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2부 20권 - 6화
제3장. 곽대출 부회장과 잠시 만났었습니다.
이병렬을 만나 한 시간쯤 의논을 마친 강성태는 날이 밝기 전에 빌라로 돌아왔다.
어지간하면 병원에 있다가 함께 아침을 먹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안호상 박사까지 나서 이병렬과 김진용, 이종환을 치료했고, 안정을 위해 돌아가라는 조언을 내놓아서 더는 고집을 피우기 어려웠다.
어수선하던 일들이 대강 끝났다.
차웅진과 함태준을 두들겨서 마약과 불법 자금이 들어올 길을 막았으며, 인천마저 신강남파의 틀에 담았다.
커피숍 여주인을 통해 우장기의 추악한 범죄를 막은 것도 나름 보람 있는 일이었다.
물수건을 이용해 대강 씻은 강성태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늘 그렇듯 식탁에 앉았다. 피곤과 함께 잠이 몰려들었는데 당장은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잠시 움직여 뜨거운 물과 원두를 준비했던 강성태는 진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앞에 두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평범했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문득 이모네 가족과 최치곤, 그리고 커피알리고가 그리웠다.
강성태는 아직 어두운 거실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웅진의 그 으리으리한 저택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백 배쯤 아늑한 빌라였다.
총성, 화약 냄새, 뿌옇게 피어나는 먼지, 시커멓게 변한 얼굴과 손, 땀, 아저씨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붉어진 노을을 처연한 눈으로 보다가도 강성태를 향해 여유롭게 던졌던 그의 미소가 지금도 선명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기회가 된다면, 망설이지 마라. 죽음을 담보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면 그때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그 양반과 마주 서면 이길 수 있을까?
자신하기는 어려웠다.
실력을 따지기 전에 삶에 대한 욕망을 한쪽 주머니에 고이 접어서 넣어둔 그의 태도가 가장 무서웠다.
언제고 한번 만나고 싶었다.
둘이 마주 앉아서 육개장이든, 갈비탕이든 함께 먹으며 웃을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옅게 웃은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꿈에서 강성태는 유쾌하게 웃는 아이를 보았다. 양손을 잡아준 부모가 높다랗게 들었다가 내려놓을 때마다 아이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실루엣처럼 흐릿한 장면이었지만, 행복한 감정은 분명하게 느꼈다.
악몽을 제외하면 과거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대로 성장했다면 강성태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꿈에서 떠오른 질문에 강성태는 답을 얻지 못했다.
**
차웅진은 서글픈 얼굴로 전화기를 귀에 댔다.
- 바가야로.
“죄송합니다.”
- 인천을 통한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고, 가마구치 이시다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하게 정리하도록 해. 그리고 너는 예정대로 마카오로 출발해.
차갑게 날아온 지시를 들으며 차웅진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 마카오로 출발하라고 했다.
“송구한 말씀이나 얼굴을 워낙 심하게 다쳐서 오늘 출발이 어려울 듯합니다.”
- 그렇다면 내일 출발할 수는 있겠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답을 하는 순간 전화가 일방적으로 뚝 끊겼다.
통화를 마친 차웅진은 퉁퉁 부은 데다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서 눈가를 찌푸렸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그의 손이 불쌍해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마카오에서 차웅진을 죽일 계획이라고 들었다.
바깥에 널브러진 야쿠자들을 해치우고도 강성태는 멀쩡했다.
그런 놈이 뭐가 아쉬워서 거짓말을 하겠나.
다른 걸 다 떠나서 차웅진은 그의 눈에 담긴 진실을 분명하게 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시커멓게 변하고, 손이 지금처럼 떨린다.
다시 그를 만난다면 과연 이전처럼 위엄을 지킬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앉은뱅이 테이블 앞에 무릎 꿇고 앉았던 차웅진은 날카롭게 변한 눈으로 닫혀 있는 문을 보았다.
거실에 있던 놈들은 동양인 놈의 희한하게 생긴 칼에 모조리 죽었다. 그 외에 살아남은 놈도 있는데 그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강성태가 했던 말을 일본의 아카시 회장에게 전할 사람은 밖에 있는 비서 놈 하나였다.
놈이 아카시 회장에게 따로 보고하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거실 정리가 끝나고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한다면 비서 놈은 강성태가 했던 말을 나불댈 게 분명했다.
“어이!”
차웅진은 서재 문을 향해 비서를 불렀다.
그 직후였다.
문이 열리며 얼굴이 흉측하게 부은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널따란 거실에서는 아카시 회장이 보낸 야쿠자들이 죽어 자빠진 동료들을 치우고 있었다.
“가마구치 이시다를 불러.”
“예, 회장님.”
거실로 움직였던 비서가 수염을 짙게 기른 가마구치 이시다와 함께 돌아왔다.
“함께 잠깐 들어와.”
거실을 돌아보았던 가마구치 이시다가 비서와 함께 들어와 차웅진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문을 닫고 너도 앉아.”
차웅진의 지시에 따라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비서가 가마구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내부에 강성태와 통하는 놈이 있었다.”
나직한 차웅진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있던 가마구치가 눈을 매섭게 떴고, 비서는 놀란 얼굴로 차웅진의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마구치. 옆에 있는 배신자를 처단해라.”
내가? 내가 배신자…?
고개를 돌린 가마구치의 시선 앞에서 비서는 입조차 떼지 못했다.
재킷 안으로 손을 넣은 가마구치가 칼집에 담긴 단도를 꺼냈다.
“회장님? 저는…. 저는 회장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회장님!”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비서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콰악.
그의 멱살을 가마구치가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런 뒤에 바싹 당기고는 번쩍이는 단도로 심장을 깊게 찔렀다.
“커흑.”
가마구치의 어깨에 얼굴이 걸린 비서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끄윽.”
그런 뒤에 마치 칼에 찔린 자리가 아파서 울음이 터진 사람처럼 눈과 입술을 늘어트렸다.
억울합니다.
내가 왜?
울음에 담긴 항변은 분명했는데 차웅진과 가마구치, 두 사람 모두 비서의 억울함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비서의 몸이 가마구치의 품으로 늘어졌다.
“끝났습니다, 회장님.”
“내일 마카오로 가야 한다. 바깥을 정리하고 나면 의사를 부르도록.”
“하이.”
고개 숙인 가마구치가 비서의 멱살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연 그가 고갯짓을 하자 야쿠자 둘이 달려와서 비서를 함께 들었다.
문이 닫힌 서재에서 차웅진은 비서가 앉았던 자리에 흥건하게 고인 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강성태가 말했던 게 바로 저런 의미일 거다.
지금은 차웅진의 지시에 비서가 죽었지만, 마카오에서는 아카시의 계획에 따라 자신이 비참하게 피를 쏟아낼 게 분명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이 한목숨 은혜를 갚는 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바친다.
그러나 강성태란 놈이 이미 계획을 알고 있다면 덧없이 죽는 꼴이 된다.
아카시 회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줘서 대책을 세우라고?
사실을 말하는 순간, 뒤탈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고, 혹시나 강성태와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해서라도 가마구치가 들었던 단도가 차웅진의 심장을 파고들 거다.
비참한 죽음이라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아직도 붉은빛이 선명한 비서 놈의 피를 바라보던 차웅진의 왼편 얼굴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욱신거렸다.
**
새벽에 깬 조태완은 문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1층으로 내려갔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거기 시원한 물 한 잔 다오.”
“예, 형님.”
지시를 마친 조태완은 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이었다.
김석문이 움직여 생수와 홍삼 달인 물을 함께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나름 눈치가 생겼는데?
조태완이 힐끔 김석문을 볼 때였다.
- 박배근입니다, 형님.
기다리던 대꾸가 건너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보스는 지금 어디 있고?”
조태완의 질문에 박배근은 아는 대로 내용과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뭐냐. 인천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이거냐?”
- 예, 형님. 지금 제가 정리하고 있는데 부천 자동차 매장에서 병렬이가 보여준 게 워낙 커서 부천은 그냥 순순히 따르고, 형님. 인천 애들 몇 명이 반발하는 거 같은데 크게 문제는 없을 거 같습니다.
조태완은 폐에서 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인천을 이렇게 빠르고 깔끔하게 정리하다니?
말이 좋아 정리라고 하지만, 전성기의 조태완이라고 해도 전면전을 벌이느니 함태준과 자리를 만들어서 원만한 타협점을 찾았을 정도로 나름 독한 조직이 인천 부천 연합이었다.
“그것참. 이렇게 되면 정말 우리나라 밀수할 만한 곳을 거의 틀어막은 건데….”
- 예? 형님?
“부산, 인천, 안중이 우리나라 삼대 밀수 항 아니냐? 남은 건 여수, 군산밖에 없는데 그쪽도 광주 사정 빤히 아는 데다, 인천 소식까지 들으면 맞붙을 생각을 못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다.”
- 그건 그렇습니다, 형님.
“신고는 어떻게 처리했어?”
- 우선 영화 촬영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신고받고 순찰차가 왔었는데 모른 척하는 눈치라 저는 형님께서 손 쓰신 줄 알았습니다, 형님.
조태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 처리였다.
“보스는?”
- 그게 형님.
자리를 잠시 옮기는 것처럼 박배근은 시간을 끌었다.
그 정도 눈치는 지닌 조태완이어서 앞에 놓인 생수를 마시며 답을 기다렸다.
- 성태 형님께서는 어제 키란이라는 동생과 함께 차웅진 회장을 정리하셨답니다.
“푸훅!”
조태완은 마시던 물을 뿜었다.
급하게 김석문이 티슈를 뽑아 건네주고 앞섶과 테이블을 닦았으며,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형님? 괜찮으십니까?” 하는 박배근의 질문이 달려들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 성태 형님을 모시고 갔던 동생들도 밖에만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는데, 형님. 성태 형님께서 들어가시고 잠시 뒤에 키란이란 동생이 뛰어들었는데, 형님.
그 뒤로 박배근은 피에 젖은 강성태와 키란이 나온 일, 마당에서 들렸던 비명, 그리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는 내용을 조태완에게 전해주었다.
“차웅진 회장을….”
조태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실제로 조태완은 차웅진의 찻잔을 날랐을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사람이었다.
“보스에게 달려들어서 이 정도로 살고 있으니 내가 말년에 대운이 들었던 거지.”
가슴을 가라앉힌 조태완은 혼잣말처럼 들리는 탄식을 내놓았다.
“그럼 지금 보스는 병원에 있나?”
- 집으로 가셨답니다, 형님.
“혼자서?”
- 병렬이가 보스 모르게 동생들 깔았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형님.
“알았다. 고생하고,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무리하게 달렸던 사람처럼 앞에 놓인 홍삼 달인 물을 단숨에 삼켰다.
차원이 다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웅진을 느닷없이 달려가 그것도 달랑 키란이라는 동생 한 명과 해결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우.”
당장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이병렬에게 전화할까 싶었으나 치료받은 뒤에 잠들었을지 모르니 아침 먹을 때쯤 전화하는 게 도리였다.
**
동이 하얗게 트는 시간이었다.
강명그룹 정세원은 강남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선 그를 은선곤이 맞았다.
곤잘레스 이두안과 조식 약속을 할 때부터 도착하는 순간까지 은선곤이 자리한다는 걸 정세원은 알지 못했다.
‘괘씸한 놈.’
정세원이 차가운 눈으로 은선곤을 노려볼 때였다.
“회장님.”
은선곤이 의미 있는 음성으로 부른 뒤에 시선을 입구로 가져갔다.
‘저 사람이구나.’
누가 봐도 곤잘레스 이두안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다가왔고, 그 뒤를 머리 하나는 불쑥 위로 올라온 흑인 남자가 무겁게 따랐으며, 나머지 경호원이 입구를 지켰다.
그 외에도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한쪽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명그룹 정세원 회장님입니다. 회장님?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십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입니다.”
“어려우셨을 텐데 시간 내주신 점에 감사합니다. 정세원입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인사를 정세원이 능숙한 영어로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뒤편에 늘어선 경호원과 수행원들을 눈에 담았다.
물론, 정세원도 수행원을 대동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를 부리듯 라운지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고, 특히 경호원은 표시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앉으실까요?”
“감사합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의 제안에 정세원은 그가 가리킨 테이블로 옮겼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미스터 은도 합석했으면 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곤잘레스의 제안을 정세원이 넉넉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커피 좀 주겠나?”
아직 커피도 따르기 전이었다.
“어제 늦게 지경그룹 곽대출 부회장과 잠시 만났었습니다.”
정세원이 힐끔 은선곤을 돌아볼 만큼 뜻밖의 화제를 곤잘레스 이두안이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