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2부 19권 - 13화
제5장. 방지병원은 죽어도 못 가.
당연하게 강성태라고 불행한 과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모처럼 마주한 최치곤과 좋았던 지난 추억을 들추자 연신 웃음이 나왔고, 덩달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살면서 지금까지 맞은 거 중에 그때 술 먹고 이모한테 등짝 맞은 게 제일 아팠다. 그렇게 취했는데도 고통이 생생하더라고.”
“너니까 욕조에 토하고 그 정도로 끝난 거지, 민재가 그랬으면 거꾸로 넣어버리셨을 거다.”
“사실 진짜 죽을 뻔한 건 그다음이었어.”
강성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과거로 돌아간 게 즐거웠는지, 아니면 모처럼 강성태와 이렇게 떠드는 게 좋았는지, 최치곤은 생기를 되찾은 듯 눈빛마저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얼결에 문을 열었는데 그게 민정이 방이더라고.”
“뭐-?”
“일단 들어. 그런데 민정이가 검지를 이렇게 입 앞에 세우고는 나를 붙들고 네 방으로 끌고 간 거야.”
“너 죽고 싶었어?”
“아니라니까! 하여간 그 민재랑 민정이 말만 나오면 눈 뒤집히는 것 좀 고쳐. 아무렴 화장실에 이모 계시고, 너도 술기운 올라 있는데 죽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일부러 민정이 방에 들어갔겠냐?”
장난스럽게 최치곤을 노려보았던 강성태가 잠시 눌러두었던 웃음을 풀어냈다.
“뭐야? 벌써 아침이야?”
그 웃음의 끝에서 최치곤이 커튼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전 조 출근한 거 보니까 날 밝았나 보다. 나야 지루하게 누워있던 참이라 재미있었는데 네가 피곤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최치곤의 말대로 커튼 바깥에서 고생했다는 인사와 수고하라는 격려가 오가고 있었다.
강성태는 넉넉한 얼굴로 최치곤을 들여다본 뒤에 몸을 일으켰다.
“할 거지?”
그리고 몸을 일으킨 강성태에게 최치곤이 뜬금없이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병욱이 형님 잡으러 유스시에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해결할 생각 아냐?”
최치곤은 확신하고 있었다.
설령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해도 최치곤에게 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갈 건 아니지?”
“미쳤냐?”
강성태의 답을 들은 최치곤이 히죽 웃었다.
“가.”
“끝내고 올게.”
말끝에서 둘이 비슷하게 웃었다.
커튼을 나섰을 때, 덩치 둘이 고개를 숙였고, 유충일의 커튼 쪽에서 조성호가 나왔으며, 새롭게 출근한 스태프들이 강성태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형님.”
“옷 갈아입은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당분간 고생해야 하니까 알아서 조절해.”
조성호를 다독인 강성태는 유충일이 누워있는 커튼을 바라보았다.
“아직 주무십니다, 형님.”
“됐어. 굳이 깨울 거 없이 다음에 보자.”
대화를 마친 강성태는 그 길로 응급실을 나섰다.
병실로 올라가려면 로비로 연결된 통로를 이용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잠시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쐬며 여유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스름하게 날이 밝은 시간이었다.
주차장으로 나선 강성태는 벤치를 보며 픽 웃었다.
휠체어에 앉은 이병렬과 그 옆 벤치에 앉은 이종환, 뒤에 선 김진용과 조봉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병렬이 지시했는지 입구와 주차장을 지키던 덩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병원 직원들이 출근과 퇴근하며 주차장을 지나고 있었다.
오가는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이종환과 김진용이 조심스럽게 인사했고, 이병렬은 조봉진에게 눈짓을 던졌다.
“커피 드십시오, 형님.”
“이걸 어디에서 구했어?”
“아침에 커피전문점에서 사 왔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조봉진이 건네는 일회용 컵을 받아든 뒤에 이병렬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새벽에 왔다면서?”
“병실에 올라갈 건데 뭐 하러 이러고 있어? 원장님이 보면 또 한 소리 들을 거 아냐?”
“휠체어 앉았는데 이것까지 뭐라고 하면 반칙이지.”
하긴, 휠체어에 앉아 내려온 것까지 뭐라 하기는 어렵겠다.
“힘들었을 텐데 정말 고맙다.”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황원남 같은 놈은 트럭으로 쏟아부어도 얼마든지 상대해. 칼잡이도 그래. 뒤에서 한칼 놓는 게 무섭지, 빤히 올 줄 알고 있는 칼잡이가 뭐가 무서워?”
강성태는 시선을 들어 이병렬의 머리에 붙은 거즈를 보았다.
“에이! 엉성하게 휘두른 거에 맞아서 모양 다 빠지네.”
상처 난 게 자존심 상한다는 투로 이병렬이 툴툴거렸다.
“아, 참! 커피숍에 애들 붙였었지?”
“뭐?”
“이 앞에 있는 커피숍 말이야. 애들 붙여서 따라가 보라고 했다면서?”
“그건 기억하지. 벌써 연락 왔어?”
커피를 마시라며 권했던 이병렬이 커피숍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보스한테 개겼다면서? 깡패 새끼 같았으면 벌써 요절을 냈을 텐데 일반인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자고 일어나서 물어봤더니 그 새끼 완전 개 변태인 모양이더라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성태는 무슨 말이냐는 투로 시선을 주었다.
“요 뒤에 빌라촌 있잖아? 집이 거기라서 멀지도 않은데 밤새 여자 두들겼다던데?”
“그 정도면 신고하잖아? 본인이 아니면 옆집이라도 할 텐데?”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투로 이병렬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뭔가 있는데?
일회용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강성태는 주눅 들어있던 커피숍 여주인을 떠올렸다.
진짜 일 참 더럽게 많다.
아니라면 유독 일이 몰려드는 시기인지도 모르고.
강성태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언제 갈 거야?”
“어디를?”
아침 메뉴를 묻는 것처럼 이병렬이 툭 질문을 던졌다.
“그냥 넘어갈 건 아니잖아? 차웅진이 먼저야, 아니면 함태준이야?”
요사이 가슴이 투명하게 변했나 싶을 정도로 이병렬까지 강성태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쉬고 생각하자.”
“그 안에 차웅진이 작업하면 귀찮아질 텐데? 태완이 형님도 차웅진은 감당하기 어렵다잖아.”
실제로 차웅진을 염려해서라기보다는 어쩐지 본인 모르게 움직일까 봐 확실히 해놓고 싶은 느낌이었다.
“경고는 해주려고.”
“어떻게?”
“전화로 할지, 다른 방법을 택할지 고민 중이야. 그 전에 만나볼 사람도 있고.”
입술을 길게 늘인 이병렬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더 묻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란 의미로 보였다.
“보스가 알아서 하겠지만, 나 모르게 움직이지는 말자. 여기 종환이랑 진용이는 부상이 심한데 나는 멀쩡하거든. 움직이지 말라던 일주일도 반이나 채웠고.”
이종환과 김진용이 몹시 억울한 표정으로 보았는데 이병렬은 태연했다.
“그럼 됐고. 이만 들어가서 좀 쉬어.”
“아침은 먹어야지.”
“출근 시간 되면 괜히 길만 막혀.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씻고 푹 잔 뒤에 맑은 정신으로 고민해.”
이병렬이 최치곤과 비슷하게 휴식을 권하고 나섰다.
“봉진아. 보스 좀 모셔다드리고 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예 조봉진에게 지시까지 내렸다.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여?”
“잠과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얼굴에 진하게 쓰여 있는데 뭐. 이럴 때는 두 눈 질끈 감고 쉬어주는 강단도 필요하니까 사양할 거 없어.”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남은 커피를 마셨다.
누구보다 강성태를 잘 이해해주는 두 사람, 이병렬과 최치곤이 같은 권유를 내놓는다면 못 이기는 척 듣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피곤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서 허리까지는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
아르윈은 새벽같이 움직여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왔다.
운전석으로 들어온 그는 먼저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와 샌드위치를 꺼내 키란에게 권했다.
“김밥을 사다 줄 걸 그랬나? 김밥 먹을래?”
“이거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아르윈과 네팔 출신의 키란이 평창동의 주택가에 차를 세워두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형님은 이런 일 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내가 늙었다는 거냐?”
샌드위치를 입에 넣은 키란의 질문에 아르윈이 반쯤 농을 섞어 반문했다.
“이러고 가서 조직원들을 챙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거?”
짧게 웃은 아르윈은 반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내가 처음 성태 형님을 뵌 게 나이 든 한국인들 등쳐먹다가 걸려서였다. 수입이 짭짤하기도 했고, 또 필리핀에서 온 출연자들이 한국에서 당하는 수모를 갚아준다는 묘한 복수심도 있었지.”
당시를 떠올렸는지 아르윈이 앞쪽 유리 바깥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개 같이 살았지. 여기 조폭들이 여자 출연자 끌고 가는 거 달려가서 싸워야 하고, 필리핀에 다녀온 한국 남자들 협박했었으니까. 그걸 단숨에 바꿔주신 분이 성태 형님이시다.”
샌드위치를 베어 문 키란이 궁금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나랑 계약한 출연자들 모두 천국을 걷는 느낌이라더라. 빵빵한 업소 출연하지, 삥 뜯거나 몸 달라는 인간들 없지, 거기에 필리핀 본토에서는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을 멕시코에 보낼 기회까지 얻어서 혹시 형님이 언짢을 일 없는지 그거 걱정하는 중이다.”
그 정도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키란을 돌아보며 아르윈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지금 보여주시는 모습만 해도 믿기 어려울 정도 아니냐? 눈짓 한 번이면 알아서 몸 바칠 출연자 잔뜩 있고, 돈이고, 유흥이고, 원 없이 즐기실 텐데 인사받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시니까.”
“형님은 원래 그런 분입니다. 전에도 우리 무시하는 용병들은 모두 형님께 크게 혼나곤 했습니다.”
“그러셨겠지.”
키란이 내놓은 맞장구를 아르윈이 얼른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형님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데 불만이나 불평이 있겠냐? 형님이 안 변하시는데 내가 변해? 그럼 죽어야지. 형님께 달려들었던 놈들처럼.”
말끝에 아르윈은 독한 눈으로 멀찍이 있는 차웅진의 저택을 보았다.
“저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들었다. 그래도 말이다. 형님께서 아르윈, 들어가서 쏴버려, 하시면 나는 바로 들어가서 총질할 거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던 사람들을 지키게 해주셨고, 내가 없더라도 대신해서 출연자들을 지켜줄 분이니까.”
아르윈의 시선을 따라가 저택을 바라본 키란이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강성태의 지시가 내려온다면 아르윈보다 더 빠르게 달려갈 거라는 각오가 키란의 눈에 가득했다.
**
식탁에 앉은 우장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뭐 해? 얼른 커피 타!”
버럭 지른 그의 고함에 이영선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주방으로 향했다.
“대답 안 하냐?”
“네.”
“에이, 진짜.”
저걸 두들겨?
주방으로 향하는 이영선의 뒷모습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던 우장기는 입술을 내밀어 숨을 위로 불었다. 그런 뒤에 그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나다. 아직 안 잤지?”
- 아침 먹고 자잖아. 그나저나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좋은 거라도 구했냐?
“그게 아니고. 양아치 새끼 하나가 자꾸 찝쩍대서 신경 쓰이거든. 한번 들러서 버릇 좀 가르치고 가라.”
- 깡패? 누구라는데?
“몰라-아.”
짜증 섞인 답을 토해낸 우장기가 애꿎은 이영선을 노려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영락없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새끼가 자꾸 영선이한테 찝쩍대잖냐. 그래서 내가 인상 좀 썼거든? 그랬더니 돼지들을 부르더라. 자기들끼리 가오는 졸라리 잡던데, 인사받는 게 존나 어색한 거로 봐서 생활하는 놈은 아닌 거 같더라.”
- 돈이 많은 놈인가?
“그렇게 부티도 나지 않던데? 옷도 허름하고.”
- 이름은 못 들었다고 했지?
“그렇다니까. 별거 아닌 거 같으니까 오늘부터 가게에 좀 와 있어. 내가 보기에 기생오라비나 가오 잡던 놈 한둘은 분명 올 거다.”
우장기의 요구가 건너간 다음이었다.
- 커피숍이 방지병원 옆 아니냐?
“새삼스럽게 왜?”
- 인사받는 분이 잘생기지 않았냐? 연예인 삘 나고?
“연예인은 씨발. 기생오라비라니까. 그리고 왜 갑자기 분이 나와 분이? 인사받는 새끼라고 해.”
- 혹시 상처 같은 거 없었냐?
“상처?”
고개를 뺀 우장기가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가 생각난 게 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목덜미에 거즈가 올라와 있더라. 여자가 졸라 빨아줬나?”
- 이런 씨발 새끼가?
느닷없이 달려드는 쇳소리 가득한 욕설에 우장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야, 이 개새끼야! 뒈지고 싶어? 만약에 네가 인상 썼다는 분이 신강남파 강성태 형님이면, 너는 그냥 뒈졌다고 생각해. 이 씨발 놈아. 그러게 내가 아무한테나 인상 긁지 말라고 했었지?
“그 새끼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 에라 이…! 차라리 대마초를 물고 경찰서를 찾아가거나, 지금껏 영상 돌린 거 모조리 들고 검찰청으로 가. 아, 씨발! 이거 우리 형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그 새끼가 그렇게 센 놈이야?”
- 이 새끼가 그래도 함부로 말을 해? 입 좀 조심하라고, 제발! 그 형님 이모님께서 중고차를 사러 갔는데 그걸 모르고 중간에서 깝죽거린 형님이 있거든. 그거 때문에 어젯밤에 부천 중고차 매장에 있는 차 80대 다 부서졌고, 그 형님은 손가락 잘랐어, 이 또라이 새끼야!
장난이라고 치기에는 절박하게 들릴 정도로 분노한 상대방의 음성에 우장기는 눈알을 치켜뜨며 강성태를 떠올렸다.
연예인 삘, 목덜미에 올라온 거즈, 고개 숙이던 덩치들.
“야! 하나만 묻자. 그런데 왜 갑자기 그 형님이 우리 커피숍을 드나든 거야?”
- 방지병원이잖아! 방지병원! 거기 지금 신강남파 행동대장 입원해 있고, 성태 형님 친구분 하고, 지난번에 광주 일 말해줬지? 거기 유충일 형님도 계시고!
답답한 심정을 넘어서 울분을 터트리는 듯한 대꾸에 우장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나더러 거기에 와 달라고? 차라리 회칼 들고 경찰서 가서 서장한테 삥을 뜯어달라면 그건 하겠는데 신강남파가 차지한 방지병원은 죽어도 못 가. 이거 아무래도 우리 형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거 같은데? 에라, 이 개 씨발 새끼야!
쉴 틈 없이 쏟아진 거친 말의 끝에서 통화가 끝났다.
내가 호랑이 수염을 당긴 건가?
우장기는 멍하니 앉아서 또다시 강성태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