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2부 19권 - 14화
모처럼 돌아온 집에서 강성태는 가장 먼저 샤워실로 향했다. 이병렬의 조언대로 개운하게 씻은 뒤에 소박하게 내린 커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최치곤이 대자로 누워 버릇하던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소파, 거기에 강성태를 품어주던 침대가 지루한 기다림의 끝에서 주인을 반겨주었다.
감정이란 게 참 신기해서 집에 도착해 씻고 식탁에 앉은 것만으로도 피로가 반쯤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병렬, 은선곤, 아르윈과 키란을 믿고서 반나절쯤 쉰다. 두 가지 확인을 거친 뒤에 말이다.
스마트폰을 든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전화를 넣었다.
- 아르윈입니다, 형님.
“아침은?”
- 키란과 둘이서 샌드위치 먹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필리핀 조직원들이 부산부터 방지병원까지 함께 움직였으니 아르윈이 강성태의 동선을 모를 리 없었다.
“나야 부산에 다녀왔을 뿐이라 고생은 이병렬이 했지. 힘들겠지만, 키란과 오늘까지만 좀 부탁한다. 그렇게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되거든.”
- 키란이나 저나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차웅진 머리를 권총으로 날리라고 하시면 기꺼이 뛰어들겠습니다.
“뭐야? 밤사이에 키란하고 그런 대사 연습했어?”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진중하던 강성태의 돌발적인 농담에 억지로 참다가 나온 듯한 아르윈의 웃음이 스마트폰을 타고 짧게 건너왔다.
“아무튼, 하루만 더 부탁하자. 변동 사항이 있으면 언제고 전화하고.”
- 예, 형님.
아르윈과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새삼 어깨에 매달리는 무게를 실감했다.
지금이야 신강남파가 일반인과 시비를 피하고는 있지만, 깡패란 족속은 원래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무식한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는 집단이었다.
여기에서 강성태가 조금만 휘청여도 그동안 눌러두었던 본성을 드러낼 인간이 득시글거릴 테고, 이병렬이나 최치곤, 아르윈처럼 중심을 잡으려던 이들이 당하거나 멀어질 게 분명했다.
잠시 현실을 돌아봤던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다시 들었다.
[인천으로 들어온다는 약과 자금에 대한 상세 정보가 필요해. 차웅진의 약점을 알아내는 일을 잠시 중단하더라도 그 정보를 먼저 좀 알아봐 줘.]
바르지오에게 보낸 문자였다.
시차가 있으니 어쩌면 자고 있을지 모른다.
‘문자를 확인하면 답이 있겠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눕기 무섭게 아늑함과 함께 아직 낫지 않은 상처들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강성태에게 달려들었고,
우우웅.
[일본의 통화기록까지 뒤지고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바르지오의 답이 있었다.
[고맙다.]
답신을 전한 강성태는 해일처럼 몰려드는 잠을 받아들였다.
**
함태준의 아침은 불편했다.
지난밤에 보냈던 칼잡이들의 연락이 뚝 끊겼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언제 강성태가 밀고 들어올까?
아니면 이병렬이 먼저 오려나?
연안 부두 앞의 중급 호텔을 잡았고, 빙 둘러싸다시피 덩치들을 깔아두었음에도 그는 잠에 들지 못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부산 조강치가 HK 맨션에 천 명 가까이 깔아두고도 강성태에게 당했다. 그런데도 검찰이나 경찰의 수사는커녕 보도 한 줄 나오지 않았다.
‘중국이나 필리핀이다. 내가 살 길은 거기밖에 없어.’
점점 목을 조여오는 압박 속에서 함태준은 입술을 단단하게 깨물었다.
“중국이나 마카오에서 당분간 지내지? 앞으로 인천을 통해 거래하려면 친분을 쌓을 시간도 필요하고.”
이틀 앞으로 다가온 거래를 야쿠자와 차웅진은 바꾸지 않았다. 게다가 거래가 끝난 뒤에 중국이나 마카오로 오라는 제안도 주었다.
오냐.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들고 중국이나 필리핀으로 잠시 피해있거나, 아니면 하와이로 가서 멋진 해변과 여자들을 즐기다 잠잠해지면 조용하게 들어오면 끝이다.
“이틀이다. 이틀.”
“예? 형님?”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애들은?”
“부천 숙소까지 모조리 도착했습니다.”
설마하니 호텔을 쳐들어올까.
여기에서 칼부림을 벌이면 아무리 보도를 안 한다고 해도 연안 부두에 놀러 온 사람들이 모두 볼 텐데.
“항구는 문제없지?”
“예, 형님.”
함태준의 질문에 확실히 건방진 대꾸가 있었다.
이 정도 숫자를 모아놓고도 강성태를 저렇게 경계할 필요가 있나?
답을 하는 덩치의 표정을 확실히 읽었으나 함태준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올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돈만 쥐면 된다. 돈만.
어쩌면 해외로 튄 함태준 대신 신강남파에게 붙잡혀 죽도록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한 덩치의 건방진 표정을 애써 무시했다.
**
날이 완연하게 밝았을 때, 차웅진은 아카시 미키야토의 전화를 받았다.
CCTV와 영상 녹화 장치가 외부로 연결되는 일이 없도록 손을 본 다음이라 거실에 가득했던 덩치들은 모두 원래 자리인 마당으로 나갔다.
- 부산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권총을 사용할 수 있다면 쉽겠는데 한국은 아직 미개하게 회칼을 들고 설치는 수준이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듯싶다.
“미개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고즈넉한 실내에서 차웅진은 습관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맞서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대들 수 있으련만, 어릴 적부터 눌려왔던 습성에 발목을 묶인 코끼리처럼 길들어서 차웅진은 자세를 낮추는 데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느끼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검찰이나 행정력을 동원해서 강성태를 잡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회장님?”
- 이틀 뒤에 거래를 마치는 게 더 중요해. 이번 거래가 우리 둘 사이에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만드는 일이라 우선 그 거래를 완성하고 처벌하자.
“예, 회장님.”
- 만에 하나 함태준이 입을 가볍게 놀리면 일이 틀어질 수 있다. 거래가 끝나면 그를 중국이나 필리핀, 아니면 마카오로 불러서 조용하게 처리할 테니 함태준을 너무 나무라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통화가 뚝 끊겼다.
신기한 일이었다.
통화하는 내내 비굴해 보일 정도로 낮추었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절대자로 변하는 모습이 말이다.
“밖에 있느냐?”
“예, 회장님.”
“아침을 들겠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직한 눈빛, 무겁게 가라앉은 눈꼬리,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차웅진이 몸을 일으켰다.
**
강명그룹 정세원 회장은 들어서는 비서를 보며 엄지와 검지로 눈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는 책상에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고 다가온 비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됐어?”
“홍콩에서 벌어진 일은 완전히 마무리된 것으로 판단한답니다.”
“흐음.”
정세원은 이제야 안심된다는 투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렇더라도 언제 사건화될지 장담하지 못한다. 은선곤이 연루되었으니 혹시 있을지 모를 불똥이 튀지 않게 당분간 홍콩 쪽 정보에 집중해. 그 외에 다른 소식은?”
“지경그룹 곽대출 부회장이 입국했습니다, 회장님. 지경그룹 내부에서조차 아직 알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입국했으며, 사유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정세원이 대번에 책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곽 부회장이 그 뭐냐, 도깨비라는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혹시 강성태 회장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멕시코 공사를 차지하려는 건 아닌가?”
“비서실에서 모든 정보원을 동원하고 있지만, 지경그룹 자체 보안이 워낙 삼엄해서 사유를 알아내는 데 어느 정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회장님.”
“어쩐지 천중명 회장이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그는 절대 이런 기회를 그냥 지켜볼 사람이 아니지. 혹시 강성태 회장이나 곤잘레스 회장이 그쪽에 연락했는지 조사해 봐. 연락했다면 박승양 회장이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확률이 높아.”
“예, 회장님.”
지시를 내린 정세원은 왼손으로 볼을 쓸어내리며 여유를 가진 뒤에 다시 시선을 들었다.
“차웅진은 어때? 인천 쪽 반응도 있을 거 아냐?”
“부천 충돌 이후 모두 조용합니다. 이상한 건 대대적인 응징을 했어야 할 강성태 회장과 신강남파가 침묵한다는 점입니다.”
“양쪽이 부딪치면 승산은 어느 쪽에 있지?”
“회장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5대5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강성태 회장이 물리적 힘을 이용해 차웅진 회장을 제거하는 게 빠를지, 반대로 차 회장이 권력으로 강 회장을 제압하는 게 빠를지의 싸움으로 보고 있습니다.”
설명을 들은 정세원은 시선을 창으로 돌리고 잠시 말이 없었다.
뻑뻑한 침묵 속에서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업이라는 게 온갖 사람을 상대한다고는 하지만, 깡패와 도박 기계나 파는 장사치의 싸움에 끼어들게 될 줄은 몰랐군. 내가 돕는다는 가정도 해보았나?”
“회장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신다면 7대3의 확률로 강성태 회장이 유리합니다. 그럴 경우, 차웅진 회장은 사망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참.”
탄식을 뱉어낸 정세원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은선곤도 이 내용을 알고 있나?”
“비서실 정보망에 접속할 권한을 아직 회수하지 않았습니다.”
“지경그룹이라….”
답을 들은 정세원이 엉뚱한 혼잣말을 내놓았다.
“곽대출 부회장, 박승양 회장, 고강준 고검장, 소신영 JBC 회장. 이우섭 부의장, 도대체 그들이 왜 일개 폭력 조직의 두목에게 매달리는 건지, 원. 우리가 모르는 게 분명 있을 텐데….”
양손을 책상에 올려 깍지 낀 정세원이 검지를 까닥였다.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의미여서 비서는 입을 다문 채 묵묵하게 기다렸다.
“차웅진을 적으로 돌리면 그를 비호하던 세력이 앙심을 품을 테고.”
비서의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계산을 위해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강성태 회장이 무너지면 투자금과 기업 이미지, 주가 손실이 엄청날 테지?”
혼잣말의 끝에서 한숨을 크게 내쉰 정세원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곽대출 부회장의 행적을 살펴서 그가 어딜 방문하고 누굴 만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보고해. 우선 그 정도만 하자. 그리고 나가서 은선곤을 불러줘.”
“예, 회장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비서가 회장실을 나섰다.
“지경그룹. 지경그룹. 지경그룹.”
그 뒤에 정세원은 주문을 외우듯 ‘지경그룹’이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도깨비 회장이 하필 이럴 때 곽대출 부회장을 보내다니?”
지기 싫다는 강렬한 의지가 혼잣말을 뱉어낸 정세원의 얼굴과 눈빛에 진하게 올라왔다.
**
강성태는 오전 11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전쟁터 한중간에서 빠져나와 얻은 짧은 휴식처럼 정말 깊게 잤고, 그만큼 피로가 풀렸다.
샤워실로 들어간 강성태는 간단하게 씻고 나와서 스마트폰을 집었다.
최소한 잠만은 재워주마, 하는 것처럼 연락 온 곳은 없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강성태는 익숙한 번호를 찾아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아버지, 저 성태예요. 통화 괜찮으세요?”
- 아이고. 바쁘다더니 어떻게 전화를 했어?
“아버지 뵌 지도 오래됐고 해서 인사나 드리려고요.”
강성태의 대꾸에 최재섭의 가벼운 웃음이 넘어왔다.
“치곤이랑 통화하셨다면서요?”
- 그래. 말은 청산유수로 쏟아내더구만, 그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예?”
- 아니, 씩씩한 척하는데 어쩐지 아픈 목소리 같아서 그렇다.
“예에.”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 강성태는 적당하게 최재섭의 질문을 받아넘겼다.
부모란 진짜 이런 건가?
최재섭이 이 정도인데 장숙경은 오죽할까?
봐서 점심은 이모 장숙경과 먹으려던 계획을 강성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편안하시죠?”
- 나야 잘 지내지. 치곤이 놈 마음잡았는데 더 뭘 바라겠냐? 그래도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나 더 욕심낸다면 그놈이 얼른 참한 여자나 만났으면 싶지.
“어? 아버지? 치곤이 만나는 여자 있어요. 모르셨어요?”
- 그래? 누군데?
이은주를 팔아서 대략 5분쯤 통화한 다음이었다.
“아버지.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 언제 한번 내려와. 아니면 내가 올라가도 좋고. 허허허.
세상 걱정을 모두 내려놓은 듯 행복한 최재섭의 웃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신기한 일이었다.
최재섭과 통화하고 난 뒤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피폐했던 마음에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듯 가슴이 포근해졌고, 왜 이렇게 싸우고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다시 한번 얻은 느낌도 들었다.
최재섭, 장숙경, 김민정, 김민재와 같은 사람들이 더러운 욕망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는 세상, 강성태는 최소한 마약과 고리대금을 없애고 싶어 시작했었다.
‘생각했던 대로 해야겠지?’
픽 웃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