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2부 19권 - 19화
생각에 잠긴 강성태의 옆에서 바르지오는 명단이 담긴 USB와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미스터 강. 충고 하나만 해도 될까?”
손에 있던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바르지오가 모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차웅진과 관련된 3백 명은 나름 한국에서 힘을 쓰는 사람들이다. 아파트를 200세대 이상 구입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높였을 만큼 재력도 있어.”
파일철을 시선으로 가리켰던 바르지오가 이번에는 USB를 집어서 손바닥에 올렸다.
“여기 있는 명단은 더러운 영상을 즐기기 위해 회원에 가입했고, 매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다. 초등학교 선생도 있었어.”
카르텔의 조직원도 아니고, 초등학교 교사가 더러운 영상을 보기 위해 회원에 가입하고 돈을 지불했다고?
강성태의 눈 끝이 독하게 올라가자 바르지오가 고개를 저었다.
“회원의 숫자도 공교롭게 300명 정도다.”
“괜찮으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해.”
“재력과 권력을 지닌 3백 명과 명단이 드러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3백 명이 미스터 강의 적이 된다는 거지. 미스터 강을 제거하기 위해 가진 걸 모두 동원해서 달려들 거라고.”
바르지오는 손에 들고 있던 USB를 훌쩍 띄웠다가 다시 붙잡았다.
“교사도 그렇지만, 경찰, 군인, 학생, 직장인, 심지어 기자도 있다. 바꿔 말하면 사회 각계각층에 속한 사람들이 미스터 강을 죽이려 든다는 거고. 누구도 이 모든 이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어려워.”
어떤 상황에서도 장난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않던 바르지오가 진지하게 건네는 조언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조언이 강성태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나는 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피해자가 내 가족이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럼 그렇지.
조언은 했지만, 강성태의 반응 역시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강성태의 첫 마디를 들은 바르지오가 씁쓸하게 웃었다.
“경찰에 넘겨.”
“당연하게 그럴 생각도 있다. 하지만, 빠져나가는 놈이 생겨. 지금껏 힘 있고, 돈 있는 놈들은 명단에서 빠져나가고, 또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고는 했으니까.”
더는 말리지 못한다고 여겼는지 바르지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부탁하면 회원 명단을 뿌려줄 수 있나?”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지만 예외도 생각해 보는 게 좋아. 예를 들면, 아버지나 형제들의 이름으로 가입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통화까지 해서 확인했다던데?”
“순진하게 왜 그래? 전화야 얼마든지 대신 받을 수도 있잖아.”
듣고 보니 바르지오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튼, 고맙다, 바르지오.”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야 일도 아니지. 혹시 미스터 강에게 도움 되는 일이 있다면 언제고 연락해.”
몸을 일으킨 강성태는 바르지오가 준비해두었던 파일철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엔화를 바꿨다는 내용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을 거 아냐?”
“그 명단은 일본에서 구했어. 차웅진이 돈을 환전해줄 때마다 명단과 환전한 금액을 일본에 보냈다.”
“결국, 돈을 환전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에 약점을 잡혔다는 말이네?”
“그렇다고 봐야지, 미스터 강.”
궁금한 게 모두 풀렸다.
이병렬과 우장기를 통해서 고민하던 문제도 해결했었고.
저들이 모든 걸 걸고 달려든다면 남은 건 강성태의 독한 결심뿐이었다.
“차웅진과 관련된 명단도 뿌려줄 수 있나?”
“한국에서 환전한 일자, 일본에 명단을 건넨 시점, 명단을 보관한 장소까지 모조리 인터넷에 올려주지. 후폭풍이 엄청날 거다.”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바르지오의 어깨를 툭 쳐준 뒤에 몸을 일으켰다.
이틀 남았다. 인천을 통해 야쿠자가 물건을 들여오는 날이.
바르지오의 방을 나선 강성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로비로 내려갔다.
마음 같으면 곤잘레스 이두안을 찾아가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 모두 부족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거야 원.
줄줄이 엮어 놓은 폭죽이 터지듯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숨 막히게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하나씩, 순서대로, 빠르게 해결한다.
더러운 짓이 발각되는 게 두려워서 모든 걸 걸고 덤빈다면 이쪽도 가진 걸 모두 걸고 상대해주마.
로비에 도착한 강성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소신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출입문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까지 신호음만 울릴 뿐, 소신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거 봐?
볼에 든 멍이 다 빠졌다는 건가?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가 다시 스마트폰을 귀에 댄 다음이었다.
- 강성태 회장이 어쩐 일이오?
마지못해 받으면서도 여유 있는 척하는 소신영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잠깐 봤으면 하는데 어디야?”
- 커흠. 내가 일정이 연달아 있어서 시간을 만들기가 곤란한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호텔 입구 안쪽에서 강성태는 옅게 웃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연락하자.”
- 무슨 일인지는 말해줄 수 있지 않소?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질 일.”
머리를 굴리는지 소신영은 바로 대꾸를 내놓지 못하고 잠시 멈칫했다.
- 좋은 일이오?
“스무고개 해? 바쁘면 그만 끊어.”
-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하시오? 알았소. 봅시다. 내가 지금 우리 방송국으로 가고 있으니까 회장실로 와주시겠소?
“30분 뒤에 봐.”
- 알았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그제야 호텔 입구를 나섰다.
진입로 쪽에서 기다렸던 모양인지 출입문을 나서기 무섭게 타고 왔던 승용차가 다가왔다.
“내리지 마.”
조수석 창문에 손을 댄 강성태는 마침 다가온 도어맨이 열어주는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JBC 방송국으로 가줘.”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대답 직후에 승용차가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파일철을 옆에 내려둔 강성태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강성태입니다. 통화되십니까?”
- 보스의 전화를 거부하는 고문도 있어?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조태완이 반쯤 농담을 섞은 대꾸를 건넸다.
- 어쩐 일이야?
“여쭤볼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어쩌면 부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뭔데 이렇게 어렵게 말해?
본능이 그를 일깨웠는지 조태완의 음성이 확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우리 조직의 지역 책임자를 모두 부르고 싶습니다. 조용하게 모여야 해서 그럴 장소도 필요합니다.”
- 혹시 인천 함태준이를 달 생각이야?
“그건 아닙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임이 정해지면 먼저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언제 시간 돼?
“지금 JBC 방송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소신영 회장을 만나고 나면 다음 약속은 아직 없습니다.”
- 흐음.
고민이 깊은 사람처럼 무거운 숨소리가 건너온 다음이었다.
- 지역 책임자만 부른다고 해도 달랑 혼자 오게 할 수는 없어. 거기에 부산과 광주에서 오려면 자정은 넘을 테고. 그래도 부를 거지?
“예.”
- 내가 노익이랑 의논해서 처리할 테니까 소신영 회장 만나고 나서 연락 줘. 장소는 우리가 소유한 클럽으로 하자.
“자정이면 영업할 시간 아닙니까?”
- 우리 클럽 중 두 곳은 목, 금, 토, 사흘만 영업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는 가벼운 질책처럼 들려서 강성태는 “죄송합니다.” 하는 답을 내놓았다.
- 바쁜 보스가 그런 거로 사과할 건 아니지. 일단 준비하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병렬에게 전화를 걸까 싶었다. 그러나 우장기를 처리한 뒤에 연락한다던 말이 떠올라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우장기에 대한 양심의 가책?
강성태는 창밖을 보며 옅게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카르텔 조직원이 그런 짓을 했다가 걸렸다면 손톱 끝만큼도 고민하지 않은 채 목줄기를 쿠크리로 그었을 거다. 그런데 우장기라서, 같은 한국인이니까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돌아갈 건 차가운 미소밖에 없었다.
깡패라고 욕해도 좋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며 손가락질해도 달게 받겠다.
하지만 말이다.
열두 살은 정말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으면 싶었다. 어쩌다 촉법소년이라는 점을 악용하는 못돼먹은 녀석들도 있지만, 우장기의 손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꼭 열두 살의 아이들이었다.
그 어린아이들을 붙들어서 약을 먹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돈을 받고 영상을 내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퍼진 영상을 완벽하게 지울 방법은 아직 세상에 없었다.
누군가의 스마트폰, 외장 하드, USB, 혹은 집과 사무실의 컴퓨터 하드에 담겨 있다가 언제고 떠돌 테고, 과거를 잊고 살아가려던 피해자들의 숨통을, 혹은 어렵게 일군 현실을 부술 거다.
흔히 팔다리를 자르는 건 끔찍한 범죄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신을, 영혼을 짓밟아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심한 경우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범죄임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손가락질할 때가 있다.
단지 피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그건 범죄만큼이나 잔인한 짓이었다.
“차웅진. 너도 마찬가지다.”
“예? 형님?”
“혼잣말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강성태가 침묵하면서 승용차 안에 묘한 긴장이 맴돌았다.
아직 오후의 중간이었다.
빠르게 달린 승용차는 예상했던 그대로 JBC 방송국에 도착했다.
“지루하겠지만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이자.”
“힘들지 않습니다, 형님.”
조수석에서 내려 문을 열어준 덩치를 다독인 강성태는 곧장 JBC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신영 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강성태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연락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단정한 차림의 여직원이 강성태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회장실의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빠 보이기 위해 연출했던 것처럼 소신영이 책상에서 몸을 세웠다.
“어서 오시오, 강 회장.”
‘직원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어?’
거만한 태도로 움직이던 소신영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시원한 것 좀 주지?”
“예, 회장님.”
“자. 앉으시오.”
몸을 돌리는 직원의 뒤편에서 소신영은 소파를 가리켜가며 자리를 권했다.
그가 상석에 앉았고, 강성태는 오른쪽에 자리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하게 서두르시오?”
“차 가져온 뒤에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크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소. 그래. 멕시코 공사 준비는 잘 되고 있소?”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린 틈에 직원이 들어와 주황색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앞에 놓아주었다.
“드시오.”
손을 뻗어 음료를 권했던 소신영이 힐끔 눈을 돌려 직원이 나간 것을 확인했다.
“자, 됐소. 무슨 일이오?”
강성태는 대답 대신 USB를 소신영 앞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강성태에게 당한 일들이 있어서인지 소신영은 USB를 내려다 볼뿐, 집어 들지 않았다.
“이게 뭐요?”
“인터넷을 통해 가입한 회원 명단이다. 정치권, 행정부, 경찰, 군인, 기자, 심지어 교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게, 회원 명단인데,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회원인지를 말해줘야 알아들을 게 아니오?”
침착한 태도를 지키려 애써가며 소신영이 질문을 내놓았다.
내용을 알지는 못하지만, 강성태의 표정과 눈빛, 그동안 해왔던 일로 미루어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한 달에 5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까지 비트코인으로 결재하고 가입한 인간들인데 성관계나 화장실, 치마 속 영상, 그 외에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성관계 영상을 열람했다.”
“커흠.”
잘못 걸렸다 싶었는지 소신영이 헛기침을 내놓았다.
“피해자들에게 마약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중에는 열두 살짜리 여학생도 있다.”
“그러니까 이걸 보도하라는 거요?”
강성태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은 안 되오. 그건 보도 규정을 위반할 뿐만 아니라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에는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도 있소.”
준비하고 있던 사람처럼 명단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를 늘어놓는 소신영의 표정이 몹시도 복잡했다.
특종이라는 기대감, 그와 반대로 강성태가 명단을 밝히라고 할 상황에 대한 두려움, 또 회원 중 힘 있는 사람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그의 얼굴에 복잡하게 올라와 있었다.
“사건 내용만 보도해. 이런 종류의 사이트가 있다. 피해자 중에는 열두 살 어린아이도 있었다. 또 마약을 사용한 정황도 잡았다. 이 정도만.”
“정말 그 정도로 되겠소?”
“조건이 있다.”
절대 쉽게 줄 사람이 아니지!
소신영이 의심 가득한 눈매로 강성태가 내놓을 조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도에서 명단을 밝히지 않는 대신, 여기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가 모두 인터뷰해. 이런 증거가 있는데 본인 맞냐?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그 영상을 모두 내게 줘.”
강성태가 내놓은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소신영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인터뷰하고, 그 영상을 달라고. 가능하면 직장으로 찾아가.”
“그러니까 보도에는 명단을 밝히지 않지만, 인터뷰를 통해 범죄사실을 주변에 알리라는 거요? 그런 거 맞소?”
“거의 비슷해.”
“다른 건 뭐요?”
“부인하는 놈들은 모두 방송에 내보내.”
“말했잖소? 그걸 내보내면….”
“부인했다고 보도하는 거잖아. 얼굴은 모자이크로 처리하고, 정확한 직장 이름을 올리지 않는 대신 교사다, 경찰이다,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건 상관없는 거 아냐?”
강성태의 설명을 들은 소신영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쉽게 말해서 사회에서 매장시킬 생각인 거요? 그렇게 하면 자살하는 사람도 나와요.”
차가운 강성태의 표정과 눈빛을 확인한 소신영이 이번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