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2부 18권 - 15화
정영권이 대꾸를 내놓은 뒤였다.
- 이 씨발 새끼가 클럽 하나 깔고 앉더니 대가리가 컸다고 골사발을 굴려? 너 이 새끼, 어제 대구 식구들 올라와서 술 처먹은 걸 빤히 아는데, 뭐? 야쿠자? 죽고 싶어?
원래부터 대가 부족했던 정영권이었다.
김동팔 사건 때도 주뼛거렸었고, 부산에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렇게 나약한 심성에 느닷없이 쇳소리가 가득 묻은 이병렬의 음성이 달려들자 정영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너 이 새끼, 지금 클럽 사무실로 갈 테니까 그리로 와. 아니다. 그냥 트와일라잇으로 와.
문 닫은 클럽으로 부르는 건 당연하게 주먹을 날리겠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트와일라잇은 정소국이 관리하는 업장이었고.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답을 하고 난 직후에 통화가 끊겼다.
독이 오른 이병렬, 원체 무서운 강성태, 불 꺼진 클럽, 머리에 날아들 안주 접시, 쿠크리, 막무가내로 생각이 달리던 정영권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떨려요, 정말로.
눈물이 핑 돌아요, 정말로.
“후우.”
당장 트와일라잇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승용차의 지붕에 손을 얹은 정영권은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 조직을 깨러 갈 때는 그렇게 든든한 이병렬이 지금은 저승사자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안 잡힐 방법만 있다면 글자 그대로 잠수를 타고 싶었고, 고통이 없다는 보장만 준다면 그냥 콱 죽고 싶은 심정, 정영권은 그런 심정으로 애꿎은 승용차의 지붕만 문질렀다.
**
통화를 마친 이병렬은 어떻게 할 거냐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바쁘지?”
식사 자리에 함께 이야기를 들었었던 이병렬이 강성태의 시간을 배려했다.
보름의 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차웅진이 실제로 그 정도의 여유를 준다는 보장이 없었고, 그 이야기는 언제 구치소에 달려갈지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차웅진을 대비해놓고 봐야겠다. 업장은 오늘 밤이든, 내일이든 돌아볼 테니까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오늘 일은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마. 바깥에 강한 적이 있을 때는 내부를 다독일 필요도 있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으나 이병렬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 말 더럽게 안 듣고, 삐딱하게 살아서 깡패 된 거 아니냐? 너처럼 선이 확실한 사람은 어지간해서 깡패 안 해. 한다면 보스급이 되겠지. 태완이 형님, 노익이 형님, 너, 다 그렇잖아. 모두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
조수석에 앉아 있는 김석문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어쩌지 못하겠다는 웃음을 픽 웃었다.
“내가 좀 잘났다는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그렇지 못한 식구들을 주먹으로만 대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냐. 특히, 강력한 적이 바깥에 있을 때는 더더욱 더.”
김진용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승용차의 조수석에서 김석문은 형벌을 앞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알았다. 일 끝나는 대로 연락해.”
“적당히 하고 병원으로 가라.”
“아, 알았어요.”
장난처럼 강성태의 말을 받은 이병렬이 눈짓으로 진용도를 가리켰다.
먼저 출발하라는 의미였다.
눈인사를 건넨 강성태는 진용도가 기다리는 승용차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바르지오 만시니를 만나서 차웅진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고, 다음으로 얼핏 떠오른 계획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
집에 도착한 조태완은 카페처럼 꾸며놓은 1층에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차웅진이 회장으로 있는 기업 ‘골든 트라이앵글’은 검색 순위 가장 위에 있었다.
마음 같으면 앞쪽에 서 있는 덩치들을 시키고 싶은데 과정이 어떨지 몰라 조태완은 직접 스마트폰을 들었다.
김정훈이 있었다면.
이런 일쯤 믿고 맡겼을 테고, 김석문 같은 놈들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못했을 텐데, 아무리 한숨을 쉬어 봐도 이미 떠나간 사람이었다. 거기에 김정훈이 떠나고, 오세아가 아이를 가지면서 어쩐지 조태완은 속 안에 간직했던 독기가 반쯤 꺾여버린 느낌이었다.
‘나이를 먹은 건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조태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대기음 대신 ‘골든 트라이앵글’은 늘 최선을 다한다는 뜻 모를 안내 멘트가 먼저 나왔고, 이어 단순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 골든 트라이앵글입니다.
“조태완이란 사람이오. 회장님을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태완은 오랜만에 쇳소리 가득 담은 저음으로 질문을 건넸다.
- 네?
“조태완이라는 사람인데 회장님을 뵙고 싶다니까.”
- 조태완이요?
이런 개새….
빠직, 이마에 핏줄이 솟았으나 조태완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나 강남 조태완이오. 차웅진 회장님께 말씀드리면 아실 테니까 연락 좀 부탁합시다.”
- 그건 비서실에 직접 전화하세요. 번호 알려드릴게요.
비서실에 돌려야 하는 거면, 이름을 확인하기 전에 알려줬어야 하지 않을까.
분통이 자꾸만 치밀었으나 조태완은 참고 참았다.
“비서실로 전화 좀 돌려줍시다.”
- 불러드릴게요.
뜨거운 숨을 푹 내쉰 조태완은 앞에 서 있는 덩치들을 향해 뭔가를 끄적이는 시늉을 보였다.
우왕좌왕, 열 명 정도 있는 놈 중에 볼펜을 지닌 놈이 한 명도 없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조태완은 뜨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02, 2263….
“02, 2263….”
조태완은 외우라는 투로 앞쪽의 덩치들에게 눈짓을 던진 뒤에 상대방이 불러주는 번호를 차례대로 따라 불렀다.
번호를 다 불러준 상대방은 말 한마디 없이 전화를 끊었다.
골든 트라이앵글의 업무 특성상 오만 곳의 조직과 야쿠자, 마피아를 상대했을 테니까 이해는 한다만, 일개 직원이 이 정도로 거만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번호 외웠지? 불러봐.”
“02에 형님, 2263에 형님.”
조태완은 덩치 한 명이 불러주는 번호를 입력한 뒤에 다시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갔다.
- 비서실입니다.
“나 강남의 조태완이란 사람이오. 회장님을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속이 있었던 거냐, 만나려는 사유가 뭐냐, 회장님은 이런 식으로 연락해서 뵐 수 있는 게 아니다, 몇 번을 말해도 직원의 답은 한결같았다.
“야. 내가 전에 강남 태완이파 보스 조태완이다. 이름 들으시면 아실 테니까 적당히 하고 회장님께 말씀이나 드려.”
- 태완이파 조태완이요?
조태완은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쇳소리를 가득 담은 데다, 참았던 분통이 터져서 죽고 싶냐는 협박만큼이나 살벌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웃음이 먹혔던지 직원은 전화번호를 물어보았고,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후-.”
앞에 선 덩치들을 보며 조태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강남파 고문이 된 건 아쉬울 게 없었는데 뭐라고 해도 김정훈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당장 지금만 해도 김정훈이 있었다면 조태완을 위해 홍삼 달인 물을 가져다 놓았을 게 분명했다.
**
호텔에 도착한 강성태는 먼저 존 보스만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바르지오는 같은 층 객실에서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면서 통화했어. 그쪽으로 가서 만날 건데, 이곳까지 와서 그냥 가면 서운할 것 같아서.”
“회장님께 말씀드릴까요?”
“일정이 바쁘실 테니까 오늘은 이만 하자. 나중에 기회 봐서 내가 들렀다고 말씀드리고 찾으시면 연락해.”
“알겠습니다.”
존 보스만은 군소리하지 않고 강성태의 뜻을 받아들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워낙에 계획에 없는 일정을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인사하겠답시고 업무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존 보스만과 인사를 나눈 강성태는 룸문을 나서 바르지오 만시니가 묵는 룸을 향해 걸었다.
벨을 누르자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강성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잠시 틈이 있었고, 이어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바르지오가 한쪽으로 비켜서서 고개로 안을 가리켰다.
내부는 곤잘레스 회장이 사용하는 룸과는 비교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거실과 침실이 구분되어서 예상보다 넓었다.
고작 하루만인데 별도로 마련한 책상에 다섯 개의 모니터가 아래로 세 개, 위로 두 개 걸렸고, 각종 사이트와 복잡한 수치가 올라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커피?”
“물이 있으면 부탁해.”
강성태에게 책상 옆의 작은 탁자를 권한 바르지오가 아래쪽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전화로 해도 되는데 굳이 찾아온 걸 보면 이번에 알아내야 하는 정보가 예사롭지 않은 거겠지?”
홍콩에서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바르지오는 뻔뻔한 눈빛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지만, 그쪽 사람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능청맞은 표정을 바르지오는 참 선명하게 지니고 있었다.
“차웅진이라는 사람이 있다. 골든 트라이앵글의 회장. 일본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알 수 있는 모든 걸 뽑아줘.”
“흐음.”
생수병을 내려놓은 바르지오가 컴퓨터로 자리를 옮겼다.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했지?”
그가 키보드로 회사 이름을 입력하자 영문으로 된 내용들이 쭉 올라왔다.
“거물이네?”
“어느 정도는.”
“어디까지 상대할 생각인데?”
강성태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인 바르지오가 마우스를 조작해 내용을 가볍게 살폈다.
“카지노 게임기 제작, 유통, 리조트, 카지노 지분 투자. 어후. 일본 쪽 폭력집단은 말할 것 없고, 마피아와도 제법 관련 있는 거 같은데 괜찮겠어?”
강성태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듣겠다는 투로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셨다.
“이봐, 미스터 강? 마카오 회의를 끝내고 진행하면 어때?”
“그전에 사고가 터질 수 있어. 그러면 내가 마카오에 못 가게 될 수도 있고.”
“정말 바쁘게 사는군.”
모니터를 돌아보았던 바르지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최대한 서둘러 주고, 중간에라도 나오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줘.”
바르지오가 조사에 필요한 여유를 제시했고, 강성태가 곧바로 도움을 청했다.
**
조명과 음악이 없는 클럽은 침묵과 허전함을 가득 채우고서 느닷없이 들어선 이병렬 일행을 맞았다.
클럽 책임자 정소국은 강단만큼이나 눈치도 있어서 홀 안에 이미 이병렬을 위한 의자까지 준비해두었다. 아마도 오는 길에 이곳의 직원들에게 연락했었던 모양이었다.
기본 조명만 들어온 클럽의 넓은 홀에 앉은 이병렬, 바로 뒤에 선 김진용, 주변을 쭉 둘러싼 덩치들, 그 앞에서 김석문은 매 앞에 놓인 한 마리 병아리처럼 완벽하게 주눅 든 모습이었다.
“너는 왜 깡패가 됐냐?”
이병렬의 느닷없는 질문에 김석문은 눈알을 굴리며 좌우로 늘어선 김진용과 정소국,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도움을 바라는 수험생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출제자의 의도를 알려줄 친절한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뭐해, 이 새끼야? 형님께서 물어보셨잖아?”
대신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험악하게 눈매를 뒤튼 김진용과 비슷한 표정의 덩치들이 가득했다.
“조직 보스가 되고 싶었어?”
“아닙니다, 형님.”
이어진 질문에 김석문이 얼른 답을 내놓았다.
“그럼 업장이나 하나 관리하다가 나중에 그거 차지하고서 편하게 살고 싶었냐?”
“죄송합니다, 형님.”
엉뚱한 답변이었으나 그게 사실은 “예, 형님.”을 대신해 내놓았다는 사실을 이병렬과 주변에 있는 덩치들은 모두 알았다.
“깡패는 있잖냐. 우리끼리나 먹어주지, 정상적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깡패 새끼인 거야. 다른 사람 피눈물 짜내서 저녁에 술 마시고, 리어카에서 짝퉁을 사더라도 명품 로고 박힌 양말 신고, 벨트는 염병한다고 번쩍이는 브랜드여야 하고, 다 썩어서 언제 퍼질지 몰라도 중형차 이상 타야 하고.”
양손을 앞으로 잡고 고개를 떨군 김석문을 향해 이병렬은 최대한 감정을 누르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선배들이라고 한번 돌아봐라. 백 명이 깡패 하면 하나둘 먹고살고 나머지는 죄 학교 들락거리다가 양아치로 끝나. 그나마 먹고사는 하나둘도 빵만 지겹게 들어갔다가 가족 생각해서 생활 접은 사람들이 대다수고.”
한숨을 길게 내쉰 이병렬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김석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걸 두들길까, 아니면 이렇게 좋은 말로 계속할까를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우리 보스 꿈이 너 같은 놈도 학교 들락거리지 않고 먹고살게 하는 거다. 여기 소국이가 클럽 담당하고 있지만, 새벽에 일 마치고 내가 불러서 달려왔다가 또 이러고 있다. 이렇게 졸라리 열심히 안 하면 깡패도 제대로 못 한다고.”
“죄송합니다, 형님.”
“그것도 좋은 보스, 선배를 만나야 가능하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잣 같은 조직에 속하면 대가리 노름돈, 술값 만들다가 빵에 들락거리는 거라고. 그것도 아니면 다른 조직원 칼빵 놓고 학교 가거나.”
할 말이 없는지 김석문이 고개를 다시 조아렸다.
“태완이 형님 모시는 게 자랑스러울 수 있지. 폼도 잡고 싶고, 남들보다 많이 아는 걸 내세우고도 싶었을 테고. 그런데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먼저 태완이 형님, 다음으로 보스가 당한다. 남은 건 엿 같은 선배 뒤치다꺼리하다가 너도 빵에 가는 거고. 알았냐, 이 씨발놈아?”
“예, 형님.”
고개를 떨군 김석문을 이병렬은 또다시 노려보았다.
“너는 씨발, 오늘 운 졸라리 좋았어. 오늘 일을 가슴 깊이 새겨서 태완이 형님 모시는 일에 실수하지 마.”
“예, 형님.”
정말 안 때리고 끝나?
김석문은 교훈만 주고 끝낸 이병렬에게 감동한 눈치였다.
“대답은? 개새끼가? 오늘 일 잊어버리지 마라. 이거 깊게 새기면 나중에 그럭저럭 먹고 사는 놈 되는 거고, 적당히 넘어갔다고 깝죽거리다가 일 생기면 그때는 진짜….”
슬며시 고개를 들었던 김석문은 이병렬의 매서운 눈매를 보고는 얼른 시선을 떨궜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왜 여태 안 와?”
김석문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이병렬의 성질을 더욱 맹렬하게 긁어대는 정영권의 순서가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들어오면 김석문처럼 좋게 끝날 텐데.
김진용과 정소국이 갑갑한 얼굴로 문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