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2부 20권 - 11화
벽까지 밀려났던 침묵이 물결처럼 다시 소파로 몰아친 다음이었다.
“널 살리려면 여기 병렬이가 신강남파 식구들과 함께 평생 지켜줘야 하고, 태완이 형님이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작업해야 하는데 건방지게 고개 빳빳하게 들고 살려 달라고?”
냉정한 강성태의 음성이 아직도 꼿꼿한 기운이 남아 있는 차웅진의 이마를 세차게 때리며 지나갔다.
“일본 놈들에게 개처럼 충성하며 살았으면 죽는 것만이라도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사람 귀찮게 해?”
지켜보는 조태완과 이병렬의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거침없는 질책이었다.
“방법이 없다는 거냐?”
“없다니까.”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까지 불렀냐?”
차웅진의 질문에 강성태는 그야말로 같잖다는 미소를 눈가에 담았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20분이나 내줬더니 달려와서 한다는 소리가 왜 불렀냐고? 만나자고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야.”
“끄응.”
말문이 막힌 차웅진은 대꾸조차 내놓지 못했다.
맞은편에서 그를 지켜보던 이병렬은 올라오는 속내를 감추려 표정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고름 한번 진짜 잘 죽이네.’
강성태가 용병을 거쳐 경호원으로 활동했었고, 그 과정에서 협상에 관한 경험을 쌓았다는 말이야 분명하게 들었다.
실제로도 긴박한 상황마다 고개가 저어질 만큼 무모하게 밀어붙였는데, 막상 지나고 보면 최고의 선택이었고, 그 끝에서 상대방이 따를 수밖에 없도록 끌어왔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정말 잘 봤지.’
지금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강성태는 이미 차웅진의 시대를 뛰어넘어 그 위에 올라선 보스의 모습이었다.
더는 강성태에게 매달릴 방법이 없다고 여긴 눈치였다.
‘도와다오. 방법이 없겠냐?’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었다.
표현은 이상하지만, 조태완이나 이병렬이 보기에 이미 남들 사는 만큼 살았다.
무엇이 그에게 저토록 간절한 삶의 의지를 만드는지는 몰라도 차웅진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눈동자로 맞은편의 조태완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악 받쳐서 노려보았다면, 비웃어주기라도 할 텐데,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눈꺼풀 아래에서 비 맞은 개처럼 비루한 눈동자로 매달리는 걸 조태완은 외면하지 못했다.
“보스. 부탁이 있다.”
소파에 앉아 양팔을 무릎에 걸친 조태완이 무겁게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차웅진이 보는 앞이었다.
강성태는 상체를 세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강성태의 모습이 고마워서일까, 조태완은 감정을 가다듬는 것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잠깐이나마 모셨던 인연이 있어서 그렇다. 내가 이렇게 고개 숙일 테니까 혹시 방법이 있다면 도움을 다오.”
너무 나섰나?
괜히 차웅진을 잘 달구고 있었는데 공연히 끼어들어서 강성태의 계획을 망친 건가?
염려하는 조태완을 향해 강성태는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그러시면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맙다, 보스.”
묵직한 조태완의 인사를 받은 강성태는 빚을 받는 채무자처럼 차웅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형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니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마. 두 가지를 내놔. 하나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야쿠자들의 명단과 위치, 두 번째는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후원자 명단.”
목 앞에 칼을 들이댄 것만큼이나 차웅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못 하겠지? 그럴 거 같아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았던 거니까 고민하지 말고 돌아가.”
‘이건 아니잖나?’
항의하는 표정으로 차웅진이 고개를 돌렸는데 조태완은 한 번 청을 건넨 거로 이미 과거의 인연을 모두 털어버린 듯 냉정한 얼굴이었다.
“네게 다 주고 나면 난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깡패도, 직장인도, 가정주부도 다들 그렇게 살아. 그렇다고 너처럼 일본 놈들에게 혼을 팔지도 않고. 일본 놈의 개로 움켜쥐고 죽을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더 살 거야?”
“기가 막히는구나.”
차웅진이 고개를 떨구었을 때였다.
“어딜 들어와, 이 개새끼들아! 야! 저 새끼들 내보내!”
바깥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런 씨벌럼들이!”
인천에서 뒤늦게 달려왔는지 익숙한 고룡동의 욕설이 들렸고,
“뭐 하냐! 얼른 치우라니까!”
연달아 이종환이 던지는 지시도 사무실로 달려들었다.
쇠파이프 소리, 누군가 얻어맞는 소리, 비명, 기둥과 벽에 사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는데 차웅진만 문을 바라보았을 뿐, 강성태나 조태완, 이병렬 모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카오에서 사용해야 할 미끼가 오래도록 안 나오니까 야쿠자들도 마음이 급해진 모양인데? 저렇게 달려들어서라도 데려가야 할 정도로?”
“한 가지만 묻자. 왜 아카시 회장이 너를 노린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니? 그 전에 나를 제물 삼을 거란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냐?”
질문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더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강성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밖에 나가서 상황 보고, 정리 끝났으면 이 영감 내보내.”
“예,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조태완과 이병렬의 뒤에 서 있던 김진용이었다.
덩치가 커다란 데다, 상처로 인해 인상마저 험악해 보이는 그가 고개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길게 걸리지 않았다.
고작 숨 두 번쯤 쉬고 났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김진용이 돌아왔다.
“야쿠자 놈들 전부 홀에 꿇려 놓았습니다, 형님.”
“영감 데려가.”
“예, 형님.”
쇳소리 가득하게 답을 한 김진용이 정말이지 단순 무식한 태도로 차웅진을 향해 움직였다.
“모시겠습니다.”
짧은 한마디를 건넨 그는 왼팔로 차웅진의 뒷덜미를, 오른팔로는 팔뚝을 잡고는 허수아비를 들 듯 단숨에 자리에서 일으켰다.
완력으로 차웅진은 김진용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들리다시피 끌려가면서도 그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한마디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껏 매달린 모습이 무색할 만큼 조용하게 문밖으로 끌려 나갔다.
“저기….”
뭔가를 말하려는 이병렬에게 강성태는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 있어.’
그 정도 눈빛을 못 알아볼 조태완과 이병렬이 아니었다.
뭐가 또 있나?
두 사람이 강성태를 궁금한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이종환이었다.
“차웅진 회장이 마지막으로 형님을 한 번만 더 뵙고 싶다고 사무실에 데려가 달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형님?”
이걸 짐작했다고?
조태완과 이병렬이 얼빠진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본 뒤였다.
“홀에 있는 야쿠자들과 차웅진 모두 내보내.”
“예, 형님.”
차갑게 지시한 강성태는 숙제를 끝냈다는 투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대로 가면 죽는다며?”
“굳이 우리 손에 더러운 거 안 묻혀서 좋지.”
“뒷감당은?”
“우리 몫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당장 야쿠자들을 살려 보내는 게 그런 이유고. 저놈들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해도 여기에서 나간 게 확실하니까 방법이 없지.”
질문을 연달아 던졌던 이병렬이 허탈한 웃음을 그려냈다.
“사람이 참 무섭다. 싫든 좋든 저 정도 되면 강단 있게 받아들일 것도 같은데 왜 저렇게 추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건지. 오늘 모습은 도저히 예전에 내가 봤던 차 회장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가진 걸 못 놓아서 그렇습니다. 집착 때문에 저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거고요. 다 내놓으라는 말에 답을 못 한 걸 보면 아실 겁니다.”
“다시 보스를 보게 해달라고 매달렸잖아?”
“평생을 일본 놈들에게 조아렸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뭐든 하며 살아와서 지금은 구질구질하게 고개 조아리지만, 재산을 내놓으라면 반응이 달라질 겁니다. 매국노들이 자식보다 재산에 집착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참.”
직전까지 차웅진의 모습을 직접 보았던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놈들이 번 돈을 회수한다고 했잖아?”
“명단과 재산목록이 있어서 그건 차웅진이 없어도 얼마든지 회수할 수 있습니다.”
“다 가지고 있는데 왜 차웅진 회장에게 그걸 달라고 했어?”
“그 인간이 잔머리를 굴렸는지 비교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후-.”
조태완은 아예 무섭다는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말이지. 혹시 차웅진 회장이 모두 내놓겠다고 했으면 회사는? 그걸 정리할 계획도 세웠어?”
“야쿠자가 죽이든, 그 인간이 스스로 내놓든, 어느 쪽이어도 일본은 더 이상 차웅진의 회사와 파칭코 기계를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차웅진 회장은 끝난 상황이었구나.”
혼잣말처럼 내놓은 그의 탄식이 현재 차웅진의 처지를 그 어떤 말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인터뷰 영상이 올 게 있으니까 그거 보면서 하루 이틀 쉴까 합니다.”
“인터뷰?”
강성태는 소신영 회장과 협의한 내용에 관해 짤막하게 들려주었다.
“죽는 인간 여럿 나오겠네.”
“어려운 환경에 놓였거나 잠깐 흔들린 여자아이들을 죽음만큼이나 잔인하게 짓밟으며 즐겼던 놈들이라 그 정도는 달게 받아야죠.”
“죄짓지 말아야지.”
말을 해놓고 무안했던지 조태완은 애꿎은 무릎을 문질렀다.
“병렬이 너는 이제 뭐 해?”
“저는 방금 말씀하신 사이트 운영진 놈들 잡아놓아서 거기 가볼까 합니다.”
“운영진은 또 언제 잡았어?”
“인천에 갈 때 봉진이 시켜서 쭉 달아 왔습니다, 형님.”
“에이, 개새끼들.”
이만 자리를 마치자는 듯 조태완이 거친 욕을 뱉어냈다.
“나는 그럼 이만 돌아갈까 하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다른 일 있으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조태완이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와 이병렬이 함께 일어나 셋이서 사무실을 나섰고, 곧바로 홀을 가로질렀다.
분명히 쇠파이프 날아다니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홀은 거짓말처럼 단정한 모습이었고, 중간에 서 있는 덩치들이 단단한 표정으로 강성태와 조태완, 이병렬을 향해 고개 숙였다.
계단을 올라선 다음이었다.
주차장을 메운 검은색 승용차와 신강남파 덩치들을 둘러보며 조태완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조직 생활을 오래 해왔던 사람답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강남파의 변화와 덩치들이 뿜어내는 다부진 기운을 느낀 눈치였다.
“자. 그럼 먼저 출발하마.”
뭔가를 털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의 조태완이 김석문을 비롯한 덩치들과 함께 나이트를 떠났다.
승용차가 도로로 합류해 사라진 뒤였다.
“안 바쁘면 저녁이나 함께 먹지?”
이병렬이 장난기 묻은 음성과 함께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여기 고생한 식구들은?”
“보스나 나랑 함께 앉아서 편하게 밥을 먹을 놈이 몇이나 되겠어? 그런 건 종환이나 섭우한테 맡기고, 우리는 육개장이나 한 그릇 때려주자고.”
고개를 돌린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이종환과 유섭우가 웃음을 참고 있었다.
“고룡동이 좀 잘 챙겨줘.”
“예, 형님. 배근이 형님도 인천에 계시니까 대전이랑 전주 식구들과 얼굴도 익힐 겸, 함께 저녁 먹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럼.”
이종환과 유섭우를 다독인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뭔가 씨발. 아쉬운데?”
“뭐가 또?”
점잖을 때는 참 묵직한데 한 번 가벼워질라치면 이병렬은 영락없이 개구리를 손에 쥔 개구쟁이의 모습이었다.
“차웅진 회장 말이야. 보스가 그 양반 잡으려고 고생 졸라리 했는데 그냥 보내준 거 같아서 아쉽잖아.”
강성태는 모른 척 홀 한쪽을 따라 사무실로 걸었다.
“뭔가 있지? 그렇지?”
“차웅진이 얌전히 죽을까, 아니면 저쪽에 가서 있는 대로 잔머리를 굴릴까?”
“이거 봐, 이거. 뭔데? 내가 다 잘하는데 머리를 못 굴려. 이제부터라도 책 열심히 읽어볼라니까 뭔지 시원하게 말해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온 김진용이 문을 닫았다.
“이제 우리끼리니까 와서 앉아.”
강성태가 권유하자, 얼른 앉으라는 투로 이병렬이 손짓을 던졌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상석, 그 앞쪽의 긴 소파에 이병렬과 김진용이 마주 앉았다.
“차웅진은 평생 야쿠자가 내려주는 돈과 배경을 이용해 으스대며 살았던 사람이다. 자기를 먹여준 일본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감정이 앞서서 우리를 하찮게 여기는 거고.”
“눈빛부터 그래 보이긴 했었지?”
“예, 형님.”
이병렬이 시선을 돌리자 맞은편의 김진용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
“살고 싶어서 왔고, 수모를 견디지만 차웅진은 절대 진심으로 반성할 인간이 아냐. 이번 위기를 피하고 나면 어떡해서든 야쿠자 놈들에게 공을 세우려 할 테고.”
“아, 진짜 뭐냐고!”
“내가 차웅진을 통해 원하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진 거 전부, 또 하나가 뭐였어?”
“야쿠자 명단?”
“그걸 기억했어?”
“이런, 이 씨….”
밉지 않게 욕을 뱉은 이병렬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강성태를 보았다.
“이전에 태완이 형님 엮으려던 거 기억하지? 야쿠자 놈들이 권총을 쏠 만한 장소로 어떡해서든 우리를 밀어 넣으려고 했던 거? 그걸 다시 시도하려 할 거다.”
“혹시? 야쿠자를 잡으려는 거구나?”
상체를 세우며 묻는 이병렬을 향해 강성태는 옅게 웃는 얼굴로 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