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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0권 - 14화 (407/513)

《407》2부 20권 - 14화

김명동은 의아한 얼굴로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상체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한 강선영은 와인 세트가 담긴 종이백을 내밀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죄송합니다.”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들어와.”

손짓까지 하는 김명동을 따라 강선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모님은 안 계십니까?”

“오늘 동창들과 골프 모임이 있어서 나갔지. 아마 좀 더 있다가 올 거야. 어서 앉아.”

강선영이 소파에 앉는 사이 김명동은 주방으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안 사람이 없어서 뭐가 있는지도 몰라. 천연 주스라고 내가 유일하게 마시는 게 있는데 제법 괜찮아.”

냉장고에서 꺼낸 캔과 진열돼 있던 유리잔을 들고 온 김명동이 강선영의 앞에 놓아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 밤에 꼭 봐야 하는 거야?”

전화로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김명동은 다분히 조심하는 눈치였다.

“혹시 차웅진 회장님을 알고 계십니까?”

“차웅진 회장? 카지노와 리조트로 유명한 차웅진 회장 말인가?”

“예, 선배님.”

“흐음.”

강선영의 답을 들은 김명동은 멋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조강치의 일을 봐줬을 정도로 부산 조직과 가까이했던 김명동이 차웅진을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차웅진 정도 되는 인물과 교류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위치가 부끄러워 그런 눈치였다.

“갑자기 차웅진 회장은 왜?”

질문을 받은 강선영은 아무도 없는 집안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안식구와 둘이 살아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저기 내일 차웅진 회장이 전 재산을 넘기는 서류를 작성합니다.”

김명동은 말귀를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하기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차웅진이 느닷없이 전 재산을 넘긴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걸 바로 알아듣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속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그 업무를 선배님께 돌려드릴까 합니다.”

“나한테?”

“예, 선배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선배님 생각이 나지 뭡니까? 차웅진 회장이 지닌 주택, 회사 지분, 전부를 넘기는 일이니까 변호사 수수료가 제법 나올 겁니다.”

칼로 그은 상처에서 핏물이 올라오듯 고개를 갸웃했던 김명동의 눈에 탐욕이 진하게 피어났다.

“우리 후배는 사회생활을 참 잘하는구만.”

“그렇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예?”

“이런 일을 가져왔을 때는 생각이 있을 게 아닌가? 막말로 검사가 돈 필요한 구멍이 한두 개야? 승진하려면 인사도 해야지. 30퍼센트면 되겠나?”

김명동의 제안을 받은 강선영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선배님. 이런 말씀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일을 듣자마자 바로 선배님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일 마치시면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사 주십시오.”

강선영이 거절하자 김명동은 오히려 부쩍 의심이 생긴 듯 눈가를 좁혔다.

커미션을 거절하는 게 오히려 의심을 살 일이라니.

김명동이 살아온 지난날을 한눈에 본 듯한 느낌에 속이 뒤집혔으나 강선영은 배시시 웃었다.

“저는 선배님. 국밥 먹고 나서 타고 갈 삼각별 승용차와 그 차를 타고 갈 20평대 오피스텔이면 만족합니다.”

의심을 담아서 찌푸려졌던 김명동의 미간이 두통약 광고처럼 스르르 풀렸다.

“자네는 정말 성공할 거야. 암! 그렇게 자기 몫을 챙길 줄 알아야지.”

이제야 온 얼굴에 웃음을 담은 김명동이 연방 강선영을 칭찬했다.

“제가 이런 건을 선배님께 넘겼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아무래도 곤란할 거 같아서 번호만 받아왔습니다. 스마트폰에 직접 입력하시면 어떠십니까?”

“그래? 잠시만 기다리게.”

바쁘게 움직인 김명동이 소파 옆의 탁자에서 돋보기와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강선영이 불러준 번호를 김명동이 입력한 다음이었다.

“그리로 연락하셔서 강성태 회장 변호사라고 말씀하시면 그쪽에서 모실 겁니다. 오전에 연락하시면 점심 먹고 나서 서류 전체를 확인하기로 돼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움직이시면 됩니다.”

“강성태 회장이라고 했지?”

“예, 선배님.”

답을 한 강선영은 냉정한 얼굴로 스마트폰에 이름을 입력하는 김명동을 지켜보았다.

강성태란 이름을 듣고도 느껴지는 게 전혀 없나?

지난번에 그 사건으로 찾아와 질문까지 했는데 최소한 다시 들춰보지도 않았어?

기억해.

그 이름을 기억해내고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양심의 가책을 받았든, 죄책감을 안고 있든, 그 정도 모습만 보인다면 최소한 살아날 방법은 만들어드릴 테니까.

강선영의 심정을 모르는지 이름을 입력한 김명동은 흡족한 얼굴로 돋보기를 벗었다.

“차웅진 회장의 전 재산이라면 규모도 상당할 테니까 보조 변호사와 함께 가야겠네.”

“차웅진 회장의 변호사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서류를 검토만 하는 일이라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이 새나가면 서로 곤란한 일도 있어서요.”

“아!”

강선영의 설명을 들은 김명동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수수료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5퍼센트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조정을 원하면 편하신 대로 조율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나 많이?”

“선배님께 가져오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않겠습니까?”

“흐하하하! 우리 후배 검사는 정말 시원시원해! 내가 현직에 있었을 때, 후배 같은 검사가 밑에 있었다면 제대로 큰일 한번 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쉽네!”

대략 5분쯤 유쾌하게 대화를 마친 강선영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선배님. 내일 일 마치고 뵙겠습니다.”

“그래! 일 정리하는 대로 내가 아주 비싼 국밥을 대접하지.”

“참. 혹시 모르니까 내일까지는 사모님께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 나이가 되면 쓸데없는 자랑이 얼마나 독이 되는 건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그럼 쉬십시오, 선배님.”

고개를 구십 도로 숙인 강선영이 “나오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잡아 억지로 닫았다.

띠루룩.

디지털 도어 록이 잠긴 직후였다.

웃고 있던 강선영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압구정동의 아파트였다.

시세로 한 30억쯤 하나?

이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김명동은 방금 보였던 흐뭇한 미소를 지었겠지만, 이걸 얻기 위해 그가 외면했거나 덮었던 억울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기 위해 몸을 돌리며 강선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강성태 부모의 죽음조차 외면했던 김명동이었다.

지난번에 와서 질문까지 했는데 강성태란 이름을 듣고도 수수료에 들떠 환하게 웃는 걸 보면, 그 사건은 아예 그를 괴롭히는 축에도 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강선영은 버튼을 누르기 전에 김명동의 아파트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꽤 낡은 아파트였다.

그에 비해 가격만 더럽게 비싼 아파트.

“씨발.”

‘닫힘’ 버튼을 누르며 강선영은 욕을 뱉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김명동의 탐욕 가득한 웃음과 그가 피해자들의 비명과 양심을 팔아 움켜쥔 아파트가 구역질 날 정도로 역겨웠기 때문이었다.

**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의 룸에 들러 함께 있었다.

그는 레드워터가 인정해서 곤잘레스 이두안이 고용할 정도로 수준 높은 정보 전문가였다.

호텔의 거실 한쪽 벽면을 여러 대의 모니터와 각종 장비로 빼곡하게 채워두었는데 수시로 올라오는 문구나 영상을 살피는 그의 눈이 전장에 나선 강성태만큼이나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그가 몇 가지 명령어를 입력한 뒤였다.

[CHECK THE PHONE CALL]

가장 중앙에 있는 모니터가 느닷없이 붉은색 경고 문구를 깜박였다.

“차웅진의 스마트폰에 걸려온 전화다. 들어봐.”

모니터를 확인한 바르지오는 먼저 키보드의 엔터키를 가볍게 때렸다.

“이 번호는 차웅진의 비서실인데?”

그의 설명이 끝난 직후였다.

- 모시모시?

차웅진의 음성이 모니터 옆의 스피커에서 나왔다.

염병할 인간.

강성태는 나오는 욕을 삼켰다.

무슨 지랄 났다고 한국에서 한국인 직원과 통화하는데 일본어를 사용하는 건지.

태생이 일본이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는데, 강성태와 대화할 적에는 멀쩡하게 우리말을 사용하던 인간이어서 더욱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강성태는 일본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붉은색 경고 문구가 번쩍이는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어떻게 됐지?]

음성을 영어와 우리말로 번역해 주는 프로그램이라 실제 통화보다 대략 30초에서 40초가량 뒤에 모니터에 대화 내용이 올라왔다.

[내일부터 이틀간 사용 허가를 받았고, 대여료를 입금했습니다. 광고촬영으로 신고했고, 특이사항으로 도검류와 총기류 모형을 사용할 예정이며, 고함과 총성이 있다고 명기해두었습니다.]

한글 아래로 영문이 함께 나오고 있어서 바르지오 만시니 역시 강성태와 함께 통화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통제는?]

[이틀간 내부 관리자를 포함한 촬영장 직원을 모두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입구의 통제를 위해 조금 전에 비서실 직원들이 출발했습니다.]

[보고에 조금 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일본이었다면 너는 바로 해고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20분 전에 출발했습니다.]

‘아후. 무서워.’

장난기를 가득 묻힌 바르지오가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강성태란 놈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혹여라도 권총이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알겠습니다.]

이거 봐? 장난 아닌데?

내내 비웃는 얼굴로 모니터를 지켜보던 바르지오가 웃음기를 지운 표정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변호사가 있기는 하다만, 동료나 동업자 따위 얼마든지 버릴 정도로 교활한 놈이다. 절대 방심하는 일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

[명심해서 준비하겠습니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붉은색 문구가 사라진 모니터에 마우스를 움직인 바르지오가 다시 엔터키를 눌렀다.

벌써 다섯 번째 통화였다.

발신 번호, 수신 번호, 통화 시간, 그리고 통화 내용이 꼼꼼하게 찍힌 A4 용지가 레이저 프린터에서 빠르게 나왔다.

“자네를 어지간히 죽이고 싶은 모양인데? 이대로면 내가 봐도 쉽지 않아.”

프린터에서 나온 A4 용지를 건네주며 바르지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인천과 부산에서 권총을 최소 50정 이상 가져온다고. 자네는 아르윈인가 하는 필리핀 조직원들이 지닌 권총 몇 자루가 전부고. 막말로 백 명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중 절반은 죽거나 다쳐.”

앞에서 도청했던 통화 내용을 기억하는 바르지오가 답답하다는 투로 염려를 쏟아냈다.

“이 싸움은 누가 이겨도 나중에 문제가 커. 한국에서 총기를 사용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내일 갈 거지?”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바르지오가 가슴이 쪼그라들 정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시 회장이란 인간 전화번호는?”

“여기.”

강성태가 요구하자 바르지오가 번호 세 개가 찍힌 종이를 내놓았다.

“가장 앞에 있는 게 그의 가족만 사용하는 번호, 두 번째가 심복들과 직접 통화할 때 사용하는 번호, 세 번째가 공식적인 통화에 사용하는 번호.”

“어느 번호로 전화해야 그 인간이 직접 받지?”

“가족들 번호는 이미 입력돼 있고, 심복 전화도 그가 직접 받는 일이 드물어. 그런 상황이라 세 번호 모두 그가 바로 받기는 어렵지. 게다가 국제 전화는 번호가 표시되지 않으니까 무조건 확인부터 할 거야.”

부정적인 답을 내놓은 바르지오 만시니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무언가 감춰두었던 걸 꺼낼 때 그가 보이는 표정이었다.

뭔가 만들어 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순간에는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장난에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깜짝 선물이 있나 본데?”

“나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거든.”

책상으로 몸을 돌렸던 바르지오가 팔을 쭉 뻗어서 투박하게 생긴 구형 전화기를 가져왔다.

“스마트폰은 개조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이걸 사용했다.”

명함만 한 액정 아래로 숫자 키가 쭉 나열된 정말이지 오래된 전화기였다.

“열아홉 살 대학생인데 아카시가 요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져있지. 그 여자의 번호를 복제해뒀다. 통화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카시가 직접 받을 거다.”

“여자 이름은?”

“잠시만.”

한 번에 주면 더 좋을 텐데, 바르지오는 늘 이런 식으로 생색내는 방법을 택했다.

“아카시가 여자를 부를 때, 특이하게 외국 이름을 사용하던데? 레이나? 그리고 통화할 때는 레이나짱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붙이고.”

바르지오는 제법 두툼한 분량의 A4 용지를 건네주었다.

“그 아가씨와의 통화 내용이다. 차를 사 주겠다거나, 백화점에 가서 옷을 구입하라거나, 귀찮은 일은 없냐는 등의 사소한 것들이지. 열정이 존경스러울 정도지.”

강성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용을 넘겼다.

통화 내용이 영어로 표기되어 있는데 바르지오의 말대로 특별할 건 없었다.

“어때?”

“더 할 수 없이 고맙다, 화이트 테일.”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 바르지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만 가 볼 테니까 혹시 다른 특별한 통화가 있으면 내용을 문자로 보내줘.”

“그거야 문제없지.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나도 인원을 모아야지.”

“정말 무모하게 밀고 들어갈 건 아니지? 말했지만, 권총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기면 곤잘레스 회장이 나서도 수습이 어려워.”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카오 쪽 동향은?”

“다른 모니터들이 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삼합회, 야쿠자, 태국과 베트남 조직의 통화, CCTV 기록 등을 모조리 살피고 있다.”

앉은 상태에서 강성태를 올려다보며 바르지오가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내일 차웅진을 정리하고 보자.”

몸을 돌린 강성태가 문을 나설 때였다.

“행운을 빌어, 미스터 강.”

돌아본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바르지오는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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