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2부 20권 - 7화
정세원은 그룹을 운영하며 날고 긴다는 인물들을 꽤 많이 만났다.
생김새가 다르듯 사람마다 느껴지는 품성, 성격, 강단이 다 달랐는데, 정세원 나름으로 순위를 정했다.
그가 국내의 재계 원탑으로 꼽은 인물은 천중명 회장이었다. 툭, 찔러보는 정세원의 제안쯤 천중명 회장은 가볍게 웃으며 받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세원이 깜짝 놀랄 복안을 내놓기도 했었다.
나이를 고려하면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뒤에 천중명이 어떤 모습일지 두려울 정도였다.
‘앞으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는 지경그룹의 차지겠구나.’
천중명을 만나고 난 정세원의 평가였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다른 걸 다 제쳐놓고 인재들의 향방만 봐도 그렇다.
이름을 떨친 경력자는 물론이고, 우수 신입사원들이 지경그룹 기획실과 전자, 증권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그의 판단을 증명해 주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은 마치 나이 든 천중명을 본 느낌이었다.
천중명 회장이 산전수전을 모두 겪고 난 뒤에 평온을 찾은 거물이 된다면 지금 곤잘레스 회장쯤 되지 않을까.
‘천중명과 곤잘레스 이두안이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정세원이 엉뚱한 질문을 떠올렸을 때였다.
“지경그룹은 강성태 회장과 여기 미스터 은이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아프리카에 진출하기를 바랍니다.”
지경건설이 깡패 두목과 은선곤을?
은선곤을 빼가기 위한 작업인가?
영어로 나누는 대화였다.
그 와중에도 곤잘레스 이두안은 정세원의 눈에 담겼던 의문을 알아보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도시를 건설해도 어둠을 통해 스며드는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빠르게 부패하고, 슬럼화됩니다. 천 회장은 그런 현상을 통제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빠르다. 그리고 무섭다.
지경건설이 새롭게 건설하는 신도시에는 어둠의 세상마저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천중명의 야심이.
“그 문제를 미스터 은과 의논할까 했는데 마침 우리 정 회장께서 면담 요청을 주셔서 이렇게 함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설명이 끝난 뒤였다.
직원 두 명이 다가와 커피를 따라주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식사를 하실까요?”
“나쁘지 않습니다.”
질문을 건넸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샐러드와 빵을 시작으로 요리들이 테이블에 가득 올라왔다.
30분가량 국제 유가와 그 밖의 화제, 이따금 취미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정세원은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다.
곤잘레스 이두안도 비슷해서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다음에 한번 초대하겠다는 제안을 전하는 사이, 깨끗하게 정리된 테이블에 뜨거운 커피가 새로 놓였다.
“보자고 하셨는데 이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커피잔을 든 곤잘레스 이두안이 질문을 건넸고,
“그룹의 방향을 정하기 전에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를 확인합니다. 그 중에도 나는 오너의 판단과 의지를 특히 중요한 결정 사항으로 고려합니다. 선원이 아무리 많아도 키는 선장이 잡기 때문입니다.”
막힘없이 답을 내놓는 정세원을 곤잘레스 이두안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룹 차원에서 강성태 회장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곤잘레스 회장님의 뜻을 분명하게 듣고 싶습니다. 물론 사람 일이고, 사업이라 바뀔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의지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멕시코 공사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은선곤을 돌아보았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옅게 웃는 얼굴로 시선을 가져왔다.
“마카오 회의가 끝나면 정식 계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컨소시엄의 대표는 강명건설이 되겠고, 현지 책임자로 미스터 은을 임명해 달라는 게 유일한 조건입니다.”
“흐음.”
이렇게 쉽고 시원하게 답을 할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 곤잘레스 이두안이 은선곤을 탐내고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서 정세원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 생겨나는 직종이 있습니다. 물론 사라지는 직종도 있지요. 그중에는 화산폭발로 멸망한 폼페이오에서부터 지금껏 없어지지 않는 직업도 있습니다.”
“매춘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용암과 화산재에 잠긴 폼페이오의 유적에 사창가가 있습니다. 심지어 매춘남도 있지요. 유흥, 도박, 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세계적인 부호이자 경영인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매춘을 언급하다니. 어쩐지 격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나 하는 의심이 불쑥 정세원의 가슴에서 피어났다.
“강성태 회장이 그런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어로 하는 대화라 잘못 알아들었던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정세원을 향해 곤잘레스 이두안이 바로 입을 열었다.
“강성태 회장은 마약과 고리대금, 매춘, 인신매매가 없는 밤을 만들고자 합니다. 반대로 중국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도시들을 차지하기 위해 마약과 고리대금업, 매춘을 퍼트립니다. 그걸 문화사업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당연히 삼합회 물론이고, 세계적인 폭력조직들의 엄청난 도전이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대강 듣기만 했지, 곤잘레스 이두안처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막말로 매춘과 마약, 고리대금업의 진행과 발전까지 따지는 건, 그룹 회장이 관심 둘 분야가 아니라고 여긴 탓이었다.
“강성태 회장이 나선다면 한국의 컨소시엄이 건설한 도시에서는 어둠에서조차 불법은 없을 겁니다. 나와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은 강 회장과 여기 미스터 은이 그런 도시를 만들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세원은 알지 못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강성태에게 ‘회장’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했다는 점과 함께 듣고 있는 은선곤이 기쁜 기색을 감추려 애쓴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겠습니다. 우리 강명그룹은 멕시코 사업장과 신도시 건설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 순간부터 강성태 회장의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세원의 한 마디에 오늘 아침 일찍 모인 이유와 결과가 모두 담겨 있었다. 다짐을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대꾸 대신 넉넉한 미소를 그려냈다.
**
아침을 먹기 전에 조태완은 특별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조태완이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 아닌 차웅진의 연락이었다.
강성태가 방문했었다고 들었다.
피에 젖어 나왔으니 분명 충돌이 있었을 테고.
웅얼대는 차웅진의 음성을 들으며 조태완은 그가 제대로 따귀를 얻어맞았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음성 저 아래에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면이 분명하게 살아 있었다.
-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긴말하지 않겠다. 오늘 점심나절에 조용하게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해야 할까?
- 왜 대답이 없어?
“어디로 가면 됩니까?”
- 집으로 와. 네깟놈에게 손을 쓸 마음도 이유도 없으니까 쓸데없이 이놈 저놈 끌고 올 거 없다.
냉정한 말끝에서 전화가 뚝 끊겼다.
스마트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조태완은 전화했던 사람이 차웅진인지를 재차 확인했다.
뭔가 있는데?
조태완은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찾았다.
**
잠에서 깨어난 강성태는 물을 마신 직후에 이병렬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먼저 박배근과 통화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이어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 인천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된 거 같다. 새벽에 순찰차가 왔었는데 영화 촬영이라는 말로 적당하게 넘어갔다고 하고.
조태완과 맞붙었을 때부터 단골로 사용하던 핑계가 이번에도 먹힌 모양이었다.
- 하여간 대단해. 경찰에는 언제 또 손을 썼어?
“내가 한 거 아닌데?”
- 그래? 그럼 누구지? 태완이 형님이신가?
“인천에 모이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럴 확률이 높지. 아침은?”
- 이제 먹으려고. 참! 봉진이가 그 운영진이라는 새끼들 대강 잡은 거 같다. 한 놈 남았다니까 다 잡고 나면 연락할게. 다른 일 없으니까 이럴 때 하루쯤 푹 쉬어.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식탁으로 움직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다시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 아침은?
“커피부터 마시려던 참입니다. 드셨습니까?”
- 동생들 거기 있어?
“저는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답을 한 강성태는 식탁에 올려두었던 물병을 집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 저기, 차웅진 회장이 방금 전화했었다.
주전자에 물을 붓던 강성태는 물병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싱크대에 기대서 바라보는 거실 창으로 아침 해가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뭐라던가요?”
- 점심나절에 집으로 오라는 말이 전부였다. 손쓸 마음 없으니까 혼자 오라는 말도 있었다.
강성태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어쩌면 눈이 홱 돌아갈 만한 제안을 조태완에게 내놓고 강성태를 제거하라고 꼬드길 수도 있겠다.
뭐든 좋은데 지금은 조태완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제가 차웅진에게 전화하겠습니다. 함께 가든가, 아니면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래도 차웅진 회장 정도면 뱉은 말은 지키지 않을까? 그 양반이 조용하게 와달라고 하면 그만큼 중요하게 할 말이 있을 것도 같고.
“그런 인간은 신의가 없습니다. 그냥 두면 어차피 목숨이 끊어질 인간이고요. 막바지에 몰린 인간이 뭔들 못하겠습니까?”
- 목숨이 끊어지다니?
“야쿠자들이 마카오로 불러서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걸 제게 덮어씌우려고도 하고요. 그도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을 불러서 살기 위한 핑계를 만들려는 건지도 모릅니다.”
- 하. 이제 나는 완전히 뒷방 늙은이가 다 됐네. 지금껏 살면서 차웅진 회장이 몰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 혹시 그 양반 따귀를 때렸어?
“예.”
강성태의 답이 건너가자 기가 막혀서 나오는 웃음이 스마트폰을 타고 넘어왔다.
- 내가 다시 전화해서 보스의 뜻을 전하지. 그나저나 뒤탈은 없겠어?
“차웅진과 야쿠자들의 약점을 제가 쥐고 있습니다. 함부로 엉뚱한 짓을 하지는 못할 테니까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 알았다. 통화하는 대로 바로 전화할게.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몸을 돌려 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었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줄은 알았지만, 조태완에게 연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잘해라, 차웅진. 반대편 이까지 모두 빠지면 죽을 때까지 빨대로 죽만 먹어야 해.”
옅게 웃은 강성태는 원두를 꺼내 새 커피를 준비했다.
야쿠자에게 말이 들어가라고 대놓고 계획을 떠들었으니 당장 차웅진이 급하게 움직일 테고, 다음은 야쿠자가 다른 계획을 세울 게 분명했다.
강성태는 주전자를 들어 거름망에 담은 원두에 물을 부었다.
강렬하게 올라오는 커피 향을 맡으며 강성태는 섭충명을 떠올렸다.
중국의 삼합회와 일본 야쿠자 사이에 무언가 약속이 있었을 거다. 충성하는 차웅진을 죽여서라도 꼭 얻어내고 싶은 무언가가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건 천천히 알아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강성태는 갓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탁자에 앉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차웅진은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는 점이었다.
**
아침을 먹은 이병렬은 김진용이 가져다준 종이컵을 들고서 진한 믹스 커피를 삼켰다.
“아후, 좋다.”
찜찜하게 매달렸던 인천 정리했지, 비록 말로만 들었지만, 강성태가 차웅진을 해결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다른 조직들이 지역을 새롭게 접수하면 관리하던 업장을 족쳐서 동생들 집어넣고, 그거로 숙소 생활비를 감당하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숙소 생활비로 사용하게 풀어주는 대가리는 몇 명 되지 않았고, 대개 업장에서 받은 돈으로 큰형님의 명품을 사거나 노름 밑천으로 뿌리는 게 대다수였다.
그렇게 되면 아랫놈들은 당연하게 뒷돈을 챙겼고, 그로 인한 충돌이 적지 않았다.
신강남파는 인수한 지역을 깔끔하게 관리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전국 조직과 덩치들에게 신강남파의 운영 방침만큼은 확실히 각인시켜서, 인천의 접수는 그만큼 수월했다.
거기에 이제 남은 밀수 창구는 여수 하나 남았다.
그거야 광주 덩치들이 서서히 장악하면 되는 일이니까 명실상부, 대한민국에 마약이 들어오는 길을 틀어막았다고 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던 이병렬은 히죽 웃었다.
처음 프리 스테이션에서 강성태를 보았을 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당장 커피를 타다 준 김진용까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사이에 밀동의 이남순을 구했고, 또 우장기를 잡아서 추잡하고 더러운 범죄도 소탕했다.
커피를 단숨에 마신 이병렬은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이 정도면 너 볼 낯은 있는 거지?”
문득 서달수의 얼굴이 떠올라서 이병렬은 아침의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유헌우가 들어왔다.
“육개장 드셨나 보네?”
“예. 식사는 하셨습니까?”
“못 먹었습니다. 누가 육개장을 혼자 먹어서 말이지요.”
이제는 진짜 미운 정이 들었는지 뻔뻔한 유헌우의 대꾸가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전에 수속 밟고 퇴원하세요.”
“예?”
“퇴원하시라고요.”
혹시 워낙 들락거려서 아예 포기했다는 뜻인가?
이병렬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유헌우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말 들을 거 같지 않아서 일주일이라고 했는데 새벽에 상처 치료하면서 보니까 그 정도면 퇴원해도 될 거 같습니다. 다만, 술은 하지 마세요. 그거하고.”
진지한 얼굴로 유헌우가 이유를 내놓았다.
“이제 그만 다칩시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고, 위기에 빠진 사람 구해준 것도 다 아는데 가능하면 다치지 마세요.”
이 양반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이병렬이 감동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마지막으로 병원비는 현금인 거 아시죠? 혹시 당장 가진 게 없으면 로비에 현금 지급기가 있습니다. 건당 나한테 몇백 원씩 떨어지거든요. 이왕이면 거기에서 인출해 주세요.”
물어내, 내 감동.
기가 막힌 심정이 된 이병렬이 허탈한 웃음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