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0권 - 15화 (408/513)

《408》2부 20권 - 15화

잠든 사이 바빴던 하루가 어제라는 이름으로 멀어졌고, 대신 새로운 오늘이 강성태와 함께 새벽을 맞았다.

여러 갈래의 계획과 준비가 하나로 뭉쳐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일찍 일어난 강성태는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뒤에 커피를 담은 머그잔을 앞에 두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전투에 나설 때와 비슷한 루틴이었다.

공략 지점, 필요한 무기, 살아남기 위해서 갖춰야 할 방어, 반대로 적을 쓰러트리기 위한 전략까지.

하루를 계획하는 강성태를 가장 먼저 찾은 건 JBC 회장 소신영의 문자였다.

[연락 바라오.]

어떤 경우에도 강성태와 의논했던 내용을 문자로 남기지 않겠다는 이 세심함이라니, 인간이 사악한 만큼 죄를 감추려는 꼼꼼함 하나는 충분히 칭찬해 줄 만한 인물이었다.

연락을 달라고 했으니까.

강성태는 엄지를 움직여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 크흠. 우리도 이제는 좀 더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할 때가 되지 않았소? 이른 아침 전화답게 간밤의 안부를 먼저 물어본다면 관계 발전에 훨씬 도움이 될 듯싶소만.

“뺨에 손자국을 좀 더 진하게 남겨주길 바라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점잖은 척 내민 소신영의 요구에 강성태는 비빌 여지가 없을 만큼 단호한 대꾸를 건넸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틈을 만들기 위해 기회를 엿보다가 강성태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고 손을 물 테고, 그런 행동을 한 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곧바로 목줄을 노린다.

빤히 알면서도 틈을 보이는 건 권총을 건네준 뒤에 등을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 어제 인터뷰한 영상을 편집해서 이세종 국장에게 맡겨 두었소. 언제고 원하는 장소로 가져다주라고 했으니 그리 연락하면 건네줄 거요. 또, 말했던 사이트에 대한 관련 보도도 어느 정도 준비돼서 오늘 밤이나 내일 보도할 거고….

“5백억을 묻고 싶은 거지?”

- 흐음.

강성태가 던진 직선적인 질문에 속을 들킨 모양으로 소신영이 멋쩍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받기로 해서 변호사가 처리할 거다. 서명하는 자리에 이세종을 불러서 함께 갈지 모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무슨 명목인지는 몰라도 보도국장이 함께하는 것 만큼은 말리고 싶소. 아무래도 말 나올 여지를 줄이는 게 서로 좋지 않겠소?

소신영의 반응을 들으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5백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거저먹을 욕심을 부리면서 부하 직원조차 모르게 넘겨주길 바라는 그의 헛된 꿈에 건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도국장은 내가 알아서 연락하면 되고. 다른 건?”

- 이 국장에게 공연히 봉투 같은 걸 건넬 필요 없소. 그리고 일 마치면 식사나 한번 합시다.

“우선 일을 마치고 다시 연락하지.”

짧게 답을 한 강성태는 바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5백억 원?

5만 원권 지폐로 백만 장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일본 놈의 개로 살면서 그 몇 배나 되는 돈을 모은 놈이나, 그걸 조용히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나,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이게 문제였다.

깡패도, 정치인도, 검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국회의원도, 의사도, 내 주머니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출처나 과정 모두 무시할 수 있다는 저 천박하고 추악한 탐욕이.

그렇게 모은 돈이 죄를 덮는 데 가장 확실한 역할마저 해내면 결국 마약이든, 성매매든, 더러운 사이트든, 우선 벌고 나중에 무마하면 된다는 역겨운 논리에 잡아먹힌다.

차웅진부터 소신영, 고강준, 이우섭, 이학의까지 소위 이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인간들은 강성태가 보기에 하나같이 돈과 권력에 물든 탐욕의 화신들이었다.

‘거의 다 왔다.’

강성태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아직 실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처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약과 고리대금업을 없애겠다고 나선 길에서 밀동, 방지병원 앞 커피숍 주인, 조금 더 멀리 보면 고리대금에 시달려 죽음을 떠올렸던 이은주를 구해내는 대신 받았던 상처였다.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을 마무리하고 나면 마카오로 출국할 때까지, 안다미, 김민재, 김민정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

우유와 과일, 식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해결한 김명동은 식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뒤척이더니 드시는 것도 그러네? 걱정거리 있어요?”

“걱정은 무슨? 조금 있다가 약속이 하나 생길지 모르니까 그렇게 알고 옷이나 챙겨둬. 점잖은 거로.”

부인을 피해 서재로 들어간 그는 책상에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밤새 머릿속에서 세웠다가 허문 빌딩이 수백 채였다.

차웅진의 재산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수수료의 윤곽을 잡을 텐데 당최 짐작조차 어려우니 기대치만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일어난 참이었다.

그렇더라도 시중에 형성된 주식의 가격, 회사 자산 평가를 보면 기업가치가 대략 4천억 원이 넘었다.

통상 기업 양수도의 경우 적게는 0.1퍼센트에서 많이 받아야 1퍼센트가 정상적인 수수료였다. 그런데 현직 검사인 강선영이 5퍼센트라고 하지 않았나.

큰아들 이름으로 작은 빌딩 하나 사주고, 작은놈 이름으로 아파트 한 채 사주고, 외국에 나가 있는 딸 이름으로 땅도 좀 사놓고.

헤벌쭉 생각이 달려가던 김명동은 고개를 살며시 털며 마음을 다잡았다.

강선영이 현직 검사만 아니라면 더 볼 것 없이 사기라고 생각하기 좋은 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차웅진이라는 거물이 왜 강선영 같은 피라미 검사와 손을 잡았는지도 의문이었다.

솔직히 안식구에게 떠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직 젊은 강선영이 잘못 알아들어 벌인 일이라면 괜히 못난이 춤만 춘 꼴이라 아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김명동은 돋보기와 스마트폰을 들어 메모를 살폈다.

“강성태 회장이라?”

어디에서 들어본 거 같기는 한데, 기억에는 분명 없었다.

대한민국에는 참 능력 있는 사람들 많다.

얼마나 능력과 재력이 뛰어나면 차웅진 회장의 기업을 단숨에 받아낼까. 이런 기회에 차웅진, 강성태 회장 같은 인물들과 교류도 하고 해야 자식들 앞길을 열어줄 텐데.

입맛을 다신 김명동은 강선영에게서 받은 번호를 올린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차례 울린 다음이었다.

- 회장님 비서실입니다.

단정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나는 그…, 저…. 강성태 회장의 법률대리인 김명동 변호사라고 합니다.”

- 예, 변호사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법무팀에서 서류 작성 중이라 괜찮으시면 처음부터 함께 하셨으면 싶습니다. 현재 어디 계십니까?

진짜야? 이게 정말인 거야?

스마트폰을 잡은 김명동의 심장이 큰북을 울린 것처럼 묵직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여기 압구정동입니다.”

-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시면 차량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동반하실 일행이 계십니까?

“아니요, 나 혼잡니다. 듣기로는 그쪽에서 자료를 모두 정리해 놓을 테니까 검토만 하면 된다던데. 사실 실사도 없이 이런 거래를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강성태 회장의 지시가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 인수 가격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목록과 과정만 살피시면 되는 일입니다. 일단 승용차를 보내드릴 테니 오셔서 함께 의논하면 되겠습니다.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를 확인한 직원은 30분 뒤에 도착해서 전화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하아.”

스마트폰과 돋보기를 내려놓은 김명동은 오른손을 들어 심장 부위의 가슴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잘했다. 열심히 살았어. 그러니까 하늘이 이런 운도 내려준 게지. 지난 세월 정말 고생했다.”

뜻밖의 행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당장 김명동에게는 물리적인 시간과 심적인 여유가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

**

머그잔을 깨끗하게 닦아 건조대에 올려놓은 강성태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정말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다시 읽던 여류 작가의 수필집이었다.

표지 사진을 통해 보이는 작가의 하얀 머리칼처럼 편안한 문장과 담백한 표현이 언제, 어느 때 읽어도 강성태를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강성태가 부드럽게 책장을 넘길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소파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이 부드럽게 울었다.

“여보세요?”

- 깡패야. 김명동 변호사가 지금 차웅진 회장 회사에 도착했대. 서류가 많기는 한데 명의를 변경하는 차원이라 문제 될 건 없고, 어쨌든 세금은 나올 거라고 하더라.

강선영은 살포시 긴장한 음성이었다.

“나머지 준비는?”

- 말 새 나갈까 봐 다른 사건을 핑계로 인원 동원했고, 혹시 몰라서 관할서 경찰 기동대까지 지원요청 해놨어.

“고맙다. 나중에 클럽에 가서 제대로 한번 쏠게.”

- 정말 괜찮겠니?

말끝에서 강선영은 겨울 동치미 국물에 가득 엉겨있는 얼음처럼 선명하게 두려움과 염려를 표시했다.

“뭐가 두려운 거야? 상대가 차웅진이라서? 아니면 네가 깡패 두목과 손잡은 게 문제 될까 봐?”

- 너는 그렇게밖에 말 못 하니? 야쿠자들이 백 명씩 모인다며? 여차하면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어.

“후-.”

강성태는 지친다는 느낌을 대놓고 숨소리로 표현했다.

“우리나라 땅에서 설치는 야쿠자를 잡아들이는 일에 외교 마찰이 걱정된다면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빠져.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어떤 일이든 정의를 위해 나서겠다고 했다가 막상 닥치면 반걸음을 빼내고, 그 뒤에 반성과 함께 다시 나서는 일이 말이다.

그나마 이런 강선영이 그중 가장 양심적이고자 애쓰는 검사라는 사실이 서글플 정도였다.

- 알았어. 준비 철저히 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또 다른 일 있으면 연락할게.

잠시 침묵했던 강선영이 자존심 상한 음성으로 각오를 남기고 통화를 마쳤다.

어차피 책이 베풀어주던 고즈넉한 세상은 커다란 돌에 맞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강성태는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이세종입니다, 회장님.

신호음이 채 울리지도 않았는데 이세종의 답이 있었다.

“오늘 저녁에 특종을 하나 만들어줄까 하는데 시간 되겠어?”

- 불러만 주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재건축을 처남이 진행하게 된 데다, 멕시코 사업의 윤곽을 알아챈 이후로 이세종은 강성태의 손발보다 더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두 시간 전에 알려줄 텐데 인터뷰로 바쁘더라도 카메라 두 대 정도는 동원했으면 좋겠다. 참. 아침에 소신영 회장과 통화해서 양해를 구했으니까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돼.”

- 알겠습니다, 형님. 아니, 회장님.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인터뷰 영상은 어떻게 할까요?

“만나서 받으면 되지. 그럼 이따가 봐.”

- 저기 회장님.

어쩐지 약간은 횡설수설하는 느낌이더니 하고 싶은 말을 품고서 기회를 노렸던 모양이었다.

강성태는 다리에 책을 엎어놓고 이세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인터뷰했던 사람 중 두 명이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자살했습니다. 한 명은 초등학교 교사였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그 빌어먹을 영상이 도대체 뭐가 얼마나 좋아서 신원을 확인시켜줘 가면서 회원에 가입한 건지.

“알았어.”

- 그리고 회장님.

도돌이표가 붙어서 끝나지 않는 노래처럼 이세종이 다시 강성태를 붙들었다.

- 정말 염치없지만, 타 방송국 기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 한 명만, 제가 따귀를 맞아도 좋으니까 한 번만 눈 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동업자 정신인가, 뭐 그런 거야?”

- 전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인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돌 겨우 지난 아이도 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보도국장이 그렇게 부탁하는 거니까 나도 독한 소리는 못 하겠고.”

- 감사합니다! 회장님!

“대신 내가 유섭우하고 김진용을 보낼 테니까 그 두 사람한테서 허락을 받아. 그럼 나도 모른 척하지.”

- 예에?

비명 같은 이세종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뛰쳐나와 거실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유섭우는 알 거 아냐? 지난번에 재건축 현장에서 봤잖아? 김진용은 블라이스 엔터테인먼트 대표니까 말이 통할 거고. 따귀를 맞을 각오로 매달리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 몰라.”

-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후배고 뭐고 반드시 인터뷰를 통해 이 사회를 바로잡고, 정의를 구현하겠습니다.

“이세종?”

- 예, 회장님.

잘못 걸렸다는 걸 직감했는지 차갑게 부르는 강성태의 음성 뒤로 겁먹은 듯한 이세종의 답이 건너왔다.

“함부로 뺨 걸지 마. 그러다가 평생 죽만 먹으면서 사는 수가 있어.”

- 죄송합니다.

“당장 방지병원 응급실에 늑골과 골반이 부러지도록 맞은 여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회원들이 내는 회비를 탐낸 놈들에게 당해서. 저녁에 나 만나기 전까지 기자 인터뷰 가져와.”

- 예, 회장님.

또 한 통의 통화가 끝났다.

너무 늦게 연락한 건지는 몰라도 보도 따위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라 이세종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또 그는 입을 나불거리는 편이라 일찍 알려주는 만큼 뒤탈을 염려해야 하는 스타일이어서 이 정도 선에서 취재를 요청하는 게 적당했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강성태는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이종환입니다, 형님.

“준비는?”

- 일찍 일어나서 식사 마치고 형님 연락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 쪽 조직들은 어때?”

- 병렬이 형님께서 전화 넣으셨는데 뭐든 말씀만 하시라는 답이 있었습니다, 형님. 그쪽은 논두렁 수준이라 병렬이 형님과 통화 끝나기 무섭게 제게 전화해서 잘 마무리하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형님.

“알았어. 고생했어.”

세 번의 전화로 확인은 모두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강성태는 거실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강성태의 모습은 비록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지만, 지겹도록 더러운 욕망들과 맞서기 위해 애쓴 만큼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독이 잔뜩 오른 얼굴이었다.

괴물을 상대하다가 진짜 괴물이 돼가는 건 아닌지.

‘내일부터 정말 좀 쉬어야겠는데?’

신월동 포장마차에서 김민재, 김민정, 안다미와 평범한 세상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 보면 지금 올라온 독기쯤 눈처럼 녹아내릴 거다.

그러니 오늘 이후로 더는 탈이 없게끔 차웅진과 김명동, 야쿠자들을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