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2부 20권 - 5화
신호음은 분명 울리는데 응답은 없었다.
‘제발!’
태어나서 이렇게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복도를 돌아보았던 함태준은 다시 한번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때였다.
“비켜, 이 새끼들아! 함태준이 어디 있어?”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이 연달아 방으로 들어왔고, 이어서 고함과 비명,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이렇게나 빨리 올라왔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함태준은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옮긴 뒤에 소파 옆에 두었던 회칼을 움켜쥐었다.
부응! 퍼윽! 퍽! 콰자작!
“종환아!”
“가십시오, 형님! 제가 맡겠습니다!”
콰자작! 콰윽! 퍽!
“진용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병렬이 형님 따라가!”
퍼윽! 퍽! 퍼으윽! 퍽!
아니, 왜 신강남파 고함만 이렇게 들리는 거야?
대꾸 없는 스마트폰을 내린 함태준이 독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콰응! 콰앙! 콰다당!
열어놓은 문에 연달아 부딪친 덩치 셋이 더는 버티지 못한다는 듯 흔들린 뒤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가가 피로 물든 이병렬이 문틀을 붙잡으며 나타났다.
“함태준?”
회칼을 움켜쥐었던 함태준은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이병렬과 비슷하게 피를 뒤집어쓴 김진용, 이종환, 유섭우가 이병렬의 뒤에 줄줄이 늘어섰다.
아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인사도 했었고, 심지어 행사장 뒤풀이에서 술잔을 나누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갑게 지낸 건 아니었다. 거기에 함태준은 이교창을 작업했고, 이병렬이 있는 병원에 칼잡이까지 보냈다.
문 앞에 엎어진 놈들을 밟아가며 이병렬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엎어져 있는 놈들을 밟아가며 넘어온 덩치들이 이병렬의 뒤를 가득 메웠다.
“칼로 하자고?”
함태준이 손에 든 회칼을 확인한 이병렬이 오른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회칼을 달라는 손짓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깜박 잊고 이거만 들고 왔습니다, 형님.”
뭐야? 이런 싸움에 칼도 안 품고 왔다고?
함태준마저 멍하니 고개 돌려 지켜보는 앞이었다.
“형님? 굳이 칼로 싸우실 거 있습니까?”
이종환이 나직하게 이병렬을 달랬고,
“성태 형님이 계셨다면 무조건 말리셨을 겁니다, 형님.”
유섭우가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창밖으로 던지시죠, 형님?”
“그래?”
“다친 애들도 있고 하니까, 빨리 끝내겠습니다, 형님.”
이종환의 제안을 들은 이병렬이 살기가 담뿍 묻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뭐 하냐? 얼른 태준이 형님 모시자.”
이종환이 앞장섰고, 그 뒤로 유섭우와 김진용이 나섰다.
체격이라면 함태준도 밀리지 않는다.
거기에 회칼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개장수 앞에서는 꼬리를 말 듯이, 피 묻은 쇠파이프를 늘어트리고 다가오는 이종환, 유섭우, 김진용을 보자 함태준은 대가 부러졌다.
가뜩이나 생긴 것과 달리 소심하다는 평가를 받던 함태준이었다.
땡강.
회칼을 던진 함태준이 소파 옆으로 움직여 냅다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잘못했다, 동생. 인천 깔끔하게 내놓을 테니까 목숨만 살려주라, 동생.”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는 함태준의 뒤로 김진용이 움직였고, 왼편에 이종환, 오른편에 유섭우가 섰다.
여기에서 이병렬이 “깨버려.” 하는 한마디만 하면 뒤에 서 있는 김진용의 쇠파이프가 함태준의 머리통을 터트릴 테고, 여차하면 이종환이 창밖으로 던질 수도 있었다.
이병렬은 말이 없었다.
“후-.”
잠시 뒤에 짧게 숨을 내쉰 그가 함태준의 앞으로 걸었다.
앞으로 다가오는 이병렬의 다리를 보며 함태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직후였다. 고개를 떨군 함태준의 바로 앞에서 이병렬의 구두가 멈췄다.
발로 걷어차나?
함태준이 이를 굳게 무는 순간이었다.
자세를 낮춘 이병렬이 상체를 기울여서 함태준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천 주인이라는 분이 일본놈 뒷구멍 핥겠다고 우리한테 연장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형님?”
“내가 잘못했다, 동생. 인천 내놓겠다. 그러니까 목숨만 살려주라.”
“아, 씨발. 마음 약해지게, 진짜.”
갑갑하다는 투로 옆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홱, 시선을 다시 가져왔다.
“교창이 형님 작업한 거 인정하시지요, 형님?”
“죽을죄를 지었다, 동생.”
“병원에 모자란 칼잡이 새끼들 보내셨고, 형님?”
“정말 잘못했다, 동생.”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함태준은 비굴하리만치 고개를 조아렸다.
상황은 막막한데, 이병렬이 끝까지 형님이라고 달아주는 호칭이 그나마 아련한 희망을 함태준에게 뿌리고 있었다.
“야쿠자 새끼들 내놓으실랍니까, 형님?”
이게 무슨 소리지?
함태준은 좀 더 진해진 희망의 냄새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야쿠자 새끼들 연락처하고, 어디 있는지, 대가리가 누군지 내놓으시겠냐고요, 형님?”
“그럼 나 살려주냐?”
함태준이 다급하게 질문을 내놓은 직후였다.
살이 퉁퉁하게 찐 개를 앞발로 밟은 호랑이처럼 이병렬이 씨익, 웃었다.
“교창이 형님 작업하고, 나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충일이랑 치곤이 잡겠다며 칼잡이 보냈다면서? 그래놓고 흥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그게 아니라, 동생?”
“부천에서 말도 안 되는 새끼 시켜서 우리 보스 씹어댄 것도 그냥 넘어갔어. 그건 아시나?”
“그건…. 이광선은 진짜 내가 시킨 게 아니잖아, 동생?”
“그 뒤에 황원남 보낸 건?”
“죽을죄를 지었다, 동생. 정말 잘못했다.”
푹 고개를 숙이는 함태준을 두고 이병렬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이제부터 인천 부천은 신강남파 강성태 형님께서 관리하신다.”
“뭐든 따를 테니까 살려만 주라, 동생.”
“후-.”
비굴하게 매달리는 함태준을 내려다보며 이병렬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 살려주려고 고민하는 건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던 함태준은 이병렬의 눈가에 여전히 매달린 살기를 보며 얼른 시선을 떨궜다.
뻑뻑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옆으로 움직인 이병렬이 바닥에 던져두었던 회칼을 발로 툭 차서 밀었다.
“생활 접어. 대신 교창이 형님, 나 노린 거로 하나씩, 그리고 우리 보스 씹어댄 거로 하나, 양쪽 손가락 세 개씩 내놔. 거기에 오른쪽 발목 끊는 거로 참는다.”
뭘 그렇게 많이?
끔찍한 조건에 함태준이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야! 저 씨발 새끼 밖으로 던져!”
함태준의 망설임을 알아챈 이병렬이 지시했고,
“자를게, 동생. 내가 시원하게 자른다!”
화들짝 놀란 함태준이 급하게 회칼을 가져갔다. 그런 뒤에 그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혹시 손수건 있으면 하나만 빌리자.”
“셔츠 잘라서 쓰십시오.”
이종환의 답은 냉정했다.
다시 고개를 가져온 함태준은 회칼을 들어 셔츠의 앞섶을 길게 잘라냈다. 그런 뒤에 찢어진 셔츠로 중지 손가락을 있는 힘껏 감았다.
**
치료를 마친 강성태는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상처를 직접 치료했을 테니 누구보다 말려야 했을 안다미였으나 오늘만큼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응급실 구석에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강성태가 안다미에게 움직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인천 정리 끝났다. 함태준하고, 그 아래에 중간 간부까지 여섯 명 생활 접는 거로 대강 끝냈어.
“다친 곳은 없어?”
-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부산 조강치 형님에 비하면 함태준은 그냥 껌이야, 껌.
이병렬의 반응으로 봐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눈치였다.
- 괜찮으면 배근이 형님께 남은 정리를 맡겼으면 싶은데 보스 생각은 어때? 나보다는 인천 애들 다독이기도 그게 편하고.
“알아서 해. 지금 방지병원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려던 참인데 어떻게 하면 돼?”
- 병원에 있어. 마무리하고 바로 출발할게.
“알았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에게 역시나 옷을 갈아입은 키란이 다가왔다.
“형님. 저도 가겠습니다.”
“병렬이가 인천 정리 끝내고 출발한단다.”
“그럼 안 가십니까?”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제부터 힘들었으니까 잠깐이라도 쉬고 있어. 아니면 아르윈에게 부탁해서 서라대학병원에 가 있던가.”
“차에 있겠습니다.”
얼마나 병원이 싫으면 차라리 차에 있겠다고 할까?
그게 아니라면 강성태의 곁이 좋아서 저럴 수도 있겠다.
키란이 응급실을 나서자 강성태는 치료를 받았던 커튼을 향해 움직였다.
“안 선생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로비 쪽 입구에 있는 병상으로 가보세요. 거기 계실 거예요.”
간호사의 답에 따라 강성태는 로비와 통하는 입구로 향했다. 슬쩍 들여다본 커튼 안에서 안다미는 복잡한 기계들이 연결된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지금 가요?”
“아니요. 안 가도 됩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강성태를 위해 안다미가 침대 위쪽에 있던 의자를 당겨주었다.
강성태가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안다미는 환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장기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간과 신장이 거의 망가진 상태였어요. 거기에 폭행으로 갈비뼈, 허벅지, 골반이 부러져서 내부 출혈이 심했고요.”
“커피숍에서 인사할 때는 전혀 이런 줄 몰랐습니다. 제법 응대도 잘했고, 웃는 모습도 보였거든요.”
“폭행은 오늘 새벽이나 오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장기들은 지속적으로 투여한 마약류로 인한 손상 같아요. 깨어나서 커피숍에 보내면 아마 똑같이 움직일 거예요. 인사하고, 웃고, 커피 만들고.”
강성태는 죽은 듯 누워 있는 커피숍 여주인을 보았다.
대마에서 축출한 약물을 지속적으로 투여하면 고통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다음으로 지능과 판단력이 흐려져서 지시한 일만 반복하는 증상이 나온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웃음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약물에 젖어서 반사적으로 나왔던 행동이라고 생각하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아빠와 유 원장님도 굉장히 분노하셨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고마워했고요. 성태 씨가 조금만 늦게 구했더라도 지금쯤 이 환자는 이곳이 아니라 영안실에 있었을 테니까요.”
나직하게 말을 내놓았던 안다미가 고개를 돌렸다.
“잘했어요. 고마워요.”
뜬금없이 전해준 안다미의 칭찬과 감사였다.
“밀양에서 보았던 오주환과 이남순도 그렇고, 내 친구 소아, 그리고 여기 이 환자까지, 성태 씨가 살려낸 사람들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다친 거고요.”
안다미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적어도 강성태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다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그녀의 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더라도 나는 성태 씨 믿어요. 대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모든 걸 놓고 나랑 지내요. 아까 말했죠? 많이 벌지는 못해도 우리 두 사람 먹고는 산다고요.”
픽 웃는 강성태를 보며 안다미가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약속할 수 있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모든 걸 놓겠습니다. 그리고 비에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다미 씨 곁에 붙어 있겠습니다.”
언젠가 최치곤이 했던 표현이었다.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안다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배고파요.”
“야식이라도 시킬까요?”
“성태 씨가 만들어준 컵라면 먹고 싶어요.”
“그거야 어려울 게 없죠. 잠깐 다녀올게요.”
강성태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응급실을 나섰다.
주차장에 있던 아르윈, 대림동, 광주 덩치들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급하게 강성태 앞으로 다가왔다.
“인천은 정리 끝났단다. 배근이 형님께 맡기고 이리 온다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마.”
덩치들이 반갑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으로 강성태가 전하는 소식을 받아들였다.
“편의점에 다녀올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어?”
“필요한 걸 말씀하시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먹고 싶은 거 없어?”
“매일 야식을 챙기는 데다 옆에 모텔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들 잘 먹고 있습니다, 형님.”
아르윈의 답을 들은 강성태는 편안한 심정으로 병원을 나섰다.
다른 덩치들과 달리 아르윈과 키란은 내치지 못한 탓에 셋이서 함께 움직였다.
“컵라면 드실 거면 제가 준비하면 됩니다, 형님.”
“안 선생이 내가 준비한 걸 먹고 싶다니까 그냥 모른 척해.”
“아! 예, 형님.”
뭔가 알았다는 투로 아르윈이 입을 다물었다.
이왕 사는 길이었다.
아르윈까지 있어서 강성태는 컵라면과 삼각김밥, 음료수를 있는 대로 담았다.
셋이서 사이좋게 나눠 들고 병원으로 돌아와 스태프들에게 적당하게 건네주었고, 그중 하나는 강성태가 직접 물을 부었다.
음료수, 삼각김밥, 젓가락까지 준비한 강성태는 안다미를 부르러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커튼 안에는 안호상과 유헌우가 함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자네 다쳤다면서?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 그 옷은 뭐고?”
“다미 씨가 치료해준 덕분에 움직일 만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얼른 병실로 올라가.”
“그럼 다미 씨 컵라면 먹는 거 보고 올라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투로 안호상이 안다미를 돌아보았다.
“성태 씨에게 컵라면 부탁했었어요.”
“너는 아픈 사람에게 그걸 왜 부탁해?”
“아빠도 드실래요?”
“됐어. 얼른 가서 먹어. 많이 힘들 테니까 적당히 봤으면 쉬게 해.”
“예.”
말을 딱딱했으나 안호상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 옆에서 애교 섞인 말투로 답하는 안다미를 유헌우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