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2부 19권 - 1화
제1장. 전화는 조태완이 먼저….
강성태는 계산기에 매달린 점원을 확인한 뒤에 스마트폰을 향해 말을 이었다.
“내게 수상한 놈이 붙었다. 야쿠자로 보이는데 전에 공항에서 멕시코 히트맨을 제거하듯이 놈을 붙잡았으면 싶다.”
- 어디 계십니까, 형님?
강성태를 노린다는 말에 독기가 올라온 모양으로 다부지게 바뀐 아르윈의 음성이 건너왔다.
“6시에 태완이 형님께서 강남 호텔 레스토랑에 들를 테니까 그곳에 있겠다.”
- 키란과 조직원들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부산 조강치를 상대할 때도 그렇고, 홍콩에 함께하지 못해서 분해하던 아르윈이었다. 독기를 피워낸 만큼 제대로 된 각오와 준비로 달려오리란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거기에 실력이라면 강성태도 인정하는 키란과 이전에 멕시코의 히트맨들을 제거하며 손발을 맞췄던 그의 조직원들도 있었다.
먼저 따라다니는 놈들을 붙잡아 정체를 확인한다.
다음이 차웅진, 네 차례다.
강성태가 마음을 굳힐 때였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점원이 종이 쇼핑백과 카드, 영수증을 강성태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점원이 건네주는 쇼핑백을 받아든 강성태는 신생아 용품 매장을 나섰다.
“차가 지하에 있지?”
“예, 형님. 쇼핑백 제가 들겠습니다, 형님.”
거절하는 게 속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성태는 손을 내밀어 쇼핑백을 건네주며 그 기회에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남자는 대각선 숙녀복 매장 앞에 있었다.
물론,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일종의 협박이었다.
‘멍청한 놈. 잠시 뒤에 보자.’
그것도 먹힐 사람에게 해야지.
아무렴 광룡을 두들겨서 없애고, 삼합회에 맞서는 강성태가 야쿠자란 이름과 그 뒤에 있다는 차웅진에게 놀라서 움츠릴 거라 기대했을까.
겁을 주려면 조사라도 철저히 하고 오던가.
강성태는 보란 듯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절반쯤 내려갔을 때였다.
눈이 마주쳤던 놈이 비슷한 정장 차림 두 놈과 함께 움직이는 게 보였다.
픽 웃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내가 부탁했던 차웅진 말이지. 오늘 밤부터 키란을 붙여놓을 생각인데 지금부터 그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
-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보다 흥미로운 소식이 있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위를 슬쩍 바라본 강성태는 스마트폰에 집중했다.
- 차웅진 말이지. 일본 전역의 파칭코 기계를 교체하는 사업을 일본의 유력한 정치인과 함께 진행하고 있어.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정치인이 파칭코 사업에 손을 대기는 어렵잖아?”
- 중국 삼합회의 투자를 받아 거대한 규모의 카지노를 개설하려던 사업의 일환이지. 그 사업은 여론에 밀려 접었는데 대신 파칭코 기계를 교체하는 쪽은 조용하게 진행 중이야. 그 사업을 중개하는 대행사가 현직 장관의 형이 소유한 회사다.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 빙고!
모처럼 공을 세운 걸 자랑하고 싶은 모양으로 바르지오 만시니의 음성이 높았다.
- 일본에서 대금을 지급하면 골든 트라이앵글로 입금되고, 한국의 대부업체를 통해 세탁해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구조지. 그럼 마카오에서 다시 커미션을 일본에 넘기고.
“뭐가 그렇게 복잡해?”
- 간단하게 설명해주지. 그 중간 연결 고리를 미스터 강이 잘라놓은 거야. 얼마 전 부산을 통해 들어오기로 했던 대부업체 투자금이 세탁을 위한 자금이었거든.
참 더럽게 엮었네.
바르지오 만시니의 간단한 설명을 듣기 무섭게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자금의 흐름을 따라가면 한국의 유력한 인사들도 제법 나올 건데 괜찮겠어?
“그보다는 일본에서 이번 일을 위해 들어온 야쿠자부터 알고 싶은데?”
- 차웅진은 원래 아카시 구미라는 조직과 손잡고 움직였다. 그쪽 회장인 아카시 미키야토가 일제 강점기 한국의 초대 헌병 대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의 후손이지.
옳은 일을 했던 이들의 후손은 어렵게들 산다는데, 하여간 더러운 쪽 놈들은 이상하게 고래 힘줄만큼 질긴 면모를 지녔다.
- 복잡하겠지만, 마저 설명하지. 한국의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카시 모토지로의 가신 중 미야지토 무사시라는 일본인이 있다. 차웅진의 증조부가 그의 양자였다.
바르지오 딴에는 이 정도까지 밝혀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듣고 있는 강성태는 굴욕스러운 감정이 올라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 좀 놀랍기는 하더군. 일본이 강점하던 시대에 그쪽에 붙었던 인물들이 이후에도 군과 경찰, 사학을 통해 명예를 쥐었으니까. 차웅진과 거래하는 정치인, 군인, 경찰은 또 그들의 후손이었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 깊게 팔 것도 없이 자료가 다 있어. 나는 이 모든 걸 밝혀 놓고도 왜 지금까지 한국이 그런 인물들을 처단하지 않았는지 그게 더 궁금한데?
“바르지오. 이탈리아 역시 남북으로 나뉘어서 싸운 적이 있지 않나? 누구나 역사에 아픈 구석이 있다. 말이라고 함부로 하는 거 아냐.”
- 미스터 강을 자극하려던 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비난이나 야유처럼 들렸다면 사과한다.
사과를 받는데도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었다.
입을 다물고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강성태는 진용도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승용차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차웅진의 위치를 알게 되면 알려줘.”
- 키란에게 직접 프로그램을 전송해서 실시간으로 그의 위치를 파악하게 해두겠다. 그 외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알았다. 위치를 부탁해.”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렸을 때 진용도가 승용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강남 호텔로 가.”
“모시겠습니다, 형님.”
보고 있지?
강남 호텔로 와라.
그곳에서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하자.
따라오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느긋하게 뒷좌석에 탔던 강성태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내 맞은편에 섰다고 해서 무조건 살해하는 것으로 끝낸다는 생각은 위험해. 그걸 잊지 마.”
은선곤에게 했던 답이었다.
깡패가 아니라면, 그가 먼저 칼을 들고 달려들지 않는다면, 야쿠자를 깨부수는 건 몰라도 차웅진을 제거하는 일은 고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초대 헌병 대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의 후손과 손잡고, 당시에 일본에 붙어 권력을 잡던 증조부의 모습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우우웅.
생각에 잠겨 있는 강성태의 손안에서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 차웅진에 관한 자료들이다. 한국은 희한할 정도로 개인적인 공간에 CCTV를 많이 설치해 두었더군. 생생한 모습도 확인해 봐.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가 보내준 자료를 천천히 살폈고, 이어 사진들을 하나씩 넘겼다.
일본 천황 탄신 기념 파티, 일한 민간인 교류 회의, 일한 정치인 후원회, 마치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가 있는 사진의 뒷면에 걸린 글자들은 모두 일본이 앞서 있었다.
심지어 전범기의 형상 앞에서 나이 든 차웅진은 너무도 만족한 듯 웃고 있었다.
다음으로 길게 이어진 인터넷 주소를 누르자 현재 차웅진이 있는 공간인 모양으로 화려한 주택 내부가 작은 화면들로 나뉘어 스마트폰에 올라왔다.
경계가 제법 삼엄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던 거지? 그렇지, 차웅진?’
강성태는 차가운 눈빛으로 차웅진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
조태완은 5시 45분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이제는 은퇴했어. 과거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런 말을 조태완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매니저가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난처한 상황을 모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창가에 있는 자리로 조태완과 오세아를 안내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을 가득 안은 정원이 펼쳐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매니저가 물을 따라주었다.
“주문은 조금 뒤에 하지.”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집어 든 조태완이 말했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던 매니저가 안쪽으로 움직였다.
메뉴판을 넘기는 오세아는 바탕에 깔아둔 불안함 위로 모처럼 행복한 감정을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오후의 햇살, 욕심 없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아름다운 미소, 조태완은 잠시 오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동팔의 칼에 조태완이 죽었다면 지금 오세아는 어떤 모습일까?
조태완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오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깡패가 아닌 상태로 널 만났다면 어땠을까 싶어서. 하긴, 그랬다면 너랑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느닷없는 말이어서 그런지 오세아는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고맙다.”
“오늘 이상해요. 무슨 일 있어요?”
“그냥. 나랑 이렇게 살아주는 거, 욕심부리지 않는 거, 그리고 아이 가져준 거, 그게 고마워서 그러지.”
감정선이 섬세한 오세아의 눈에 불안함과 함께 눈물이 아른대는 걸 본 조태완이 히죽 웃었다.
“그렇다는 거지. 뭘 또 울려고 그래? 얼른 골라. 배고프다.”
뻔뻔한 태도로 오세아를 달랜 조태완이 메뉴판에 고개를 내렸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하필 이런 때 전화라니.
어쩐지 찜찜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현재 불편한 상황을 떠올린 조태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조태완 씨 되세요? 차웅진 회장님 비서입니다.
이런 개새끼들이 끝까지 조태완 씨란다.
이를 지그시 깨물었던 조태완은 행여나 오세아가 불안해할까 얼른 표정을 풀었다.
“내가 조태완이오.”
- 회장님께서 통화하시겠답니다. 기다리세요.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응대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보름의 시간을 얻어야 했다. 그러려면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다.
“잠시만.”
자리를 옮기기 위해 조태완이 의자의 팔걸이를 붙드는 순간이었다.
- 여보세요? 조태완이냐?
거만함을 한껏 담은 노인의 음성이 조태완을 찾았다.
여기에서 잠시만 시간을 끌어도 차웅진은 전화를 끊는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조태완입니다.”
강성태의 당부를 떠올린 조태완은 오세아가 돌아볼 만큼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몸이 불편해서 한 번에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 지금 잠시 보자. 평창동으로 와.
“지금 말씀이십니까?”
일방적인 요구였다.
다시 말하지만, 차웅진은 이런 사람이었다.
조태완은 안 좋은 일인가 싶어 긴장하고 있는 오세아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그동안 악하게 살아온 죗값일지 모른다.
호텔에서 고급스럽게 즐기는 저녁의 행복 따위 조태완에게는 과한 사치일 테고.
다만, 이 자리를 한껏 기대했던 오세아에게 미안한 건 분명했다.
- 왜? 못 오겠어?
다그치듯 차웅진의 음성이 건너온 직후였다.
겨우 몸을 세운 조태완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보스?’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던 강성태가 조태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몸을 일으킨 오세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강성태가 다시 시선을 조태완에게 가져왔다.
강성태는 곤란해하는 조태완의 표정을 한눈에 알아본 눈치였다.
“차웅진입니까?”
들려!
조태완은 난처한 표정과 함께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짧게 저었다. 하다못해 김정훈의 장례식장에서 조강치와 마주했을 때도 당당했던 조태완이 말이다.
“주십시오.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어떻게 하려고?
조태완의 시선을 받은 강성태는 듬직한 미소로 답을 대신 주었다.
- 어떤 놈이냐?
스마트폰에서 나온 카랑카랑한 질문이 조용한 레스토랑을 타고 강성태에게 건너가고 있었다.
강성태의 눈빛과 듬직한 미소를 본 조태완이 반쯤 포기한, 그러나 뭔가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강성태는 거침이 없었다.
“잠시 밖에서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가볍게 고개 숙이는 동작으로 조태완과 오세아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가 몸을 돌리며 스마트폰을 귀로 올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조태완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강성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러면 차웅진은 전화를 끊을 텐데.
“여보세요?”
레스토랑을 나서며 전화를 받는 강성태의 음성이 조태완에게 고스란히 들렸다.
차웅진이 뭐라고 했을까?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앞으로 나와 통화할 때는 예의를 갖춰.”
기가 막힌 강성태의 대꾸가 들린 뒤에 곧바로 그의 모습이 레스토랑 밖으로 사라졌다.
우리 그럴 때가 아니잖아?
2주를 얻자며?
조태완은 멍하니 레스토랑 입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