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2부 18권 - 17화
등과 허리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힘겹게 몸을 뒤척인 최치곤이 엉망인 얼굴에 최대한 뻔뻔한 표정을 지어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조직은 두 명만 보면 된다니까. 보스랑 행동대장. 우리 신강남파 보스는 말할 것 없이 너고, 행동대장은 누가 뭐래도 병렬이 형님 아니냐?”
마치 조직에 관한 전문가가 감춰두었던 의견을 내놓는 듯한 음성과 태도였다.
“체계를 잡는 건 그 둘이 뺑뺑 돌아간다는 건데 너는 바깥 일로 바쁘고, 병렬이 형님은 병원에 계시는데 누가 그 역할을 해?”
이럴 때 최치곤은 진짜 전문가처럼 보인다.
“거기에 사실 병렬이 형님도 지금껏 알던 조폭하고는 궤가 좀 다르거든. 오죽하면 진용이 형님이랑 따로 가게 하셨겠냐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바로 부산에 가야지. 가서 교창이 형님 챙겨주고 부산 다독여야지. 가능하다면 그 앞에서 병렬이 형님한테 힘 팍팍 실어주고.”
최치곤의 조언을 들으며 강성태는 아차 싶었다.
박노익이 돌아온 게 오늘 새벽이긴 했지만, 부산을 잠시 잊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 그러면 우리가 겁먹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누가?”
“누구기는 누구야? 부산에서 작업한 상대 조직 놈들이랑 소식을 들은 조직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아! 신강남파 보스랑 행동대장이 지겹게 설치더니 야쿠자한테는 겁먹는구나. 이렇게. 또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삼합회에도 쫄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강성태는 물끄러미 최치곤을 보았다.
그러네.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네.
“네가 아무리 계획이 있다고 해도 당장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 거로 보이잖아. 원래 이런 일이 생기면 조직 자체가 비상이 걸려야 하는데 별일도 없고.”
강성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에 픽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차웅진을 어떻게 상대할지 아직 확실한 계획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조직의 보스가 아니었다.
신강남파 식구들을 데리고 달려가 칼질할 상대가 아니란 뜻이었다.
조강치와는 다른 부류, 그러면서도 강성태가 맞서기 어려울 만큼의 권력과 부를 지닌 인물, 지금까지 쓰러트린 상대들과는 아예 궤가 달랐다.
“그나저나 김석문, 이 개새끼 진짜! 낫기만 해봐라. 내가 아예 주둥이를 쫙쫙 찢어버릴 거니까.”
최소한 두어 달은 뒤에 일어날 일이라 당장 최치곤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태완이 형님도 그래. 이리저리 설치던 분이 집에만 계시니까 얼마나 갑갑하시겠어? 거기에 정훈이 형님도 가셨고. 나이 든 양반들이 은퇴한 뒤에 팍 늙는다는 말 못 들었어? 지금 활동하는 노익이 형님은 그런 모습이 없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최치곤에게서 현명한 느낌의 의견을 듣다니?
혹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머리가 팽팽 돌아간 효과가 아닐까?
“일을 드려. 의논이 아니라 이것 좀 단도리 해주십시오. 이렇게.”
침대에 올려둔 손을 쫙 편 최치곤이 가로로 저었다.
단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하라는 의미였다.
“전쟁하시랄 건 아니잖아. 적당하게 뭔가를 관리하며 바쁠 필요가 있지. ‘아, 이거 나이 먹고 힘드네.’ 하시겠지만, 실상은 그게 좋은 거지. 그게 깡패니까.”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만 누워있어서 머리를 굴렸거나, 아니면 이은주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능이 올라갔을 수 있겠다.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라도 최치곤은 이전보다 현명한 조언을 주고 있었다.
“이제 좀 감이 잡히시나, 보스?”
만족한 얼굴로 최치곤이 건넨 질문이었다.
강성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다미 씨는 만나?”
“어젯밤에 아버님과 함께 프리 스테이션에도 갔었다.”
“프리 스테이션? 그럼 노래도 했어?”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했다.
“하! 노래까지 들었으니 이제 진짜 끝났네. 그 인물에, 노래에, 나는 네가 가수 했어도 지금 깡패 하는 정도로 성공했을 거 같다.”
과한 칭찬을 던지는 최치곤의 작은 눈에서 욕망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깥 음식은 안 돼.”
“깍두기 한쪽만. 정 그러면 물에 씻어서라도.”
“은주 씨한테 부탁해줄까?”
그냥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강성태는 지금처럼 화들짝 놀라는 최치곤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 선생님, 그 누구를 가져다 대도 ‘몇 대 맞고 말지.’ 하며 버티던 최치곤이 이은주의 이름을 듣자 당황하고 있었다.
이놈도 어쩐지 꽉 잡혀 살지 않을까?
불현듯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니 진짜 왜 이래요?”
커튼 바깥에서 짜증 섞인 유헌우의 음성이 들렸다.
“아, 거 진짜! 잠깐 나갔다 왔어요. 잠깐.”
“일주일에서 이제 닷새 남았습니다. 이러다가 상처 덧나면 나를 더 봐야 하는데 혹시 나 좋아해요?”
“뭐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합니까?”
다그치는 유헌우와 반항하는 이병렬의 대화가 커튼 안으로 달려왔다.
**
차웅진은 서른 초반의 남자 비서가 가져온 전갈을 들으며 입술 끝을 옅게 움직였다. 물론 당연하게 일본어로 전해준 보고였다.
“조태완이라고 했지?”
“예, 회장님.”
차웅진은 분명 조태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물건이 될 놈이라고 여겨서 아래에 데려다 놓을까 잠깐이라도 고민했었던 덕분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조태완은 늑대였다.
괜히 길들이려 했다가 손을 물리거나 심하면 사타구니를 깨물릴 위험이 있는 짐승.
그런 조태완을 부리는 젊은 놈이라니.
‘그놈 참.’
차웅진은 자료에 붙어 있던 사진과 최근 찍어온 영상으로 확인한 강성태의 모습을 떠올렸다.
악연인지 몰라도 마카오의 카지노, 리조트, 중국인 거부들을 고객으로 모셔야 하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특성상 차웅진은 삼합회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강성태는 그 모든 것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불과 이틀 전인가, 홍콩에서 섭충명의 콧대를 꺾어버린 일을 봐도 충분히 삼합회와 협상을 이어갈 여지가 남았다.
심지어 보리스 파리오와 연결된다면, 중국 정부의 협조를 넘어 그보다 더한 것도 얻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던 차웅진은 소파의 옆에서 조신하게 서 있던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몇 시냐?”
“오전 11시 10분입니다, 회장님.”
“저녁 6시다. 정확하게 그 시간에 조태완에게 전화해.”
“예, 회장님.”
지시를 마친 차웅진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팔걸이에 양손을 얌전히 올린 자세로 눈을 감았다.
솔직하게 강성태 따위는 차웅진의 적수가 아니었다.
다만, 그 젊음과 패기가 샘났고, 다르게는 이런 식으로 대드는 놈이 생긴다는 게 불쾌했다. 더구나 차웅진도 어쩌지 못하는 삼합회에 대드는 놈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거슬렸다.
‘젊음? 좋지!’
하루하루는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돌이켜보면 한 달이 다르고, 1년은 변화가 확실하며, 차웅진의 젊은 시절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물론 변치 않는 사실도 있었다.
조태완이 늑대라면 차웅진은 세상을 호령하는 호랑이란 점이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차웅진은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에는 기온이 떨어지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힘을 지녔다.
차웅진의 인생에서 그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두 가지, 돈과 멋진 남자, 오랜만에 손에 넣고 싶은 사내아이를 보았다. 그만큼 몸도 반응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한 번 반대편에 선 놈은 무조건 무너트려야 한다.
“삼합회의 섭충명 부회장에게 연락해. 내가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을 할 게 있다고. 특히, 마카오 회의를 앞두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전해. 그러면 아실 거다.”
메모를 바쁘게 이어간 비서가 “예, 회장님.” 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것이 바로 차웅진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다.
**
강성태는 이병렬과 병실로 향했다.
김진용이 뒤따랐고, 외롭게 병실을 지키던 조봉진이 반갑게 세 사람을 맞이했다.
뭐 훔쳐 갈 게 있다고 조봉진은 외롭게 병실을 지키고 있었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또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점심이나 먹자. 육개장 좀 시켜.”
중간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이병렬이 조봉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조태완과 박노익의 눈치를 보느라 아침이 허술했던 눈치였다.
“의논할 게 뭐야?”
“부산에 다녀오려고.”
앉은 상태에서 재킷을 벗어 조봉진에게 건네던 이병렬이 홱 시선을 주었다. 굳이 닷새 더 병원에 있어야 할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솔직히 아직 차웅진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정확한 방법은 없다. 이틀 뒤에 정보가 올 테니까 그때 약점을 보고 방법을 찾을 생각이고. 그때까지 이틀이 빈다. 그 사이에 부산을 정리하려고.”
강성태를 빤히 바라보던 이병렬이 복잡한 눈빛으로 입맛을 다셨다.
“가기는 해야지. 신강남파를 대신해 부산을 정리하던 교창이 형님이 당하신 거니까. 안 그러면 우리가 겁먹었다고 생각할 테고.”
우리 보스가 또 발전했어요.
강성태를 기특하다는 투로 보던 이병렬이 이내 못마땅한 감정을 뿜어냈다.
“데려갈 만한 놈이 없어. 노익이 형님과 함께 가면 보스가 아래로 보일 테고. 트와일라잇 소국이나 대림동 종환이를 데려가면 또 교창이 형님께 밀려서 제대로 인사 소개하기 어렵고. 그러지 말고 나랑 가.”
“원장님이 닷새만 참으라고 하던데?”
“뭐 그런 걸 신경 써?”
“부산은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 모시고 다녀올 테니까 일단 병원에 있어.”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었나 보다.
눈만 끔벅이는 이병렬의 뒤에서 김진용마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참에 부산으로 신강남파 또 한 번 죄 불러들이는 거지. 막말로 보스인 내가 고문 두 분 모시고 내려가서 조직의 힘을 보이면 효과가 있겠지.”
“그런 거 싫어하잖아?”
“깡패 뭐 있어?”
이병렬이 기가 막힌다는 느낌의 웃음을 그렸다.
“우리 보스 진짜 바쁘네. 홍콩에 부산에. 거기에다 마카오도 가야 하는 거 아냐?”
말끝에서 이병렬은 강성태의 목에 올라온 거즈에 시선을 주었다.
“씨발. 차웅진만 밟으면 당분간은 걱정거리 없을 텐데.”
혼잣말을 뱉어내는 이병렬의 눈빛이 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한테 계획이 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내가 뭘?”
“진용이랑 둘이서 차웅진을 어떻게 해볼 생각하는 거 아냐?”
“생각만 해봤어. 생각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신강남파 전체가 쑥대밭이 될 텐데 아무렴 그런 무식한 방법을 진짜 하겠어?”
답답한 상황이어서 나온 즉흥적인 생각이었던지 이병렬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냉정한 이병렬이 오죽하면 저런 상상을 떠올렸을까 싶기도 했다.
“보스.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은 꼭 명심해주라.”
뭔데 이러지?
김진용과 조봉진을 세워둔 상태에서 이병렬은 넘버 투가 보스를 대하는 듯한 태도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삼합회가 보스를 노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부산에서 교창이 형님 작업한 건 야쿠자일 확률이 높고. 거기에 차웅진 같은 거물이 나선 거니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마.”
말끝에서 이병렬은 눈짓으로 김진용과 조봉진을 가리켰다.
“조직원은 저렇게 세워둘 때만 쓰는 게 아냐. 저러고 있다가 무언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때, 진용이와 봉진이도 살 맛이 나는 거라고. 조직원으로서 자부심도 생기고.”
최치곤의 조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조직 생활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강성태가 홀로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멕시코 신도시 건설을 위해서라도 급하게 끌어모은 조직을 역할에 맞춰 다시 짤 필요가 있겠다.
퍼뜩 떠오른 생각도 있었는데 강성태는 가슴 속에 그대로 담아두었다. 확인하고 다진 뒤에 움직이는 게 현명한 일이었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아서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강성태의 침묵을 확인한 이병렬이 조봉진을 보았다.
“주문했습니다, 형님.”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조봉진의 답도 있었다.
“아, 정영권이랑 김석문은 보스가 말한 대로 말로 다독였어. 씨발 새끼들, 오늘 운 진짜 좋았지. 특히, 정영권 그 개새끼는 아예 운 터진 거고. 발목 끊어버리려고 했었다니까.”
육개장이 올 때까지 이병렬은 정영권의 행동에 대해 떠들었다.
기다리며 올라왔던 분노, 그래도 클럽을 담당한다는 놈이 보인 비겁한 처신, 그래놓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꼬락서니, 오늘은 분명 각오를 다졌지만, 비슷한 상황이 오면 또 지금처럼 행동할 거란 예측까지.
별것 아닌 내용인데 이병렬은 조직원 특유의 말투와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부산에는 영권이도 데려가면 되겠다.”
“그 새끼를? 왜? 가서 두들기려고?”
강성태는 픽 웃기만 했다.
조직을 짜는데 은선곤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은선곤을 떠올렸다.
**
속없는 행동이었다.
비록 강성태에게 두 번이나 확인했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으나 조태완은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차라리 오세아가 실망한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정말 조태완은 저녁 식사를 뒤로 미뤘을 게 틀림없었다.
힘들겠지?
이해해야지.
그러나 그 단순한 저녁 욕심을 포기한 기색으로 지내는 오세아를 보고 난 조태완은 직접 스마트폰을 들었다.
강남 호텔은 상무부터 매니저까지 아직 주르륵 꿴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냈어?”
반갑게 받아주는 총괄 지배인에게 조태완은 저녁 자리 예약을 부탁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오세아에게 저녁 자리를 말해주고 싶은 욕망에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조태완은 묵묵하게 참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스마트폰을 틈틈이 노려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세아가 기뻐할 순간이 기대됐고, 반대로 차웅진에게서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 한쪽에 담아둔 바위처럼 점점 조태완을 짓눌렀다.
‘이런 개새끼. 또 연락해야겠네.’
속으로나마 욕을 토해내기는 했으나 젊은 시절 보았던 차웅진의 위용을 조태완은 넘어서기 어려웠다.
입맛을 다신 조태완이 거실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