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19권 - 18화 (390/513)

《390》2부 19권 - 18화

매질은 매서웠다.

마약으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는 여동생이 떠올랐는지 이병렬은 우장기의 얼굴을 밟았고, 가슴을 짓이겼으며, 배를 걷어찼다.

콰작! 콰악! 퍼으윽!

김진용과 조봉진, 남아 있던 덩치들, 구석에 꿇은 박중달과 오상율까지 강성태의 눈치를 살폈다.

이병렬이 아예 이 자리에서 우장기를 죽여버리고자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걸 말리라고?

강성태는 차가운 눈빛과 표정으로 우장기를 짓밟는 이병렬을 지켜보았다.

멕시코의 카르텔도 납치한 십 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에게 처참한 짓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르텔 조직원들이 총과 칼, 폭력으로 협박하고 납치했다면, 우장기는 돈과 녹화한 영상, 마약으로 유혹하고 협박했다.

막말로 수단의 차이만 있을 뿐, 여자들의 인생이 망가진 건 변함이 없었다.

김진용과 덩치들이 몰라서 그렇지, 만약 멕시코에서 이런 짓을 한 카르텔 조직원을 붙잡았다면 강성태 역시 그의 목에 쿠크리를 바싹 붙이고 깊게 그었을 게 분명했다.

“네가 사람 새끼냐! 사람 새끼냐고!”

피범벅이 돼서 쓰러진 우장기를 보며 강성태는 먼저 축 늘어져서 들려 나가던 커피숍 여주인의 눈을 떠올렸다. 이어서 얼굴조차 모르는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차웅진의 모습을 기억했다.

마약과 고리대금업을 통해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짓밟고, 그 대가를 야쿠자 손에 올려주며 부와 영화를 누리는 인간, 차웅진 역시 이익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멕시코의 카르텔이나 우장기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었다.

강성태는 내내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은 느낌이었다.

“너 같은 새끼는 반드시 또 이런 짓을 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이 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뒈지는 게 좋아.”

우장기의 턱을 세차게 걷어찼던 이병렬이 독기를 가득 품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진용아. 연장 이리 줘.”

“형님?”

김진용은 차마 회칼을 건네지 못한 채 이병렬을 만류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상율과 박중달의 시선을 조심해야 했고, 명단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눈치였다.

아차, 싶었던지 독기를 풀지 못한 이병렬의 눈이 의자에 앉아 있는 강성태에게 돌아왔다.

“마약에 빠진 사람 중에 몇몇은 악착같이 빠져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마약으로 이용해 먹던 인간들은 절대 그 짓을 멈추지 못해. 손쉽게 얻으니까.”

지금까지 보인 모습에 대한 변명처럼 이병렬이 말을 내놓았다. 물론, 누구보다 강성태가 확실하게 알고 있던 일이었다.

이병렬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성태의 반응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할까 봐 염려하는 기색도 분명하게 보였다.

“저 새끼, 지금 교도소에 넣어봐야 나오면 반드시 아까 병원에 보낸 커피숍 여주인을 다시 찾는다니까. 그 뒤에 나나 보스에게 걸리지 않으면 또 열두 살짜리 여자애들을 꼬드길 거고.”

이를 드러낸 이병렬이 피범벅이 돼서 널브러진 우장기를 내려다보았다.

“가정이 불우해서 가출했거나 호기심에 연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생 전체를 짓밟혔어. 그저 잠자리, 밥이 아쉬운 여자아이들이.”

“너무 흥분하지 마.”

강성태의 조언에 이병렬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우리가 깡패 하는 이유가 마약 막자는 거 아니었어? 법망에 걸리지 않는 놈들, 빠져나가는 놈들, 그리고 법 위에 있는 놈들과 맞붙어서 마약과 고리대금업을 막자고 이러는 거잖아?”

“알았으니까 흥분 좀 가라앉히라고.”

“이 새끼가 깡패가 아닌 건 알아. 그렇더라도 풀어주자는 말만 하지 마라, 보스.”

독이 잔뜩 오른 상태에서도 이병렬은 보는 사람들 앞에서 보스인 강성태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강성태의 체면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만들어 낸 모습이었다.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장기는 알아서 해.”

“뭐?”

“다시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라고. 죽여도 상관없다. 혹시 한순간에 죽이는 게 고통이 너무 짧을 거 같으면 그냥 가운데를 잘라서 데리고 있어. 평생 고통 속에 살게.”

강성태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눈치였다.

이병렬은 멍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오상율과 박중달은 반쯤 사색이 된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고 있었고, 김진용과 덩치들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은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명단은 어떻게 하지?”

“이제 그게 걱정돼?”

옅게 웃은 강성태는 조봉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봉진. 병원에 세워둔 승용차 좀 가져오라고 하고, 저 방에 있는 컴퓨터 본체하고 노트북 가지고 내려가서 실어줘.”

“예,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조봉진이 문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호텔에 갈 테니까 이곳에서 이러지 말고 적당한 곳으로 옮겨서 처리해. 필요하면 아르윈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거 현실 맞지?

김진용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을 때였다.

컴퓨터 본체와 노트북을 든 조봉진이 방에서 나왔다.

“승용차 출발했답니다, 형님.”

“차에 실어두고 잠깐만 기다려.”

고개를 숙인 조봉진이 덩치가 열어주는 현관으로 나간 뒤였다.

“일반인은 건들지 말자고 했던 건 적어도 그들이 더는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였다. 저 인간은 지금까지 지은 죄만으로도 이미 한계치를 넘겼는데 고민할 게 있어?”

말을 마친 강성태는 거실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힘없는 사람의 인생을 짓밟았다면 똑같이 당할 각오쯤 해.’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오상율과 박중달이 급하게 시선을 떨구고는 선처를 호소하듯 고개를 조아렸다.

잠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움직였다.

문을 나서기 전이었다.

거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강성태는 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만은 분명히 하자. 우장기를 죽이든, 가운데를 자르든 그건 알아서 하는데 내가 지시한 일이다. 오상율과 박중달 역시 마찬가지고. 처리 끝나면 내게 알려줘.”

“보스?”

멍하니 부르는 이병렬을 향해 옅게 웃은 강성태는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김진용과 덩치들의 인사가 있었는데 고개마저 돌리지 않았다. 괜히 자신의 책임이라며 이병렬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

박승양은 세상을 모두 얻은 듯한 표정으로 허름한 그의 사무실 소파로 움직였다.

“아프리카 하면 타오르는 태양, 갈증, 맹수, 흙먼지, 캬흐! 우리 곽 부회장의 거친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준비했지요. 뭐를? 이렇게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가시게 되면 우리 천 회장께 나의 성의를 꼭 전해주십시오.”

미숫가루 탄 잔을 내려놓는 그 짧은 순간에 쏟아진 너스레에 곽대출이 가볍게 웃었다.

“큼큼. 이거 봐. 이거. 우리 곽 부회장님의 몸에서 나는 돈 냄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박승양에게는 세상 그 어떤 냄새보다도 더 진하지요. 자! 얼른 드세요.”

“감사합니다.”

“점잖아지셨네. 누가? 우리 곽 부회장께서. 그래, 지내는 곳에 맹수가 덮치고 하지는 않습니까? 독사라든가, 독충도 있을 테고?”

“5성급 호텔이라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에어컨도 잘 가동되고, 인터넷도 이용할 수 있고요.”

“그러시구나.”

급격하게 흥미를 잃은 얼굴로 대꾸했던 박승양이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아프리카에서 어쩐 일로 오셨을까?”

“회장님께서 꼭 전해드리라는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회장님이라시면 우리 천중명 회장님?”

모처럼 보는 박승양의 너스레가 나쁘지 않은 얼굴로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이 아프리카로 진출하면서 우리와 자주 충돌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리스 파리오와 삼합회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눈 끝이 매섭게 생긴 곽대출의 말을 박승양은 승양이로 변한 듯 날카로운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사업 진행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회장님의 말씀을 먼저 전해드립니다. 물론, 우리 박 회장님께서 투자하신 투자금도 알차게 불어나고 있고요. 문제는 중국인데.”

말의 중간에 곽대출은 버릇대로 오른손 엄지를 끄떡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의미였는데 박승양은 충분히 알아보는 동작이었다.

“아시지만, 중국이 최근 자국의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밀쳐낸 데는 아프리카 진출을 그만두라는 협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바람에 삼합회가 날뛰고 있고요. 그래서 말씀인데….”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구나.

박승양이 눈빛을 빛낸 직후였다.

“멕시코 건설 현장을 확보한 강성태란 친구와 교류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건설하는 신도시마다 세계 각국에서 폭력 조직들이 들어옵니다. 기업 이미지가 있어서 도깨비로 일일이 상대하는 데 한계도 있고요.”

“그렇다면?”

뒷말을 짐작한 듯한 박승양의 질문이 나온 뒤였다.

“아프리카에 강성태와 신강남파, 그리고 가능하다면 은선곤 비서실장이 진출해 주었으면 합니다.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멕시코 건설 공사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마카오 회의에 도움을 줄 생각입니다.”

“다 알고 계셨구만? 물론 목적은 사람이시겠지?”

“회장님께서 은선곤을 눈여겨 보고 계십니다. 거기에 할 수만 있다면 강성태와 신강남파를 당장에라도 아프리카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곽대출이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꺼내놓았다.

박승양은 감탄한 얼굴이었다. 그랬던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짚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하려고 이러나?

맞은 편에 앉은 곽대출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박승양은 재킷의 앞을 만져가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천중명 회장님, 만세! 만세! 만세!”

양팔을 들어 만세를 외치는 박승양을 곽대출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

정세원은 진심으로 놀란 눈을 하고서 비서를 보았다.

“분명해?”

“예, 회장님. 곽대출 부회장이 송도상인 박승양 회장의 대치동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대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으나 대신 박승양 회장이 목청껏 외치는 만세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나온 건 분명하게 들었답니다.”

“만세를?”

“예, 회장님.”

송도상인 박승양의 들쭉날쭉한 대화법을 모르는 그룹 회장은 없다. 아무리 그가 종잡기 어렵다고 해도 만세를 외칠 정도라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거나 그 정도 되는 제안을 내놓았을 게 분명했다.

“하아.”

정세원은 입맛을 다시며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성과를 이뤄낸 직원에게 천중명 회장이 전하는 보상은 이미 유명한 일이었다.

백억 단위는 이미 세기도 벅찬 수준이고, 천억을 넘게 받은 직원이 벌써 스물세 명이나 있었다.

천중명이 은선곤을 욕심내서 데려간다면?

창밖을 보던 정세원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은선곤한테 당장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에게 최대한 빠르게 만났으면 한다는 뜻을 전해. 서둘러.”

“예, 회장님.”

비서가 몸을 돌리자 정세원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몸을 기댔다.

천중명 회장이 은선곤을 데려간다면, 정세원은 그런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넘겨준 멍청이로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그것도 시종일관 정세원에게 고개 숙이며 충성하던 은선곤을 말이다.

**

컴퓨터 본체와 노트북을 받은 바르지오는 서너 가지 선들을 연결한 뒤에 모니터를 주시했다.

“어설픈 솜씨로 많이도 꾸몄네. 여기저기 얻어다 쓴 프로그램을 조합한 건데.”

키보드를 두들기며 모니터를 주시하던 바르지오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취향이 이런 거였나?”

“농담할 시간은 없어.”

강성태의 표정에 담긴 감정을 알아챈 그가 장난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여기 이것들은 실시간을 보여줬던 영상 모음, 이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카메라로 주고받은 영상 모음, 마지막으로 이건 직접 촬영한 영상 모음.”

바르지오가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영상들이 날짜별로 쭉 나열되었다.

“명단이 있다던데?”

“그건 여기.”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바르지오가 영상을 내린 뒤에 엑셀로 정리된 파일을 올려놓았다.

“뭐가 이래? 이런 거래에서 실명과 전화번호, 주소, 직업까지 밝혀?”

“한글을 읽을 줄 알아?”

“이 프로그램 역시 떠도는 걸 가져다가 대강 만진 거거든. 뒤편에 영어로 다 적혀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이걸 나한테 보내줄 수 있나?”

“물론이지. USB로 줄까?”

“그건 그거대로 부탁하고, 스마트폰에도 가능해?”

“용량이 꽤 되니까 스마트폰을 이리 줘. 아예 바로 입력해 줄게.”

강성태가 건넨 스마트폰에 선을 연결한 바르지오가 몸을 돌려서 책상 옆의 서랍을 열었다.

“데이터를 옮기는 동안, 이걸 보는 게 좋겠다.”

강성태는 그가 건네주는 파일철을 펼쳤다.

“차웅진과 관련한 자료다. 내용이 약간 복잡한데 일본에서 1만엔 짜리 화폐를 밀수입해서 한국 돈과 바꿔주는 거래 내용이지. 차웅진은 정치인, 사업가, 고위직 공무원들이 보유한 현금을 밀수로 들여온 1만 엔짜리 지폐로 바꿔주는 방식으로 비밀리에 자금을 마련했어.”

경제적 상식이 부족하지 않았으나 강성태는 바르지오의 설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부정하게 얻은 이익이나 감춰야 하는 현금이라면 1만 원짜리 열 장 대신 1만 엔짜리 한 장을 보관하는 게 좋지 않겠어? 누군가에게 뇌물로 쓰기도 좋고. 차웅진은 그런 이들의 환전상 노릇을 했던 거지. 밝혀지면 곤란한 은닉재산을 환전해주는 사람.”

“차웅진이 일본 돈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그럼 일본에서 그 돈을 보내준 사람들도 뭔가 이익이 있어야 하잖아?”

“차웅진은 세탁된 현금으로 부동산 투기, 고리대금업, 마약을 판매한 대금의 세탁. 후원회를 통해 교수와 기자, 정치인에게 다시 뿌렸어. 나머지 이익은 슬롯머신 거래를 통해 일본으로 보냈고.”

강성태는 파일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연루된 사람들의 숫자는?”

“굵직한 숫자만 3백 명 정도. 그들 집 어딘가에 1만엔 권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는 뜻이지.”

염병할.

일 더럽게 커지네.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 더러운 거래의 한가운데 차웅진이 있다는 거지?”

강성태의 표정을 본 바르지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