라선 곳은 거대한 사각 건물 옆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이었다.
‘여러 가지 하네.’
행여나 주차장에 차를 세울까 염려한 것처럼 역시나 셔츠에 정장 차림의 덩치 두 명이 ‘누가 봐도 야쿠자입니다.’ 하는 태도로 반대편 도로를 향해 왼팔을 뻗었다.
방향을 트는 승용차 안에서 강성태는 건물을 돌아보았다.
감출 게 없다고 여긴 건지, 아니면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건물 뒤편에 야쿠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주차장을 가로지른 승용차는 좁은 도로에 들어섰다.
길지 않은 도로의 끝에 승용차가 멈췄을 때,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낡은 단층 건물, 빨간 글씨로 쓴 간판, 나무로 만든 문에 군데군데 금이 간 유리까지, 이런 시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금방이라도 김두한과 이정재, 시라소니가 뛰쳐나올 것만 같은 건물들이 좌우로 길게 이어져서, 느닷없이 과거로 빨려든 느낌이었다.
운전석에 있던 아르윈이 차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조수석에서 밖으로 나온 키란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목덜미에 커다랗게 거즈를 붙였지만, 오늘 키란은 아르윈과 함께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강성태는 승용차에 내려 앞을 보았다.
말라서 굳어버린 피를 뒤집어씌운 듯한 테이블을 놓고 지팡이에 양손을 짚은 차웅진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야쿠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한민국에 야쿠자들이 이렇게나 많았었나.
평창동 그의 주택에서 쓰러트린 놈들만 20명이 넘는데 당장 보이는 놈들만 얼추 70명은 돼 보였다.
들어오는 동안 보았던 놈들, 거대한 건물 뒤편에 있던 놈들까지 합하면 실제로 백 명이라고 보는 게 좋았다.
여기가 지금 한국이 맞을까.
심지어 차웅진의 뒤에 서 있는 야쿠자 놈 중 대략 50명은 길쭉하게 휜 일본도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분위기 참.
어디선가 하얀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거리에 일본도를 품은 야쿠자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꼴이라니.
테이블에 앉은 차웅진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강성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성태는 덤덤한 얼굴로 걸어서 차웅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양주의 나지막한 산 위에 걸린 태양이 갈라진 햇살을 길게 뿌려 테이블 주변을 주황색으로 덮어씌운 시간이었다.
강성태가 도착하자 차웅진이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경호원으로 있을 때, 멕시코 카르텔과 지겹도록 경험했던 장면이었다. 물론, 앞에 있는 야쿠자 놈들과 멕시코 카르텔의 수준이 확연히 다르지만 말이다.
일단 들어는 준다.
강성태는 차웅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댄 뒤에 다리를 꼬았다.
눈알을 굴린 차웅진이 먼저 아르윈을 확인했고, 이어 키란을 눈에 담았다. 그의 볼이 씰룩하는 거로 봐서 평창동에서 무섭게 날뛰던 키란을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변호사는?”
“네가 말을 바꿀 때를 대비해서 안쪽에 두었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전 재산을 네게 넘기는 서류에 사인했고, 변호사 놈이 요구해서 도장까지 찍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들어줬잖아?”
강성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지 눈가를 좁힌 차웅진이 고개를 살며시 비틀었다.
“여기로 오라고 해서 와줬잖아? 그것도 보다시피 두 명만 데리고. 더 바라는 게 있어?”
“네놈이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내 말 한마디면 너는 말할 것 없고, 무식하게 날뛰는 네 부하 두 놈도 몸뚱이가 갈라져 죽게 돼. 알겠냐?”
강성태는 시선을 내렸다.
그런 뒤에 바지에 올라앉은 먼지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털어냈다.
그 직후였다.
철컥.
아르윈이 권총을 꺼내 차웅진을 겨눴고,
휘릭!
허리에서 쿠크리를 뽑은 키란이 훌쩍 테이블로 뛰어올라 차웅진의 목에 구부러진 날을 바싹 붙였다.
“후-.”
갑갑한 느낌의 숨을 내쉰 강성태가 시선을 들었을 때, 야쿠자 놈들은 겨우 일본도를 아래로 내려 반쯤 뽑은 상태였고, 맞은편의 차웅진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멍청한 놈들아. 칼이 길면 뽑는 데 시간이 걸려. 품에 안고 있으면 그만큼 더.”
시선을 넘겨 야쿠자들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떤 놈이든 나서는 순간, 이 인간의 목을 갈라버릴 테니까 까불지들 말고 있어.”
말을 마친 강성태는 재킷 안쪽에 손을 넣었다.
움찔, 움찔, 야쿠자들이 동요하는 앞에서 강성태는 오래된 전화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