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2부 20권 - 13화
방배동의 커피전문점에 들어선 강선영은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머리칼, 목 주변으로 레이스를 늘어트린 블라우스, 청바지 차림이었다.
평소 감색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 신분증을 목에 걸었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는데 솔직히 말하면 어려 보이기 위해 발버둥 친 듯한 느낌이었다.
“어서 와.”
“뭐니? 그 정장은? 일 끝났는데 편하게 입고 오지?”
자신의 변화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커피알리고에 들르는 여고생에게서 징그럽게 봤었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런 여학생들에게 한 번이라도 관심을 주면 다음번에는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는 했었다.
일찍 끝나서 편하게 입은 걸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거다.
아무렴 검사라는 직업을 지닌 강선영이 고등학생처럼 행동할 리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강성태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뭐 마셔?”
“오늘은…, 얼그레이.”
강성태는 주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 시간을 갓 지나서 저녁을 해결한 손님들이 커피전문점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주문대로 향하는 강성태를 따라붙었다.
강성태는 아예 잠시 기다렸다가 직원이 만들어 준 얼그레이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고마워. 저녁은 먹었니?”
“육개장.”
“말 좀 예쁘게 해라. 부탁할 건 뭔데?”
머그잔을 잡은 강선영이 뜨거운 차를 길게 불어가며 던진 질문이었다.
“말하기 전에 분명하게 해둘 게 있다. 이건 사적인 복수니까 싫으면 지금 말해.”
강성태의 눈을 본 강선영이 딱딱하게 변한 표정으로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압구정동에 계신 김명동 변호사 말하는 거니? 부모님 사건 덮었던?”
그녀가 건넨 질문에 강성태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급하게 연락하더라. 그런 줄도 모르고….”
원망스럽게 창밖을 돌아다보았던 강선영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다른 분께 부탁해야지. 우리 조직일을 봐주는 고문 변호사가 계시니까. 알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던 강선영이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내용부터 말해 봐.”
“비밀 지켜. 불법적인 요소 때문에 나중에 일 만들지 말고.”
“왜? 내가 나중에 너 구속할까 봐 겁나? 그럼 말하지 말든가.”
강선영의 음성이 높았다.
특히 ‘구속할까 봐’라는 말이 나온 뒤에는 대놓고 시선이 달려왔다가 궁금한 느낌을 안고 돌아갔다.
그냥 조태완과 함께 일하는 조철호 변호사에게 연락할 걸 그랬나?
강성태는 물끄러미 강선영을 바라보았다.
조철호가 나서면 의심받기 쉬웠다.
수수료 짭짤한 사건을 조철호가 넘기는 것부터 이상한 데다,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굳이 전혀 얼굴도 모르는 김명동을 찾아가는 건 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조철호가 능숙하게 연기를 할 건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불러낸 건 미안하다. 여기까지만 하자.”
“약속 지킬 테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
“갑자기 왜 이래?”
“깡패 새끼들 그냥 다 죽었으면 싶어서 그래. 돈에 팔린 변호사 새끼들도 모조리 함께 죽었으면 싶고.”
짐작이 어려울 정도로 툭툭 튀는 강선영의 반응을 보며 강성태는 기가 막힌 웃음을 그려냈다.
“왜 웃어? 내가 우스워?”
이전까지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선영은 분명 선을 확실하게 넘어서 있었다.
차갑게 바라보는 강성태, 뭔가 약이 바짝 오른 강선영, 옆에서 보기에 사랑싸움을 하는 연상연하 커플로 오해하기 꼭 좋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어리게 보이려고 발버둥 친 연상 강선영이 잘 빼입은 연하의 강성태에게 뭔가 서운한 게 있는 모습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쪽을 흘깃거렸다.
“인터넷에 사이트를 개설하고 회원을 모집한 놈들이 있어. 한 달에 40, 60만 원씩 비트코인으로 회비를 내고서 미성년자의 성행위를 실시간으로 보는 사이트.”
화가 풀리지 않은 눈을 한 채 강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회원에 가입한 인간들을 JBC 방송국에서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 중이다. 회원 명단과 그 인터뷰 영상을 모두 보내 줄 테니까 그 인간들을 처벌해 주라. 그건 할 수 있지?”
“갑자기?”
“사건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 형사부니까 네 소관이기도 하고.”
말을 마친 강성태는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이트를 만든 놈들은?”
“주범은 내가 잡아서 벌써 정리했고, 운영진이라는 놈들도 다 잡았어. 그놈들까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회원들만 해결해.”
“그렇게 하면 처벌하기 어려워. 그러지 말고 주범과 운영진 놈들을 넘겨.”
“넘기면 끽해야 1년, 2년에 끝나잖아. 세 살배기 아이를 상대로 한 성관계 영상에 심지어 그런 아이들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영상을 팔아먹은 놈에게 실형 2년에 집행 유예를 내리는 법을 믿으라고?”
“판결은 판사가 해!”
“그럼 공익 신고자를 살해한 사건 덮은 김명동은 누가 처벌할 건데?”
뭔가 말하려던 강선영이 멈칫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강선영. 나 같은 깡패도 내 목숨 정도는 걸고서 싸워. 그런데 검사들은 도대체 뭘 걸고 일하냐? 동료 검사 잘못은 악착같이 외면하다가 문제 되면 변호사 차리는 게 전부잖아? 너도나도 언제 걸릴지 모르니까 우리만큼은 벌 받는 일 없게 하자고.”
“그 이야기가 지금 왜 나와?”
“회원 가입한 인간 중에 판사, 국회의원 보좌관, 교사, 의사가 포함돼서 그렇다. 그 3백여 명이 힘을 모아 압력을 가하는 걸 너 혼자 감당할 수 있어?”
그렇게나 많다고?
놀라는 강선영을 향해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아무리 깨끗하고 향긋한 포도주라도 썩은 포도주가 가득한 오크 통에 담는 순간 흔적조차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잠깐 정신 차린 듯 보이지만, 이대로 몇 년 지나고 나면 강선영 역시 선배 따지고, 후배 챙겨야 하는 더러운 검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하자. 고강준하고 이야기할 테니까.”
“명단하고 인터뷰 영상 보내줘.”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차갑게 변한 강성태의 눈을 강선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숨 두 번쯤 쉬고 나서였다.
“미안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과를 강선영이 툭 내놓았다. 그것도 진심이 담긴 음성과 표정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오늘 술 마시자고 할 생각이었거든. 클럽이라는 데도 한번 가 보고 싶었고. 네 전화 받고 부랴부랴 퇴근해서 준비해 나왔는데 대뜸 일 이야기만 하니까 나는 그럴 때만 찾는 사람인가 싶었어.”
이건 또 무슨 전개지?
왜 커피알리고에서 애써 외면하던 여고생들의 반응을 저녁 시간 방배동 커피전문점에서 검사인 강선영에게서 느껴야 하는 거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성태를 향해 강선영이 화를 풀라는 것처럼 계면쩍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돼?”
“개인적인 복수라니까.”
“공소시효 지나서 다른 방법도 없잖아. 나는 내 여동생 일로 그 인간들 죽일 수 있게 도와달랐었는데 뭐. 말해. 뭘 어떻게 하면 돼?”
“진심이냐?”
“왜? 이제는 못 믿겠어? 속을 보여줘?”
블라우스의 단추를 잡아 뜯어낼 것처럼 목 부근을 잡았던 강선영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너 만난다는 그 의사 선생, 속 좀 타겠다. 이렇게 숙맥이어서야, 원. 대신 나도 부탁이 하나 있어.”
“말해.”
“이번 일 끝나면 클럽 한번 데려가 주라.”
의심 가득한 강성태의 눈을 보며 강선영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들 말이야. 대개 공부만 했어. 부모 잘 만난 인간들은 학원가와 도서관만 뺑뺑이 돌며 살았고. 그러다가 검사가 되면 그냥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거야. 너도 말했지? 누가 검사를 처벌해? 그냥 고삐 풀린 괴물이 되는 거지.”
강성태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괴물들 앞에서 사람들이 굽신대. 어지간한 기업의 회장이 스폰해 줘서 밤마다 룸살롱도 다니고. 거기에서 원하는 오만 짓을 다 할 수 있어. 그러다 보니 단숨에 타락하는 거지.”
말을 하다 보니 못마땅했는지 입술을 삐죽인 강선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명하복? 검찰에서 조금만 바른말을 하면 바로 왕따야. 위에서는 한직으로 날려 버리고. 지금도 그래. 내가 바른말을 하잖아? 아마 밑에 있는 검사 새끼들이 나 바로 들이받을걸?”
“클럽에 가는 데 무슨 설명이 이렇게 길어?”
“왜 검사들이 룸살롱이나 클럽에 가려고 그 난리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룸살롱이야 2차 나가는 거니까 그렇다고 쳐도, 클럽에는 왜 그렇게 빠져드는지 알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냈다는 듯 강선영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이제야 강성태가 기억하고 기대하던 모습으로 돌아온 강선영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JBC 보도국은 명절 직전의 택배 허브 이상으로 바빴다.
자정 근처까지 최대한 많은 숫자를 인터뷰하고, 그 영상을 밤새 편집해서 일련번호와 이름까지 붙여서 회장에게 직접 올리는 업무였다.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뉴스를 위해서 평소에 하던 취재도 멈출 수 없었다.
어쩌겠나?
보도국장인 이세종까지 카메라 기자 한 명 달랑 데리고 밖으로 뛰었다.
기자 정신? 보도 윤리?
니미! 기자는 밥 안 먹고 사냐?
막말로 기자 정신이랑 보도 윤리 지키면서 어떻게 마누라 3시리즈 사 주고, 애들 그 비싼 학원에 보내냐는 말이다.
사건 검증? 체크?
그사이 다른 곳에서 먼저 인터넷에 올리면 그만큼 클릭 숫자 뺏기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클릭 숫자는 기자의 능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표시해주는 지표였다.
직장 생활 다 비슷하지 않겠나.
기자도 마찬가지여서 살아가려면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이건 뭐야, 하며 클릭할 수밖에 없는 선정적 제목 장사를 하는 거고, 다음은 윗사람이 흡족해하는 기사를 열성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이세종은 아파트 벨을 단호하게 눌렀다.
[누구세요?]
“윤창진 선생님 뵈려고 왔습니다. 저는 JBC 보도국 국장 이세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경계하는 인터폰 음성을 향해 이세종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우장기가 만든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셨죠? 비트코인으로 회비도 내셨고. 골드 회원이시던데 그 점에 관해 인터뷰하려고 합니다.”
이세종의 대꾸가 건너간 뒤에 답은 없었다.
지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하겠지?
비슷한 반응만 오늘 벌써 일곱 번째여서 이세종은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최소한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인터뷰입니다. 거부하시면 내일 학교로 찾아가거나 아니면 바로 보도 내겠습니다.”
인터폰에 대고 말을 건넨 이세종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 기자를 돌아본 직후였다.
디지털 도어 록이 울리고 사십 중반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대신 진한 쌍꺼풀에 볼이 늘어져서 심술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미 조명을 밝힌 카메라 기자가 앵글을 돌려 이세종과 윤창진을 잡는 중이었다.
“선생님? 일단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고.”
“선생님은 제가 아니라 우리 윤창진 씨죠. 초등학교 선생님이시죠? 3학년 담임 맡고 계시고?”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셔서 말씀하시지요.”
계단형 아파트라 맞은편 집 사이에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마주 보고 있었다.
이세종을 안다시피 한 윤창진이 엘리베이터로 움직일 때였다.
도어 록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 부인이 몸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냐. 당신은 들어가. 얼른.”
무서운 얼굴로 부인을 들여보낸 윤창진이 바지 주머니에서 급하게 봉투를 꺼내 들었다.
“선생님. 인터넷 검색하다가 사이트가 보이기에 점검하려는 차원에서. 예! 요즘 청소년에게 유해한 사이트가 많다 보니 그걸 알아보기 위해 가입했었습니다. 그러니 이거 받으시고….”
“윤창진 선생님. 그 사이트 추천은요. 교복. 여고생, 스타킹, 이렇게 세 가지 검색어를 넣은 사람에게만 하게 돼 있습니다. 아니면 텀블이나 아자에서 활동하는 업자에게서 교복과 스타킹 관련 영상을 구매했던지요.”
“선생님…. 제발…. 카메라부터 좀 치우시고.”
“회원 가입을 6개월 유지하셨거든요? 그건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러지 말고 살려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빕니다. 이렇게.”
정말 다급한 모양이었다.
윤창진은 아예 바닥에 무릎을 대고는 이세종의 허리 앞에서 양손을 싹싹 비볐다.
“따님 있으시죠?”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골드 회원인 거 인정하시고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거 들통나면 우리 가정 파탄 나고, 연금까지 모조리 날아갑니다. 저는 몰라도 불쌍한 마누라와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이세종은 미어캣처럼 바닥에 댄 무릎을 바싹 세우고 처절하게 손을 비벼대는 윤창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슷한 나이였다. 이세종과.
예전 같으면 인생이 불쌍해서 봉투 챙기고 눈감아줬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당장 내미는 봉투가 얇아서 다음 날 직장으로 찾아가 좀 더 두둑하게 뜯어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걸 왜 봅니까? 따님까지 있는 교사분이?”
“실수였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세종은 볼을 둥그렇게 부풀려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소신영 회장이 직접 회원 숫자를 지정해 주지 않았다면 눈 감았을 듯한 상황이었다.
솔직하게는 소신영 회장이 독단적으로 내린 지시였다면 가서 욕을 먹을 각오로 덮었을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이세종! 까불다가 네가 대신 죽는다.’
강성태를 떠올리며 이세종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언젠가 인사 함부로 했다가 개 맞듯 맞던 순간이 오래된 필름처럼 눈앞을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가자.”
이세종이 몸을 돌리자 조명을 끈 기자가 카메라를 아래로 내렸다.
“선생님!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는 이세종을 향해 윤창진이 연신 손을 비벼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용하게 올라탄 이세종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닫힘’ 버튼을 누를 때까지 윤창진은 미어캣처럼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세운 채 있었다.
‘저 사람은 죽겠구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틈으로 보이는 간절한 윤창진의 눈을 이세종은 외면하지 못했다.
“죄짓지 말아야지.”
“저대로 뒀으면 결국 가르치는 학생들 손댔을 겁니다. 그걸 막았다고 생각하십시오.”
혼잣말을 내놓는 이세종의 뒤에서 카메라를 아래로 내린 기자가 무거운 느낌의 대꾸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