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2부 18권 - 13화
커피를 모두 마신 강성태가 머그잔을 씻어서 올려두었을 때였다.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일어나 있었던 거 맞지?
“샤워 마쳤습니다.”
- 아침부터 병렬이가 동생들 보냈던데 혹시 밤사이에 다른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앞뒤 없이 덩치들이 달려가 지킨다고 했을 테니 박노익이 당황할 만도 하겠다. 강성태는 아침 일찍 있었던 이병렬과의 통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 태완이 형님 곁에 정훈이가 없는 게 워낙 크네. 거기에 병렬이까지 병원에 있으니까 애들이 풀어지는 모양인데, 이거 참. 그나저나 신월동 애들을 동생한테 보낸다던데 이야기 들었지?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침은 어디에서 드실 겁니까?”
- 태완이 형님과 의논했는데 형님 집 근처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지금 문자로 보낼 테니까 그곳에서 봐. 지금 출발하면 돼.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셔츠와 정장을 꺼냈다.
옷을 갈아입으며 강성태는 내부 단속을 해야 한다던 이병렬의 조언을 떠올렸다.
매상을 빼돌리다가 조직이 썩어간다며 염려했었는데 시작은 조직원들의 방심이 아닌가 싶었다. 그 증거로 조태완을 지키라며 최치곤이 보냈던 숙소 덩치들이 오히려 일정을 떠벌리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지겹게 말 안 들어 먹어서 깡패가 된 놈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구분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옷을 갈아입은 강성태가 거실 창을 바라볼 때였다.
우우웅.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들어왔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집어 든 스마트폰이 손안에서 울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여보세요?”
- 진용도입니다, 형님. 병렬이 형님께서 말씀 주셔서 빌라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형님.
“내려갈 테니까 잠깐만 있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거실 창을 돌아보았다.
좁은 골목이었고, 인사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얼굴을 거의 다 아는 빌라촌이었다.
이런 곳에서 덩치들이 줄줄이 서 있다가 차례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이것도 받아들여야 할 모습인가?’
현관을 나서며 강성태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보스라는 자리를 차지하고서 조직원들을 외면하는 모습이 신강남파 덩치들의 긴장감을 풀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탓이었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빌라 건물을 나선 강성태를 향해 진용도를 시작으로 이십여 명의 덩치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에 덩치 한 명이 빠르게 움직여서 검은색 대형 승용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감추려고 했고, 감추고 싶었지만, 천안, 광주, 부산, 심지어 안산까지 뛰어다니며 앞장섰던 신강남파 보스가 바로 강성태였다. 그러니 조직의 기강을 위해서 이런 모습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지 몰랐다.
마약을 막을 수 있다면.
말도 안 되는 고리대금업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할 수 있다면.
강성태는 이병렬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를 흉내 내듯 태연하게 뒷좌석에 앉았다.
상체를 깊게 숙인 덩치가 문을 닫았고, 이어서 진용도가 조수석 문을 열고 예의 그 깊게 숙이는 인사를 한 뒤에 차에 올랐다.
“여기 문자에 있는 곳으로 가.”
“병렬이 형님께 주소 받았습니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탄 승용차가 움직이자, 뒤에 있던 덩치들이 줄줄이 차에 타고서 뒤따랐다.
골목을 나선 승용차는 올림픽 도로의 합류점을 향해 움직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여보세요?”
- 신월동 애들 도착했어?
“지금 빌라 나와서 약속 장소로 가고 있다.”
- 나도 그럼 태완이 형님 계신 곳으로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일주일만 움직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는데 그 뒤로 이상하리만치 이병렬에게 일이 많았다.
강성태가 다른 일로 바쁜 이유도 있었고, 그만큼 보스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탓이기도 했다.
“차웅진 회장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더라도 왜 그렇게 흥분해서 그래?”
출근 시간이 시작돼서 올림픽 도로로 진입하는 승용차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강성태는 공간을 주지 않으려 촘촘하게 붙어서는 승용차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어쩐지 너무 바싹 붙는 느낌 때문이었다.
- 조금 뒤에 태완이 형님이나 노익이 형님을 뵙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대한민국 끝판왕 건드린 거니까 쉽게 생각하지 마.
이병렬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옆 차선에 바싹 붙은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돈이든, 빽이든, 태완이 형님과 노익이 형님을 하나로 합쳐도 그 양반 손끝 하나 못 건드린다고 보면 돼. 그 양반 전성기였으면 우리 전부 안기부에 끌려가서 머리에 꽃 꽂고 히죽거릴 정도가 돼서야 나왔을 정도로 끗발 있는 양반이고.
처음 보는 남자들끼리 시선을 피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도 적대감 담긴 시선이라면 더더욱 더.
갸름하게 빠진 얼굴에 뼈대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광대, 언젠가 상대했던 내추럴 독종 지용호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에 짙은 눈썹을 지닌 서른쯤의 남자였다.
- 여보세요?
“말해.”
대한민국의 도로 한중간에서 권총이나 칼을 꺼내 들 게 아닐 테니까 저 남자가 조직원이라면 강성태를 지켜보고 있다는 협박을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 아무튼, 그런 양반이 움직인 게 확실하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아무리 보스가 검찰과 방송국 회장의 협조를 받는다고 해도 그 양반은 훨씬 더 위쪽과 연결돼.
이병렬의 설명을 들으며, 강성태는 문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대형 승용차답게 차창은 고급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차창 너머에 있는 남자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던 진용도가 강성태의 시선을 따라 옆에 붙어 있는 승용차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뒤에 신월동 숙소 덩치들이 따라붙었는지를 확인하듯이 뒤편을 살폈다.
“모른 척하고 그냥 가.”
“예, 형님.”
그냥 뒀으면 분명 창문을 내려서 저쪽 운전사를 확인했거나 욕을 뱉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어서 서른쯤 돼 보이는 남자가 탄 승용차는 아직 바싹 붙어 있었다. 그리고 뒷좌석에 앉은 남자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삼합회? 야쿠자? 보리스 파리오와 손잡은 조직? 그도 아니면 국내에서 앙심을 품었을 조직까지, 적이 너무 많아서 정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앞이 뚫렸는지 강성태가 탄 승용차가 조금이나마 속도를 높여 앞으로 움직였다.
‘고작 한다는 짓이 아침까지 기다리다가 차 옆에 붙어서 노려보는 거냐?’
강성태는 바로 옆에 있는 승용차의 남자를 향해 재미있다는 느낌의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뒤에 버튼을 조작해 뒷좌석의 창문을 천천히 올렸다.
강성태가 탄 승용차가 속도를 높이는 만큼, 옆 차선의 승용차는 처지고 있었다.
차창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까지 강성태는 고개를 뒤로 돌려가며 뒷좌석의 남자와 운전하는 남자를 눈에 담았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하지만 너도 목을 걸어야 할 거다.’
피식.
창이 닫히기 직전에 강성태는 분명하고 확실한 미소를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
차웅진은 올해로 여든아홉 살이었다.
89세치고는 허리도 제법 꼿꼿했고, 한 달에 한 번쯤 골프도 즐겼다. 식탁에 앉은 그는 레이저 치료로도 남는 검버섯 자국만 아니라면 70 후반으로 보일 만큼 정정했다.
셔츠, 스웨터, 골프바지를 입은 그는 장국 그릇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뒤에 젓가락으로 내용물을 입에 넣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올해로 꼭 쉰 살, 50세의 가마구치 이시다가 앉았고, 또 그가 앉은 의자 뒤로 정장 차림의 남자 다섯 명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르게 앉아 있었다.
장국 그릇을 내려놓은 차웅진이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도미구이의 살점을 조그맣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왜?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닙니다. 굉장히 훌륭합니다.”
능숙한 일본어로 건넨 차웅진의 질문에 가마구치 이시다가 고개를 조아리며 역시나 일본말로 답을 내놓았다.
“인생이라는 걸 살아보면 말이지. 오만 가지 인간들을 보게 돼.”
“예, 회장님.”
“그놈 참 물건이구나 싶은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놈이 영웅이 될지, 한낱 잡놈으로 끝날지를 알고 싶으면 시기를 살펴. 놈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바로 시기라는 놈이지. 다른 사람들은 그걸 운이라고도 하던데 나는 시기라고 봐.”
노인 특유의 흔들리는 음성이라서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가마구치 이시다는 개처럼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었다.
“시기를 잘 타면 영웅이 되는 거고, 평생 한 번 있을 기회에 어쭙잖은 영웅심으로 거들먹거리면 잡놈이 되는 거지. 다시 말하면, 영웅이 될 놈은 시기를 알아보고 그에 맞춰 처신하는 능력이 있는 거지.”
“소중한 가르침을 항상 간직하겠습니다, 회장님.”
“자네야 이미 시기를 탔으니 걱정할 게 없지.”
고개를 조아리는 가마구치 이시다를 보며 차웅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국은 쓸데없이 많이 가르쳤어. 그것 역시 일본이 한국에 베푼 가장 큰 은혜인데, 배웠다는 놈들이 많아지면서 목소리도 그만큼 커진 거지. 당장 정치니 경제니 일본을 따르려고 해도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어렵지 않은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것처럼 가마구치 이시다는 고개만 조아렸다.
“이것들이 배가 고파야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니 뭐니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는데 일본이 너무 베풀었지. 내가 젊었을 적에 엽전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격언이 있었지. 들어봤나?”
“비슷한 말은 들은 게 있습니다, 회장님.”
“앞으로는 절대 한국에 너무 많은 걸 가르치면 안 돼. 엽전은 매로 다뤄야 하고. 알겠나?”
“제가 아둔해서 말씀을 바로 못 알아들었습니다. 강성태를 말씀하십니까, 회장님?”
“흠흐흐흐.”
질문을 내놓는 가마구치 이시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귀엽다는 듯 차웅진이 웃음을 흘려냈다.
“강성태는 염려할 거 없어. 그 뒤를 말하는 거지. 깡패든, 기업가든, 사채업자든, 빠징코업자든, 어떤 일을 하는 놈이든 간에 엽전들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치지 말라는 거지. 알았나?”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돈을 풀고 풀어서 쉽게 쓰게 하는 거다. 그러다가 한 번에 움켜쥐면 다들 죽는다. 그동안 10년이 넘게 애썼던 게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 코앞에 있잖나.”
“모두 회장님께서 이끄신 일들로 알고 있습니다.”
“가계 부채만 터지면 된다. 미국의 모기지 사태는 일도 아니지. 그때는 입에 밥 넣느라 정치니 뭐니 돌아볼 틈이 없어진다. 그때는 알게 되겠지. 한국은 결코 일본의 적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시.”
짧은 말을 토해낸 차웅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메이드가 움직여 차를 놓아주었다.
“내가 집에서조차 한국말을 쓰지 않는 이유는 근본을 잊지 않아서다.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해준 일본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 마음, 은혜를 모르는 엽전들이 쓰는 말을 함께 쓴다는 것이 너무도 굴욕적이라 나는 집에서도 이렇게 일본말을 사용한다.”
“회장님과 같은 분이 한국에 계신 것이 저희의 복입니다.”
“일이 커지면 지금껏 그린 그림이 망가질 수 있으니 강성태는 이런 식으로 끝내기로 하자.”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회장님.”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깊게 숙이는 가마구치 이시다의 앞에서 차웅진은 점잖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
아침 약속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조태완은 집을 나서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회장님. 접니다.
“그래, 우리 정보과장이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야?”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조태완은 눈가를 좁히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경찰청 정보과장 강욱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했다면, 돈을 요구하거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 둘 중 하나였다.
- 확실하게 오더가 내려온 건 아닌데 신강남파에 관해 조사하고, 오늘 오전부터 조직의 수뇌부에 미행이 붙었습니다.
“그럼 나도 누군가 따라다니겠구만?”
- 회장님 담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야 있겠습니까? 제가 맡기로 해서 지금 막 본청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전화로 이럴 게 뭐 있어? 얼른 와.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 혼자가 아닙니다, 회장님. 제 아래로 둘이나 달려서 찾아뵙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뒷말을 흐리는 강욱의 음성을 들으며 조태완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스스럼없이 돈을 요구하는 강욱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까지 와서 뭐 어려울 말이 있어? 그냥 시원하게 말해.”
- 혹시 강성태 회장을 체포하게 되면 제가 회장님을 찾아뵐지 모릅니다. 아직 출국 금지는 안 떨어진 거 같으니까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으로 나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아예 작정한 모양인데 괜히 외국에서 잡혀 오게 되면 모양새만 빠지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하나만 묻자. 오늘 달려가? 아니면 하루 이틀 시간이 있어?”
-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로 봐서 뭔가 터트릴 걸 준비하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제게 붙은 인원이 둘인 걸 봐도 그렇고요.
“그렇구만.”
조태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체포를 작정했다면 최소 다섯 명 이상이 움직이지, 달랑 셋을 보내지는 않을 게 틀림없었다.
마침 오세아가 안쪽에서 나오고 있어서 조태완은 좀 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성격 알지? 혹시 감찰이니 뭐니 복잡하게 엮더라도 끝까지 모른 척해. 무슨 소리를 하든, 어떤 증거를 내밀든, 우리 둘은 과거 단속에서 얼굴 한두 번 본 거 말고는 없어.”
- 감사합니다, 회장님.
어쩌면 마지막에 조태완이 건넨 말을 듣고 싶었나 싶을 정도로 반가운 대꾸를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안 좋은 일이 있는 거죠?”
“별거 아냐.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이따가 저녁 먹으면서 말해주마. 당부할 것도 있고.”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도록 조태완은 무겁게 표정을 바꾸고 몸을 일으켰다.